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민속예술보존회 창립, 김해오광대 제작.
문화재를 만들려 꾸며낸 기록에 대해
김해민속보존회와 김해(가락)오광대 이야기를 하게 된 동기
저는 김해민속예술보존회 초대회장으로 창립과 오광대를 만든 이야기와
그것을 문화재로 만들기 위해 김해문화원과 보존회 김해시가 온갖 거짓으로 치장한 이야기 입니다.
김해민속예술보존회 창립, 김해오광대 제작. 문화재를 만들려 꾸며낸 기록에 대해
김해민속보존회와 김해(가락)오광대 이야기를 하게 된 동기
김해민속보존회 2007년 제24회 발표공연 팸플릿을 보고 이대로 두면 보존회가 문화재를 목적으로 하는 잘 못된 거짓이 후대에까지 전해지며 거짓이 진실인양 시민들이 속고 있겠구나 싶어 이제는 진실을 밝히고 싶어 이야기를 꺼냅니다.
긴 이야기가 되겠지만 보시고 거짓이 후대에 전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김해민속예술보존회를 창립한 발기인이며 초대회장을 지낸 사람입니다.
김해민속예술보존회를 창립하고 김해오광대를 처음 만든 과정의 주역이었기 그 과정을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 현재 보존회의 연혁과 연희되고 있는 오광대를 보며 바뤄놓지 않으면 보존회재로 들어오는 회원이나 시민들이 보존회가 공개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 믿겠기에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과 저의 입장 해명도 좀 해야겠다는 생각에 말씀드리오니 사심을 버리고 그 때 있었던 일 그대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아직도 초창기 고락을 같이 했던 지인들이 생존해 계시니 제 말에 증인들이라 믿고 그도 모자라면 그동안 10년간 수집한 증빙자료가 충분히 있기에 말씀드리니 보존회의 자행을 들어 보시고 아무 편견 없이 판단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1. 보존회와 사람들과의 인연
1993년 김해와 인연을 맺기 전 저는 부산 소리패 울림터의 고문과 국악인회 회장을 지낸 뒤 공연예술인연합회장으로 있으며, 처음으로 국악과 사물을 접하는 초,중,고 교사들에게 우리가락 연수를 시키고, 학교에서는 사물과 농악 지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지금 김해시립가야금단에 계신 황정숙 선생님이 저희 울림터에서 장단과 기초설장구를 배우고 있을 때였는데 하루는 연습을 끝내고 집에 오는 길에 제 차를 같이 타고 오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제가 김해에 사는 것을 알고는 차 안에서 “선생님 김해문화원에서 두부장사 하는 사람과 개인택시를 하고 있는 사람과 몇 명이 장구를 배우고 있는데 체계적인 악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시간이 있으시면 한 번 가 봐 주세요.” 하는 지나가는 부탁을 듣고 얼마 후 시간이 있기에 가 보았더니 남자들 몇 분과 여자분들 3,4명이 있었습니다. 남자들 4,5명 가운데는 정용근, 이명식, 양만근, 이상대 등이 있었는데 정말 초보 중에도 초보자였습니다.
지도하는 강재수씨는 기능은 있었으나 이론과 지도 능력이 없어 보였고 악보도 없었습니다.
사물놀이라는 정식 명칭이 붙은 곡은 칠 줄 아는 것이 없었으며 장단도 굿거리 자진모리 정도로 중중모리 쳐야할 장단을 굿거리로 칠 정도였고 중모리, 엇모리, 타령등은 장단이 있는 것조차 모를 정도였으니 짐작이 가시겠지요. 가르치는 강재수씨가 있었으나 이상대씨와 정용근씨 여자 수강생들의 부탁으로 민요 기초 장단부터 이성진씨의 설장고 가락과 영남 농악 사물놀이등을 가르쳐 주는 것으로 김해문화원 사람들과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인연이 되었고 그 후 내동에 마련한 공간 울림터(지금도 운영하고 있음)로 정용근씨는 장구를 들고 찾아와 웃다리풍물, 삼도설장구등과 모르고 궁금한 가락들을 배웠고, 그 후 한일여고등 학교로 가르치러 다니는 것을 보았고 지금도 가르치며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 때 공간에서 기초 사물놀이와 설장구등을 배운 사람 중 문화원 강사 이수금 양이 있지요.
