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 상록수 발자취 되밟기 3
최용신 선생님과 함께한 인물들
김 기 명
사람의 됨됨은 자라난 환경과 살아가며 함께한 사람들에게서 배움 받은 바에 따라 결정되는 것 같다. 인간의 인지가 높다하더라도 늑대소년처럼 인간성을 배울 기회를 갖지 못하면 인간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반대로 큰 인물의 배경을 보면 훌륭하고 큰 인물들이 뒷받침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 최용신 선생의 생애는 25년 6개월로 짧았어도 ‘농촌계몽운동가’ ‘교육자’ ‘애국자’ ‘여성운동가’ ‘영원한 상록수’ ‘사랑과 봉사의 불사조’로 크게 빛을 발하는 데는 그분이 자라고 살아오면서 그분의 생각을, 인품을 완성해 온 훌륭한 분들이 있었음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최용신 선생이 밝힌 빛에는 그 많은 분들의 혼이, 염원이 밑바탕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그분들의 면면을 다시 만나 보려고 그동안 알려진 내용들을 요약해 보았다. 이 일로 새삼스럽게 느낀 바는 최용신 선생을 통하여 이루고자 한 역사에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도 컸지만, 용기와 능력 주시고 기도의 응답으로 은혜를 내리신 하나님이 늘 함께 했고, 최용신 선생님을 도우신 분들도 하나같이 기독정신과 민족정신으로 일치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가정환경에서
전 편에서도 일부 언급 한바 있지만
최용신은 1909년 8월 12일 함경남도 덕원부(원산시) 현면 두남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주최씨 후손으로 핏속에는 경주 최 부자의 귀한 혈통이 흐르고 있다,
비록 선대가 원산 앞바다 섭섬으로 귀양살이를 왔다가 그대로 정착 했다지만 그 곳에서도 영향력 있는 가문으로 행세했다.
조부는 경주최씨 14대손으로 애국과 충효정신이 투철했던 분이다. 사재를 털어 원산에 사립학교인 취성(聚星)학원을 세우고 운영했다.
아버지 최창희(崔昌熙)씨는 1907년 덕원부 공립보통학교 부교원이었으며, 1920년경에는 취성학교 교사로 원산지역 독립만세운동에 가담했고, 1927년까지 신간회 덕원지회 부회장을 역임 했다.
큰아버지는 원산농협 조합장으로 아버지 사후에 학비 지원도 해주면서 용신의 진취에 영향력을 행사한 분이다. 소학교를 설립 운영하고 경성에 다녀 올 때마다 세상사와 새로운 문물에 대한 정보를 용신에게 이야기 해주었다.
용신보다 두 살 위인 고모 최직순은 그 시대에 미국 유학을 다녀와서 이화여전 교수가 되었고, 두 오빠 시풍(時豊)과 시항(時恒), 그리고 사촌 오빠 시복(時福)은 청년들의 계몽단체인 두호구락부 간부로 활동하고 있었다. 1927년 시풍은 덕원청소년 연맹 창립준비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이러한 가정환경으로 용신은 어려서부터 계몽운동과 민족정신의 실상을 보면서 자랐다.
2. 교회와 루씨 학원 시절
덕원(원산)부 현면 두남리에는 두남교회와 학교가 있었다.
3.1운동 때까지 교회는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요, 개화기 신학문의 교육장이었다. 두남교회에서 발아된 기독교 신앙은 용신에게 삶의 방향타가 된다.
1916년 8살에 두남학교 학생이 된 용신은 이 학교에서 애국지사 이신애 선생을 만나 애국 애족정신의 싹이 트기 시작한다.
이신애(李信愛 1891~1982) 선생은 평북 구성 출신으로 독립운동가다. 1913년 폐결핵으로 호수돈여숙을 3년 중퇴하고 1914년 원산 성경학교를 졸업한다. 1919년 상경 혈성부인회 간부 취임. 3.1운동 가담. 상해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 의친왕 상해 망명 주선 실패로 투옥. 수감 중 유관순과 3.1운동 1주년 기념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루씨여학교 두남리분교 교사로 부임하여 최용신의 항일 애국정신과 농촌계몽운동가로서의 인격형성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1947년 이후에는 여성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원산시 산재동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루씨고녀는 1903년 11월 19일, 감리교 여선교사 캐럴(A. Carrol)과 놀즈(Mary Knowles)에 의해 학생 10명으로 시작된다. 초가집 여성기숙사를 열고 각고의 정성을 쏟은 결과 학생이 70명으로 늘었고 1909년에는 제1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1913년 미국 북 캘로나이나 여선교회 회장 루씨 커닝김(Mrs. Lucy Cuninggim)의 지원으로 4층 양식교사를 증축하고 1921년에 4년제 중등교육기관으로 발전하면서 교명을 루씨로 정했다.
