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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채우*
청학집과 규원사화에 보이는 한국도교에
대한 고증 연구
1)
Ⅰ. 서론
Ⅱ. 청학집과 규원사화의 성격과 문제
1. 조선 선가서 청학집
2. 고대선가사서 규원사화
Ⅲ. 청학집과 규원사화의 유사성 교감
1. 도가의 문집 사문록과 삼한습유기
2. 동방선파의 조종 환인과 단군
3. 단군 선도와 문박씨 영랑 보덕
4. 암시선인과 참시선인
5. 최치원과 李茗
Ⅳ. 청학집과 규원사화의 관계 고증
Ⅴ. 결론
【국문요약】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진 청학집과 규원사
화는 儒家일색이던 당시 조선 중기에 쓰여진 우리의 도교 관련 사서
*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과교수
10 仙道文化 제14권
로서의 독특성과 희귀성을 갖고 있다. 양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유
사점을 갖고 있는데, 특히 한국 고유의 선도에 관한 유사한 구절들이
발견된다. 본고에서는 바로 이런 맥락에 주의하면서, 규원사화와 청
학집의 선가관련 기록들을 교감 고증하므로써, 양자의 관련성에 대
해 분석하면서, 한국고유의 선도에 대해 고찰하였다.
양서에 실려있는 한국선도의 내용에는 같은 점과 차이점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분석해본 결과 그 차이점은 상호 모순 충
돌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으로 한국의 선도사를 구성하고 있
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 청학집과 규원사화는 한
국선도에 관한 중요내용을 담고 있는 조선중기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또한 그 내용분석을 통해 한국 고유의 선도는 단군을
그 기원으로 삼고 계승 발전해왔으며, 뒤에 외래사상 유교 불교가 들
어오면서 이들과 더불어 3대 전통사상의 하나로 발전되어왔음을 확
인할 수 있었다.
주제어 : 仙道, 仙家, 조여적, 북애자, 해동전도록, 해동이적, 檀君,
僞書
Ⅰ. 서론
한국도교(仙道)사를 연구할 때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보다도 자료
가 너무 부족하다는 점이다.1) 이런 점에서 단편적이나마 한국선도에
관해 다양한 자료를 담고 있는 청학집이나 규원사화라는 서적의 존
재는 큰 의미를 지닌다. 규원사화와 청학집은 여러 가지 면에서 공통
1) 임채우, 한국 도교 문화의 회고와 전망, 한국사상과 문화(한국사상문화학
회) 15호, 2001. 6. 참조.
청학집과 규원사화에 보이는 한국도교에 대한 고증 연구ㆍ임채우 11
점을 지닌다. 양서는 儒家일색이던 당시 조선 중기에 쓰여진 우리의
도교 관련 사서로서의 독특성⋅희귀성과 함께 우리의 역사와 사상에
관한 주체적 인식이 나타난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
또한 양서는 저자가 모두 무명의 인물이며 필사본의 형태로 전해지
다가,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는 공통점
도 갖고 있다.
그런데 양서는 각각 서로의 존재에 대해 전연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내용이 서로 유사할 뿐 아니라, 우연의 일치로만 볼 수 없는 동일하
거나 유사한 구절들이 발견된다. 가령 양자에는 한국선도의 전적이
라든지 선맥을 계승한 仙人들의 이름과 행적등이 중복되어 나타난다
거나, 단군의 사적이 비슷하게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다른 전적들과 비교해보면 그 특이성을 알 수 있다. 가령 한
무외(韓無畏, 1517∼1610)의 海東傳道錄도2) 역시 한국 仙家들의 이
야기를 기록하고 있지만, 중국 도교의 영향과 도맥을 위주로 하고 있
어서, 앞의 양서의 수록 인물들을 비교해보면 최치원이외에는 다른
공통점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이는 분명하게 양서와 별도의 종류
로 구별된다. 이보다 홍만종(洪萬宗, 1643∼1725)의 海東異蹟3)에는
대세와 구칠등의 한국 선가의 인물들이 좀더 겹쳐지기는 한다. 하지
2) 해동전도록은 1610년(광해군 2)에 한무외가 찬술한 道家書로, 우리 나라
丹學의 계보를 밝힌 책이다. 인조 때 한 승려가 가지고 있던 책이 조선중기
의 학자 李植에게 전하여짐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뒤에 이식의 발
문과 한무외의 행적이 붙어 있고, 부록으로 丹書口訣十六條⋅丹書別旨口
訣十六條과 鄭磏의 龍虎訣이 합철되어 있다.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김
시습 이전의 전승은 史實로 보기 어려우나, 우리 나라 단학의 근원을 중국
의 全眞敎에서 찾는 조선시대의 사상적 경향이 나타나 있다.
