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文壇) 30년(年)의 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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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12월 스무닷샛날 밤이었다.
일본 동경 本鄕[본향]에 있는 내 하숙에는 나하고 朱耀翰[주요한]하고가 화로를 끼고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파우리스타의 커피 시럽을 진하게 타서 마시면서 그날 저녁(한두 시간 전)에 동경 유학생 청년회관에서 크리스마스 축하회라는 명목으로 열렸던 유학생들의 집회에서 돌발된 사건 때문에 생긴 흥분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서 그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야기에 꽃이 피었다. 한국이 일본에 병합된 지 겨우 8, 9년, 아직 그 날의 원통함과 분노가 국민에게 생생하게 남아 있던 시절이라, 더우기 선각자요, 지도자로 자임하고 있던 유학생들의 마음에는 애국지사적 기분이 맹렬하게 불타고 있었으며 ‘한국의 독립은 우리의 손으로’라는 포부가 유학생들의 마음에는 깊이 새겨져 있던 시절이었다. 그러한 때에 歐洲大戰[구주대전]이 끝나고 미국 대통령 윌슨이 인류에게 민족자결주의라는 것을 제창하였다. 한 개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의 자유의사로서 결정될 것이지 어떤 강력한 국가의 실력으로 좌우될 것이 아니라는, 그러니까 어떤 국가로서 그 나라의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다른 강국에게 먹히운 자가 있다면 그런 무리한 실력주의는 배제하고 그 민족의 자유의사로서 그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실력이 부족하여 일본에게 병합된 한국이라, 이 기회에 윌슨 대통령의 제창에 따라서 한국은 마땅히 그 국권을 회복해야 된다는 부르짖음이 동경 유학생(선각자로 자임하는) 새에 부르짖어졌고, 그 날(1918.12.25) 크리스마스 축하를 핑계삼아 청년회관에 집회하여서 거기서 드디어 커다란 결의까지 한 것이었다. 즉 3․1운동의 씨가 그 밤에 배태된 것이었다. 운동을 진행시킬 위원을 선출하고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內地(일본)와 연락할 방도를 토의하고 헤어진 것이었다. 요한과 나는 거기서 헤져서 파우리스타에 들러서 차를 한 잔씩 마시고 커피 시럽을 한 병 사가지고 함께 내 하숙으로 온 것이었다. 처음에는 우리들 새에는 아까의 집회의 이야기가 사괴어졌다. 그 집회에서는 徐椿[서춘]이 우리(요한과 나)에게 독립선언문을 기초할 것을 부탁했었지만, 우리는 그 任[임]이 아니라고
역사(歷史)와 사실(事實)과 판단(判斷)과 사료
(史料)에 대(對)한 작자(作者)의 입장(立場)을 논(論)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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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몇몇 친구가 어떤 정자에 모여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는 가운데 화제가 우연히 ‘역사상 사실의 사실적 면’과 ‘그 판단적 면’에 급하였다. 그리고 그 예로서 春園[춘원]의 「端宗哀史[단종애사]」와 필자의 단편 史譚[사담] ‘首陽[수양]’이 화두에 올랐다. 그 좌석에는 「단종애사」의 작자인 춘원도 있었고, 그 밖에 月灘[월탄], 白華[백화], 岸曙[안서], 巴人[파인] 등등 數友[수우]가 있었다. 춘원과 월탄은 그 당시 (문종-단종-세조)의 일을 역사상에 나타난 그대로 보는 것이 옳다는 파였다. 안서와 백화와 필자는 그 반대의 파였다. 역사상의 ‘사실’은 무론 후세인이 굽힐 수 없는 배다. 후세인은 전대의 일을 보지 못했으니 전대 사가의 기록을 신뢰할 밖에는 도리가 없다. 그러나 그 판단이라 하는 것까지 전대 사가에게 구속될 필요가 없다 하는 것이 반대의 골자였다.