1918년 두남학교 2학년이었던 용신은 루씨 여자보통학교로 전학을 하고 여기에서 개화사상가 전희균을 만나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를 전수 받는다.
전희균(全羲均 1890~1950)은 충남 논산 태생으로 16세에 윌리암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에 몸담고, 공주 영명보통학교, 배재학당을 거쳐 감리교회 협성신학교 졸업반 때 루씨고녀 교목이 되어 20년간 재직하면서 성서 교사(1930~1945)로 용신의 삶의 이정표, 조언자, 후원자로 ‘행동하는 기독교인’으로 이타적인 삶의 가치를 심어 주었다. 전희균은 교회를 통해 민족단합과 사회개혁, 여성인력개발을 추구해 왔기 때문에 1929년 용신이 협성여자신학교로 진학할 것을 권유하며 추천해 주었다.
또 최용신 선생의 루씨고녀 학창시절 기록 중에 ‘방애인 성자’가 나온다. 최용신 선생(1909.8.12.~1935.1.23.)과는 동갑이었으나 바로 위 선배로 최용신 선생의 교과서였다고 기록(<어리석은 선구자 최용신> 서병욱. 2010. 안산시. 42쪽)되어 있다. 그런데 방애인은 1926년에 호수돈여학교를 수석으로 졸업. 전주 기전여학교 교사로 나가고 용신은 1928년 3월에 루씨고녀를 졸업한 후 감리교회 협성여자신학교에 진학하게 되어 두 분의 관계가 어떻게 연결 되었는지 밝히지 못했다.
방애인(方愛仁1909.9.26.~1933.9.16)은 황해도 황주에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평양 숭의여학교, 개성 호수돈여고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18세에 전주 기전여학교 교사로. 3년 후에 모교인 양성학교로 전근. 1931년 9월 전주 기전여학교로 다시 부임한다. 1930년 1월 10일, 11일 성령체험을 했는데 ‘겉모습을 꾸밀 필요가 없을 만큼 마음이 부유해졌다’고 술회. 부잣집 딸로 신여성 처녀임에도 단장을 하지 않고 단 한 벌의 옷으로 생활하면서 1932년 전주 수재민을 구제하고, 8천여 호의 가정방문 모금으로 전주 고아원 설립. 전주 교외 시골에 야학을 열어 한글을 가르치고, 어머니가 보낸 솜옷도 거리의 걸인에게 주고, 버려진 아이들을 업어다 목욕시켜주고, “애인은 천사처럼 아름다웠다. 거리의 무뢰한들도 눈물과 온유한 목소리로 기도하고 어루만져 진정시키고, ‘걸인과 병자의 친구’ ‘가난한 자의 천사’ ‘거리의 성자’ ‘기도의 사람’으로 불려졌다.”는 <방애인 소전>을 저술한 배은희 목사의 표현이다. 또 “그는 세상을 비관하는 성자가 아니요, 세상을 낙관하는 성자였다. 그는 스승이 되려는 교만한 성자가 아니요, 형제의 발아래 엎드려 겸손히 섬기는 성자였다. 그는 죄인에 대한 책망의 성자가 아니요, 죄인에 대한 눈물의 성자였다.” 방애인 성자는 방황하는 아버지의 회유를 기원하는 아침금식을 수년 간 하며 과로한 탓에 전주에서의 봉사생활 6년을 끝으로 짧은 24세의 생애를 마감했다. 그때 전주 시내가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기록 되어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역한 진실한 신앙인이요 행동으로 봉사를 시범한 성자였다. 그분의 탄생 100주년을 기하여 전주 서문교회와 YWCA 주동으로 ‘방 선생 본받기’ ‘방애인 선생의 뜻 잇기’ 등의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고 한다.
김학준(金學俊1912~1975)은 최용신 선생의 약혼자다. 함남 덕원(원산)부 현면 신 두남리 태생. 원산 보광학교(중학과정 2년제 상업학교)재학 시 두남교회 주일학교 회장이었고 용신은 부회장이었다. 1925년 용신이 학준의 청혼을 받아드리고 교회에서 약혼, 농촌계몽운동을 꿈꾸며 일본유학(도쿄 명교중학), 용신은 샘골에서 YWCA로부터 학당운영 보조금 30원을 받아 그중 매월 10원씩을 학준의 학비로 송금(후원금 30원 중 보조교사 황종우 8원, 12원으로 학당운영과 생활). 1931년 명고중학 졸업. 1934년 도쿄 법정대 예과 졸업. 1936년 도쿄 전수대학 경제학부 졸업.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 최용신 선생 사후 길금복과 결혼 하고 성균관대, 동국대, 조선대학(부총장)에서 교수생활을 했다. 1963년 샘골고등농민학원 이사장 취임 1970년까지 운영했다. 1975년 타계. 그분의 유언에 따라 안산 최용신 선생 묘 옆에 안장하고 부인이 해마다 두 분의 산소를 벌초 했다고 한다.