3) 해동이적은 1666년(현종 7) 홍만종이 丹學說話를 수집하여 인물별⋅시대
별로 배열하고 평설을 달아 펴낸 도가서로 17세기 무렵의 조선시대 선도에
대한 인식을 볼 수 있다. 단군에서부터 시작하여 郭再祐에 이르는 38인의
이적을 여러 책에서 뽑아서 인물별 시대순으로 배열하고 엮은이의 按語와
評說을 붙였다.
12 仙道文化 제14권
만 이 역시 규원사화와 청학집 양서간에 일치하는 정도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
이런 점으로 인해서 규원사화가 청학집의 내용을 인용한 것으로
판단하는 견해들이 일부 사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바 있다. 그런데 규
원사화는 일부 역사학자에 의해 20세기초 일제강점기에 조작된 僞書
로 규정되기도 했다.4) 청학집을 지은 조여적이 선조연간(1588년)에
과거에 실패했다고 하니, 숙종 원년(1685년)에 서문을 쓴 규원사화의
저자 북애노인보다는 적어도 한세대쯤 앞선다고 추정하는 것은 무리
가 없다. 이렇게 본다면 규원사화를 저술할 때 선배의 저작 청학집을
참조하거나 인용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일부 사학자들이 말하듯 규원사화가 1685년의 작이 아니
라, 1920년대에 들어와서 이전의 기록들을 베낀 위서라면5) 자료적
가치를 인정받기는 어렵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일본 제국주의의 침
략전쟁의 논리인 대동아공영론에 동조하는 왜곡된 민족주의자의 위
작으로 매도되기도 했다.6)
과연 그럴까? 이 문제는 청학집과의 관계로 볼 때 여러 가지 문제
점을 내포하게 된다. 한국도교사상 참으로 독특한 이채를 띠면서도
공교로운 공통점들을 가진 이 양서중에서 규원사화는-善意이든 惡
意이든, 고의이든 우연이든-청학집으로부터 400여년 지난 후에 교
묘하게 위작된 것이라고 한다면, 현재까지의 정황으로 볼 때 규원사
화의-한국도교부분에 대한-저본은 청학집일 수 밖에는 없을 것으
4) 필자는 2008국학기초자료사업으로 ‘韓國仙道’ 관련 자료의 수집⋅교감⋅해
제라는 프로젝트에서 이 규원사화의 위작논쟁 문제에 대해 전문적인 논문
을 작성해서 발표한 바 있다. 임채우, 선도사서 규원사화 해제-위작설에 대
한 쟁점을 중심으로-, 선도문화 6집 2009. 2. 참조.
5) 김성환, 재야사서의 사료적 검토-규원사화의 진서론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
로-, <한국고대사의 시공간적 문헌적 범위>, 한민족공동체연구소 학술회
의 발표논문집, 2012.7.20. 참조.
6) 박광용, 대종교 관련 문헌에 위작 많다, 역사비평 1990. 가을호, 참조.
청학집과 규원사화에 보이는 한국도교에 대한 고증 연구ㆍ임채우 13
로 보인다. 왜냐면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에 근거해볼 때, 양서가 가
장 유사하기 때문이며, 또한 빈약하기 짝이 없는 한국도교자료상에
서 다른 저본의 소스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렇거나 원서 자체로의 규원사화가 청학집과는 적어도 한 세대
(규원사화 서문의 간기에 의거) 많게는 400년(1920년대 위작설에 의
거)의 차이를 두고는 베끼거나 인용했다고 한다면, 규원사화의 도교
관련 서술내용은 청학집의 부분집합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라는 추리
가 가능하다.
본고에서는 바로 이런 맥락에 주의하면서, 과연 그러할지 그 실제
정황을 추론해보려고 한다. 이를 위해 규원사화와 청학집의 선가관
련 기록들을 교감 고증함으로써, 양자의 관련성에 대해 분석하려고
한다. 아울러 이를 통해 양자가 한국선도사에서 갖는 자료적 가치가
밝혀지리라 기대한다.