다시 말하자면 단종 당시의 사실적 면(즉 문종이 어린 세자를 皇甫仁[황보인]이상 늙은 재상들에게 부탁한 일, 부탁받은 재상들이 새 임금 단종을 극진히 섬긴 일, 수양대군이 이 늙은 재상을 꺼리고 싫어하던 나머지에 종내 癸酉年[계유년] 變亂[변란]을 일으킨 일, 그런 뒤에는 스스로 군국의 최대 권위자가 된 일, 그 뒤 이태를 지나서 단종은 애착 많은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물려드리고 당신은 퇴위한 일, 계유년 변란시에 해를 받지 않은 다른 顧命[고명] 遺臣[유신]들은 이 새 임금께 臣仕[신사]하고 하야치 않은 일, 明使[명사] 來朝時[내조시]에 상왕의 유신 〈現王[현왕]의 現臣[현신]〉들이 상왕을 옹호하고 반역 운동을 일으킨 일, 이 일이 미연에 발각되자 상왕은 魯山君[노산군]으로 降封[강봉]이 되고, 반역을 도모한 선비들은 친국을 당한 일, 왕은 당신을 배반한 그 역신들을 무척도 아껴서 누차 心降[심강]하기를 종용한 일, 그 뒤에 錦城大君[금성대군]의 사건이 생기며 강봉한 노산군에 賜死[사사]한 일. 이 왕의 일대는 이조 5백년사에 있어서 武備[무비]며 국토 확장에 있어서 가장 빛나는 역사를 가진 일 등등)은 우리가 보지 못한 일이며 문헌에 의지하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 그러나 사실은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판단까지 고인에게 구속될 의무는 없다. 莊陵誌[장릉지]며 死六臣傳[사육신전]이며 그 他[타] 정사 야사 등에 기록된 것은 모두 단종이 追崇[추숭]되고 사육신의 절조가 찬가된 뒤에 된 기록이며, 그 판단이라는 類[류]로 보자
덕수궁 석조전의 일본미술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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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언
시인 모윤숙여사는 "영원히 문이 열리지 않았던들 차라리 애틋한 동경의 궁전으로나 바라볼 수 있을 것을……" 하며 오랫동안 침묵에 담으려짓는 덕수궁 문이 십전씩에 해방된 것을 비탄하였다. 애틋한 서정시인의 감정이라 하겠다. 석일(昔日)의 영화를 일장의 춘몽으로 돌리고 무심한 까막까치만 오락가락하는 음울한 고림(古林)에 쌓여 우는 듯 조는 듯이 고요히 잠들어있는 구중궁궐의 옛날을 생각하며 바라볼 때에 누군들 강개지심이 없으랴? 그러므로 예로부터 시인들 가운데에는 슬픈 노래를 던진 분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측정할 수 없이 풀려 나아가는 역사의 실마리인지라 현실에 간정한 우리들로서 어찌 과거를 돌아보는 애틋한 시상에만 잠길 바이랴? 과거는 과거인지라 차라리 이러한 것은 시인들의 곱다란 붓끝에나 맡겨두고 우리는 앞날을 전망하면서 현실을 현실 그대로 직시할 것이다. 영화로운 옛날을 가졌던 덕수궁, 오랫동안 그윽한 침묵에 잠겼던 덕수궁의 백조전에 미술품이 진열되었다.
시간적으로 제한된 단순한 전람회와 달라서 차라리 미술의 전당으로 화한 감이 있다 하겠다. 그리고 동미교수(東美敎授) 전변효차(田邊孝次) 씨의 말과 같이 왕가의 궁전에 진열한 점으로 보아서는 역사상 초유의 일로서 멀리 저 불란서의 베르사이유 궁전이나 이탈리아의 치뽀리 이궁, 영국의 함푸튼 별궁, 독일의 포츠담 이궁, 서반아의 아랑호예쓰 별궁 등 궁전 미술관에 비하여 말할 수 있다 하겠다. 그러하나 여기에 관심되는 점은 불란서 베르사이유의 궁전에는 불란서인의 명화가 진열되어 있고 영국의 함푸튼 별궁에는 영국인의 걸작이 진열되어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독일, 이태리, 서반아 할 것 없이 다 각각 그 궁전에는 그 궁전을 쌓고 사는 그 땅 사람들의 명품과 걸작만이 만개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석조전에 진열된 미술품은 이와 달라서 주객이 전도된 감이 없지 못하다. 비록 근대에 이르러 다른 문화와 함께 조선의 미술이 쇠퇴하였다 할지라도 오히려 일가를 이룬 화가가 한둘에 그치는 바 아니요, 또한 세계적으로 가장할 만한 역대 명가들의 대표적 작품이 박물관의 장품(藏品)을 비롯하여 멀리 항간에 이르기까지 광구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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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1 작성자 청해명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