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글은 서명인님 결혼과 관련해서 올라온 글을 퍼온 것입니다.
【图文】徐奉洙迎娶越南新娘 怕影响甚至想移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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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eiqi.tom.com 2004-12-10
“盘上孤独的胜负师”徐奉洙九段(51岁)迎娶了年轻的越南新娘(22岁)。
今年10月18日徐奉洙九段在越南南部的某村和农村家庭的长女举行婚礼,10下旬携新娘回国在京畿道安养的写字楼租下屋子当做新房。
徐奉洙九段怕外界的目光一直不敢把结婚的消息告诉同僚棋士。徐奉洙九段说:“不久前韩国棋院的人士察觉出什么叫住我担忧说:‘不是有了影响韩国围棋界声誉的事情吧?’其实我也害怕会连累围棋界,甚至想过移民越南。”
徐奉洙九段去年5月和夫人离婚,鳏居1年半。他的两个子女(1男1女)也跟了前妻。
한국의 거의 모든 언론사에서도 서명인님 결혼 기사가 나왔고, 중국 언론에서도 나왔네요.
중국 언론 기사 번역 생략합니다.
[i진선 한 마디]
서봉수 9단은 저의 고등학교 선배님이시기도 합니다.
그동안 무척 외로우셨군요...ㅠ.ㅜ::서선배님의 근황은 이미 알고있었지만,
차마 기사화는 하지 못했었습니다.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나오네요...ㅜ.ㅠ::
너무 나이 차이가 크다고해서, 행복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서선배님 이제 새 출발 하시고 부디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바둑팬들에게도 승부사의 멋진 모습 다시 한 번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좀 바둑계에서 서선배님의 결혼에 대하여 뻘쭘해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같은데...
아마도 서선배님에 대한 걱정과 관심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타이젬과 오로에서도
기사를 넣을까 말까 고민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여하간에 마땅히 축하해드려야 합니다.
서봉수9단 없는 한국 바둑은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토종바둑으로의 첫번째 계보가
바로 그 이기 때문입니다. 서봉수, 서능욱, 유창혁, 이창호, 이세돌등..일본 바둑을
직접 접하지 않고 오늘의 한국 바둑의 기둥이 된 첫번째 인물이 바로 서봉수9단이지요.
잡초 바둑이니 된장 바둑이니 싸움 바둑이니 등등의 한국 바둑을 뜻하는 많은
칭호들이 그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창호를 조훈현 선생님이 가르치기는 했지만, 이창호 바둑의 대성할 것임을 가장
먼저 공공연히 인정하고 주장한 분은 서봉수 선배셧습니다. 이창호가 본격적으로
등장할 때, 과연 이창호가 대성할 것이라고는 조훈현 선생님을 비롯하여 많은
한국 일본 기사들이 갸우뚱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서봉수 9단은 단 한 마디로 그런
의문을 일축했던 분 입니다.
"이창호는 나를 넘어설 것이고 조훈현도 곧 넘어설 것이다. 그의 바둑이 곧 바둑계를
평정할 것이다. 일본 중국 기사중에 어떤 기사도 이창호를 넘어서기가 힘들 것이다."
(관련 자료는 밑에 업그레이드 하겠습니다.)
한국기원 관계자가 "바둑계의 위신과도 관계 있는 문제"라고 서선배님께 말했다고
기사에 나왔는데, 경악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서선배는 한국 바둑계에서 항상 비주류 였습니다. 일본 유학파에 밀려서, 한국기원
에서도 항상 뒷자리..그리고 그 흔한 이사 자리 한번 꿰차본 적이 없었습니다.
누구는 서봉수 9단이 성격때문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 입니다.
2인자여서 비주류 였다고요? 아닙니다. 한국기원 자체가 일본 유학파의 본산이고
국산파 기사들은 항상 비주류였고 뒷자리였습니다. 그럴 듯한 행사에 서선배가
초대된 것을 본 적도 없습니다. 한국 바둑계의 실질 지배자가 누구였나 한 번
보십시오. 다......그 분 들 입니다.