Ⅱ. 청학집과 규원사화의 성격과 문제
1. 조선 선가서 청학집
趙汝籍(16⋅7世紀)이 지은 청학집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선가 자료
이다. 특히 환인과 단군을 우리 고유의 선가와 관련시키고 있으며,
다른 서적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선가의 인물들의 사적을 싣고 있다
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7)
조여적의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청학집의 서두에
7) 청학집에 대한 연구성과로는 이종은, 이석호, 김성환의 3종의 번역서가 나와
있고, 연구논문으로는 이종은, 도가의 한시연구-청학집을 중심으로, 한국
학논집 11, 1987. 최창록, 청학집의 분석연구, 대구어문논총, 12, 1994와
김성환, 선가자료 청학집의 자료적 검토, 선도문화 6, 2009.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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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스스로 밝힌 내용에 근거해 보면, 선조에서 인조연간에 살았던 관
서출신으로 인물이다. 그는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여러차례 과
거에 실패하였다. 그러다가 과거에 낙방해서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1588년) 도가의 인물을 만나 그 문하에서 60여년을 선도를 연마하였
고, 말년에 그가 들은 선가들의 언행을 기록해서 청학집을 저술했다
는 것이다.8)
그래서 김성환은 이 책의 저술시기를 대략 낙방한 해에 60년을 더
한 1648년으로 계산했다. 이는 대략 선조대에 태어나서 광해군 인조
연간에 활동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런데 김성환은 이 책에 등장하
는 인물들의 생존연대를 추적해본 결과 효종 현종 때의 인물들이 다
수 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17세기 말 한차례 이상의 내용 변개
가 있었다고 추정했다.9)
이 책의 체제는 주제나 시기별로 나뉘어 있지 않지만, 연대기적인
서술방법을 기본으로 하고, 주제별 내용을 진행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다. 즉 연대별로 청학상인과 편운자 금선자 취굴자 채하자 화오자
아예자 계엽자 벽락자의 언행 및 대내외적인 시국관을 수록하고 있다.
전체 내용은 크게 저술동기, 조선의 선가, 청학상인 위한조의 활동,
위한조 이후의 제자들의 활동 등 4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10)
청학집에서는 조선 선가의 도맥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대략 4개
계통으로 전해지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본파와 별파로 크게 나
뉘어지고, 본파에서 보덕의 分派가, 별파에서 大世⋅仇㓒의 일파가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선가의 본파는 古仙人 廣成子와 明由
를 시작으로 桓仁眞人→환웅천왕→단군→文朴氏→永郞→寶德으로 이
어지며, 別派는 신라의 瓢公을 시작으로 참시(旵始)선인과 玉龍子에
8) 이종은, 해동전도록 청학집, 보성문화사, 1996. 11-13쪽 참조.
9) 김성환, 운학선생사적에서의 몇가지 문제, 운학선생사적, 경인문화사, 2010.
52-54쪽 참조.
10) 김성환, 운학선생사적에서의 몇가지 문제, 30쪽 참조.
청학집과 규원사화에 보이는 한국도교에 대한 고증 연구ㆍ임채우 15
게 계승되는데, 참시선인의 도맥은 직접 勿稽子→대세 구칠→ 원효
최치원 이명등으로 계승된다고 본다.11)
2. 고대선가사서 규원사화
揆園史話는 숙종 원년인 1675년에 北崖子에 의해 저술된 역사서
형식의 史話로 환인과 환웅의 신화와 47대에 걸친 단군조선의 역사
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을 찬술한 저자 북애자는 무
명의 인물로서, 揆園史話 序에서 효종에서 숙종 시대에 살았던 과거
에 급제하지 못한 선비라고 스스로를 소개하고 있다. 그는 전국을 방
랑하던 중 우연히 고려말의 인물인 李茗이 저술한 震域遺記를 얻
어서, 이를 토대로 규원사화를 저술했다고 한다.
