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문무대왕릉(慶州文武大王陵)
사적大王岩)이라고도 한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文武王)은 통일
후 불안정한 국가의 안위를 위해 죽어서도 국가를 지킬 뜻을 가졌다.
그리하여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유언으로, 자신의 시신(屍身)을 불식
(佛式)에 따라 고문(庫門) 밖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국가를 평안하게 지키도록(護國大龍) 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유해를 육지에서 화장하여 동해의 대왕암 일대에 뿌리고 대석(大石)에
장례를 치렀다. 사람들은 왕의 유언을 믿어 그 대석을 대왕암이라고 불렀
다. 대왕암은 육지에서 불과 200여 미터 떨어진 가까운 바다에 있다. 큰
바위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고, 중앙에 약간의 넓은 공간이 있는데, 이 공간
에 대석을 이동하여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중앙의 대왕암 주변을 큰 바위
(화강암)가 둘러 싸고 있는데, 네 방향으로 물길이 나 있어 주변 바위는
네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다. 자연적으로 물길이 나 있는 상태이나 약간의
인공을 가하여 튀어나온 부분을 떼어내어 물길이난 가운데 공간을 약간
가다듬은 흔적이 발견되었다.
바닷물은 파도와 함께 동쪽 물길을 따라 중앙 공간으로 흘러들어와 서쪽
물길을 통해 빠져 나간다. 바닷물이 물길을 따라 중앙으로 진입할 때
파도가 소멸되기 때문에 중앙의 물은 파도의 영향을 받지 않아 잔잔하며,
물 높이는 중앙의 큰 바위를 살짝 덮을 정도를 항상 유지한다. 대석의
안치 방법과 유골의 수장 여부에 대하여 그 동안 많은 의문점이 있었다.
2001년 3월 한 방송사에서 역사연구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초음파
탐지기 등을 이용하여 바위의 조직과 바위의 내부 및 수면하를 조사한
결과, 대왕암 내부 또는 아래에 유골이나 부장품이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하였다.
대왕암에서 멀지 않은 육지에 '낭산'이라고 하는 신성시되는 언덕이
있는데, 이곳에 '능지탑'이라고 불리는 탑이 있다. 연구 결과 문무왕의
시신은 이 능지탑에서 화장되어 대왕암 주변에 산골하고, 대왕암 주
변 바위에서 절리된 큰 바위를 중앙의 빈 공터에 남북으로 안치시켜
장례를 지낸 형식적 절차를 가짐으로써 무덤(왕릉)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대왕암의 네 방향으로 수로를 낸 것은
석가의 사리 신라의 한 설화에, 문무왕이 그 아들 신문왕(神文王)에게
만파식적(万波息笛)이라는 피리를 주어, 문무왕이 죽은 후 바다의
용이 되었다가, 만파식적을 불면 용이 나타나 국가의 안위를 지키도록
하겠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한다. 아들 신문왕은 바다에서 1.5km
떨어진 동해변에 부왕을 기리는 감은사(感恩寺)를 지어, 절의 금당 밑
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도록 설계하였다. 이는 용이 쉽게
접근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감은사의 동쪽에 약간 높은 언덕이 있다. 이곳은 대왕암을 정면으로
바라다 볼 수 있는 곳인데, 이곳에 이견대(利見臺)를 짓고 신문왕은
이곳에 수시로 와서 대왕암을 망배(望拜)하였다고 한다.
경주감은사지(慶州感恩寺址)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사찰터. 사적.