3. 감리교 협성여자신학교 시절
감리교 협성신학교는 1907년 설립된 감리교 교역자 양성기관이다. 이 학교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많은 선각자들을 배출했는데 우리의 어려웠던 시기에 민족의 독립정신과 농촌계몽사상을 높여 주고 활동가들을 양성하는데 크게 기여 했다.
최 용신 선생이 재학 중이던 시절에는 전영택, 조민형, 김창준, 정인보, 조병옥, 정경옥 등 걸출한 우국지사들이 교수진을 이루고 있었다. 최용신 선생이 농촌계몽사업에 생애를 걸도록 지도하고 후원하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했던 황에스더도 사감 겸 교수로 있었다.
황에스더(黃愛德, 黃愛施德 1892~1972) 교수 : 농촌계몽운동가. 감리교 신학대학 사감 겸 교수, 평양 태생 한학자요 유학자이신 아버지 황석헌(黃錫憲)의 딸. 이화여전으로 유학 1910년 졸업. 평양 숭의여학교 교사, 1913년 송죽회(松竹會) 비밀결사, 국외 항일 독립단체에 군자금 보내기 운동, 1918년 선교사 홀의 권유로 도쿄 여의전 입학, 동경 유학생회(홍학회)를 조직. 배일사상 고취, 애국심 배양, 2.8독립선언 때 여성으로 참여, 1919년 파리강화회의 여성대표 참가비용 마련하다 체포 돼 6개월 간 투옥, 애국부인회 조직. 모금한 군자금 국외 항일독립단체로 송금하다 체포되어 3년 형을 받고 2년 만에 가출옥. 이화학당 대학부 3학년에 편입, 졸업. 이화학당 사감과 교수를 거쳐 1925년 미국 유학, 컬럼비아 대학에서 석사, 펜실바니아 주립대학에서 농촌사회학 6개월 간 수강, 1928년 10월 귀국. 다음 해 1929년 1월 감리교회 협성여자신학교 교장 채핀 부인의 제의로 감리교 협성여자신학교 사감 겸 교수가 됨. 1930~1945년까지 전국에 6개의 강습소와 2개의 교회를 개설한 독립운동가요 농촌계몽 선구자, 교육자였다. 1929년 안경록 목사의 추천으로 용신을 김노득(金路得)과 함께 황해도 수안군 천곡면 용현리로 파견 1차 실습을 하도록 했고, 1930년에는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포항리 옥명학원으로 2차 파견을 했다. 그리고 최용신이 농촌계몽활동의 방법과 민족정신을 이어 받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1931년 천곡학원 부임 후 물심양면으로 계속적인 지원을 했다.
전영택(1894~1968) : 평양 출생. 평양 대성중학 3년 중퇴. 일본 청산학원 문학부와 신학부 이수. 김동인, 주요한, 김 환, 등과 문예지 <창조>의 동인이 되어 문단 활동. 1923년 감리교 신학대학 교수. 1930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 유학. 흥사단 입단. 봉산감리교회, 평양 요한학교, 여성성경학교, 신리교회 목사. 1948년 중앙신학교 교수. 문교부 편수국 편수관 역임. <천지>, <새벽종> 등 많은 단편과 <생명의 봄>, <청춘곡>, 성극 <순교자> 등 저술. 종교인이자 작가로서의 정신세계 구현.
조민형(1896~1950) : 함남 북청 출신. 일본 청산학원에 유학 신학수업. 전영택과 동창. 감리교 협성여자신학교에서 교편. 기독교 사회운동에 지대한 관심. 1924년경 김포 지역에 많은 농장 건설. 1929년 <조선농촌구제책> 저술. 농촌운동 지침서로 활용 됨. 정부 수립 후 황해도 백천 군수 부임. 6.25 발발 후 피난 못함. 서울 공덕교회 장로로 기독교 농촌운동 전개. 농촌운동은 분배개선 보다 생산증가에 역점. 운동의 순서는 문맹퇴치->단체조직->농사개량->지도자 양성으로 방향 설정. 이론과 실제를 시범. 최용신에게 농촌계몽운동의 구체적인 행동 방식을 전수했을 것임.
김창준(1889~1959) : 평남 강서 태생. 3.1운동 때 33인 대표 중 최연소. 1921년 2년 6개월 선고를 받은 후 가출옥. 예수 북감리교 전도사. 1924년 미국 유학. 목사로 서울중앙감리교회, 성동교회, 성북동교회, YMCA 순회강사 등으로 설교와 강론. 1932년 모교인 감리교 협성신학교 시간강사. 1946년 좌익계 민족주의 민족전선 중앙상임위원 역임. 월북. 1948년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 역임, 사회주의 기독신앙.
