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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유명인사 스크랩 조선시대오현(朝鮮時代五賢)
이창주 추천 0 조회 288 13.06.26 08:2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조선시대오현(朝鮮時代五賢)

 

 

한훤당  김 굉 필      일두   정 여 창    정암 조 광 조

 

회재     이 언 적      퇴계   이     황

 

 

한훤당 김굉필
  
            1454-1504 서울 출생 묘 실전 
         조선 전기의 성리학
         본    관 : 서흥
         호       : 사옹 ·한훤당
         별    칭 : 자 대유, 시호 문경
         주요저서 : 《경현록》 《가범》 《한훤당집》

         본관 서흥(瑞興). 자 대유(大猷). 호 사옹(蓑翁) ·한훤당(寒喧堂). 시호 
         는 문경(文敬).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주로 현풍에서 성장하였으며 인근 함양의 군수
         로 있던 김종직을 만나 성리학을 배운다.
         특히 소학에 심취하여 스스로를 소학동자라 칭햇다.

         1471년 18세 결혼 처가는 합천 야로

         1480년(성종 11년 27세) 초시에 합격하였으며,

         1494년 40세에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되
                어 주부(主簿) ·감찰 ·형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498년(연산4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조의제문 건에 연루 평안
                도 희천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아버지의 임지로 와 있던 조광조
                (趙光祖)를 만나 학문을 전수하였다.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로 순천에서 사사되었으나 중종반정 이후에 신
                원되어 도승지가 추증되고, 1517년에는 정광필(鄭光弼) 등에 의해 우


                의정이 추증되었다. 학문경향은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로 이어
                지는 의리지학(義理之學)을 계승하였으며, 치인(治人)보다는 수기(修


                己)에 중점을 두었다. 이로 인하여 여러 사화를 통하여 제자들이 많
                이 연루 되기도 햇지만 또한 살아남아 성리학의 전통을 이어갈 수 잇
                었다고 사료된다.


          문인으로는 조광조 ·이장곤(李長坤) ·김안국(金安國) 등이 있으며, 16세
          기 기호 사림파의 주축을 형성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정여창(鄭汝昌) ·조광조 ·이언적(李彦迪) ·이황(李
                  滉) 등과 함께 5현으로 문묘에 종사됨으로써 조선 성리학의 정통
                  을 계승한 인물로 인정받았다.

          김굉필을 배향한 서원으로는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 희천의 상현서원
                  (象賢書院),(회천은 평북 영변북쪽에 잇다) 순천(順天)의 옥천서원
                  (玉川書院), 임청대, 추모비 달성 구지면 도동동의 도동서원(道東
                  書院)이 잇다.

          문집에 《한훤당집》, 저서에 《경현록(景賢錄)》 《가범(家範)》 등이 있
                   다.  

 * 남명과 김굉필 
 
 한훤당 김굉필은 1504년 졸하엿으므로 남명은 그분을 뵐 수 
 없엇다. 한훤당 사후 남명의 후학 구암 이정이 한훤당과 조위의
 
 기록을 모아 경현록을 만들엇다. 다시 남명 제자 한강 정구가 
 경현록 상하권을 만들엇고 연보 행장을 추가하여 경현속록을 
 
 만들엇다. 남명은 선배학자 한훤당의 사적 가운데 빠진 것을 
 모아 경현록보유를 지었고 그 내용이 남명집에 실려 잇다. 
 
 김굉필의 손자 김립은 나이 여든에 가까운 나이에 1570년
 7월 21일 남명 을 찾아와 그의 조부의 유품 병풍에 글을 받아
 갔다. (한훤당화병발) 
 
 * 도동서원 
 
도동서원은 대구 달성군 구지면 도동에 잇다. 1568년 현풍 비슬산 
 기슭 쌍계동에 있었고 1573년 쌍계서원이라 사액되었으나 정유란으로
 
 소실되자 1605년 지 금의 자리로 옮겨 포로동서원이라 했고 1607년
 도동이란 사액을 받았다. 마을 이름도 도동으로 바뀌고 후에 외증손
 한강 정구도 같이 배향되었다. 이외에도 김굉필을 배향하는서원으로는 
 
 성주의 천곡서원 상주의 도남서원 합천의 이연서원 거창의 도산서원
 순천의 옥천서원 나주의 경현서원 아산의 인산서원 황주의 백록동서원
 
 연안의 비봉서원 서흥의 화곡서원 은율의 봉암서원 희천의 상현서원
 등이 있다. 
 