그런데 규원사화에 대해서는 일부 사학자들에 의해 20세기 초에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조작되었다는 僞作論이 제기됨으로써
조선 숙종년간에 저술되어, 이후 근대기 민족사학과 대종교의 성립
에 영향을 주었다는 眞書論과 대립되어 있는 실정이다.12) 일부에서
는 규원사화에 사용된 ‘國家’, ‘同族’, ‘文化’, ‘全世界’, ‘民衆’ 등의 용어
가 근대적이라든지, 「조판기」와 「태기시」 편의 우주만물의 창조에
대해 설명한 부분은 기독교의 성경 창세기 1장과 비슷하고, 환인⋅환
웅⋅단군의 삼신일체론은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론과 기본적
으로 일치하며, ‘神鄕’이란 개념은 천국과 유사하다는 등의 이유를 들
어서 위작으로 판단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규원사화는 사계의 권위자에 의해 공식적으로 그 저
작연대가 조선 숙종 때(1675년)에 나온 것으로 이미 서지학적으로 검
증받아 확인된 판본이다. 1972년 서지학 및 금석학 분야 전문가들인
11) 김성환, 선가 자료 청학집의 자료적 검토, 선도문화 6집,
12) 김정배, 한국사 권4-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국사편찬위원회, 1997. 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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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도서관 고서심의의원 李家源, 孫寶基, 任昌淳 등이 조선 중
기에 씌여진 진본임을 확인하여 인증서를 작성한 바 있다.13) 이렇게
규원사화가 조선중기에 쓰여졌다면 그동안 전해지지 않았던 고대사
연구에 새로운 근거자료로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여적이 1588년 과거에 낙방한 뒤에 60여년을 조선 도가의 인물
들과 어울리며 보고들은 내용을 기록한 청학집과 北崖老人(17세기)
이 1675년에 완성한 규원사화간에는 대략 50여년의 시차가 보이지만,
상당한 공통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일단 첫째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및 인조반정 등의 미증유의 내우외란에 시달린 대혼란을 겪은 17세
기 조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조여적과 북애자는 둘
다 유학자로서 과거에 낙방한 인물이란 점이다. 이는 유학으로 뜻을
얻지 못해 실의에 빠져있었음을 의미한다. 셋째 전국을 주유하며 산
중에서 한국의 도가 및 고유의 선도와 만나게 되고 넷째 중국 중심
의 유교적 세계관에서 탈피하면서 우리 역사에 대한 주체적 인식과
선도적 세계관으로의 새로운 인식을 보여준다는 점과 다섯째 말년에
선도의 서적을 저술하게 되는 비슷한 인생역정이 보인다. 이는 우연
의 소치일수도 있겠지만,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 일부 지식인계층에
서는 당시 사대주의 정책과 과거제도 등 조선사회가 안고있던 구조
적 문제에 대한 비판의식을 공유하면서, 우리의 고유사상과 고대역
사에 대한 주체적 인식이 새롭게 대두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3) 임채우, 선도사서 규원사화 해제-위작설에 대한 쟁점을 중심으로-, 선도
문화 6집 2009. 참조.
청학집과 규원사화에 보이는 한국도교에 대한 고증 연구ㆍ임채우 17
Ⅲ. 청학집과 규원사화의 유사성 교감
1. 도가의 문집 사문록과 삼한습유기
규원사화와 청학집에는 공교롭게도 동일한 서책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먼저 규원사화를 보자.
최고운은 문학에 정통하고 재주가 뭇 사람들 보다 뛰어나며 고금의 일에
대해 두루 통하고 글의 명성이 자자한데, 그의 말은 앞선 성인들이 후세에
전한 교훈의 진수를 잘 가려 뽑았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에 여러 서
적에 흩어져 보이는 것과 사문록 및 삼한습유기 같은 道家 문집에 있
는 것들은 빠짐없이 적지 못하였다.14)
인용문에서 선가 인물인 최치원을 소개하면서 “그 밖에 여러 서적
에 흩어져 보이는 것과 四聞錄 및 三韓拾遺記 같은 도가 문집에
있는 것들은 빠짐없이 적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단군에서 기원하는
한국의 도가사상의 흐름을 소개하면서, 이런 내용들이 四聞錄과
三韓拾遺記같은 도가문집에도 실려있었다는 것이다. 이 사문록과
삼한습유기가 누구의 어떤 내용인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이
없어서 자세하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청학집에서 이 두 책에 대해 다시 언급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삼한습유기부터 보자.