이렇게 저와 인연이 된 대다수는 부산 문화회관 무대에 한 두 번씩 세워 공연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인연을 맺었고 각자가 활동하는 중에 김해민속보존회 창립의 필요성을 느끼고 얘기가 오가다가 1995년 6월 15일 김해민속보존회 발기모임을 갖고 바로 이어 6월 20일에 창립총회를 가지므로 명실 공히 “김해민속예술보존회”가 출범을 하게 되었습니다.
창립당시 류필현씨를 회장으로 모시자는 얘기도 나왔지만 이것은 문화원과는 독립단체라는 각오의 의지를 굳히고 류필현씨는 제외시키고 독립운영 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이런 각오와 다짐으로 출발한 발기총회 임원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발기총회임원 : 초대회장-손성일, 사무국장-정용근, 기획담당-이강식, 조사담당-양만근,
교육담당-강재수, 공연담당-이상대, 홍보담당-이명식 이상 7명
2. 오광대를 만들게 된 동기
보존회 창립 후 첫 사업으로 양만근씨의 요청으로 삼정걸립치기농악을 복원키로 하였습니다. 거기에 선 듯 동의하게 된 이유는 1993년부터 제가 삼정농악을 조사를 하고 다녔는데 그 때 문화원에서 삼정농악걸립치기 종쇠를 쳤다는 양만근씨의 도움으로 당시 연희자들의 명단과 안내로 사람을 만나는데 도움을 받기도 했었습니다.
발굴조사를 했으나 당시 연희자들은 악의 구성도 가락도 발림도 기억하는이가 거의 없었고 입장단 몇 구절 읊을 정도였습니다.
하는 수 없이 1994년 가을 저의 공간 울림터에 모여(손성일, 이상대, 강재수, 양만근, 이명식, 정용근 등) 삼정걸립치기를 채록( 채록-손성일) 해 둔 악보가 있어 채록에 참석한 이들과 같이 연습에 들어가기가 쉬워 결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화원 사무국장인 이강식씨가 제안하기를 11월에 경남민속경연대회에 김해시에서 작품을 내라고 하는데 걱정이라고 하면서 이번에 가락오광대 대본을 입수를 했는데 보존회에서 가락오광대를 만들어 출품하기를 요청했습니다. 토론 끝에 두 가지를 병행하기로 하고 연습시간을 한 시간 더 늘리기로 합의를 보고 연습에 들어갔습니다.
1) 병행되면서 들어나는 문제 점
(가) 삼정걸립치기
삼정걸립치기를 잠간 얘기하고 지나가야 될 것 같습니다.
연습 당시에 쇠는 종쇠를 쳤다는 양만근씨가 잡았고 나머지는 그동안 장구를 배운 사람과 나름대로 연습을 했으나 종쇠를 쳤다는 꽹과리가 따라 주질 못 했고 쇠가락은 최덕수씨 가락을 흉내 내고 있어 쇠와 치배들 간에 계속 부닥치고 나중에는 감정까지 들어내는 어려움이 돌출합니다. 양만근씨는 고집으로, 강재수씨는 기능으로 맞서 다투면 옆에 다른 치배 들도 덩달아 가만있지를 못합니다.
칠 때 마다 맞지 않는 쇠가락(박자도 가락도)에 치배들 짜증이 가중 되었고 그나마 쇠를 조금이라도 칠 줄 아는 이 들이 그냥 보아 넘기질 않고 다들 각자 자기가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같았습니다.
김해 사람들의 특성? 인지는 모르겠으나 자기가 아니면 안 되고 자기보다 나은 사람은 보아 넘기지 못하고 한번 씹고 지나가야 하는 습성은 2,3년 배워 겨우 가락을 아는 사람이나 짧게는 이제 악기를 금방 잡은 사람까지도 자기가 잘 났음을 과시해고 한마디를 해야 끝이 납니다. 악보를 무시하는 쇠는 가락이 맞지 않으면, 그것은 죄 없는 사물놀이 가락이라며 타박을 합니다. 나쁘게는 나를 보고하는 소리며, 빠른 사물놀이에 엄두를 못내고 타박하며 자기의 능력을 달래보는 말이지요.
악보를 볼 줄 모르는 자기의 한풀이 같기도 하고...... 다툼이 가관일 뿐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징 점도 몰라 헤매든 이들이 생각나고 요즘에 보면 대견한 마음이 듭니다.
그래도 원형 가락을 끌어 내 연습을 해 보려고 삼정농악 소고를 치던 분을 모셔도 봤으나 그 분 역시 가락 하나 몸짓하나 시범조차 못 보이는 상태였습니다.