정인보(1893~ ? ) : 서울 태생. 어려서 부친으로부터 한학. 한 말 진천 목천에 은거. 1910년 상해로 망명. 1912년 다시 상해로 신채호, 박은식, 신규식, 김규식과 동제사(同濟社) 조직. 교포의 정치적 문화적 계몽활동 주도 광복운동. 부인 성씨 사망으로 귀국. 국내 독립운동 중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 연희전문학교, 협성신학교, 이화여전, 불교중앙학원에서 한학과 역사학 강의. 1926년 순종 서거 시 유릉지문(裕陵誌文) 찬술. 1931년 조선고전 해제, 1935년 조선후기 실학 연구. 1933년 양명학 연론 저술. 1936년 연희전문에서 한문학, 국사학, 국문학 담당. 1946년 사료적 추적에 의한 조선사 연구. 1947년 국학대학 학장. 1948년 대한민국 감찰위원장. 정부와 의견 대립으로 사임 후 남산에 은거 중 1950년 7월 공산군에 의해 납북. 역사학자.
조병옥(1894~1960) : 천안 목천 태생. 독립운동가. 1911년 평양 숭실학교, 1914년 연희전문.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경제학 전공. 1925년 동 대학 철학박사 학위 취득. 협성신학대학 사회학 교수. 송진우, 김성수, 장덕수, 이승만 등과 한국민주당 창당. 미 군정청 경무부장. 6.25 동란 시 내무부 장관으로 대구전선 사수. 1956년 민주당 대표최고의원. 196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활동 중 선거 한 달 전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서 병사.
정경옥(1903~1945) : 전남 진도 출신. 감리교 목사. 조직신학. 1927년 미국 개랫신학교 수학. 미국 경험주의 신학의 대표자인 롤(Roll. F.H.)의 영향 받음. 1931년 감리교신학대학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 <위기의 신학>, <기독교 신학개론>, 설교집<그는 이렇게 살았다> 등 다수 집필.
안경록 목사(1882~1945) : 진남포 태생. 1910년 선천역 데라우치 총독 암살사건 연루. 농촌계몽운동가, 독립투사. 1911년 감리교 신학대학 1회 졸업. 평양, 강릉, 영월, 만주 영고탑, 황해도 수안 등에서 시무. 거국적으로 일제에 항거한 3.1운동은 유교 천도교 기독교의 역할이 컸다. 강릉에서도 중앙감리교회 안경록 목사와 그곳 청년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전개 되었다. 1929년 안경록 목사는 황에스더에게 농촌계몽운동 요원 최용신과 김노득의 최초 파송지로 황해도 수안군 천곡면 용현리를 추천했다.
김노득(金路得)은 용신의 급우로 1930년 안경록 목사의 추천으로 용신과 함께 황해도 수안군 천곡면 용현리로 파견 그곳에서 연필장수까지 하며 일용계수법(日用計數法), 한글, 목욕하기, 노래, 웅변, 율동, 덴마크체조 등을 지도했다. 초기에 주민들의 반대가 있었으나 무저항주의로 극복하고 성탄 축하행사에서 아이들이 바뀐 모습들을 보고 부모들의 관심이 호전 되었고 학기가 개시되어 경성으로 돌아가려는 노덕과 용신을 극구 말려 노덕은 황에스더에게 간청. 학업을 중단하고 영구파견을 받아 교사도 짓고 허가까지 얻어 성광학교와 성광교회를 설립. 6.25사변 때까지 봉직했다. 이 사업에는 미국의 에스터서클에서 매월 US$20~25씩 15년 간 지원을 받았다.
케이불(Cable.E.M. 1875~1945) : 협성여자신학교 교장, 1931년 4월 최 용신이 교장배척 스트라이크에 깊이 관여한 관계로 케이불 교장은 연희전문학교로 전근하고 용신은 3년 중퇴를 한다. 이로 인해 농촌지도자나 신앙인이 되려던 용신은 꿈을 접게 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채플시간에 교장이 눈을 뜨고 기도를 하고, 인종 우월주의에 빠진 선교사들의 차별적인 자세와 나라 없는 백성이라고 민족적 자존심을 상하게 하였음이다. 이 사건으로 집으로 돌아가 있을 때 황에스더와 YWCA 농촌사업부위원 홍은경의 추천으로 용신이 샘골 강습소 교사로 가게 된다. 용신은 이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있던 이광수의 <흙>을 통해서도 많은 감명을 받았다.