삼한습유기를 쓴 사람은 녹두처사다. 신라 서산석실에서 나온 것을 내가
한번 죽 읽어보았는데, 믿을만한 옛 자취가 꽤 많았다. 거기에서 말하기를...
14) 규원사화 단군기, 孤雲, 精敏文學, 卓越諸人, 博通古今, 文名飄動, 其言可謂善
採先聖垂訓之精華矣. 此外, 散見於載籍者, 及道家文集, 如四聞錄.三韓拾遺
記等諸書者, 不可殫記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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愼氏는 沙伐國에서 나오고...康氏와 龍氏는 송양국에서 나왔고 단군의 후예
가 숙신 부여 말갈이 되었다.15)
인용문에 의거해보면, 삼한습유기는 옛날의 역사를 기록한 신뢰할
만한 자료로서, 대개 고대 국가의 후예와 성씨들의 역사 및 고향을
밝힌 내용으로 보인다. 다만 인용문에서의 ‘신라 서산석실’(羅瑞山石
室)에 대해서는 어떤 이는 ‘나단산 석실’(羅端山石室)로 읽고 동국여
지승람에 의거해서 함경도 산천의 나단산으로 고증하고 있다.16) 그
러나 필사본 원문을 찾아보면 아세아문화사에서 영인한 가람문고본
은 瑞山으로 되어있지만,17)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에는 약간 흘려쓴
서체로 인해 瑞자인지 端자인지가 모호하게 되어 있다.18) 이 2종의
판본만 가지고는 단정할 수는 없고 앞으로 여러 판본등을 교감해야
겠지만, 일단 필자는 瑞자일 가능성이 더 높은 것으로 판단한다. 다
만 이것이 ‘신라의 瑞山’인지, 아니면 나서산인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연구와 고증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위의 청학집의 내용은 규원사화에서는 찾기는 어렵다. 다
만 규원사화에서 沙伐이 나오기는 하지만, 이는 나라이름이 아니라
47대 단군의 이름중의 하나로19) 신씨와는 무관하다. 오직 肅愼 靺鞨
을 단군의 遺族이라고 한 구절이 위 내용과 가장 근사할 뿐이다.20)
15) 이종익, 해동전도록 청학집, 87-88쪽 및 240쪽 참조. 三韓拾遺紀者 鹿頭處
士所錄也. 出羅瑞山石室 余嘗一次遍覽 古迹可遽者 甚多...愼氏出于沙伐國…
康氏龍氏 檀君之後 爲肅愼扶餘靺鞨.
16) 김성환, 운학선생사적의 몇가지 문제, 323쪽.
17) 아세아문화사, 규원사화 청학집, 1976. 212쪽.
18) 김성환, 운학선생사적, 548쪽 참조.
19) 규원사화 단군기, 乙亥歲, (王)[壬]儉奧婁門...在位二十歲, 崩. 子, 沙伐立. 己未
歲, (王)[壬]儉沙伐元年. 在位十一歲, 崩. 子, 買勒立. 을해년은 오루문 임금...
임금자리에 있은 지 20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사벌(沙伐)이 임금이 되
었다. 기미년은 사벌 임금의 원년이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11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매륵(買勒)이 임금이 되었다.
청학집과 규원사화에 보이는 한국도교에 대한 고증 연구ㆍ임채우 19
삼한습유기와 더불어 청학집에서도 사문록이란 도가의 전적도 기
록되어있다.
금선자가 말했다. 卞沚가 지은 記壽四聞錄이란 동국 도류의 총서다.21)
김성환은 같은 구절에 대해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운학선생실기
본에는 “卞沚壽四聞錄者로 기록되어 있어 이제까지 변지가 지은 사
문록이라는 저술로 이해되었으나, 변지수가 지은 사문록으로 이해하
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그 저자나 저술의 명칭이 다
른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고 했다.22) 그러나 이능화의 조선도
교사에서는 ‘卞沚記壽四聞錄’으로 인용되어 있어서 청학집의 원문과
일치한다. ‘卞沚壽의 四聞錄’이든 ‘卞沚의 記壽四聞錄’이든 모두 가능
하다. 記壽四聞錄은 사문록에 ‘記壽’란 말이 더 붙어있지만, 필자는 양
자가 별종의 전적이 아니라 정황상 同書異名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수사문록이란 이름의 뜻을 풀이해보면, ‘長壽한 선인들을 쓴 四方
에서 들은 記錄’이라는 의미로서 사문록이란 책의 내용을 좀더 자세
히 풀이한 이름일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는 1,2종의 판본만 가지고
단정하기는 어렵고, 좀더 여러 판본들을 교감하고 인물 및 저술들을
고증해서 종합적으로 판단해야할 문제라고 본다. 아무튼 김성환은
사문록이란 책은 다른 전적에서 확인할 수 없다고 했지만, 규원사화
에서도 사문록이 도가의 전적이라고 한 내용과 기본적으로 일치하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20) 규원사화 단군기, 盖靺鞨者, 古肅愼之後, 而亦檀帝遺族也.
