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청 옥상에 인공(人共) 깃발 나부꼈네
내가 집에 온 지 불과 2~3일 후인 7월 20일 인민군들이 따발총을 메고 부안에 들어왔고 부안도 인민공화국(人民共和國)의 세상이 되었다. 나는 그 때 옹정의 형님 집에 있었는데 19일 읍내에 다녀 온 마을 사람의 말이 경찰서가 텅 비었고 군청에도 개미새끼 한 마리 없이 다들 도망하였다고 하였다. 행정력 공권력이 증발하여 버려 무정부 진공상태의 부안에 하루쯤 지난 후 군청의 옥상에 인민공화국의 깃발이 꽂혀 나부꼈다.
예상은 한 일이지만 이렇게까지 허망하고도 싱겁게 공산당의 세계가 되어버리니 맥이 탁 풀렸었다. 그 해 4월인가 육군 참모총장에 채병덕(蔡秉德) 소장이 임명되었을 때 일본군 육사출신인 그는 그 때 북한 괴뢰군이 도발하여오면 일거에 섬멸함은 물론 그대로 밀고 올라가 “평양에서 점심을 먹고 신의주에서 저녁을 먹겠다.”고 호언한 기사가 신문에 나서 허풍이 심한 장군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때 그는 이승만과 함께 도망하면서 점심은 대전에서 먹고 저녁은 부산에서 먹는 꼴로 패주하기에 바빴던 것이다. 1592년의 임진왜란 때가 이랬을까 싶었다. 그는 인민군이 침공하여온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도망하면서는 아무런 예고나 조치도 없이 한밤중에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여 엄청난 수의 피난하는 시민들이 수중고혼이 되게 하였으며, 저항선 하나 제대로 구축하지 못하고, 항전 한 번 못해보고, 패퇴만 거듭한 육해공군을 총지휘 한 뚱뚱이 장군이었다. 그런 그가 하동 섬진강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싸우다가 전사하였다고 하니 불행한 일이기는 하나 죽음만은 군인다운 면모를 보여주었으니 임진란 때의 원균(元均)을 연상하게도 하였다.
이때 북한군이 밀고 내려오기 시작하자 경찰에서는 그동안 부안에서 좌익 활동을 해온 중심인물들을 골라서 구속하였다가 7월 19일 후퇴하면서 줄포의 후포 야산 골짜기 이른바 40고라당에서 학살하였다고 하며 주로 사상전향을 서약하고 보도연맹에 가입한 분들이 정부를 믿고 안심하고 있다가 불행한 일을 당한 것이다. 이때 학살된 사람이 40명이어서 사람들이 그 학살한 골짜기를 ‘40고라뎅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은 각 형무소에 수감 중인 좌익사상범들과 보도연맹에 가입되어 있는 좌익들을 전국에서 일제히 예비검속 하였다가 후퇴하면서 집단 학살하였다.
이때 서울의 형무소와 서울지역만은 이와 같은 불행한 학살을 모면하였는데 이는 갑자기 서울이 함락되어 그럴 틈이 없었기 때문이라 한다. 이와 같은 야만적인 보복성 집단학살 행위는 이후에 좌우익을 막론하고 전국의 곳곳에서 자행되었는데 9·28 후퇴 때는 좌익들이 반동분자로 지목한 우익진영의 인사들을 백산면 평교 옆 망산 공동묘지에서 학살하였고 1951년 1·4 후퇴 때는 인공에 부역한 사람들을 상서 개암동 골짜기에서 집단학살 하였다. 특히 9·28 때 이른바 반동분자로 지목한 우익진영의 인사들을 학살하면서 읍내 어느 신씨 집안 삼대(三代 :辛晦錫, 泳瓚, 濠根)를 무참하게 학살한 일이 일어나 부안 사람들에게 실로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이 분들은 사상적으로는 우익적인 성향이었는지 몰라도 그 인성이 온유 선량하여 누구에게나 좋은 이웃이었다. 한날 한시에 같은 장소에서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3대를 학살한 이 사건은 2차대전 때 나치스들의 유태인 학살에 견줄만한 극악무도한 행위라고들 규탄한 사건이다. 그날이 음력으로는 한가위 명절 직전인 8월 14일이다.