4. 샘골 강습소 시절
경기도 수원군 반월면 천곡리 샘골마을은 서해바다가 가까운 농촌마을로 한두 집을 빼고는 모두가 기독교 가정이었다. 1930년부터 수원구역 여선교사(삼일여학교 교장) 밀러의 요청으로 샘골 강습소가 마련되어 장명덕 전도사가 최용신 선생 이전에 교인 가정의 학령 초과 아이들이나 가난한 집 아이들을 우선으로 강습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최용신 선생은 YWCA가 샘골 강습소를 인수한 다음 1931년 10월 10일 김활란, 황에스더, 쿨란과 함께 군포까지 기차를 타고 시오리도 넘는 길을 걸어서 샘골에 당도 한다. 이날 마중을 하고 안내를 한 분은 김순봉 전도사였다. 이후 최용신 선생은 염석주, 전재풍 목사 등 많은 분들과 함께 이곳에서 꿈을 펼치다 생을 마감한다.
밀러(Lula Miller) : 감리교 수원구역 전도사. YWCA에 샘골 강습소의 인수를 건의하고 장명덕을 파견. 1901년에 한국에 와 1907년 수원 삼일여학교(현 매향여고) 교장 취임. 학교 신축과 애국지사 김세환을 학감으로 초빙. 3.1운동 지원. 1924년 수원 일대 농촌교회에 문맹퇴치 강습소 세우다. 그의 요청으로 최용신이 샘골 강습소에 파견 된다.
장명덕(張明德1901~1990) : 부천 소래면 무지리 태생. 인천 영화여학교에서 신앙교육을 받고 1916년 졸업. 결혼 후 1922년 협성여자신학교에 입학 딸 박미화를 키우면서 학업에 열중. 1925년 협성여자신학교 졸업. 용신의 선배. 삼일여학교 교장 밀러의 요청으로 본교 성경교사, 1929(30)년 샘골 강습소 개원. 근실한 선교사, 전도사, 나타내지 않는 선생의 열정과 정성 탓에 샘골 강습소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이 대단히 좋았다. 신학교 후배인 최용신을 적극 도우면서 수시로 강단에 세워 설교도 시키고 심방도 같이 다녀 활동영역과 목회분야를 넓혀주며 믿음 안에 좋은 친구가 되고 여자로서의 생활태도도 본보기가 되어 주었다. “교회 언덕 밑에는 전재풍 목사님이 사셨고 최용신 선생과 나는 한 집에 살았다. 최 선생은 안방, 나는 건넌방을 썼다. 최 선생이 병석에 눕게 되어 도맡아 간호했다. 의사의 지시에 따라 겨우 소변을 보게 한 적도 있었다.” “무지리 교회의 사경회에 참석했다가 비보를 듣고 수원 도립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빨리 갈 줄 몰랐다.”
장명덕은 최용신 선생을 끝까지 돌봐주면서도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언제나 뒤에서 헌신하는 참된 신앙인으로 말년에는 은퇴한 여자 교역자들의 노후를 돌보는 안식관 사업에 매진했다.
류달영(柳達永1911.4.8.~2004.10.27.) : 경기도 이천 태생. 1933년 양정고 졸업, 1936년 서울농대 졸업. 개성 호수돈여고 교사. 1956년 미국 미네소타 대학. 1959~1979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원예학 교수, 1972년 명예 농학박사(건국대학). 5.16혁명 직후에는 국가재건국민운동 본부장, 1970년대 추진된 새마을운동에는 <새 역사 창조>라는 제하의 강연으로 새마을지도자들의 의식개혁에 크게 공헌 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1930년대에는 상록수 최 용신의 농촌계몽운동에 사업자금을 모금하여 지원하기도 했다. 최 용신 선생 사후에는 양정 김교신 선생의 권유로 <농촌계몽의 선구 최용신의 소전>을 써서 많은 분들에게 감명을 주어 상록수 정신 함양에 크게 기여 하였다.
김홍제 목사() : 1929년 이상촌 건설의 꿈을 갖고 천곡교회 담임목사로 부임. 농사강습, 소비조합과 저축계를 조직 운영하면서 제승기와 직조기를 구입 부업을 장려했다. 또 YMCA와 연계 농토 토질검사까지 실시하고 밀러 선교사의 후원과 장명덕 전도사의 지도로 1930년 샘골 강습소를 개설했다. 샘골 강습소 설립인가 획득과 교사 신축 등 최용신 선생의 사업을 적극 지원하고 1934년 5월5일 안산 서 구역으로 이임했다. 김홍제 목사와 김용기 장로가 시도한 이상촌 건설은 해방 후 농촌개발 사업으로 크게 인정을 받았다. 이는 1970년대 거국적으로 진행된 새마을운동의 밑거름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재풍 목사( 1887~1966) : 서울 인사동 출신. 중추원 의관 전승업의 4대 독자. 1919년 감리교 협성신학교 입학. 1921년 협성신학교 7회 졸업. 1925년 김복희 여사와 결혼. 개성, 원산, 철원, 고성, 장단, 천곡 등 15개 교회 시무. 천곡교회에는 1934~1937년, 1939~1954년 2회에 걸쳐 시무. 샘골교회 중흥의 기틀 마련. 최용신 선생이 일본에서 돌아와 소천 시까지 같이 활동, 영결식 집전.