더 큰 문제는 쇠잡이가 가락보다는 성주풀이 사설을 못해 안달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 때 쇠잡이는 삼정걸립치기가 12마당이라고 하더니 요즘에는 18마당라고 주장하고 김해에는 없다던 부산의 농사풀이가 삽입됐는가 하면 18마당 명칭은 고사하고 12마당 명칭을 얘기하라고 해도 종쇠를 쳤다는 이가 15년이 지난 지금도 그 명칭조차 모를 뿐더러 순서도 모르고 있습니다.
왜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그 동안 계속 해온 이들의 실력이 이럴 진데 12년 전을 상상 해 보시라는 것입니다.
하는 수 없이 경연대회 김해오광대를 핑계로 삼정걸립치기는 접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 후 채보한 가락을 보이며 삼정동 류명식 씨와 활천동장님께 권유해 활천농악대가 발족을 하게 되었는데 발족 후에는 조사, 채보자는 무시되고 종쇠를 쳤다는 사람이 끌어넣는 것이 삼정농악 가락이요 순서가 되는 현실입니다. 보존회라는 명칭의 뜻을 모르는지 고의적인지...........그에 대한 얘기는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겠습니다.
(나) 보존회의 잘못된 기록을 남기게 된 원인
보존회는 김해오광대 전수를 류필현씨와 김덕명씨가 받았다고 꾸준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김해오광대를 무형문화재로 만들려는 목적을 세워두고 준비를 하면서 모든 것을 거기에 맞추다 보니 거짓에 또 거짓을 반복하는 행위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합니다.
이제껏 이런 사실을 말할 수 없었던 것은 증거 없이 말하다 보면 저들 트집에 말려들까 하는 염려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은 당시 전수 받았다는 당사자와 서류를 그렇게 만든 당사자들의 증언과 증거를 가지고 있고 오광대 책 출판 때문입니다.
저는 2004년에 나이가 많아 그만 두었던 방송연출을 다시 연출의뢰가 들어와 다시 직접 드라마를 쓰고 방송연출을 하면서 어디를 가든지 참고가 되겠다하면 메모나 녹음을 해 두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 덕분에 증거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몇 번의 만남으로 그들이 왜 말을 하고 왜 글을 써 주었는지 질문을 던져 신경 쓰지 않고 말할 수 있도록 유도도 했습니다.
언젠가 때가 오면 진실을 밝혀 거짓이 진실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믿었기에 믿고 여기까지 오는데 10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이제 과정을 말씀 드릴 테니 판단해 주십시오.
사실 제가 이렇게 진실을 공개해 전국적인 망신?을 하기 보다는 스스로 바뤄 놓거나 찾아와 사과라도 한마디 할 줄 알고 기다린 점도 있엇던 것 같고요...... 그런데 금년 2007년 발표회 프로그램을 보니 이제 더 기다릴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참고 기다릴 것이 아니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1995년 당시에는 경남남도 대회에 나갈 목적만 가지고 아무 준비 없이 오광대를 만들었기 때문에 가락오광대를 본 사람조차 없는 상태에선 할 수 없이 부산 수영야류 태덕수 회장님을 모셔와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류필현씨와 김덕명씨가 전수를 받았다면 전수자에게 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고 옳은 일인데 류필현씨가 강용권교수와 의논 끝에 태덕수회장을 모셔와 주었겠습니까?
탈도 의상도 준비 없이 매일 하나씩 준비해 가며 연습하는 입장 이었기에 당시의 이강식국장은 저희들 뒷바라지 해 주느라 동분서주 정말 수고를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탈이라고 하는 것이 하루아침에 만들 수도 고증도 없는 입장이라 처음에는 이강식국장이 박을 구해 만들어 보려 했으나 6,7월이라 박을 구하기가 그리 쉽지 않아결국 1990년도 김덕명씨가 무용단 할머니들과 구성해 도 대회에 나갈 때 쓰던 탈(부산 동래야류 천재동 선생 작품 거의 동래야류 탈을 닮음)을 고쳐 쓰기로 하고 이강식 국장이 김해미술협회 류재열 고문을 찾아가 그림과 사진을 보면서 고쳐다 쓰곤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이강식 국장은 잘 해 보자는 입장이었겠지만 거의 매일 탈을 바꾸다 시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제가 이의를 붙일라 치면 강용권박사의 고증이라는 말로 입을 막으려 하는 것입니다.
