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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로 승화된 농협운동 경남 합천군 초계단위농협 조합장 심 의 조 완전한 성공은 존재할 수도 없고 또 기대하기도 힘든 일이다. 다만 실패를 최소한 줄인 일의 결과를 성공이라 일컫는지 모른다. 지금까지 내 나름대로의 지역개발을 위하여 해 나온 일이 얼마나 실패 없이 추진되어 왔는가는 아직 나도 모른다. 그리고 성공과 실패를 단정하기에도 시기적으로 이르다. 그것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비교되기 때문이다. 나는 2년 전만 하여도 15년에 걸친 지역개발에 따른 경험을 성공사례롤 발표하기에 부끄럽지 않았고, 또한 듣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지역개발의 경험을 성공사례로 발표하기에는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움이 앞선다. 그러나 그동안 일을 하여 나오는 동안 실패를 줄여보려고 동분서주했던 나의 미흡한 경험을 말함으로서 지역개발을 위하여 고생하고 계시는 여러분들에게 조금이라도 실패를 줄이는데 도움이 되어 주었으면 하는 소망에 말씀을 드리고자 하니 나의 경험담을 고도로 성장된 현대 문명사회에서 아주 먼 옛날의 전설과 같이 듣고 오늘에 비교하여 주기 바란다. 1. 지나온 역경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오늘도 책가방을 든 동생들이 학용품 값, 납부금 등 돈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대문을 나선다. 어린 동생들의 성화에 공납금 미납 학생의 호명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걱정쯤은 아랑곳없이 대문을 나서 무거운 책가방에 발걸음을 옮겨야 했고, 온종일 아침에 있었던 등교 때의 동생들의 모습이며 울며 학교에 보내는 부모의 아픈 마음이 마음에 걸려서, 즐거워야 할 학교생활을 가난에 송두리째 빼앗겨 버린 것이다. 이렇게 가난과 싸우며 배워야겠다는 일념으로, 아니, 배워서 남과 같이 잘 살아 보아야지, 나의 후손들에게는 결코 책가방 싸는 보자기로서 눈물을 닦으며 등교해 야 하는 쓰라린 나의 경험을 물려주지는 말아야지, 하는 것이 나의 향학열을 북돋우어 주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의 향학열이 도를 더해 갈수록 보다 큰 시련이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닌가? 평소 몸이 건강치 못하시던 아버님께서 과로로 몸져누우시게 되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가난한 살림을 이어가는 생활은 돌풍을 만난 돛단배와 같았으며 이제 학교도 그만두고 농사를 도맡아야 할 형편이 되었다. 남의 품삯 일이라도 해야 할 사정에 학업을 계속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학업을 중단할 수 없었다. 배워야 잘 살 수 있다는 나름대로의 생각과 부모님들의 교육열에 힘입어 그런대로 지탱할 수 있었다. “앞으로 2년이다. 2년 동안 주어진 시련과 싸워보자, 그리고 꼭 이기고 말 것이다.” 이렇게 마음먹고 보니 무엇인가 될 것만 같은 실오라기만한 기대가 나를 억척으로 만들어 버렸는지 모른다. 북한에 노동력 착취를 위하여 별보기 운동을 한다는 말이 있다는 것과 같이 나는 「새벽 공기 제일 먼저 마시기」「제일 늦게 자기」운동을 했다고나 할까. 한번은 이른 새벽 호미를 들고 야산 기슭에 있는 밭에 김을 매러 가는 길이었다. 무심코 길을 따라 가는데 무엇인가 뒤에서 나의 신발을 벗기는 것이 아닌가? 어릴 때 어른들로부터 늑대가 사람을 해쳤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공포에 떨며 어둠을 헤쳐 보니 큰 셰퍼드만 한 말로만 듣던 늑대가 아닌가. 거기다 2마리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마치 먹이를 가운데 놓고 좋아라고 빙빙 도는 고양이와 같다고나 할까, 아무리 구원을 청하려고 고함을 질러도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를 않았고 도망을 치려고 하여도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쨌든 정신을 잃지 말자고 머리카락을 당기며 버티고 있으려니 먼동이 트질 않겠는가. 