김복희 사모(1901~1980) : 1901년 충남 아산 백암리에서 출생. 공주지방 여선교사 사애리시(Mrs. Alice H. Sharp)의 천거로 이화학당 교비생으로 입학. 1919년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제1회 졸업. 졸업반으로 있을 때 1학년이던 유관순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 하다가 강제휴교로 고향 백암리에 내려가 동년 3월 31일 지역민들과 함께 백암리 만세운동을 주동. 유관순과 함께 공주 감옥에 투옥. 1921년 이화여전 보육과 3회 졸업. 강경, 공주, 강원 김성, 평강 등 유치원 설립 근무. 1934년 천곡학원 홍종우 보조교사 진학 후 강습소 보조교사를 하다가 최용신이 일본 유학을 떠난 후에는 천곡학원 운영을 이어 받았다. 전재풍 목사의 사모로서 샘골 교회와 교우들에게 끼친 신앙과 인격과 생활상의 공헌은 지대했고 최용신 선생의 사업지원과 마지막 보살핌 등 사모의 사표였었다고 함.
김활란(金活蘭 1899~1970) : 인천 태생. 한국 최초의 여성 대학 졸업생. 최초의 철학박사(1931년 컬럼비아대학). 1931년 YWCA 창설. 1939년 아펜젤러의 추천으로 이화여전 교장. 한국 여학사회 창설 초대 회장. 국제연합 한국대표 5회. 6.25 전시내각 공보처장. 최초의 영자신문 코리아타임즈 발행. YWCA 중점 사업인 전도 외에 농촌계몽, 금주, 단연, 공창폐지 등 여성의 지위향상과 민족사상 고취에 중점. 최용신 선생이 처음 샘골에 부임 할 때 황에스더 여사, 쿨란과 함께 기차 편으로 동행 격려와 후원을 계속 했음.
김순봉 전도사(金舜鳳 1896~1970) : 화성 농가 출생. 어려서 부모를 잃고 친척집에서 자라 독학으로 글을 배워 22살에 감리교회 협성신학대학에 입학 2년 만에 중퇴하고 1918년 홍순호 목사 소개로 샘골에 와 샘골교회를 교회답게 가꾼 전도사다. 3.1운동 반월 면책으로 활동. 최용신이 처음 샘골에 오는 날 마중부터 시작하여 강습소 일을 내일처럼 감당하고 최용신 선생 입원 중에는 모든 병 수발을 다 하신 분이다. 마지막 임종 시에는 임종예배를 인도하셨다. 김순봉 전도사는 1936년 만주 길림성으로 이주 했다가 해방직후 서울로 돌아 왔다고 한다.
염석주(廉錫柱 1895~1944) : 애국지사. 수원 율전동 출신. 수원지역 신간회 부회장. 막고지에서 정미업과 목축업을 한 부자. 수원 삼일학교에도 매년 100원씩 기부하는 자선가. 만주 흑룡강성 오상 충하진에 90만평의 추공농장개설 율전리 주민 100여명 이주. 부족한 학원 건립비 부담. 공사비 700백 원 중 모금 60원, YWCA 110원. 나머지 자금과 목재까지 지원. 교인은 아니면서도 교회와 강습소에 아낌없는 지원. 최용신과는 나이 차이가 있지만 서로 마음을 터놓고 나라 걱정을 하던 사이. 최용신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기획하여 하나의 민족운동으로 승화시키고. 최용신 사후에는 학원 이사장을 맡아 최용경과 함께 학원 운영. 전재풍 목사와 절친한 사이. 1944년 검거되어 동대문경찰서에서 18일간 취조를 받고 적십자병원에서 치료 중 사망. 염석주는 최용신과 함께 천곡학원의 최대 공로자였다고 함.