이 당시 류필현씨나 이강식 사무국장 그리고 문화원에서 장구를 배운 이들은 문화재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인지 강박사가 하는 얘기는 저승사자 보다 더 벌벌 떠는 것 같았으니까요. 그러나 저는 이제 시작하는 오광대가 몇 십 년이 흐르면 몰라도 무슨 문화재를 만든다고 하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그들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저는 제가 보존회 회장인 것을 밝히고 강용권 박사에게 실제로 고증이 있었는지와 몇 가지를 공식적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강박사는 질문에 대답은커녕 감정을 앞세우더니 끝내는 그것은 이강식 국장이 자기를 끌어들인 처사였다는 대답을 해 주는데 그 말을 듣고는 그 뒤로는 이국장과 격이 생길 것 같아 탈에 대한 애기를 안 하기로 하였습니다.
(다) 나누어 연출하다.
그 뿐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태덕수 선생님과 연출방법에 이견이 자주 생기게 됩니다.
그 이유는 김해오광대를 만들어야 되는데 제 눈에는 수영야류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오광대는 서울에서 연극을 배울 때 산대놀이를 잡간 배운 것 외에 특별히 연구 해본 경험이 없는 저로서는 될 수 있으면 입을 다물려고 했지만 저는 연극, 영화, 방송드라마, 각종 행사 연출을 200여회나 한 연출자였고 방송국 실장을 지낸 전문 연출자이기에 지도하는 것을 보면 바로 눈에 보이는데 그냥 넘어 갈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수영야류가 아니라 김해오광대를 만들고 있다”고 제시하며 의견충돌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그것은 회장으로 오광대 제작의뢰자 입장에서 당연한 요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입문해 처음 연극적인 연습을 대하는 사람들 눈에는 싸움이나 다툼으로 보였던지 오히려 나에게 문제를 제시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사람들이 2,3년이 지나고서야 저를 찾아와 그 때 제가 한 말을 이제야 이해를 하겠다고 하는 분들이 많이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지요.
결국 태덕수 회장과 상의 끝에 제가 출연하는 영노과장과 노름꾼 과장을 제가 만들기로 하고 나머지는 태덕수 회장이 만들기로 협의 했고 그렇게 오광대는 만들어 졌습니다.
그렇게 만들어 졌으니 잘 못된 부분도 있었겠지만 고증 보다는 연극적인 창작품으로 나름대로 재미있게 만들어 졌다고 봅니다.
사실 강용권 박사가 고증 해 준다기에 그 것만 믿은 구석도 있었는데 고증 없이 말입니다.
이렇게 만들어 져 1995년 10월 20일 김해문화체육관에서 복원공연이 류필현씨 고집으로 “부활공연”이라는 이름을 붙여 복원이건 부활이건 첫 공연을 했습니다.
이런 첫 공연이 현재 오광대의 뿌리인 대본에 의해 만들어진 김해오광대입니다.
‘김해가락오광대’라는 책에서 대대적인 공연..(책 P21 상단 첫줄) 이라고 극찬한 그 중요한 첫 공연이고 연혁에는 빠져있고 12회 연례발표회로 명기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모르면 몰라도 초대회장이었던 저의 출연과 사진이 프로그램에 있고 더 큰 이유는 문화재로 만들려는데 보존회의 연혁을 늘리려니 김해오광대 첫 공연을 감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들리는 다른 심사과정의 후일담도 있습니다만.
발기총회 정관과 “ 류필현 전수 기획, 강용근 박사 고증, 태덕수 연출, 손성일이 영로로 출연한 첫 부활공연 프로그램이 있는데 진실이 거짓으로 가려 지겠습니까?
연혁 표나 기록에 보면 초대회장이 류필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초대회장을 20년을 넘겨 했다는 얘긴데 1995년 창립이전에는 어디에도 민속보존회 회장 명칭이 나오질 않습니다. 류필현씨는 김해문화의 지존 같이 활동을 한 분이라 금방 알게 되지요.
김해 문화의 산 증인이신 류재열 선생님 같은 분들이 생존해 계신데 말입니다.
(라) 장려상을 받다
1995년 11월 4일 경상남도 대회에서 장려상을 받게 됩니다. 사실 전통과 고증에 자신이 없어 걱정을 하고 있으면 옆에서 강용권 박사가 심사위원장 이라는 것을 강조하곤 합니다.