그런데 그런 대접 하던 바둑계 주류가 서선배가 재혼한다고 해서, 무슨 바둑계의
위신 문제를 따지는지? 그럴리는 없다고 봅니다만, 설마.....
베트남 처녀와 결혼한다는 사실이 바둑계에 누라도 되고 창피하다는 뜻이었는지
묻고 싶네요. 도대체 어떤 누가 되고, 어떤 폐가 된다는것 인지요?
그럼 이혼했으니 그냥 도인 처럼 홀로 살아야한다는 법 있는 건가요?
제가 바둑계의 위신 어쩌고 한 분이 누군지 한 번 알아바야 겠네요.
정말 화딱지가 납니다.
그리고 바둑계에서 쉬쉬 하는 분위기도 참 못 마땅 합니다.
서선배가 무슨 죄라도 지었나요?
ㅠ.ㅠ::
서선배, 이를 갈고 노력하셔서 세계 타이틀 꿰차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동남아에서 최근 바둑 바람이 불고있다고 합니다. 기회있으면
한국 토종 바둑을 심는데도 일력을 담담해 주기를 바랍니다.
서봉수 선배, 늦깍기 행복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중국 언론에서도 서봉수선배님의 결혼을 다루었는데, 내용이 벩스러워서,
기사 올렸다가 뺐습니다.ㅡ.ㅡ::
다음 기사는 이창호에 관한 글입니다. 그 중에서 서봉수 국수와의 인연 편만 따로
첨부 합니다.
[서봉수와의 인연]
이창호는 아기자기한 저단시절을 거치지 않고 곧장 정상으로 치달았다.
허리가 약한 한국바둑계의 특징을 고려하더라도 그 스피드는 발군이어서 만 14세에
국내대회에서 우승컵을 차지했고 17세 때는 세계대회서도 우승했다. (앞으로 50년간은
이 기록이 깨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뒤에도 창호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진격을 계속했는데 그 와중에서 조훈현 9단,
린하이펑(林海峰) 9단, 조치훈 9단, 서봉수 9단, 요다 노리모토(依田紀基) 9단, 마샤오
춘(馬曉春) 9단 등 당대의 효웅들과 특이하고도 진한 인연을 맺게 된다.
이중 서봉수는 "이창호가 나보다 상수"라고 일찌감치 인정해버린 인물이다.
창호는 아직 정상의 실력이 아니었는데 서 9단은 왜 그를 그토록 높이 평가했을까.
서봉수와의 인연은 창호가 13살이던 1988년에 시작된다.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렸던
88년은 바둑사에서도 획기적인 한해였다. 도꾜(東京)에선 후지쓰배가, 베이징(北京)
에선 잉창치(應昌期)배가 막을 올렸던 것이다. 바둑사의 흐름을 바꿔버린 세계대회가
연이어 창설된 것이다.
당시 동양 3국 중 가장 약체로 치부되던 한국은 후지쓰배에 3명이 출전하여 모두
1회전에서 탈락해버렸다. 그러나 應씨배에선 조훈현 1인이 출전하여 8강전에서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 9단에게 필패의 바둑을 역전시키더니 드디어는 결승까지
진출했다. 이것은 서울 장안의 빅뉴스가 됐다.
88년엔 또 유창혁이란 젊은이가 막강 조훈현의 대마를 잡고 타이틀을 따낸 해이기도
했다. 이런 요란한 화제들에 눌려 이해 겨울에 열린 이창호 대 서봉수의 최고위전
도전자결정전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주술에 걸린 서봉수]
창호는 서봉수라는 거목과 처음 대좌한 이 대국에서 의외로 쉽게 불계승을 거둔다.
그리고는 이 뒤로도 徐 9단에게 내리 5연승을 거뒀다. 徐 9단은 창호만 만나면 주술에
걸린듯 거의 힘을쓰지 못하고 졌다. 창호는 당시를 이렇게 술회한다.