 
 
 
일두 정여창

           1450-1504 함양출생
           본관 하동(河東). 자 백욱(伯鄭). 호 일두(一웝). 시호 문헌(文獻). 함
           양(咸陽) 출생.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지리산에 들어가 3년간 오경(五
           經)과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483년(성종 14)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고 1490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받아 소격서참봉이 되었다. 같은
           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을 거쳐 세자시강원설서(說書) ·안음현

 


           감(安陰縣監)을 지내고,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로 종성(鍾城)에 유배
           되었다.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그러나 곧 그의 학덕이 높이 평가되어 문묘에 배향되고 동방오현으로 일
           컬어지게 된다.

             성리학의 대가로서 경사에 통달하고 실천을 위한 독서를 주로 하였다.
          《용학주소(庸學註疏)》 《주객문답설(主客問答說)》 《진수잡저(進修雜

 


           著)》 등의 저서가 있었으나 무오사화 때 부인이 태워 없애 그 유집(遺
           集) 일부가 정구(鄭逑)의 《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 속에 전할 뿐이다.

 


           중종 때 우의정에 추증, 광해군 때 문묘에 배향되고 나주(羅州)의 경현(景
           賢)서원, 상주(尙州)의 도남(道南)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일두유
           집(一웝遺集)》이 있다.

           
* 남명과 정여창

   남명은 정여창을 학문의 선배로 여겼으며 그 학문이 깊고 독실하여 유학의 학통을
   계승했다고 평가하였다. 이로서 실천주의적 유학의 전통이 남명에 계승된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잇다.

   정여창은 함양에서 태어 낫으며 집안은 대대로 함양에서 살앗다. 여?살에 아버지
   의 벼슬에 따라 의주에 살앗는데 이때 명나라 사신이 여창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고 전한다. 그의 아버지는 정3품 함경도 우후에까지 올랏으나 이시애의 난에 목숨
   을 잃엇다. 정여창은 김종직에게 배우고 김굉필, 김일손 남효온과는 도의지교로 사
   귀는 사이였다.  
 
 
 
 
정암 조광조
         1482-1519 서울출생 묘 광주구성  광해왕2년-1610 문묘종사
         본관 한양. 자 효직(孝直). 호 정암(靜庵). 시호 문정(文正). 개국공신 온
         (溫)의 5대손이며,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어천찰방(魚川察訪)이던 아
         버지의 임지에서 무오사화로 유배 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였다.

 


         1510년(중종 5) 진사시를 장원으로 통과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성균관에서 학문과 수양이 뛰어난 자를 천거하게 되자 유생 200여 명의 추천

 


         을 받았고, 다시 이조판서 안당(安入)의 천거로 1515년 조지서사지(造紙署司
         紙)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전적

 


         ·감찰 ·정언 ·수찬 ·교리 ·전한 등을 역임하고 1518년 홍문관의 장관
         인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성균관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士林派)의 절대적 지지를 바탕으로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것은 국왕 교

 


         육, 성리학 이념의 전파와 향촌 질서의 개편, 사림파 등용, 훈구정치(勳舊政
         治) 개혁을 급격하게 추진하는 것이었다. 국왕 교육은 군주가 정치의 근본이

 


         라는 점에서 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먼저 힘써야 할 것이었다. 그리
         하여 국왕이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에 힘써 노
         력하여 정체(政體)를 세우고 교화를 행할 것을 강조하는 한편 자신들의 정당

 


