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지순례.......
순례의 여정은 구세주의 발자취를 따르며 지나온 삶들을 회상하고, 자신의 복음화로 진리를 따라서 오늘을 지혜롭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빛바랜 순례사진들을 다시 보면서 진지한 성찰의 여정을 시작하며 주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이미 순례를 다녀오신 분들에게는 회상을 통한 자신의 복음화에 도움이 되고, 다녀오시지 않으신 분들에게는 참고자료가 되면 좋겠습니다.
★ 천주교마산교구 성지4. 복자 박대식(朴大植) 빅토리노 성지
"죽어서도 선산에 못 묻히고 남의 문중 산에 평장으로 누워"
* 위치 : 경상남도 김해시 진례면 청천리 산 30(책골 : 진영터널 위 진례쪽)
* 관련기관 : 진례 성당
♥ 순교복자 박대식 빅토리노(1812~1868년)
김해시 진례면 시예리에서 태어났으며, 1868년 무진박해 때 조카인 박수연과 함께 붙잡혀 대구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배교를 강요당하며 혹독한 고문을 받아 뼈가 부러지고 몸이 뒤틀렸다. 순교자는 1868년 8월 27일(음) 조카 박수연과 함께 참수 치명했다. 당시 56세였다.
* 순교복자 박대식 빅토리노 묘소성지
□ 한국 천주교회 초창기 신자들은 주로 서울과 경기 지역에 살았다. 그러다가 박해가 일어나자 피신할 곳을 찾아 강원 · 충청 · 전라 지역으로 흩어지면서 신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경상도 지역에 신자들이 늦게 나타난 것은 지리적인 이유로 특히 마산교구가 위치한 서부 경남지역에 가장 늦게 신자들이 등장했다. 그로인해 초기 신유박해(1801년)와 기해박해(1839년) 때 이 지역에서는 순교자가 나오지 않았다.
마산교구 지역으로 신자들이 들어온 경로는 두 가지로 추측하고 있다. 첫째는 강원도와 경상도 북부 지방에 숨어 있던 교우들이 남쪽으로 낙동강을 따라 이동하면서 합천, 창녕, 의령, 밀양, 진영, 함안 등지에 교우촌을 세웠다. 지금도 이 지역에는 오래된 공소들이 남아 있다. 둘째는 1827년 정해박해가 곡성(谷城)을 시작으로 해서 전라도 전역으로 확산되자 지리산과 백운산을 넘어 서부 경남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들은 함양을 본거지로 하여 단성을 거쳐 문산, 고성, 통영, 거제도로 흘러갔고 일부는 단성에서 북천을 거쳐 곤양, 서포 쪽으로 내려갔다.
이러한 교우촌들은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전까지 안정된 공동체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특히 문산, 함안(대산), 고성, 통영(황리), 진영, 거제도에는 큰 규모의 교우촌이 있었다.
♥ 박대식(朴大植) 빅토리노(1812-1868년)는 1812년 경상도 김해 예동(현 경남 김해시 진례면 시례리, 詩禮里)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아들 삼형제(종립 · 종반 · 종철)를 두었다. 그가 언제부터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입교한 이후 부친 박만혁과 형제 대붕 · 대흥과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중 병인박해를 만났다. 다행히 이때는 가족 모두가 피신하여 체포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1868년 7월 7일 무진박해 때 대구에서 내려온 포졸과 김해 포졸들이 그의 집으로 몰려와 형 박대홍과 예비신자인 조카 박수연(47세)과 함께 체포되어 김해 관아로 압송되었다. 그곳에서 송 마태오와 박 요셉을 만나 3일간 문초를 받으면서도 서로 위로하며 믿음을 지켰다. 대구로 압송된 그들은 감영(監營)에서 혹형을 받아 뼈가 부러지고 몸이 뒤틀렸지만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고 신앙을 굳게 증거했다. 가족들이 면회를 왔을 때는 험한 꼴을 보이지 않으려고 옷으로 몸을 가렸다고 한다.
결국 대구 감사는 박대식과 그의 동료들을 결코 배교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형을 선고했다. 이에 따라 1868년 10월 12일(음력 8월 27일) 박대식은 조카와 송 마태오, 박 요셉과 함께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박대식의 나이는 56세였다.
[참고자료 출처 : 천주교마산교구청]
* 빛바랜 사진
2000년 당시에는 박대식 순교복자의 세례명이 '로렌조'로 잘못 불렸다가
이 후에 '빅토리노'로 바로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