개설
사적 제31호. 신라를 통일하고 동해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을 위하여
만들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사찰 터이다. 1959년 1차 발굴조사에서
쌍탑식 가람배치로 밝혀졌고, 1979년과 1980년의 2차 발굴조사에
서 초창(初創) 이후 2번에 걸쳐 중건(重建)되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
서 중기 사이에 폐사(廢寺)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지정
(至正) 11년(1351) 명문(銘文)이 있는 청동반자(靑銅飯子), 9세기
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 2구, 기와류∙
벽돌류∙토기류∙자기류 등이 4,268점이 출토되었다. 한편, 1961년
서탑 해체∙보수 당시, 제3층 탑신 내부 사리공(舍利孔)에서 사리각외함
과 그 안에 들어 있던 사리기(舍利器), 사리병(舍利甁) 등이 출토되어
보물 제366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탑은 1995년 해체∙보수되었는데
서탑에서 발견된 것과 마찬가지로 사천왕상이 그려진 외함과 내함,
사리기, 사리병 등을 갖춘 사리장엄구가 온전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내용
경주 감은사지는 남쪽에서부터 중문(中門), 쌍탑(雙塔), 금당(金堂),
강당(講堂) 순으로 배열된 통일신라시대 사찰의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雙塔式伽藍)이다. 남쪽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문지가 있고,
이 중문 좌우로 후면의 강당지에 이르기까지 회랑으로 이어져 있었다.
중문은 지대석, 면석, 갑석을 갖춘 가구식(架構式)의 기단 위에 세워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정면의 각 칸마다 2짝 출입문을 달았
고, 문과 연결되는 계단이 3칸의 전후면에 모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당은 정연하게 쌓아올린 2중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정면 5칸, 측면
3칸이다. 기단의 사방 중앙에는 돌계단이 각각 배치되었고 기단은 턱이
있는 지대석(地臺石) 위에 면석(面石)을 세우고 그 위에 부연이 있는
갑석(甲石)을 얹은 가구식이다. 금당 아래에서는 특이하게 지하공간을
이룬 석조 유구(石造遺構)가 조사되었다. 윗면에 남북으로 홈을 둔 사각
형의 돌을 정면 6열, 측면 4열로 놓고 이 홈들에 장대석을 끼워 연결하고,
그 위에 동-서 방향으로 장대석들을 마루널처럼 잇대어 깔아 약 60㎝ 높
이의 지하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이 공간은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을
감은사 금당에 들어오게 했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과 부합된다.
금당 북쪽의 강당은 지대석, 면석, 갑석을 수직으로 쌓은 가구식의 기단
위에 세워졌는데, 처음에는 정면 8칸, 측면 4칸이었으나 후대에는 서쪽
3칸이 축소되어 정면 5칸, 측면 4칸이 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강당 좌우에
각각 독립된 건물을 배치하였으나 후대에는 회랑형으로 모습이 바뀌었다.
회랑 중에서, 남회랑은 중문 동·서쪽으로 각각 10칸씩 20칸의 도리칸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동회랑과 서회랑은 남회랑과 접속되는 칸을 포함하여
각각 20칸의 도리칸인데, 남단에서 12번째 칸에 7칸의 익랑이 금당 좌우
로 연결된다. 이 회랑들도 지대석, 면석, 갑석을 갖춘 가구식 기단으로 꾸며
졌다. 금당 앞 좌우에 남아 있는 석탑은 국보 제1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석탑들은 2중기단 밖으로 탑구(塔區)가 돌려져 있는 3중기단의 형식의
삼층석탑이다. 각 부의 구성이 백제의 석탑처럼 많은 석재를 사용하고,
옥개석(屋蓋石) 받침을 5단의 층급으로 표현한 것 등이 목조가구를 모방한
흔적으로 판단된다. 건립연대가 확실하여 현존하는 한국 석탑, 특히 통일
신라 초기의 석탑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밖에도 곳곳의 석재
에 태극무늬가 새겨져 있어 이색적이다.
특징
중심영역이 정방형으로 구성된 점과 금당을 중심으로 동서의
회랑을 잇는 익랑(翼廊)을 둔 점이 특이하다.
의의와 평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배치이며 금당과 양측 동서 회랑
사이로 익랑을 두어, 이후 건립된 사천왕사(四天王寺) 배치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감은사는 황룡사(皇龍寺)·사천왕사(四天王寺) 등과
함께 호국사찰이었다.