당시 도 경찰국 소속 순경 이종순씨의(후에 반공연맹 전북지부장) 증언에 의하면 전라북도 내의 경찰들은 7월 18일 밤에 만경강을 방위전선으로 삼아 진지를 구축하고 밀려오는 인민군을 맞아 맞서기는 하였으나 인민군들이 탱크를 선두로 따발총을 쏘며 밀려오자 사기도 전의도 없어 총 몇 발 쏘아보지도 못하고 너도나도 모두 앞 다투어 도망하기에 급급하였다고 술회하였다. 부안경찰들도 이때 후퇴한 것이다.
7월 20일 나는 우리 마을 옹정 샛터 모정에 나가 제주도 사람 오경표(吳卿杓)와 같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오죽리, 금판리 쪽을 가
1930년의 부안군청 청사
리키며 “저것이 무엇이대여!” 하기에 바라보니 아스라이 인민군들이 총을 어깨에 메고 평교 쪽으로부터 길 양쪽으로 늘어서 부안읍내를 향하여 걸어오는 행렬이 길게 늘어섰었다. 드디어 그 사람들 말로 인민의 군대들이 부안지역을 해방하기 위하여 오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마음이 걷잡을 수 없게 설레었다. 모정에 있던 마을 사람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나는 오경표와 인민군 행렬이 다 지나간 뒤 우리집으로 같이 와서 드디어 남북이 통일이 된다며 서로 손을 맞잡고 감격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리 좋아하였는지 조금은 쑥스럽다. 오경표는 제주도에서 4·3사건에 가담한 철저한 공산주의자다.
이때 우리 마을에는 1948년 가을에 제주도 사람 한 분 이 기울어져 가는 마을 부자 송상룡 씨의 집과 논을 사가지고 와서 살고 있었는데 오경표는 그 분의 처남이다. 나보다 나이가 두 살쯤 위였는데 서귀포농업학교 학생이라 했으며 제주도 4·3사건에 가담하여 투쟁하다가 간신히 섬을 탈출하여 자기 매부 집에 숨어 지내고 있었다. 나는 그와 가깝게 지냈으며 그에게서 제주도 4·3사건의 처참했던 양민학살의 이야기를 듣고 공분하였었다. 그는 공산당에 관한 서적들을 많이 읽어 이론이 해박 정연하였는데 인공 때는 어떻게 지냈는지 내가 옹정에 있지 않아서 잘 모르겠고 후에 들으니 1955년경에 결핵으로 병사하였다 한다.
세상이 갑자기 바뀌어버리니 이럴 때 나는 어디에 가서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지 막연하여 그대로 2~3일을 지내고 있었다. 내 신분이 공부하는 학생의 신분일 뿐인데 생사가 어찌될지 모르는 이 난리 중에 학교와 학생을 누가 챙기랴. 그러던 어느 날 신석정 선생님으로부터 빨리 군 문화선전부로 나오라는 쪽지연락이 왔다. 나는 서둘러 문화선전부를 찾아갔는데 그곳은 지금은 음식점 <당산마루>가 되어버린 춘헌(春軒) 이영일(李永日)씨의 집 사랑채에 있었다. 그 집의 사랑채를 부안군 임시인민위원회가 사용하고 있었으며 문화선전부도 거기에 같이 있었다. 그때의 기구조직의 상황은 잘 모르나 이러한 기구들이 자치적으로 조직된 임시기구였던 것 같았으며 임시인민위원장은 선생님의 형님인 호민(胡民)께서 맡아보고 있었다. 하얀 모시옷 한복을 입은 호민 신석갑 선생께서 너른 대청에 조용히 앉아 계셨는데 사람들이 ‘위원장 동무’라고 불렀다. 이에 대해 비전향장기수 허영철 씨는 그의 구술기록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에서 신석정 선생이 임시인민위원장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초기가 아닌 후기의 일을 잘못 안 것 같다.
며칠 후에 북측 정치보위부에서 와서 이 기구의 업무를 인수 받아 위원장에 이용기, 부위원장에 김창규, 조직부장에 허영철, 선전부장에 이재길 등이 정식으로 선임되었다고 한다. 그 후 8월말 경 허영철씨가 부안군 인민위원회 대의원대회에서 정식으로 위원장에 선출되었는데, 그는 보안면 성메 출신으로 6·25 후에는 또다시 월북하였다가 간첩으로 내려와 체포되어 장기 복역 중 끝까지 전향을 거부한 분이고, 김창규씨는 내 친구 백아무개의 매부인데 1953년 경 행안면 마동 경주김씨 재실에 살고 있을 때 한 번 만나 본 일이 있었는데 한쪽 다리가 불구로 매우 온화 인자해 보였으며 후에 들으니 북한에 다녀오다가 지뢰를 밟아 그리 되었다고도 하고 혹은 심한 고문으로 불구가 되었다는 설도 있었다.
