라캉은 정신분석학자이다. 그가 말하는 이론들은 근본적으로는 정신분석에 필요한 것이고, 실제로 이용되고 있다. 프로이드의 수제자격이었던 융이 스승의 "성욕동"이론에 반기를 들고 뛰쳐나갔다면, 라캉은 프로이드 이론에 아주 충실하였다고 할 수 있다. 어쨌거나 라캉은 오늘은 문화비평이론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정신분석이론이란 것이(프로이드이든, 라캉이든) 모호하고, 불확실하여 많은 반론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라캉이 해석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시시콜콜 따지기 보다는 아주 쉽게 설명을 하면서 우리 수필에 응용해볼까를 내 나름의 생각으로 말해보겠다.
라캉은 근친상간이라는 비유를 통해서 어린아이가 자기가 속한 사회에 어떻게 적응해가는가를 설명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설명이 아닐까.
막 태어난 아이는 제멋대로 하는 존재이다. 원초적 욕망에 의해서 행동하는 존재인 것이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쾌락추구가 기본인 욕구 중에는 성욕이 제일 강렬하므로 성욕을 모든 욕구의 근원으로 설정하였다. 이때의 성욕은 상징적인 욕망의 표현일 뿐이라는 것이 오늘의 해석이지만 프로이드의 생존시에는 성욕을 아주 강하게 주장하였다고 한다. (리비도)
어린아이는 자라나면서(거울단계를 거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갈려면 자기 욕망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배운다. 이 말은 자기가 하고 싶은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을 억제하는 금지가 있음을 말하는 것임을 알 것이다.
이것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설명해 보자.
원초적인 욕망대로 행동할 뿐인 동물의 경우는 어미도 욕망의 대상이다, 실제로 행동이 일어나고 있고, 그렇다고 하여 비난도 금지도 없다. 아직 동물적인 상태인 어린이에게는 어머니도 욕망의 대상이지만 , 현실에서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금지를 배우게 된다. 그 금지가 바로 아버지로 상징되는 것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인 것이다.
이것을 다시 생각해보면 어린이가 멋대로 행동할 수 없도록 하는 아버지의 금지는 사회의 금지 즉 도덕이나, 법, 관습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욕망은 원천적으로 쾌락지향이므로 그 금지를 깨뜨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할 것이다. 이것을 아버지의 살해로 비유한 것이다.
어버지를 살해한다면 심한 죄의식에 사로잡힌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금기를 깨뜨리면 벌을 받기도 하고, 죄책감에 불안해진다. 그래서 아버지의 금지를, 즉 사회의 규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때부터 사회라는 조직 속에 편입되어 들어가서 욕망을 억누르고 살아가게 된다. 즉 사회 속에서 자기의 위치를 찾아가게 되고, 그 위치에 주어진 역할을 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이렇게 하므로 거울단계를 벗어난다. 그러면 이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이 될까. 그렇다면 라캉의 이론이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사회의 규범에 순응한다고 해서 원초적인 욕망이 소멸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고 무의식 속으로 숨어버릴 뿐이라고 한다.
무의식 속에 갇혀버린 욕망은 틈만 있으면 탈출을 할려고 꿈틀거리고 있지만 , 막상 그 주인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른다고 한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욕망을 무의식 속에 너무 꽁꽁 가두어버리면 정신건강에 문제를 일은킨다고 하였다. 사회의 금지를 깨뜨리지 않고, 아니 교묘히 눈속임하면서 무의식에 갇힌 욕망에게 약간의 숨통을 틔어주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고 하였다.
무의식의 욕망에게 숨통을 틔어 줄 때는 주로 "은유"나 "환유"의 방법을 택한다고 하였다. 은유와 환유를 정신분석 용어로 설명할려면 또 나도 이해하기 힘든 말들을 하여야 하므로 여기서는 생략을 하기로 하겠다.
그래도 은유를 단적으로 설명하자면, 프로이드가 예술도 성욕을 은유적으로 채우는 것이라고 한 말에서 대강 짐작이 갈 것이다.
나는 원초적 욕망을 적절히 해결하는 방법의 예로 곧 잘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든다.
이 영화의 여주인공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무난히 통과하고 건전한 생활을 꾸리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욕망이 소멸된 것이 아니고, 무의식 속에서 살아 꿈틀거리면서 삐어져 나올 틈새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모두들 처럼.
여주인공이 욕망(상상계)을 어떻게 채우는가를 보자. 그는 남자 주인공을 따라가지 않으므로 가족이라는 사회구조의 틀 속에서 자기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 그뿐아니고 그 비밀을 죽을 때까지 혼잣서 지키므로 그네들의 현실적인 삶에(상징계) 하나도 손상을 입히지 않는다. 그러면서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의미로 (물론 영화 속에서 이지만===수필을 쓰시면 수필 속에서 할 수 있으면) 나타내므로 오히려 자신의 욕망을 "승화"시키고 있다.
수필도 욕망에 대한 은유를 활용하여 표현한다면 아름답게 승화시킬 수 있을까.? 프로이드가 예술도 성욕의 은유적 표현이라고 하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