황종우(1916.8.27.~2010현재 95세 생존) : 진위 현덕 부자 집 태생. 홍천 물걸리 피신 시 기독교 입문. 최용신 다음 가는 천곡학원 공로자. 군포고등보통학교를 우수하게 졸업하고 1933년 개성 송도고보로 진학할 때까지 보조교사로 활동. 같이 일하신 분들 중 최장수, 학원 건립 시 3km나 떨어진 곳에서 서까래를 져 나르는 등 강습소의 바깥일을 전담했다. 학업을 위해 개성에서 만주로 일본으로. 인공시절에는 원산 시장. 1.4후퇴 시 주민 3만 명 소개. 그 후 신앙생활과 봉사생활을 위해 의과대학 수학. 의사가 되어 부산에서 20여 년간 봉직. 1978년 알코올 연구를 위해 도미. 사회봉사를 위해 한.미 봉사센터 이사장 역임. 알코올, 담배 등에 대한 연구, 저술 다수.
오야마(大山綱擧) : 일제의 농촌진흥운동 첨병 노릇을 한 일본인으로 측량기사, 퇴직공무원, 또는 전문교육을 받은 조선총독부 고등계형사로 여겨지던 인사다. 반월 면소재지 부근 남산 뜰에 살면서 통배추, 고구마 순 재배 등 신 영농기술 보급과 포도, 양파, 호박 등 특용작물 재배도 시범했다. 고잔 저수지에 유료 낚시터를 개설하고 일본인들을 상대로 파전이나 막걸리를 파는 영업행위도 했다. 천곡학원 낙성식에도 참석하는 등 샘골 주민들과 샘골 학원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도 하면서 최 용신 선생 사후에는 천곡학원 원장 행세도 하고 학원을 뺏으려는 재판까지 했다. 항상 그의 정체는 요 주의 인물로 인식 되었고 나중에는 김종규 목사의 집을 시세보다 비싸게 사서 샘골로 이사 와 살다가 해방되기 사나흘 전 소리 없이 일본으로 가버렸다고 함.
<그 외 샘골과 주변 인물들>
박용덕(朴容德 ) : 둔대교회 설립자 박경춘의 아들. 샘골로 부터 10여리 떨어진 반월 저수지 근처 마을에 사는 신자도 학부형도 아닌 분이 최용신의 진정성에 감동. 1932년 학원 터와 운동장 실습지 등 강습소 부지로 1,052평(수원군 반월면 사리 475번지)의 밭을 쾌척한 후원자였다.
윤홍림(尹洪林) : 용신의 친구 야목리 강습소 교사. 야목리 주민들의 요청에 의해 1933년 강습소 개설. 1934년 윤홍림이 부임하고, 1935년 야목리 유지 박흥로의 협조로 강습소와 교회 건립. 성경, 음악, 동화, 역사, 한글, 위생, 체조, 직업교육 실시.
김용진 : 참판 댁으로 불리어진 인근 마을 부자. 그 집 잔칫날 용신이 학원설립기금도 부탁하고 아이들에게 “뭐 좀 얻어 먹일까” 하고 갔다가 그 집 하인들로부터 몰매를 맞은 적이 있다. 이런 봉변과 문전 박대를 당하는 일은 흔히 있었단다.
홍 수산나 : 샘골 주민들의 저축의식과 소득증대를 위해 운영하던 구우계(求牛契) 계장. 소 값이 폭락하는 어려운 시기에 소 판돈 300원을 학원 건립비로 내 놓자 용신은 이의 반 150원만 받고 나머지는 되돌려주기도 했다. 김종규 목사 모친.
최용경 : 용신의 아홉 살 아래인 여동생. 용신 사후에 천곡학원 교사로 일했다. 그 외 교사로 일하신 분들은 주의득, 황종연, 송봉호, 염석주의 딸 염태윤 등이다.
이상종 : 학원 신축을 할 때 최용신 선생과 아동들과 함께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나무를 베고 돌을 모아 져 나르고 공사장에서 같이 일하던 제자.
홍수용 : 학원 건립을 도우신분,
홍수득 : 학원건축 시 회계담당(학원 건립공사비 : 수입 450원. 공사비 656원. 206원89전 부족. 준공식장 모금 217원(쌀 20 가마니)
안원순 : 최용신 선생의 설교에 늘 감동하며 선생의 면면을 증언 하신 후원자. 용신과 함께 천곡학원 교사였던 홍찬의 장로 부인, 최용신 선생과 샘골에 대한 많은 저술을 남기신 홍석창 목사의 어머니.
최한이 : 최용신 선생님의 제자. 어릴 때 손을 잡아주며 귀여워 해주던 선생님 회고. 선생님은 자기 집 옆에 사셨다고 함. 1970년대 샘골마을 새마을지도자였음.
5. 최용신 선생의 소천과 그 후
1935년 1월18일 샘골 집에서 통증을 참고 견디다가 쓰러져 주민들이 모두 나서 가마에 태워 수원 큰 병원으로 재촉해 간다.