이때는 아직 춘헌 선생이 살아계실 때인데 어찌 된 일인지 사랑채 전부를 임시 인민위원회에서 점유 사용하고 있었다. 후에 이행식 교장에게 들으니 이때 춘헌께서는 가족들과 아제리 송씨 집에서 이 난리를 피했었다고 했다. 문화선전부에는 초등학교 은사인 신아무개 선생님을 비롯하여 이아무개씨와 후에 전북일보 편집국장을 한 신아무개씨 등이 왔다 갔다 분주히 일을 하며 “이봐! 이동무”, “어이! 신동무!” 하고 서로 동무로 부르는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아! 정말로 이제는 동무세상으로 세상이 바뀌었구나!” 하고 세상 바뀌었음을 실감하였다. 동무라는 말 한마디에 혁명의 무게가 천근만근으로 무겁게 내 가슴을 쿵하고 누르는 것 같았다. 신석정 선생님은 나에게 “이렇게 바쁜 때에 집에서 뭐하느라 이제야 나오느냐”고 핀잔하시고 “선전사업의 일을 도우라”며 유인물을 주시며 “행안면으로 나가서 마을들을 돌며 선전계도를 하라”고 하셨다. 나는 그 선전유인물을 받아 대충 읽어보고는 행안면 인민위원회를 찾아 갔다.
행안면 인민위원회는 행안면사무소에 있었는데 그 때 솔메 조금 못가서 우측 길가에 있었고 지서도 그 옆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면의 인민위원회에 들려서 군 문화선전부에서 나왔다니까 깍듯이 맞아 주선하여 주었다. 나는 대초리와 솔메 두 마을을 지정, 마을 사람들을 모정으로 모이게 할 것을 부탁하고 모정으로 가서 차례로 선전문의 내용에 준하여 한바탕씩 연설을 하였다. 인민공화국은 무산대중을 위한 정부이니 조금도 동요 말고 각자 자기 일을 열심히 하면서 적극 협조하여야 한다는 지극히 원론적이고 일반적인 말을 했던 것 같다. 모정에는 마을 사람들이 넘치게 모였으며 모정이 비좁아 일부는 땅바닥에 앉아서 내 말을 귀담아 듣는 것 같았다. 세상이 바뀌어버린 오늘 지금까지 어느 마을이나 좌우로 나뉘어 처절하게 싸우다가 이제 하루아침에 양지가 음지 되고 음지가 양지되는 세상으로 바뀌어 그 음지에서 양지로 나온 사람들이 바뀐 세상의 주인이 되어 이야기 한다니 어찌 관심이 없었으랴만 세상이 장차 어찌될 것인지가 더 궁금하였을 것이다.
지금은 농촌마을 대부분의 모정들이 쇠락하여 쓸쓸하지만 6·25 이전까지만 하여도 모정은 여름 한철 마을문화의 중심공간이었다. 마을 중심지에서 떨어진 변두리에 3칸 정도의 사방이 시원하게 터진 정자 형식으로 지은 모정에서는 무잠방이만 입은 농군들이 쉬는 공간이기 때문에 부녀자들은 얼씬도 못한 일종의 별서(別墅) 공간이다. 생활정보는 물론 마을 공동사도 협의하고, 두레일자도 잡고, 장기, 고누도 두고 미움도 갈등도 해소하지만 더러는 툭탁 치고받고 싸우기도 하였으며 무더운 삼복철에 손님이라도 오면 모정으로 모시고 갔었다. 이와같은 사람냄새 훈훈했던 모정문화도 사라진지 50년이 넘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 때 내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하였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으나 언변이 좋았던 내가 다만 매우 열정적으로 막힘없이 말을 줄줄 했던 것으로만 기억 된다. 강연을 마치고 면사무소로 오니 거기 중학교 동창이요 민학련 사건 때 함께 구속되었던 유치장 동기 행안면 사치산의 유아무개군이 있었다. 그는 생기가 발랄하고 기세가 등등해 보였는데 후에 들으니 그는 행안면 지서에서 내무서원으로 일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