"내가 실수를 해서 판이 나쁜데도 徐 사범님은 더 큰 실수를 해주곤 했습니다."
徐 9단은 늦게 바둑을 배워 18살에 가서야 프로가 됐다. 그러나 타고난 승부사적
기질로조훈현이란 천재와 15년간 3백번 이상 싸워 1백번 이상을 이긴 사람이다.
3판 중 한판꼴로이긴 것이다. 그런 강인한 서봉수가 창호에겐 장작더미처럼 무너졌다.
왜 그랬을까.서 9단은 누구보다도 먼저 이창호의 재능을 알아본 사람이었다. 그후
그는 이창호란 인물에게흠뻑 빠져들었다. 창호가 자신이 몽매에도 그리던 '중앙에
대한 계산'을 해내는 것을 보고서 9단은 엄청난 기재(棋才)가 나타났다고 단정했다.
"실전에서 그것(중앙에 대한 계산)때문에 얼마나 몸살을 합니까.
사실은 그게 전부거든요."
중앙을 얘기할 때마다 프로들은 고개를 내젖는다. 어렵기 때문이다. 徐 9단은
중앙을 가리켜아예 '허공'이라 부른다. 손을 내저어 잡으려해도 지푸라기만 잡힐
뿐이라는 자조의 표현이다.하기사 아무리 계산해보려 해도 막연하기만 한 중앙을
무슨 수로 계산해낼 것인가.
조금 괴짜고 외곬이지만 순진한 구석이 있는 서 9단은 자기가 갖지 못한 능력을
지닌 창호를극구 칭송했다. 창호가 아직 기초가 부족하고 포석이 특히 약하고
접전과 수읽기에서도 약점을 드러내고 있었음에도, 무엇보다 아직 어린 소년임에도
불구하고 서 9단의 뇌리에는 "창호는 강하다"는 인식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중앙에 대한 특이한 능력 ]
徐 9단은 "머지않아 조훈현이든 누구든 창호에게 진다"고 공공연해 단언했다. 그는
일종의자기암시에 걸려있었음이 분명하다. 이런 강력한 자기암시 탓에 徐 9단은
창호 앞에만 앉으면 자신의 기량을 펼쳐보이지도 못하고 무너지곤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하나의 이유가 있으니 그것은 徐 9단의 승부호흡이다. 기본기에서 조훈현에게
뒤지는徐 9단은 曺 9단과 싸울 때 초반엔 조심조심하며 장기전을 유도한 뒤 종반의
계산으로 승부하곤 했다. 이창호는 두터운 기역자 꼬부림이 보여주듯 徐 9단보다는
속도가 느린 기풍의소유자였지만 승부호흡만은 비슷했다. 즉 계산력이 승부의
중요한 포인트였는데 창호가그점에서 자기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자 그만
심혼이 흔들려 페이스를 잃어버리곤 했던 것이다.
徐 9단은 5연패 뒤 혼신의 힘을 다해 2연승하더니 다시 5연패했고 겨우 1승을 올리더니
다시 7연패를 당했다. 서봉수에겐 이창호가 지옥사자였다. 불과 13세의 소년이
'야전사령관'이란 별호를 지닌 역전의 승부사 서봉수를 싸우기도 전에 무너뜨린 것은
신기했다. 그것이 이창호의 마력이었다. 나중에 서봉수는 조금씩 정신을 차려 그
마력에서 벗어났지만 이창호에 대한 상대전적은 2001년 8월 현재 17승 50패로 승률이
28%에 불과하다. (물론 서 9단은 이 모든 것이 실력일 뿐 자기암시가 패인일거라는
필자의 지적을 한번도 인정한 일이 없다는 점을 밝혀둔다)
[1989년의 첫 도전기]
아무튼 창호는 서봉수를 쉽게 넘어선 덕분에 88년 생애 처음 도전자가 되었고 스승
조훈현 9단과 대망의 5번기를 펼치게 됐다. '도전 5강'이 젊음을 다 바쳐 넘으려 했으나
끝내 넘지 못한 서봉수라는 벽을 창호는 이런 식으로 쉽게 넘어선 것이다.