직접 얘기는 하지 않아도 그런 분위기 있지 않습니까 ! 마음으로 의문을 품곤 했었습니다.
짐작대로 강박사가 최종 심사에 올라갔다고 알려 주었고 최우수상이 된 것 같은 분위기에 상장을 누가 받으러 나가는가? 하는 얘기까지....모두가 기대에 차 있었습니다.
결과는 장려상이었습니다. 도 대회는 2등이 장려상이 됩니다. 2등 3등을 다 발표하고 두 작품을 올려 최우수가 정해지면 나머지는 장려상이 됩니다. 첫 출연에 감사하다 싶었습니다.
상장을 들고 저와 류필현, 이강식씨등 6~7명이 운동장을 걸어 나오는데 강용권박사가 뛰어 왔습니다.
얼굴이 불그락 푸르락하며 심은주 그 000년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며 오히려 미안하다고 하면서 내년에 한 번 더 나오면 최우수상을 주겠다고 약속을 해 두는 것입니다.
한 술 더 떠 내년에 최우상을 받고 바로 문화재 신청을 어떻게 하라고 방법과 순서까지 설명을 해 줍니다.
“이러니 강박사 얘기라면 저승사자 보다 더 무서워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심사를 하러 다녀 보았고, 다니다 보면 어떤 때는 신경이 쓰이는 팀과 사람이 있을 수는 있지만 이건 아닌데 싶었습니다.
속으로 나는 내년에 나는 참석하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으로 다짐을 합니다.
다음 해 1996년도 10월에 도 대회를 준비하는데 저는 8월까지만 연습하고 10월 대회에는 불참 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줍니다.
최우수상을 준다고 한 것을 알고 있었기에 8월 까지만 연습을 하고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혹자는 저를 상을 준다는데 더 나가야지 왜 안 나가느냐? 하고 비아 냥도 했습니다.
제가 참석치 않았다고 상을 타 온 뒤 다들 모여서 용마라도 탄 기분에 저를 불러 의사를 묻기에, 차마 그 말은 속으로 삭힌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보존회를 떠났습니다.
이 때 그들의 모습은 무슨 인간문화재나 된 듯 기고만장 하고 천둥벌거숭이 같던 그들이 불쌍하게 제 눈에는 보였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라) 투서를 했다고 씌웁니다.
김해민속보존회를 나온 뒤 정말로 오광대를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각오하고 합니다. 그 후 저는 국악협회 김해지부장을 맡고 있으면서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강의도 하고, 공연도 하고 단체지도도 하며 바쁜 시간 중에도 오광대의 연고자나 증인을 찾아다니며 듣고 기록하고 녹음하고 녹화도 하며, 김해 보존회 얘기는 소문으로만 듣고 지냈는데 하루는 이강식씨와 김동조씨 외 몇 분이 더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저를 찾아 왔습니다.
대뜸 한다는 말이 투서를 왜 했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무슨 투서 말이냐고 하며 강용권 박사에게 질의 한 것은 다 알고 있지 않느냐? 고 하며 질의 원본까지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무형문화재 신청을 했는데 내가 투서를 해서 심사에서 떨어 졌다는 것입니다. 속으로 이 사람들 수준이 이 것 밖에 안 되나? 하고 생각 했습니다.
문화재를 심사하는 자격이나 전통, 고증, 전수 과정 등 자격만 갖추면 되는 것을 내가 투서를 안했다고 되고, 투서를 했다고 심사에 떨어진다면 그것은 문화재가 될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뒤에 신청서류를 볼 기회가 있어 보았는데 신청서 거의가 거짓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복사본이 아직 저에게 보관되어 있는데 문화재가 될 자격이 안 되면 안 되는 것이 당연한데 온갖 거짓으로 도배를 해 놓고는 그게 마음에 걸리니까 창립 회장으로 모든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제가 투서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고 저를 찾아 왔던 것입니다.
다음 날 아침 류필현씨가 만나자는 통보가 와서 집으로 찾아가 만났습니다.