수원도립의원 원장 신현익(申鉉益) 선생은 장 중첩증으로 진단 한 다음 수술을 결정하고, 외과 명의 김하등(金河橙)박사가 집도하여 수술을 했으나 시기가 너무 늦어 회복이 어렵게 되고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며 하나님께 애원하다 혼절을 거듭 한다. 1주일이 경과된 후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의료진은 재수술을 시도했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급기야 의료진의 권고로 오빠들의 피를 수혈한다. 1월 22일 새벽 안홍팔은 용신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병원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안홍팔(安洪八): 1899년 음성 대소 출신. 16세에 사서삼경 완파. 의병지원으로 가정이 파탄 되고 배움을 위해 일본으로 가려던 중 안산 샘골 서당 선생으로 초빙되어 정착. 최용신의 정신 신앙적으로 친자매처럼 돌봐주던 김경준의 딸 신명순과 결혼. 사업할 때는 학원 이사로, 투병 중에는 병간호를 했고 1935년 1월23일 0시20분, 임종을 지켜보며 유언을 청취하고 정리하셨다. 돌아가신 후에는 학원을 빼앗으려는 일본인과 법정다툼까지 하면서 학원을 지킨 분이다.
홍에스더(1892~ ? ) : 고종 29년 경기 수원군 출신. 1912년 이화학당 교사. 여성운동과 문맹토치운동 전개. 1919년 유관순과 함께 비밀결사 여성동지회 조직. 1920 김활란, 윤성덕과 함께 7인 전도대 조직. 전국 순회 계몽운동 전개 중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1922년 조선여자기독청년회 초대 부회장 역임. 1923년 김활란, 최활란, 유각경 등과 함께 조선기독교 여자절제회 조직. 1924년 초대 회장으로 피선 활동. YWCA 사업을 통하여 최용신 선생의 사업을 후원하고 선생의 장례식에서 YWCA 대표로 조사를 하며 영결하였음.
장례식 : 장명덕 전도사의 조종(弔鐘)에 이은 기도. 장례위원장 염석주 영결사. 어린 아동들의 조가. 안홍팔 이사의 약력보고. 전재풍 목사의 유언 낭독. 제자 신명순과 이종팔 의 고별사. 일본인 오야마의 조사. 윤홍림의 유고 낭독. YWCA 대표 홍에스더 여사 조사. 고모 최직순의 조사. 수원도립병원장 신현익의 조사. 늦게 도착한 김학준의 영혼결혼식 만류. 장례위원장 염석주는 장례비용 일체를 부담하면서 사회장으로 이끄는데 주역을 맡았고 이 분과 심훈은 언론과 소설 <상로수>로 최용신 선생을 세상에 알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셨다.
심 훈(1901.9.12.~1936.9.16.) : 소설 상록수 작가(별도 소개 생략)
홍석창 (1936~ ) : 샘골(본오동) 출생. 최용신의 제자. 천곡학원 홍찬의 교사의 아들. 수원고등학교. 1963년 감리교 신학대학 졸업. 수원지방 감리사. 수원 도마교회, 성려교회, 동탄교회 등 44년간 담임목사로 시무. 은퇴 후 여러 분야에서 활동 중. <최용신과 샘골마을 사람들> 등 저술.
김우경(1933.12.19.~ ) : 천곡교회 장로. 최용신 정신 계승운동가. 농촌사업가. 1959년 샘골에 와서 12년간 샘골고등농민학원 운영 참여. 400여명의 학생을 배출했다. 1977년 도시계획으로 샘골이 철거 위기에 처했을 때 ‘최용신의 터전’을 지켜내기 위해 주민들과 함께 많은 노력을 한 수훈자. 최용신 정신계승 모임회장으로 사료집을 발간하고 천곡학원에 대한 증언과 사료의 수집, 보존, 정리에 생을 바치고 있다.
한 인물의 생애와 주변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한시대의 역사가 고스란히 나타난다. 우리 최용신 선생의 고난은 우리 민족의 고난이었고 선생의 꿈과 소원은 우리 민족의 꿈이요 소원이었다. 선생이 쏟은 눈물과 땀과 그가 드린 기도가 거름이 되고 애처롭게 거둔 혼이 민족의 혼이 되어 오늘 우리는 동방의 등불로 인류공영에 이바지 하고 있다. 이 거룩한 혼과 정신이 기리 전승되고 열매 맺기를 빌어 마지않는다.
참고문헌
어리석은 선구자 최용신( 서병욱 지음. 안산시. 2010.02.28.)
최용신과 샘골마을 사람들(홍석창 지음. 한국감리교 사학회. 2010.06.15.)
상록수와 최용신의 생애(이주승 역음. 홍익재. 1992.07.30.)
방애인 소전(배은희 목사 지음 전주 유치원 발행.1933.12.25.)
상록수(샘골) 기사집(최용신 선생 정신계승모임. 김우경 보존 자료철)
네이버 지식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