1989년 벽두에 스승 조훈현 9단과 어린 제자 이창호의 도전기가 화제속에서 시작됐다.
사람들은 승패보다도 두사람이 어떤 심정일까 하는 것에 더 관심을 두었다. 두사람은
아침에 조훈현의 부인 정미화씨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나란히 타고와 함께 대국장으로
올라갔다. 대국 개시까지 曺 9단은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면서 주위사람들과
느긋하게 대화를 했다. 그 앞에서 창호는 고개를 푹 숙인채 가만히 앉아있었다.
"어린 제자와 승부를 겨룬다는게 몹시 부담스러웠다. 주위의 시선도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곧 잊어버리고 좋은 바둑을 두자고 생각했다." (조훈현)
"괜히 죄송스럽고 거북했다. 등에서 식은 땀이 났다." (이창호)
曺 9단은 徐 9단과 달리 창호를 아직 자신의 적수로 여기지 않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한판가르친다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창호는 쏟아지는 시선과 카메라
프래쉬에우선 주눅이 들었다. 창호는 그리하여 스승과의 도전기 첫대국을 불과
80수만에 던지고 만다. 첫 도전기는1승 3패로 끝났다. 하지만 내용은 자못 충실해서
제3국에선 아슬아슬한 승부 끝에창호가 반집을 이겼고 제 4국에선 화려한 대사석작전
으로 국면을 리드하기도 했다.창호는 3월에 또한번의 도전 기회를 잡 았으나 이번엔
스트레이트 3연패.
바둑계 인사들은 신구미월령(新鳩未越嶺 : 어린 비둘기 아직 재를 넘지 못한다)
란 옛 문자를 들먹이며 창호가 인물은 인물이지만 조 9단에겐 아직 멀었다고 평했다.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해에 서봉수가 조훈현을 격파하고 국기(國棋) 타이틀을
쟁취한 일이다.徐 9단은 창호에게 꼼짝 못하고 창호는 曺 9단에게 꼼짝 못하는데
徐 9단은어찌 조훈현을 이길 수 있었을까. 승부는 기술인가. 마음의 조화인가.
자신감이 없이는 바둑을 이기지 못한다. 빈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상대와 마주 앉을
때 승부는이미 절반은 결정나고 만다. 승부는 물론 기술이다. 그러나 기술이 비슷
하거나 아주 작은 차이일 때는 마음이 승부를 결정하게 된다.
.......
다음 글은 제가 서봉수9단 기사가 나오면 참고기사로 올리려고 준비했던 기사 입니다.
정치적인 글이라고 생각지 마시고, 서봉수 9단에 관한 글이려니 하고 보아주시기를
바랍니다.
[개혁국 해설] 서봉수와 노대통령의 유사성
상생이란 절대 실현불가능한 수사에 불과하다
.
우선 서봉수의 바둑역정이 노대통령과 닮은 점이 있습니다. 그가 엘리트 코스
(당시 바둑의 엘리트 코스란 일본 유학이었음)를 밟지 않은 채 실력 하나로
혜성과 같이 한국 바둑계에 등장해 1인자 자리에 등극했다는 점이 노대통령과
유사합니다.
엘리트 교육을 받지 않은 서봉수의 바둑은 투박하고 거칠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김인과 윤기현 등 소위 일본 유학파들은 차례로 서봉수에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비록 조훈현이라는 천재기사가 일본에서 돌아와 한국바둑계를 평정할 때까지
그리 긴 시간 동안은 아니었지만 분명 서봉수의 등장은 기존 한국바둑계에서
는 경악과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서봉수 바둑의 특징은 ‘전략과 전투’에 있습니다. 엘리트 교육을 받지 못한
탓에 이론은 부족했지만 그것을 그는 뛰어난 전략과 전투로 충분히 만회하고
도 남았으며 나아가 1인자까지 된 것입니다. 따라서 서봉수의 별명이 ‘야전
사령관’인 점은 하나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이러한 전략과 전투의 우수성 역시 노대통령과 닮은 모습이지만 제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서봉수와 노대통령의 유사성은 다른 데에 있습니다. 그것은
능력을 떠나 바둑을 두어가는 스타일에 관한 부분입니다.