대화중에 정상박 박사라고 하며 통화를 끊더니, 다시 심사위원 두어 분에게서 또 전화가 와 통화를 끝내고 나서 실제로 투서가 아니고 고증이 부족하고 오광대의 발생지인 가락이 부산으로 편입되어 법적으로 부산에서 신청을 해야지 경남에서는 못 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존회는 10년이 넘겨 지났는데도 아직도 전수 운운하면서 미련을 못 버리고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면서 문화재를 받을 것이라며 회원들을 현혹하고 걸핏하면 문화재 신청을 한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사실 책도 그래서 만들었고요. 보존회는 이런 거짓을 해가고 김해시민들 세금 수천 수억원을 탕진하며 희희낙락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로인해 강서문화원과도 의견이 오가고 강서구 가락동 오광대 고장 사람들과도 마찰이 있습니다.
류필현씨가 저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고 저는“아닌 것은 아니라“는 답변을 하고 돌아 왔습니다.
그 후 류필현씨는 고인이 되실 때까지 저에게 너무 잘 해 주셨고 저도 성의를 다해 선배님으로 모셔 드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보존회 회원들이 자기네가 만든 일에 괜히 저를 서먹해 하며 사이가 벌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왜 뒷켠에서 들리는 모함하는 소리 같은 것 있지 않습니까?
사람을 가지고 놀다 못 해 별의 별 소리를 다 하는가 싶더니 제 고향까지도 만들어 주며 전라도 사람이라는 소리까지 합니다.
전라도 사람이면 어떻습니까? 마는, 저는 서울이 고향이고 6.25때 피난도 경기도 여주, 이천까지 밖에 나가지 못했고 초등학교는 양평에서, 수복 후에 서울로 가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부산으로 발령 전까지 서울을 벗어난 일은 피난 때 밖에 없었습니다.
모함 얘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만 더 얘기 하겠습니다. 국악협회장직을 뺏어간 얘깁니다.
국악지부장을 뺏으려고 들러리로 이수금양을 앞세워 저를 공금 횡령자로 몰아, 파렴치범으로까지 만들며 감투라면 환장?을 한 사람들인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사제지간을 이간하고, 결국 혐의 없는 결과로 지나갔습니다만.......밝히는 시간낭비.....이들의 행동은 이 뿐 아니지요. 보존회에 있는 몇 몇 사람은 1993년에서 1994년에도 장소택지부장을 쫓아내고 자기네가 지부장을 차지하려고 저에게 찾아와 공작에 동참 해 주기를 권 했지만 저의 참여 거부로 자기네들끼리 일을 저지른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지금 이명식 정용근 양만근씨등은 국악협회 회원 자격도 채 갖추지 못했고 겨우 입문한 상태였는데 농악을 배우고 있는 사람들을 끌어 모아 입회원서를 받아 몇 일 전에 입회를 시키곤 국악지부 총회 날 투표권을 달라며 숫자가 적은 국악협회 약점을 숫자 싸움에서 이겨 국악지부를 빼앗으려던 사건인데..... 그로 인해 김해국악협회가 법적으로 시끄러운 시기를 만들었던 장본인 인 것을 알고 있는 나에게 또 공작을 합니다.
사실 지금 국악협회 김해지부는 회원 중 몇 사람 빼고는 지금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지요.
실질적인 국악협회 지부가 결성이 될 수가 없는 곳이지요. 지부는 정회원 30명 돼야 그 자격이 됩니다. 저는 국악협회경남지회 수석부회장을 역임하여 정관이나 회칙을 잘 알지요.
국악지부 사건을 요약하면 이수금양이 전라도에 있다가 이광수 선생님 사무국장이 나에게 가보라고 했다며 연락이 왔습니다. 일 할 자리가 필요 했던 것이지요. 당시 국악강사풀제가 진행되고 있었기에 제가 경남도 국악협회에 연락해 이수금양을 구봉초등학교 풍물반을 지도 하도록 알선을 해 주었습니다.
국악강사풀제는 두 사람씩 한조가 되어 강의를 나가야 되는데 이수금양이 혼자서 그 시간을 다 했으면 좋겠다고 요청하기에 도지회장에게 얘기해 그렇게 하도록 승낙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수금양이 절반의 시간도 못 채우고 사정이 있어 중단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나머지 시간은 다른 사람이 채우기로 하고 이수금 양에게 교육 한 시간만큼만 돈을 지불 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나가야 되는 것을 승인 해 준 것이 경남 도 지회인데 혼자 나가게 해 준 도에서 이것을 약점으로 나에게 씌워 작당을 하는데 거기에 이수금양이 말려들었고 얘기를 어떻게 했는지 나머지 돈을 내가 횡령 했다는 것입니다.
분명 나머지 강의료는 앞으로 교육을 한 사람에게 지불해야 할 돈인데 말입니다.