         성을 확립하고 앞 시기의 사화(士禍)와 같은 탄압을 피하기 위해 군자(君子)
         와 소인(小人)을 분별할 것을 역설하였다. 성리학 이념의 전파를 위해서는
         정몽주(鄭夢周)의 문묘종사(文廟從祀)와 김굉필 ·정여창(鄭汝昌)에 대한 관

 


         직 추증을 시행하였으며, 나아가 뒤의 두 사람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요청하
         였다.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간행하여 전국에 반포하게 한 것은 사림파
         가 주체가 되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1518년에 천

 


         거를 통해 과거 급제자를 뽑는 현량과(賢良科)의 실시를 주장하여 이듬해에
         는 천거로 올라온 120명을 대책(對策)으로 시험하여 28인을 선발하였는데
         그 급제자는 주로 사림파 인물들이었다.

           훈구정치를 극복하려는 정책들은 많은 논란을 일으키며 추진되었다. 아버
         지 신수근(愼守勤)이 연산군 때에 좌의정을 지냈다는 이유로 반정(反正) 후
         에 폐위된 중종비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반정공신들의 자의적인 조치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도교 신앙의 제사
         를 집행하는 관서로서 성리학적 의례에 어긋나는 소격서(昭格署)를 미신으
         로 몰아 혁파한 것도 사상적인 문제인 동시에 훈구파 체제를 허물기 위한 노

 


         력이었다. 급기야 1519년에는 중종반정의 공신들이 너무 많을 뿐 아니라 부
         당한 녹훈자(錄勳者)가 있음을 비판하여 결국 105명의 공신 중 2등공신 이
         하 76명에 이르는 인원의 훈작(勳爵)을 삭제하였다. 이러한 정책 수행은 반

 


         정공신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홍경주(洪景舟)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에 의해 당파를 조직하여 조정을 문란하게 한
         다는 공격을 받았으며, 벌레가 ‘조광조가 왕이 될 것(走肖爲王)’이라는 문

 


         구를 파먹은 나뭇잎이 임금에게 바쳐지기도 하였다. 결국 사림파의 과격한
         언행과 정책에 염증을 느낀 중종의 지지를 업은 훈구파가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는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킴에 따라 능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

 


         었다. 그러나 후일 사림파의 승리에 따라 선조 초에 신원되어 영의정이 추증
         되고,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전국의 많은 서원과 사당에 제향되었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덕(德)과 예(禮)로 다스리는 유학의 이상적 정치인
         왕도(王道)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것이었으며, “도학을 높이고, 인심을 바르
         게 하며, 성현을 본받고 지치(至治)를 일으킨다”는 진술로 압축한 바와 같

 


         이 도학정치의 구현인 지치라고 표현하였다. 동시에 그러한 이념은 사마시
         에 제출한 답안인 〈춘부(春賦)〉에 나타나듯이 자연질서 속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따뜻하고 강렬한 확신이 기초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학문과

 


         경륜이 완숙되기 전에 정치에 뛰어들어 너무 급진적이고 과격하게 개혁을 추
         진하려다가 실패했다는 점은 후대 사림들에게 경계해야 할 점으로 평가되었
         다. 훈구파의 반격으로 자기를 따르는 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고 개혁은 한

 


         때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의 이념과 정책은 후대 선비들의 학문과 정치
         에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조선 후기까지의 모든 사족(士族)은 그가 정몽주
         ·길재(吉再)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김굉필로 이어져 내려

 


         온 사림파 도통(道統)의 정맥(正脈)을 후대에 이어준 인물이라는 점에 정파
         를 초월하여 합의하고 추앙하였다. 그것은 학문의 전수 관계로 인한 것만이

 


         아니고 목숨을 걸고 이상을 현실정치에 실행하려 한 노력에 대한 경의였다.
         문집에 《정암집》이 있다.

      
  *
심곡서원

    경기도 용인시 수지읍 상현리에 있다. 1550년에 지어지고 준공과 동시에 효종의
    사액을 받았다. 인근에는 정몽주의 충렬서원이 있어 그곳에서 배향되다가 늦게
    이곳에 배향할 서원이 세워졌다.