그렇게 극성을 부리던 늑대는 사라지고 몸에는 땀과 상처투성이에 힘은 지쳐 주저앉아 그만 한없이 울었다. 흘러내리는 눈물은 닦아도 소용이 없었다. 남들은 새벽 단잠에 취하여 있을 때 일을 하기 위하여 일어나 이러한 고통을 받는 것이 서러워서가 아니다. 학우들이 새벽의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시고 책상머리에 앉아 공부하는 것이 부러워서가 아니다. 또한 나에게 주어진 시련과 고통 때문은 더욱 아니다. 그것은 오직 가난이 피맺혀 눈물로 변하였고 또한 가난과 싸워 이겨야 한다는 의지와 투지가 가슴에 넘쳐흘러 눈물로 변한 것이다. 이러한 나의 생활을 보고 남들은 불쌍하게도 여겼을 것이고 어린 나이에 고생이 너무 심하다고들 했을지 모르니 나에게는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보람이었고 또한 오늘의 조그마한 삶의 터전을 가지게 된 정신적 지주가 되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1955년 이른 봄, 겨우내 움츠렸던 만상의 생물이 제철을 만난 듯 생기를 되찾을 무렵, 나에게는 또다시 견디기 힘든 시련과 슬픔이 주어졌다. 몇 달을 앓고 계시던 부친이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이렇게 되고 보니 하루아침에 5명의 나이어린 동생들을 부양해야 할 가장이 되고 만 것이다(어머님이 계시지만). 부친께서 남겨주신 것이라고는 논 600평, 밭 500평에 초가 한 칸뿐이었으니 일곱 식구가 생계를 이어가고 동생들을 공부시키기란 엄두도 보낼 형편이었다. 거기다 나도 졸업을 하려면 아직 1년이 남아있지 않는가? 당시 나에게는 너무나 큰 시련이었고 슬픔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슬픔 속에서도 의지의 싹은 자라나 앞으로의 삶에 대한 설계를 하기 시작하였다. 농촌에서 남과 같이 살자면 씨앗을 뿌릴 농토를 가져야 한다. 전에도 눈물겹도록 농토에 대한 애착을 가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생각한 나는 약간의 돈을 마련하여 야산을 사들여 개간을 하기로 마음먹고 1일 10평 개간 계획을 세워 밤낮 없이 개간을 하기 시작하였다. 등교 전 이른 새벽, 귀가 후……. 손발이 부르트고 햇볕에 그을린 얼굴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의 땅이 한 평 두 평 늘어나고 이 새로운 농토에 씨앗의 싹이 터서 결실의 기쁨을 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육체적인 고통쯤은 오히려 값비싼 보약보다 좋게 받아들이게 되었고 하루하루가 즐겁기만 하였다. 당시만 해도 개간이라는 것은 농민들에게는 생소한 단어였고 또한 개간을 한다면 미친 사람으로 단정할 정도로 관심 밖의 일이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두들 산을 파헤치면 제 명에 못 살 것이라고 수군거렸고 부친의 묘를 잘못 써 사람이 저렇게 되었다고 야단들이었다. 심지어는 이러한 소문이 학교에까지 퍼져 학우들이 나의 정신을 의심할 정도가 되었다. 이렇게 주위에서 이상한 눈으로 주시하고 손가락질 할수록 산을 파헤치는데 더욱 미치자고 다짐했고 끝내 다투어 개간을 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동안 산을 파헤쳐 만든 농토 2천여 평에 가을에 심었던 뽕나무들이 파릇파릇 싹이 틀 무렵 몇 번이고 중단할 뻔했던 학업을 참고 견디어 온 보람과 홀 어머님의 지극하신 정성으로 감히 대학 진학 같은 것은 꿈도 꾸어보지 못한 채 졸업을 하게 되었다. 「이제 더욱 열심히 일하고 학교에서 배운 영농기술을 부락 청소년들 그리고 부락민들에게 계몽지도 하여 가난에서 탈피해야지」하는 것이 졸업 후 나의 포부였다. 이러한 나의 포부(비웃음을 받을 대상이지만)를 펼쳐 보고자 부락 4H운동을 하기로 결심하고 일일이 찾아다니며 참여하여 주위를 설득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나의 농촌운동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부원들의 부모들이 이해하지 못한데서 오는 부작용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가장 견디기 어려운 일은 나의 진의를 이해하지 못한데서 오는 멸시였다. 