다만 괘심하게 생각 되는 건 이수금양이 나는 받을 것 다 받았다고 해야 하는데, 나머지 돈을 강의도 안하고 돈에 욕심이 났던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몇 십 만원 받는 일자리가 문화원이었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구요.
나이도 어린데 조그만 수입에 양심을 짓누르는 그 맘 얼마나 곤란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지만 인간이라면 저에게 전화 한 통화 해 줘야 옳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부탁을 거부하지 못하고 내 차 기름 달궈 가며 학교로 창원으로 쫓아 다녀 마련해 준 자린데....여러분들 같으면 어쩌시겠습니까?
지금 저는 내용을 공개 할 정도로 당당할 수 있지만 듣는 수금 양은 마음이 아프겠지요.
사실 이수금은 1993년도와 94년에 저에게 장구를 배운 제자라고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유난히 김해에 와서 객지의 설움을 맛보았지만 대단치도 않은 간판(회장, 지부장 등)에 유난스럽게 목매는 것 같은 김해 그 사람들이 불쌍해 보일 뿐입니다.
가끔은 내 머리 속을 스쳐지나가는 그 말 “김해와 부산교도소는 김해사람이 아니면 텅 빈다더니” 제가 만난 몇 사람에게 딱 맞겠다 싶은 애기라 생각 합니다.
머릿속에 들은 것 없으면서 전을 벌려 놓으면 빼아고 자기 이어야 하는 류 에 속하니까요.
이렇게 뺏어간 국악지부, 사고지회였던 겅남도지회를 제가 수습위원장이 되어 겨우 안정시켜 놓은지 5~6년 밖에 안 되는데 다시 경상남도국악협회를 소용돌이 속에 밀어 넣는 일원이 되었고, 결국 제명까지 되는 신세가 되어 근간에도 법적 싸움을 하고 있다는 얘길 들으니 역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은 어딜 가든 문제를 일으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얘기가 너무 길어지는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이해가 되셨으리라 믿고 다음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부활공연을 “대대적인 공연”이라고 밝힌 “김해가락오광대”라고 하는 제명의 책 애깁니다.
3. 김해가락오광대라는 책에서 밝혀지는 거짓
김해보존회에서 펴낸 “김해가락오광대” 책을 펴냄으로 거짓이 들어나고 스스로 한 거짓이 활자로 증명이 되니 저에게는 다행인 셈이지요.
부활공연이 1995년 10월 20일(금요일) 오후 6시 30분 김해문화체육관에서 공연을 했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책에서는 대대적 공연(p21 상단)으로 소개를 했습니다만 “대본에 의해 공연된 첫 공연이라든지 부활공연”이라는 말과 “중단 된 것이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는 여기서도 밝히지 않고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또 자랑하고 내세울 것은 밝히는 척 하면서 연혁이나 프로그램에서 빼는 이중적 잣대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연희되고 있는 김해가락오광대는 누가 뭐래도 1995년 부활공연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처음으로 입수된 대본, 처음으로 채록 대본과 대본에 의한 탈(미숙하고 미완성 이었지만) 무엇보다 김해민속보존회 창립 후 첫 공연이며 공식공연 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김해민속보존회에서 숨기고 연혁에서 제외시키는 부활공연 프로그램의 프로그램 총 12페이지 중 필요한 세 페이지만 옮겨 놓고 말씀을 드릴 테니 비교해 보십시오.
프로그램 일부를 소개하겠습니다.
부활공연 팸플릿은 총 12페이지로
1. 표지 2.이병태 문화원장 인사말씀 3.국회의원 김영일 축사
4.송은복 김해시장 축사 5.김성조 김해교육장 축사 6.김해 오광대의 유래
7.과장별 내용 8.출연자 명단 9.공연순서 10.출연자 사진
11~12 스폰서 등을 싣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확인 하실 수 있는 표지와 8쪽 출연자 명단, 10쪽 출연자 사진만 소개 하겠습니다.
1995년 10월 20일 공연한 “김해오광대 부활공연” 프로그램 표지입니다.
내동 연습장 위에 있는 수인사 앞에가 연출해 찍은 사진입니다.
제작진들 명단 부활공연에서 노름꾼 과장에 어딩이 역과 영노과장에 영노 역을 했습니다만
배역 표기도 오류가 여러 곳에 있습니다.
1995년 10월 20일 부활공연 팸플릿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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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할공연 팸플릿 중 출연자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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