서봉수 역시 천재기사임에 틀림없지만 엘리트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열등감과
한계가 분명히 있었으며 이러한 점이 그가 바둑을 두어가는 스타일을 결정
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봅니다. 즉 전략 혹은 전투에 있어서
천재적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바둑은 집에 짠 실리바둑이라는 점이 이러한
그의 한계를 웅변합니다.
따라서 그의 천재적인 전투능력은 그가 바둑이 불리할 때에만 비로소 발현됩
니다. 이러한 서봉수의 능력과 스타일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대국이 제2회 응창
기배 최종국입니다. 그가 이 바둑에서 상대인 일본의 오다케를 이기고 우승을
차지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상대인 오다케는 서봉수와는 정반대로 극단적인 이론파 기사입니다. 그는 바둑
이 지는 일이 있더라도 이론에 어긋나는 수는 좀처럼 두지 않는 것으로 유명합
니다. 서봉수가 그런 오다케를 상대로 초반부터 집내기 실리바둑으로 두어간다
는 것은 지는 길로 간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봉수는 최종국이
라는 무게에 눌린 나머지 그런 길로 바둑을 두어나갔습니다. 초반에 바둑을
전투로 이끌어 그만의 특유한 능력을 발현할 기회가 수차례 있었음에도 불구
하고 서봉수는 자기가 무슨 바둑이론의 대가인 양 점잔을 빼면서 조금씩 조금
씩 바둑을 그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바둑이 중반종반에 이르자 형세는 이미 만회가 거의 불가능해
보일 정도의 열세임이 분명해졌습니다. 이는 초반 전략상의 미스이자 앞서
말한 것처럼 서봉수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
바둑은 그 시점에서 이미 진 바둑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부터 서봉수의 진면목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바둑을 다 져
놓고서야 그의 천부적인 재능이 발휘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언제부터라고 할
수도 없이 부지불식간에 바둑은 혼전의 양상으로 돌변하고 바둑은 대마가
서로 얽히고 섥혀서 뭐가 뭔지 모를 상태에서 누가 대마를 잡고 잡히느냐가
승부를 결정짓는 그런 바둑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당시 해설을 맡았던 조훈현
(1회 응창기배 우승자)은 “바둑을 새로 두는 것 같다”고 평할 정도였습
니다. 초반 중반까지 두어졌던 바둑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바둑이 전개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결국 오다케에게서 결정적인 실착이 등장함으로써 서봉수는
그 바둑에서 '기적적인' 역전 우승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바둑의 양상이 이례적이지 않은 바로 서봉수의 바둑입니다.
천재적인 전투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어떤 컴플렉스에 의해 결국
바둑이 불리해졌음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전투를 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 그래서 결국 바둑을 다 버려놓고서야 허겁지겁 전투모드에 돌입
해서 어렵게 어렵게 바둑을 건져내는 것이 서봉수의 바둑 스타일입니다.
........
[어떤 바둑 애호가 분이 쓰셨습니다.]
(이하는 정치적인 내용이라서 생략합니다. 원문을 보시려면
http://www.seoprise.com 에서 찾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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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처럼 밝게 웃으시는 모습을 자주 볼수 있었으면 합니다.
결혼도 하셨으니 자주 우승하시기를....
파이팅!
카페 게시글
기본 자료실
서명인님의 기풍에 관한 글
ezm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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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2.14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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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흥미진진한 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읽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서九단이 반드시 재기하여 타이틀도 획득하고 활발히 활동하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