참고문헌
『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감은사지 동∙서삼층석탑 사리장엄』(국립문화재연구소, 2000)
『감은사발굴조사보고서』(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경주시, 1997)
『감은사』(김재원·윤무병, 국립박물관, 1961)
『감은사지발굴조사보고서』(김재원·윤무병, 국립박물관, 1961)
문화재청(www.cha.g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견대(利見臺)
경상북도 경주시 감포읍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30대 문무왕 관련 대(臺). 사적.
내용
사적 제159호이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의 호국정신이 깃들인
해중왕릉 대왕암(大王巖)이 보이는 감은사지(感恩寺址) 앞에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인용된 이 절 안에 있는 기록에는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감은사를 처음 창건하였는데, 끝내지 못하고 죽
어서 바다의 용이 되었다. 아들 신문왕이 681년 7월 7일에 왕위에
올라 682년에 공사를 끝냈다. 금당(金堂) 뜰 아래에 동쪽을 향하여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는데,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뒤에 용이 나타난 곳을 이견대라 하였다고 한다. 682년 5월
에는 왕이 이 곳에서 용으로부터 옥대(玉帶)와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만들 대나무를 얻었다고 한다. 한편, 이와 관련된 「이견대가(利見臺歌)」
라는 가요가 있었다고 하는데 작자는 어느 왕이라 하나 잘 알 수 없고
가사는 전하지 않지만,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는 “전설에 의하
면 신라 어느 왕의 부자가 오랫동안 헤어져 지내다가 대(臺)를 지어
서로 만나보게 되었는데 그 이름을 이견대라 하고, 그 부자의 즐거움이
비할 데 없어 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사(高麗史)』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름 모른 어느 사찰의 부처상들이 모진 태풍을
견뎌낸듯 손가락이 꺽인 가까스로 서있는 모습입니다.
나정고운모래해변
넓은 백사장의 잔잔한 모래와 동해의 청정해역, 여유있는 주변 공간과
인근의 갖은 편의시설이 있고 동해의 바닷물을 이용하여 온천을 즐길
수 있는 해수탕이 있어 새로운 체험을 할 수 있고, 해수탕 옆은 주차
공간과 송림이 개방되어 있다. 또한, 모터보트, 바나나보트 등 수상
레저를 즐길 수 있다. * 백사장 - 길이 0.5㎞, 폭 40∼90m
태풍에 잎은 떨어지고 나목(裸木)바람맞아 성치않은 열매만 달려있는 무화과나무
감포항(甘浦港)
규모가 아기자기하면서도 멋진 등대가 우뚝 솟아있는 감포항은 드나드는
어선이 많은 동해남부의 중심 어항이다. 감포항 방파제는 동해 일출을
감상하기에 좋은 포인트로 예전부터 널리 알려져 왔다. 감포항에는 바다를
전경으로 한 고유의 재래시장이 들어서 있으며 문무대왕릉에서 감포항
으로 이어지는 해안도로에도 횟집과 민박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식도
락가의 발길을 붙잡는다. 3일과 8일에 장이 서는 감포장은 바다가 바로
인접해 새벽에 들어오는 오징어배와 멋진 일출이 어울릴 때면 가슴이 벅차
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곳이다. 도로를 따라 서는 시장은 경주를 비롯해
구룡포 등지에서 몰려든 상인들로 붐비며, 특히 포구가 바로 옆에 있어 갓
잡아온 싱싱한 생선류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태풍에 스탬프 찍는 도장박스가 떨어져 날아갔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꽃순이를 아시나요(1989)♣
김종순 작사
김희갑 작곡
조용필 노래
꽃순이를 아시나요
꽃처럼 어여쁜 꽃순이
나의 눈에 이슬 남기고
내 곁을 떠나간 꽃순이
어디가면 찾을까요 첫사랑 꽃순이
내사랑 꽃순이 꽃피는
봄이 돌아오면은
내곁에 오려나 꽃순이
어디가면 찾을까요
첫사랑 꽃순이 내사랑 꽃순이
꽃피는 봄이 돌아오면은
내곁에 오려나 꽃순이
2020-09-13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