 


    그가 유배되었던 능주에는 지방유림들이 죽수서원을 그가 은둔하려고 전답을 마련
    하였던 가평에는 미원서원이 그가 자주다니던 도봉산 기슭에는 도봉서원이 세워
    져 그를 배향하고 잇다.
 
 
 
 
회재 이언적(14   -1553)

 


            광해왕 2년-1610 문묘종사
         본관  호회재(晦齋) ·자계옹(紫溪翁). 자 복고(復古). 이름 적. 시호 문원
         (文元). 원래 이름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령으로 언적(彦迪)으로 고쳤

 


         다. 회재는 주희의 호 晦菴에서 땄다고 하니 그의 포부와 공부가 어느정도였
         나를 짐작할 수 있다.


         경주에서 태어나 외숙인 손중돈(孫仲暾)에게 글을 배웠으며 1514년(중
         종 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였다. 사헌부 지평 ·장령 ·밀양부사

 


         등을 거쳐 1530년(중종 25) 사간원 사간에 임명되었는데, 김안로(金安老)의
         재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귀향한 후 자옥산에 독락당(獨樂堂)
         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였다.

           1537년 김안로가 죽자 다시 관직에 나아가 홍문관 부교리 ·응교를 거쳐
         이듬해에는 직제학에 임명되었다가 전주부윤이 되었다. 이 무렵 일강십목(一
         綱十目)으로 된 상소를 올려 올바른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그 후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대사헌 ·홍문관부제학을 거쳐 1542년 이조 ·형조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노모 봉양을 이유로 자주 사직을 하거나 외직으로 보
         내줄 것을 요청하여 안동부사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544년 무렵부터 병이 생겨 거듭되는 관직 임명을 사양하였는데, 인종이 즉
        위한 다음해(1545)에 의정부 우찬성 ·좌찬성에 임명되었다. 그해 인종이 죽

 


        고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尹元衡) 등이 사림(士林)을 축출하기 위해 을사사
        화(乙巳士禍)를 일으켰는데, 이때 의금부판사에 임명되어 사람들을 죄 주는

 


        일에 참여했지만 자신도 곧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 을사사화의 여파인 양
        재역벽서(良才驛壁書) 사건이 일어나 사람들이 다시 축출될 때 그도 연루되
        어 강계로 유배되었다.

          부인은 박숭부(朴崇阜)의 딸로 슬하에 자식이 없어 종제(從弟) 이통(李通)
        의 아들인 이응인(李應仁)으로 양자를 삼았으며, 서자로는 이전인(李全仁)이
        있다. 1566년 이전인은 《진수팔조(進修八條)》의 상소를 올렸는데, 이는 그

 


        가 죽기 전에 작성해 놓은 것으로서, 임금의 학문에 필요한 《진덕수업(進德
        修業)》의 8가지 조목을 열거한 것이다. 그는 조선의 유학이 나아가야 할 방
        향을 제시함으로써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27세 때 영남지

 


        방의 선배학자인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 벌어진 ‘무극태극
        (無極太極)’ 논쟁에 참여하여, 주리적(主理的) 관점에 입각하여 이들의 견해
        를 모두 비판하였다.

          기(氣)보다 이(理)를 중시하는 주리적 성리설은 그 다음 세대인 이황(李滉)
        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중요한 성리설이 되었으며, 조선 성리학의 한 특징
        을 이루게 되었다. 김안로 사후 그는 재등용되어 중종의 신임을 받으며 정치

 


        일선에 복귀하는데, 이때부터 중종 말년까지 약 20년간 그는 생애 중 가장 활
        발한 정치활동을 펴 나갔다. 그가 올린 <일강십목소>는 그의 정치사상을 대표
        하는 것으로서, 김안로 등 훈신들의 잘못에 휘말린 중종에 대한 비판의 뜻을

 


        담고 있는 글이다. 왕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一綱] 왕의 마음가짐이라고 주
        장하고, 그것을 바로하기 위한 수단으로 열 가지 조목[十目]을 열거하였다.

