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미국은 베이비붐 시대를 맞이합니다.
60년대 브리티쉬 인베이젼을 보고 자란
미국의 밴드들도 비약적으로 발전합니다.
록, 재즈, 팝 모든 음악 분야에서 미국이 쭉쭉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특히나 디스코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죠?!
그리고
마이클 잭슨과 마돈나로 대표되는 80년대 팝!
살사 음악은 더 이상 미국의 대중음악으로 설 수 없었고
스페니쉬 할렘 안으로 다시 들어갑니다.
살사 뮤지션들에게는 크게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1. 팝음악으로 들어간다.
2. 전통적인 살사를 고수한다.
팝에서 설 자리를 찾은 뮤지션들도 나름 성공합니다.
대표적인 노래로 1985년 나온 콩가 Conga 라는 노래입니다.
글로리아 에스테판 Gloria Estefan 이
마이애미 사운드 머쉰이라는 밴드에서 부른 노래인데요
잘 모르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이 노래의 인기는 아래 차트에 나오는데요.
이 노래가 1985년에서 1986년 사이
각 나라 주간 차트에서 1등한 숫자입니다.
전 세계 어디가든 이 노래가 나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이러한 인기는 90년대 리키 마틴, 제니퍼 로페즈로
이어지는 라틴 팝 시장의 효시가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은 극소수만 가능했습니다.
반면, 전통 살사를 고수하는 팀은 나름 살아남지만,
많은 밴드들이 스페니쉬 할렘만 바라보기엔
시장이 작았습니다.
그래서 쿠바와 오랫동안 교류한 지역 음악과 통합을 시도합니다.
그 지역은
루이지애나주 뉴 올리언즈입니다.
재즈의 발상지죠?!
루이지애나주는 루이 14세가 이름 붙이면서부터
지금까지 공용어가 영어와 프랑스어일 정도로
프랑스 색이 강한 지역입니다.
스페인과 달리 프랑스는 식민지 초창지부터
귀족들이 들어와서 투자를 하고
그 일환으로 흑인을 관리하는 흑인을 키우면서
글과 음악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프랑스인과 흑인의 혼혈인 크레욜들은
스페인 백인과 흑인의 혼혈인 뮬라토와는 다른 음악색을 냅니다.
1900년대부터 뉴 올리언즈에는 어느 정도 재즈의 틀이 잡히고
1914년 루이 암스트롱으로 대표되는 뉴 올리언즈표 재즈가 시작됩니다.
이 재즈와의 통합은 살사에 새로운 길을 열어주게 됩니다.
P.S.
디스코 DISCO란 이름은
나치 점령하의 프랑스 댄스홀에서
밴드를 쓸 수 없어서 레코드를 트는 곳을
디스코테크 discothèque 라고 불렀던 데서
시작합니다.
P.S.
1960년대 미국 디스코는 어마어마한 밴드를 구성합니다.
소울, 펑크, 라틴음악의 요소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다 쓰다보니
밴드 안에 봉고, 콩가, 우드블럭, 카우벨 등이 쓰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살사와 디스코는 춤에서도
서로 영향을 주게 됩니다.
P.S.
디스코 폭파의 밤
1979년은 디스코의 황금기이자 몰락의 시작이었습니다.
디스코 음악이 한창 차트를 점령하고 있을 때,
한편에서는
흑인 리듬 기반의 음악에 반감을 가지거나
가벼운 음악에 대한 반감이 쌓이고 있었습니다.
1979년 7월 12일 시카고 화이트 삭스 홈구장에
안듣는 디스코 음반을 들고 오면
98센트를 할인해준다는 이벤트가 있었고
그 음반을 모아 경기와 경기 사이에
그라운드에 모아 놓고 폭약으로 폭파시킵니다.
(더블 헤더 디트로이트 vs 시카고 삭스)
이 사건은 지역 라디오 방송국의
롹음악 DJ 였던 스티브 달이 주도합니다.
스티브 달은 자신의 방송이 디스코 방송으로 바뀌면서
나갈 수밖에 없게 되자,
어떻게 하면 디스코 음악에 엿먹일까 궁리하다가
실행했다고 합니다.
이 당시 유행한 디스코 반대운동 "Disco Sucks!" 가 있다보니
구단측도 장사되겠다는 생각에 이벤트에 동참합니다.
헌데, 음반을 폭파하고 나자
흥분한 관중들이 그라운드로 돌진해서
타다 남은 음반에 불을 붙이면서
그라운드를 점거하고 폭동으로 발전해서
구장을 부수기 시작합니다.
경찰이 출동해서 진압하지만
두번째 경기를 할 수 없게 되고
시카고 삭스는 몰수패를 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