나와 어울리면 자기 자식이 당장이라도 산을 파헤치는 미치광이라도 될까 두려운 것인지 모두들 나와 어울리는 것을 꺼려하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한 달에 한번 있는 회의에 참석하는 것마저 참석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는 것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3년, 그동안 개간에 미치고 4H운동에 미쳐 다니다 보니 개간지는 만평으로 늘어낫고 일찍 심은 뽕나무는 수확기에 들어갔으며 또한 야산에 심은 밤나무도 제법 제 모습을 드러내고 부락민들도 이제 나를 이해하고 지금까지 가난을 숙명인 양 알고 살아온 부락민이 가난을 미워할 줄 알았고 가난과 싸워 보자는 의지의 싹이 움틀 무렵, 군대 입영통지가 왔다. 언젠가는 입대하리라는 것을 각오한 바가 있지만 막상 영장을 받고 보니 가장의 노릇을 해온 터에 집안 걱정이 아니 될 수 없었다. 산비탈에서 뽕나무며 밤나무는 해마다 누가 정성껏 시비하며 나무의 전지는 누가 어떻게 할 것인가? 아직 동생들이 어려 철부지였기 때문에 홀어머니에게 맡기고 입대할 수밖에 없었다. 군 생활 3년, 나에게는 긴 세월이었다. 너무나 제대 후 할 일이 많아 초조하게 여겼는지 모른다. 제대복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고향에 돌아와 보니 반가워하는 집안 식구는 물론 더욱 나를 흐뭇하게 해 준 것은 군입대전 같이 고생하던 4H 부원들이며 청년들이었다. 제대를 하여 돌아온 날 4H 부원 그리고 청년들이 제대 축하를 해 준다고 참석해 달라는 전달을 받고 가보니 다들 참석하여 있지 않겠는가! 채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모두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질문이다. 이야기인즉 2년 전부터 시작된 도박 때문에 이제 부락이 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도박으로 고향을 등진 부락민 그리고 패가망신하여 끼니를 잇지 못하는 부락민이 20호에 달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120여 호의 동네에 술집이 7군데나 된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제대 후 들리는 소리는 모두가 절망뿐이었다. 이러한 부락사정들이 제대 후 따뜻한 가정에서의 첫날밤을 잠 못 이루게 만들었다. 다음날 이른 새벽 같은 부락에 B형이 찾아왔다. 도박을 하다 싸움을 하여 큰 상처를 입고 병원에 입원을 하여 고소를 했다는 것과 가해자는 경찰에 연행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조상 대대로 형제같이 이웃에 살던 사람들이 도박으로 인해 싸우고 서로의 생계의 근원이 되는 농토를 저당하여 도박에 걸고 거기에 가족들끼리 원수지간이 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 이러한 상황이 1년만 더 지속된다면 그야말로 동네가 망하고 말 것이다. 또한 자라나는 어린이들 역시 이러한 못된 버릇을 배우지 말라는 법 또한 없지 않겠는가? 이러한 생활이 계속된다면 낙후에서 낙후로 줄달음쳐 끝내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살아야 할 것이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내가 결단을 내렸다. “나의 조그마한 힘과 정성을 이 부락 아니 농촌에 바치자.” 이렇게 생각하고 우선 몇몇 뜻있는 청년들을 규합하여 도박 없애기, 술 안 먹기 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마음먹고 행동을 개시하였다. 도박에 손을 대고 있는 사람들을 개개인을 찾아다니며 설득하고 한편으로 도박판을 찾아다니며 방해를 하기 시작하였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도박이 벌어졌다는 정보를 가지고 청년들이 찾아왔다. 청년들과 합세하여 도박판에 들어가 설득을 하기를 수입분 그러나 막무가내다. 너희들이 무엇인데 이러느냐고 호통을 치지 않겠는가? 