          유배기간 동안 그는 많은 저술을 남겼다. 《구인록》은 유학의 근본개념인
        ‘인(仁)’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을 나타낸 것이며, 《봉선잡의(奉先雜儀)》
        는 제례(祭禮)에 관한 책으로서 주자가례를 중심으로 여러 학자들의 예설(禮

 


        說)을 모아 당시 실정에 맞도록 편집한 것이다.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
        遺)》와 《속대학혹문(續大學惑問)》은 《대학》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견해
        를 보여주는 책으로 주희의 《대학장구》나 《대학혹문》을 보완하려는 의도

 


        를 담고 있다. 특히 주희가 《대학장구》에서 제시한 체제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학설을 제시하여 이를 개편하려고 한 시도는 그 이후
        의 도학자(道學者)들에 비해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학문정신을 보여주고 있
        다.

        《중용구경연의》는 진덕수(眞德秀)가 《대학연의》를 저술하여 정치의 도리
        를 밝혔지만 제왕학(帝王學)으로서는 부족한 점이 있어 이를 중용의 구경(九

 


        經)으로 보완하려는 의도에서 쓰여졌다. 완성을 보지 못한 책이지만 그는 여
        기에서 정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왕의 마음이며 왕은 천도(天道)를 체
        득하여 배천(配天) ·경천(敬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명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1573년에는 경주의 옥산서원에 제향되었
        으며,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종사되었다.

        이언적의 주요저술 원본은 ‘이언적수필고본일괄’이라고 하여 보물 제586호
        로 지정되어 독락당과 옥산서원에 보관되어 있으며, 다른 글들은 문집인 《회
        재집》에 실려 있다.


*
남명과 이언적

   이언적은(1491-1553) 1538년 남명을 천거하여 헌릉참봉이 제수된 적이 있엇다.
   이 때 남명은 나가지 않앗다.

 


   회재 이언적은 배움이 바르며 조예가 깊고 성리학을 연구하여 본격적인 저술을 남
   긴 대 학자이며 의정부 참찬, 이조,형조, 예조의 판서를 거쳐 정2품 정헌대부에 이
   른 조정의 중신이었다.

 


   또한 사례깊고 노모의 봉양에 힘써 늘 벼슬을 그만 두려하엿으나 여의하지 않았다.
   1543년에는 고향 안강에 가까운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내려와 자신이 천거한바도 있
   는 학자 남명을 보고자 청한 적이 있었다.
   남명은 답서를 보내고 만나지 않았다.

     자기를 중매하는 처녀가 없듯 자진해서 윗사람에게 보이는 선비가 있겠습니까.
   옛사람 가운데 사대의 임금에게 벼슬 햇으면서도 실제 조정에 근무한 날수는 겨우

 


   40일밖에 안되는 선비(주자)가 있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나으리께서 벼슬을 떠
   나 고향으로 돌아가실 날이 멀지 않은 줄 압니다. 그 때 각건을 쓰고 안강리로 찾
   아 뵈어도 늦지 않을 줄 압니다.

   회재 이언적은 나중에 간신 이기의 모함에 걸려 강계에 귀양가 죽엇다.(1553)
   소위 문정황후를 몰아내려는 양재벽서사건으로 이는 윤원형이 윤임을 몰아내기 위
   한 조작이라 알려져있다.


*
옥산서원
   옥산서원은 안강에 있고 1572년 세워져 사액을 받았으며 임진란에 상하지 않았으며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중 하나이다. 사적제154호로 지정되어있다
 
 
 
 
 
퇴계 이황
          1510-1570 안동출생 광해왕2년 1610년 문묘종사

          본관 진보(眞寶). 초명 서홍(瑞鴻). 자 경호(景浩). 초자 계호(季浩).
          호 퇴계(退溪) ·도옹(陶翁) ·퇴도(退陶) ·청량산인(淸凉山人). 시호 문

 


          순(文純). 경북 예안(禮安) 출생. 12세 때 숙부 이우(李)에게서 학문을 배
          우다가 1523년(중종18) 성균관(成均館)에 입학, 1528년 진사가 되고 1534
          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부정자(副正子) ·박사

 


