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일 작사 / 김교성 작곡
(대사)
이른바 대동아전쟁의 풍운이 휘몰아치던날
우린 그 어느때보다 슬픈 별아래 살아야 했다
절망의 황혼 우린 허수아비였다 슬픈 앵무새였다
광란의 전쟁앞에 바쳐진 슬픈 제물이었다
정거장마다 목이 메여 미친듯 남의 군가를 부르며
남의 전쟁터로 끌려가는 젊은이들의 충혈한 눈동자가
그 절망의 황혼을 보고 있었다
산에 올라 소나무 껍질을 벗기는 근로보국대의 하룻날
어린 소년들은 점심을 굶었고 고갯마루를 오르는 목탄차는
일제의 마지막 숨결인양 허덕였지
까까머리에 국민복 을씨년스런 몸빼차림으로
한톨의 배급쌀을 타려고 왼종일 이른바 나라비를 섰고
처녀들은 정신대에 뽑혀 갈까봐 시집을 서둘렀지
못견디게 가혹한 그 계절에도 찔레꽃은 피었는데
산천은 그렇게 아름다웠는데
우린 자꾸만 눈물이 쏟아졌는데...
(1)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
언덕 우에 초가 삼간 그립습니다.
자주 고름 입에 물고 눈물 젖어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 잊을 동무야
(2)
달 뜨는 저녁이면 노래하던 세 동무
천리객창 북두성이 서럽습니다
삼년 전에 모여 앉아 백인 사진
하염없이 바라보니 즐거운 시절아
1941 년 5 월, 태평 레코드사에서는 이 '찔레꽃'을 내고
OK 레코드사에서는 고운봉의 '선창'을 발표했는데
별로 반응이 신통치 못했던 것이, 해방과 더불어 양사(兩社)의
이 두 노래가 약속이나 한 듯 각광(脚光)을 받아
히트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꿈에도 그리던 고향을 떠나 멀리 타향에서 핍박과 서러움에
눈물짓던 실향민들에게 찔레꽃 피는 고향을 노래한
백난아의 '찔레꽃'은 더 없는 향수를 자극하여 공감을 느끼게 하여
너도 나도 이 노래를 열창하게 되었던 것이다.
몇 해 전, 한국방송윤리위원회의 오인(誤認)으로
월북작가의 작품으로 낙인 찍힌 바 있었으나
작사자 김영일씨의 항변으로 오인(誤認) 사실이 밝혀져
금지곡(禁止曲)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