이렇게 입씨름을 하다 그만 불상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정신을 차려보니 낯선 방에 누워있지 않겠는가, 몰매를 맞은 탓이란다. 어머니께서도 그런 짓은 그만하라고 눈물을 흘리시며 만류한다. 그리고 부락민들도 마찬가지로 만류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내가 하는 일에 자꾸만 동조자가 늘어 가는데 용기를 얻어 한겨울을 싸우고 나니 도박은 근절되었다. 겨울이 가고 다시 봄은 찾아 왔다. 또다시 농토를 넓히자, 그 길은 오직 유휴지를 개간하는 길 밖에는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군입대전 시작한 개간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렇게 개간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10ha를 개간하여 뽕나무 16,000주, 밤나무 1,500주의 농장을 가지게 되었으며 여기에서 연간 100만원의 소득을 올렸으며 개간지를 적절하게 이용하려면 무엇보다 지력을 증진시키는데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자가 비료 생산을 위한 양계 한우 양돈 등 유축농업으로 전환하여 자립 영농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이렇게 하여 개간의 덕택으로 자립의 기반을 구축하자 같은 마을 원당부락민은 급기야 부락 뒤의 방대한 야산 개간에 심혈을 기울이기 시작하여 당시 개간된 농경지는 40ha에 이르고 호당 0.5ha에서 0.8ha로 늘어나게 되었으며 부락 공동으로 종돈을 구입하여 전 부락민이 사육하는 돼지는 개량 돈으로 대체되었고 한우 공동 사육을 위한 15ha의 목야지를 조성하기 이르렀다. 이렇게 부락민이 협동하여 추진한 몇 가지 사업이 성공을 거두게 되자 부락 이장 직을 맡아달라는 부락민의 권고에 부락 일을 맡아보게 되었고 또한 합천군 농촌지도자 연합회 부회장이란 벅찬 직을 맡게 되었으며 당시 이동조합 조합장까지 맡게 되었다. 이렇게 지역조직의 중심 역할을 맡게 된 나는 우선 첫 사업으로 지게를 지고도 비켜 나갈 수 없는 협소한 원당 마을로 통하는 논두렁길을 넓히고자 부락민들에게 제의를 하였더니 몇몇 지주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애로를 겪게 되어 구역 내 나의 농토(130평)를 내놓고 협조해 줄 것을 호소하여 농토 780평을 희사 받아 65년도에 착공하여 폭 4m의 농로 6km를 완공시켜 드디어 「리어카」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렇게 농로의 확장으로 편리하게 되자 더욱 욕심을 부리기 시작하는 얼굴에는 희망이 넘쳐 있었고, 하면 된다는 의지를 가슴 속에 심게 되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하나같이 또 다른 사업을 들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창고를 건립하자는 것이다. 부락민 전체 의견 일치로 마을 창고 2동을 행정지원 13만원과 주민부담 60만원을 들여 건립하게 되었으나 기존 개인 창고주가 부락 창고 건립을 방해하는 것이 아닌가. 자기의 창고 수입이 줄어들기 때문이겠지만 이곳저곳 다니며 심 의조를 죽인다는 등 가진 중상과 모략으로 부락민을 선동하고 다닐 뿐만 아니라 심지어 집에까지 찾아와 협박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 개인의 사업이 아니라 초계면 서부지역 650호의 8개 부락민 숙원 사업이라고 양보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갈망하고 있는 부락민들의 열기에 찬 후원덕분이었다. 이제 부락민은 협동의 힘이 얼마나 위대하며 슬기로운 것인가를 배운 것이다. 65년부터 67년까지 창고 보관료 수입금 60만원이 부락의 기금으로 적립되어 다시 그 창고 수입금으로 못쓰게 될 정도로 내버려진 소류지를 정부의 지원만 있기를 기다리지 말고 우리의 힘으로 보수 확장하자는 의견의 일치로 공동 작업으로 보수 확장하였고, 다음해 주민부담 160만원과 연인원 16,000명이 동원되어 집수 면적 2,000평의 소류지를 신설하여 65ha의 천수답을 수리안전답으로 바꾸고 연간 400석의 미곡을 증수하게 되었다. 