21) 규원사화 단군기, 在位九十餘載, 天下皞皞然, 忘其樂焉. 乃命夫婁攝位曰: 「天
道昭昭, 降在爾心, 惟秉爾心, 以親萬民, 其惟純誠乎!」 乃南至唐莊, 入居阿斯
達, 以孟冬月, 化神朝天. 在世凡二百十年, 在君位九十三年.
22) 김성환, 운학선생사적, 184쪽 인용.
20 仙道文化 제14권
2. 동방선파의 조종 환인과 단군
변지가 지었다는 기수사문록이 규원사화에서 말한 사문록과 동일
한 책인지는 규원사화와 청학집의 내용을 비교 교감을 해보면 밝혀
질 것이다. 먼저 청학집을 보자.
김선자가 말했다. 변지가 지은 기수사문록이란 동국도류의 총서인데, 거
기에서 말하기를 환인진인은 명유에게서 수업하였고 명유는 광성자에게서
수업하였는데 광성자는 상고의 선인이다.라고 했다. 환인진인이 동방선파의
조종이고 환웅천왕은 환인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 풍우와 오곡등
360여가지의 일을 주재하여 동방백성을 교화시키더니 단군이 또 그 업을
이어 교화를 편지 천년에 구이가 함께 받들어 천왕으로 모셨다. 작은 정자
와 버들대궐에 살면서 머리를 땋아 드리우고, 소를 타고 다니면서 백성을
다스린지 1048년에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23)
여기에서는 기수사문록을 인용해서 환인을 우리 선도의 시원으로 보
고 단군이 그를 계승한 신선으로 기록하고 있다. 다시 규원사화를 보자.
(단군은) 재위 90여 년 동안 천하는 공허롭게 넓기에 즐거움을 잊고 지
냈다. 이에 부루에게 명하여 재위를 잇게 하며 이르기를 「하늘의 도는 밝디
밝게 네 마음에 내려와 있으니, 오로지 네 마음을 잡고 그로서 만백성을 사
랑하면 그 뜻은 순수하고 정성스러울 것이니라」 하고는, 남쪽으로 당장(唐
莊)에 이르러 아사달에 들어가 기거하다가 10월에 신이 되어 하늘에 오르니,
세상에 있은 지 무릇 210년이요 임금의 자리에 있은 지 93년이다.24)
23) 청학집, 金禪子曰 卞沚 記壽四聞錄者記 吾東道流之叢 有曰 桓仁眞人受業于
明由 明由受業于廣成子 廣成子古之仙人也 桓仁爲東方仙派之宗 桓雄天王桓
仁之子也 繼志述事 又主風雨五穀三百六十餘事 以化東民 檀君繼業 化行十年
九夷共尊之立 爲天王 蓬亭柳關 而綯髮跨牛 而治主世一千四十八年 入阿斯山
仙去. 원문번역은 이종은, 해동전도록 청학집, 16쪽 참조.