          (博士) ·호조좌랑(戶曹佐郞) 등을 거쳐 1539년 수찬(修撰) ·정언(正言)
          등을 거쳐 형조좌랑으로서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를 겸직하였다. 1542년
          검상(檢詳)으로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사인(舍人)으로 문학(文學)

 

·

          교감(校勘) 등을 겸직, 장령(掌令)을 거쳐 이듬해 대사성(大司成)이 되었
          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이기(李)에 의해 삭직되었다
          가 이어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고 응교(應敎) 등의 벼슬을 거쳐 1552년

 


          대사성에 재임, 1554년 형조 ·병조의 참의에 이어 1556년 부제학, 2년 후
          공조참판이 되었다. 1566년 공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예조판서, 1568년(선조

 


          1) 우찬성을 거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내고 이듬해 고향에 은퇴,
          학문과 교육에 전심하였다.

            이언적(李彦迪)의 주리설(主理說)을 계승, 주자(朱子)의 주장을 따라 우
          주의 현상을 이(理) ·기(氣) 이원(二元)으로써 설명, 이와 기는 서로 다르
          면서 동시에 상호 의존관계에 있어서, 이는 기를 움직이게 하는 근본 법칙

 


          을 의미하고 기는 형질을 갖춘 형이하적(形而下的) 존재로서 이의 법칙을
          따라 구상화(具象化)되는 것이라고 하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
          면서도 이를 보다 근원적으로 보아 주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

 


          시켰다. 그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사상의 핵심으로 하는데, 즉 이가
          발하여 기가 이에 따르는 것은 4단(端)이며 기가 발하여 이가 기를 타[乘]
          는 것은 7정(情)이라고 주장하였다.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한 기대

 


          승(奇大升)과의 8년에 걸친 논쟁은 사칠분이기여부론(四七分理氣與否論)의
          발단이 되었고 인간의 존재와 본질도 행동적인 면에서보다는 이념적인 면에

 


          서 추구하며, 인간의 순수이성(純粹理性)은 절대선(絶對善)이며 여기에 따
          른 것을 최고의 덕(德)으로 보았다.

            그의 학풍은 뒤에 그의 문하생인 유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 ·정
          구(鄭逑) 등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嶺南學派)를 이루었고, 이이(李珥)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畿湖學派)와 대립, 동서 당쟁은 이 두 학파의

 


          대립과도 관련되었으며 그의 학설은 임진왜란 후 일본에 소개되어 그곳 유
          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스스로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창설, 후진 양성

 


          과 학문 연구에 힘썼고 현실생활과 학문의 세계를 구분하여 끝까지 학자의
          태도로 일관했다. 중종 ·명종 ·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은 물
          론 글씨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 및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
          으며 단양(丹陽)의 단암서원(丹巖書院),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 예안
          의 도산서원 등 전국의 수십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퇴계전서(退溪全書):修正天命圖說 ·聖學十圖 ·自省錄 ·朱書記
          疑 ·心經釋疑 ·宋季之明理學通錄 ·古鏡重磨方 ·朱子書節要 ·理學通錄

 


          ·啓蒙傳疑 ·經書釋義 ·喪禮問答 ·戊辰封事 ·退溪書節要 ·四七續編》
          이 있고 작품으로는 시조에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글씨에 《퇴계필
          적(退溪筆迹)》이 있다

 

* 도산서원

     도산서원은 퇴계사후 제자들에 의하여 1574년 세워지고 준공과 함께 선조의 사액
     을 받앗다. 1969년부터 대대적인 성역화 작업이 이루어져 나라의 대표적 서원이
     되었다. 일원이 사적제170호 전교당이 보물제210호 상덕사사 보물제211호이다 
가져온 곳 : 
블로그 >롯데캐논복사기 구입.임대.A/S 경남대리점
|
글쓴이 : 프라이드| 원글보기

 



 

조선 성종 때의 대학자

일두 정 여창(1450~1504)의 옛집

 

대구에서 88고속도로 거창 톨게이틀르 빠져나와,

거창 시내를 우회하여 4차선으로 잘 포장된 3번도로를 접속하여,

 

마리, 안의를 지나 지곡면으로 가는 방법과,

88고속도로를 이용하여 함양 IC를 나와 지곡면으로 가는 방법이 있으나,

 

거창, 안의로 가는 방법이 시간과 돈을 절약할 수 있다.