이렇게 부락민의 협동과 자조 자립의 정신으로 열심히 일한 보람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토록 가난했고 낙후된 부락을 이와 같이 온 부락민이 협동 단결한지 8년 만에 탈 가난의 개가를 올린 것이다. 이와 같이 원당 마을이 잘살게 되자 이웃 마을에도 파급되었고 부락간의 협동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하여 급기야 면내 11개 이동조합이 합병하여 초대 조합장으로 선임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2. 농협운동을 통한 지역개발사업 70년도 관내 11개 이동조합이 합병되었으나 자기자금은 전무한 상태이며 합병 조합의 자산 역시 있을 리 없고 오직 과거 금융조합 내지는 이동조합 때에 좋지 못한 일들로 농협에 대한 불신 풍조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거기에다 이동 단위조합 당시 출자금으로 구매사업 또는 도정공장 등의 실례로 보아 합병된 조합 역시 과거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농협의 존립 목적은 농민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향상을 도모하는 것에 있다고 하지만 농민들의 참여의식 결여 또는 과거 이동조합의 영세성 또한 정부와 계통 기관의 지원과 지도가 미치지 못하여 조합의 간판만 초라하게 붙어 있었을 뿐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렇게 백지로 합병하여 백지 상태에서 출범하는 단위조합의 초대 조합장으로서 무엇을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암담하기만 하였다. 3평 남짓한 사무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방을 얻어 여기저기 다니며 책상이며 의자 등 집기 쓰다 둔 것을 구걸하여 들여 놓았다. 이렇게 하여 사무실을 가지고 농협의 간판을 내다 붙였으면 농민을 위하여,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활발한 사업과 또한 농민 지도에 주력하여야 할 것이나 자기 자금의 부족으로 감히 엄두도 못 내고 농민의 지도 또한 불가능하였다. 활발한 사업과 병행하여 지도가 되어야지 그렇지 않고는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만 해도 농민들에게 농협운동의 이념과 조합 육성의 필요성을 주지시키기도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조합의 자기자금의 필요성을 역설하여도 듣고 납득할 수 없었기에 우선 농협에 가입하지 않으면 비료 외상은 물로 농사자금도 융자받을 수 없다고 하며 가입을 종용하며, 1농가 1,000원을 출자하여 줄 것을 호소하며 리어카를 끌고 다니기 2개월, 자기자금 110만원으로 비료업무와 약간의 구매사업을 해 가며 보리 수확기 벼 수확기마다 부락민을 모아놓고 조합 사업을 공개하며 정신계몽 운동과 지역 내부 조직의 내실을 기하여 조합 육성에 참여시키는 동시에 계속적인 출자증좌를 위하여 조합원들이 호당 얼마의 출자를 하여 준다면 이러 이러한 사업을 하여 조합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여 주고 나아가서 직접 간접의 이득을 주겠다는 조건을 내세워 몇 명되지 않는 직원들과 같이 「리어카」를 끌고 가가호호 찾아다니며 현물출자를 권유하였다. 이렇게 자기 자금 조성에 총력을 기울이고 나아가서 조합원들과 약속한 사업을 착실히 이행함에 따라 조합원들의 참여도 점점 확대되어 종합시설을 가지게 되면서부터 조합 사업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3. 구매사업 1970년 9월 과거 이동조합 시절에 상인들의 농간에 못 이겨 구매사업을 끝내 포기해야 했던 초계면 소재지에 연쇄점을 개점하게 되었다. 장사라고는 ABC도 모르는 자신은 물론 지배인 역시 상업에 경험이 없어 얼떨떨하였으나, 오직 열과 성을 가지고 하면 된다는 생각과 농민 조합원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던지 해보자는 나름대로의 생각에 시장 상인들과 싸우고 나아가서 조합원들의 계몽에 나섰다. 처음 연쇄점을 개점하고 나서 시중 상인들의 농간은 말할 것도 없이 조합원들 중에서도 연쇄점이 얼마 안가서 망할 것이라고 할 정도로 상인들의 모함이 극심하였으며, 농협의 구매사업을 실패로 유인하려는 도난행위는 처음 시작한 구매사업에 무서운 적이 아닐 수 없었다. 심지어 상인들의 단체에서 조합원들이 농협에 대한 불신을 가지도록 별 소리를 하고 다니며 이간질시키기에 혈안이 되었고 노골적으로 협박하는 상인도 있었다. 그러나 구매사업을 하기 위하여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가지고 부락마다 부녀자들을 모아놓고 연쇄점 이용을 호소하고 실질적인 계수를 실례로 들어 계몽 설득하고 부녀회를 중심으로 부락마다 4~5명의 연쇄점에 대한 여론지도자(opinion leader)를 두어 연쇄점과 일반구매 사업에 대한 조합원들의 여론을 청취하고 또한 「붐」을 일으키게 하는 반면 부녀회 구판장 설치 등으로 연쇄점 개점 3개월 만에 1일 평균 매상고 8만원의 실적을 올려 73년도에는 연간 총 판매액 3,820만원에 전국 1위의 영광을 차지하였으며 농용자재를 비롯한 각종구매사업 역시 2,600만원의 실적으로 582만원의 직접 이득과 2,000여만 원 간접 소득을 돌려주었으며 연말의 연쇄점 이용에 대한 이용고배당 역시 철저하게 하여 조합원들과 인근 주민들의 연쇄점 이용도가 높아져 생활필수품 가격은 연쇄점에서 좌우하기 이르렀다. 4. 신용사업 1차로 구매사업에서 성공을 거두게 되자 타 사업 역시 참여도가 높아가기 시작하였다. 1961년 정부의 과감한 시책으로 농어촌고리채를 정리시켰는데도 71년도에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관내 조합원들의 고리채가 4,500만원이나 되었다. 4,500만원의 고리채로 지불해야 할 이자는 연 2,250만원이 넘었다. 이러한 고리채를 이용하는 농민들의 이자 부담액을 줄이려면 단위조합의 불가결한 사업이 상호금융이었다. 다행히도 70년도부터 중앙회가 단위조합의 상호금용 제도를 마련하여 72년 8월부터 상호금융을 실시하게 되었다. 처음 상호금융 업무를 개시하였으나 군 농협지소가 있기 때문에 예수금 확대가 곤란하였다. 부락마다 어느 농가에 돈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만 듣고 찾아가 몇 원이라도 좋으니 예금을 해 달라고 애원을 하다시피 하여 끌어 들이고 필요하다고 할 때에는 즉시 현금배달 형식으로 편의를 제공하며 거기에다 부락마다 부녀회 청년회 등 협력조직을 통해서 절미저축 또는 목적저축 등을 권장하여 불과 상호금용 실시 1년 만에 6,000만원의 예수 실적과 중앙회 상호금융 지원자금의 지원을 받아 농사자금이나 고리채 정리자금을 과감하게 지원하여 관내 금융질서를 바로잡았다. 이외에 판매사업 공제사업 이용가공사업 등을 조합원의 편에서 추진한 결과 조합원의 조합 참여도가 높아져 조합을 완전 이용하게 되었다. 특히 이용가공 사업은 농협에서 도정공장을 운영하기 전에는 관내 3개 면의 도정업자조합이 있어 업자들이 마음대로 도정료를 조정하여 징수해서 농민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의 피해를 받아 와서 73년도에 농협이 도정공장을 운영하게 되자, 일반에서도 도정료를 농협에서 받는 도정료와 같이 받게 되어 연간 수백만 원의 직간접 이득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농민들도 단위조합의 육성이 농민이 잘 살 수 있는 길이고 스스로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하여 농협을 중심으로 농협발전에 참여하고 나아가서 농협을 완전히 이용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5. 농협기능을 통한 새마을사업 추진 72년 2월 어느 날 아침 관내 장동부락 새마을지도자와 부락민 3명이 집으로 찾아와 간곡한 부탁이 있다는 것이다. 부탁인즉, 새마을사업을 추진하려고 하는데 농협에서 지도와 지원을 해 주어야 되겠다는 것이다. 나의 농촌 운동 15년 만에 가장 가슴 벅차고, 이처럼 보람을 느낀 적은 없었다. 