 

지곡초등학교 서쪽마을이 개평마을이다.

 

'좌 안동 우 함양' 이란 말이 있다.

 

빼어난 유학자들을 많이 배출한 영남 사림을 대표하는 두 지역을 여섯 글자로 함축한 말이다.

그만큼 선비의 기개, 가문과 학문에 대한 자부심, 뿌리깊은 양반사상을 엿볼 수 있는 고장이다.

 

함양에서도 지곡면에 자리한 개평마을은 조선시대 성리학을 대표하는 동방오현 가운데 한사람으로 추앙받는 일두 정 여창 선생의 고향이다.

 

이 마을에는 일두 고택을 비롯해 수백년동안 대물림해온 유서깊은 고택이 즐비하다.

일두산책로를 따라 한바퀴 둘러보면 마을전경이 한눈에 보인다.

 

 

 

 

조선 성종 때의 대학자 정 여창(1450~1504)의 옛집으로,

지금 남아 있는 건물들은 대부분 조선 후기에 다시 지은 것이다.

 

 

사랑채는 현 소유자의 고조할아버지가 다시 지었다고 하며,

안채는 약 300년전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전한다.

 

이 집의 터는 500년을 이어오는 명당으로 유명하다.

 

 

 

솟을대문에는 정려(旌閭)를 게시한 문패가 4개나 걸려 있다.

 

 

 

 

대문을 들어서서 곧바로 가면 안채로 들어가는 일각문이 있고,

왼쪽으로 비스듬히 가면 사랑채가 나온다. 

 

높은 기단위에 지은 사랑채는 'ㄱ' 자 모양이다.

 

 

일각문을 들어서서 사랑채 옆면을 따라가면 다시 중문이 있고,

이 문을 지나야 'ㅡ' 자 모양의 큼직한 안채가 있다.

 

 

 

왼쪽에는 아랫방채가 있고 안채 뒤쪽으로는 별당과 안사랑채가 있다.

 

 

또 안채 뒤 따로 쌓은 담장 안에는 가묘가 있다.

 

 

이 집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사랑채 안마당에 꾸민 인공산이다. 

 

 

돌과 나무를 적절하게 배치하고 엄격한 법도에 다라 아름다운

인공산을 꾸몄는데,지금은 원래의 옛모습을 그대로 볼 수는 없다.

 

 

 

이러한 여러가지 구조적 특성과 함께 살림살이들이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어,당시의 생활상을 파악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일두 선생 홍보관으로 통하는 문.

 

                                                          홍보관.

지정 당시 명칭은 '함양정병호가옥' 이었으나,

조선 성종 때의 이름난 유학자 일두 정 여창(1450~1504)의

 

생가지에,후손들이 타계 1세기 후 중건한 가옥인 점을 반영하여,

그의 호를 따라 '일두고택'으로 지정명칭을 변경(2007.1.29)하였다.

 

 

1984년 1월 14일 중요민속문화재 제 186호로 지정되었다.

 

                                                   *문화재청 자료 참조.

 

 

우리 답사객이 오전 9시 조금 넘은 시각에 개평마을에 도착하였는데,

일두고택 입구 골목에는 할머니 한분이 골목길을 쓸고 있었는데,

 

골목 청소를 마치고나서 곧바로 고택 안으로 들어와서 빗자루를 들고

청소를 하시더라.내가 답사한 고택 중에서 청소가 잘 된 최고로 깨끗한

집이었다.

 

여러 고택과 문화재를 다녀보았지만,

주인이 살고 있지 않은 빈 집을 이렇게도 깨끗이 관리를 하는 집도 있으니,

고택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참고로 삼으면 좋다고 생각된다.

 

나라 예산으로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빗장을 채워 관람을 막는 행동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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