농촌이 이제 동면에서 깨어난다는 것과, 새마을사업은 행정기관에서만 주도하고 지원하는 줄만 알고 있는 농민들이 농협 조합장인 나에게 새마을사업의 지도와 지원을 요청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잘 살 수 있는 농민들의 마음가짐이며 또 나아가서 협동과 자조와 자립의 의지이기도 한 것으로서 너무나 반갑고 고마운 부탁이라서 선뜻 허락을 하고 총력을 기울여 지도와 지원을 아끼지 않으리라 마음먹고 전체 임직원의 성의 있는 지도와 또한 지원으로 전국에서 우수 새마을이 되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농협의 지도와 지원 없이 새마을사업을 효과적으로 추진하지 못한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어 73년도에는 관내 17개 부락 모두가 다투어 중점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고 나와 즐거운 비명에 73년도에는 면내 전호 지붕개량을 목표로 추진하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관내 지붕개량 실적은 25%도 못 미치는 실정이라서 전호 지붕개량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반드시 달성하겠다는 생각에 농협중앙회의 자금을 지원받아 지붕개량용 슬레이트를 비롯한 각종 자재를 확보하고 추진한 결과 2,300동의 지붕 개량을 완료하였다. 연간 2,300동을 개량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특히 성의 있는 정부지원은 있었지만 대부분 농협자체의 힘으로 추진되어 많은 애로사항을 동반하였다. 이러한 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전체 임직원은 밤잠을 못자고 심지어는 부락에서 형편이 어려운 농가에 노력지원까지 해야 할 형편이었으며 슬레이트 운반 또한 직원들이 직접 부락까지 따라다니며 도맡아야 했다. 이렇게 임직원을 동원하여 추진하다보니 조합원들도 이에 호응하여 계획대로 완료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영세농가의 자재대금, 또는 자금상환이 문제였다. 소득이 한정되어 있는 농가는 지붕개량을 통한 복차 소득사업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 일환으로 지붕개량으로 남아도는 짚을 이용한 고공품 생산을 하도록 유도하여 관내에 560대의 입직기를 공급하여 연간 호당 평균 47,000원의 소득을 올려 조합에서 지원받는 자재 대와 자금을 기한 내에 모두 상환하게 되었다. 특히 농협에서 직영하는 완초 공예센터에서 생산하는 공예품을 농가에서 가내공업으로 생산하여 조합원당 연간 20,000원의 소득을 올려 80년대 140만원 소득 목표는 76년까지 앞당겨질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조합원들의 큰 자랑거리는 100% 전화사업과 이동별 70% 체신전화 사업이다. 이러한 사업 역시 단위조합에서 추진하였다면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새마을사업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농민 조합원들이 농협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농협의 육성에 헌신하고 또한 농협사업의 이용에 인색하지 않는 결과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6. 앞으로의 계획 농협운영 기본방침인 자조적 새 농협운동의 기반을 확립하고 농산물 생산 판매 처리기능을 강화하여 농민을 위한 최대 봉사와 경영의 쇄신을 기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험준한 길이 가로막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험준한 농협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단위조합의 내부조직과 협력조직을 튼튼한 타이어로 갈아 끼우고 농민 조합원의 생업인 농산물 생산과 또한 조합원의 소득과 직결되는 농산물 판매를 유리하게 처리할 수 있는 차체(車體)에 농민 조합원을 안전하게 승차시켜 안전 운행할 수 있도록 전 임직원이 일치단결하여 계속 노력할 것이고, 75년도 새마을사업의 목표인 100% 간이 상수도 설치와 1농가 1개 부업 갖기 운동을 전개하며, 잘 살 수 있는 일이라면 궂은일을 도맡아서 해 나갈 것을 다짐한다. 아울러 조합원의 교육 내지는 민주시민의 정신적 기반을 구축할 정신교육에 나와 전 임직원은 총 매진 할 것이며 서정쇄신과 총화유신 총력안보에 앞장설 것을 덧붙이는 바이다.
(단위조합장반 제8기 수료생) 본 사례는 1975년 새마을지도자 연수원에서 발간한 성공사례집 ‘새마을로 가는 길’에서 전재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