24) 규원사화 단군기, 在位九十餘載, 天下皞皞然, 忘其樂焉. 乃命夫婁攝位曰: 「天
청학집과 규원사화에 보이는 한국도교에 대한 고증 연구ㆍ임채우 21
규원사화에서는 비록 사문록을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청학집에서
인용한 기수사문록과 비슷한 내용이 발견됨을 볼 수 있다. 앞 청학집
의 기수사문록을 인용한 기록과 위의 규원사화의 기록이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몇가지 유사점을 보인다. 즉 사문록 혹은 기수사문록이
란 책의 존재와 그 속에 담긴 내용은 단군이 한국도가를 전수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청학집의 기수사문록에는 단군뿐 아니라 광성자
명유에서 도를 배운 환인과 환웅이 진인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
이 추가되고 있다. 하지만 청학집과 규원사화의 내용이 상충되거나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위 인용문에서는 청학집에 없는 내용들도 수록되어 있다. 즉
재위 93년만에 아들 부루에게 양위하고 210세때에 아사달에 들어가
살다가 10월달에 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는25) 것이다. 여기에서는
청학집에서 단군이 1048년을 다스렸다는 내용과 규원사화에서 93년을
재위하고 210세 때에 朝天했다는 내용이 서로 일치하지는 않는다. 하지
만 규원사화에서 말하는 47대단군의 역년을 모두 합하면 1195년인데,26)
대략 청학집의 1천여년을 단군왕조의 전체 역년을 총합한 槪數로 본
다면 규원사화의 총역년수와 큰 차이는 아니라고 할 것이다.27)
아무튼 청학집에 의하면 기수사문록에는 환인이 도가의 眞人으로
광성자에서 명유로 이어지는 계통에서 도를 배워 동방선가의 시조가
되었고, 그 뒤를 환웅과 단군이 이어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단군은
1048년을 다스리다가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그
런데 이능화는 그의 명저 조선도교사에서 환인을 동방선가의 시조
道昭昭, 降在爾心, 惟秉爾心, 以親萬民, 其惟純誠乎!」 乃南至唐莊, 入居阿斯
達, 以孟冬月, 化神朝天. 在世凡二百十年, 在君位九十三年.
25) 朝天의 사전적인 뜻은 천제를 뵙는다는 뜻이지만, 여기에서는 다소 포괄적
인 의미로 해석했다.
26) 규원사화 단군기, 自檀儉神人開創鴻業, 歷四十七世, 一千一百九十五年.
27) 청학집의 1048년은 제왕운기와 응제시주의 역년과 일치한다. 삼국유사에는
1908년간으로 되어있다.
22 仙道文化 제14권
로본 백악총설이란 서적을 인용한 바 있다. 환인을 우리 선가의 시
조로 보는 백악총설의 관점은 일단 청학집과 같다고 할 수 있다.28)
3. 단군 선도와 문박씨 영랑 보덕
이 뒤를 이어서 청학집에는 단군의 도를 전한 분으로 몇 명의 선
인을 언급한다.
그 뒤에 문박씨란 분이 있어 아사달산에 살았는데, 얼굴이 아름답고 눈
이 모난 특출한 분으로 단군의 도를 자못 얻었다. 영랑은 향미산 사람이니
나이가 90이 되어도 안색이 어린아이 같았으며 노우관을 쓰고 철죽장을 짚
고 산수사이에 소요하며 마침내 문박의 업을 전하였다. 마한시대의 신녀 보
덕이 바람을 타고 다니며 거문고를 안고 노래를 부르니, 그 모습은 가을물
의 부용과 같이 아름다웠다. 이 이가 영랑의 도를 이어받은 것이다.29)
즉 단군의 도는 문박씨와 영랑을 거쳐 보덕이 전해받았다는 것이다.
규원사화에서도 단군의 도를 전한 선인으로 문박씨와 영랑과 보덕을
거론한다.
부루가 뭇 가와 제후를 거느리고 하늘에 오른 곳에서 제사를 지내고는
신축년에 평양에서 즉위하니, 바로 두번째 단군이다. 뒤에 문박씨가 아사달
에 살고 있었는데, 환하게 젊어 보이는 얼굴에 모가 난 눈동자를 하고서 자
28) 이능화, 조선도교사, 보성문화사 1977. 358-359쪽 참조, 白岳叢說云 向彌山
人曰 仙道之在天下 中國則黃帝得於廣成子 吾東則文朴得桓因之源 傳爲淸潔
之學焉.
29) 이종은 역, 청학집 해동전도록, 16-17쪽 및 218-219쪽. 其後有文朴氏, 居阿
斯達, 韶顔方瞳, 頗得檀君之道. 永郞者向彌山人也. 行年九十有嬰兒之色, 鷺羽
之冠, 鐵竹之杖, 逍遙于湖山 遂傳文朴之業. 馬韓時 有神女寶德者, 御風而行
抱琴以歌 貌若秋水之芙蓉.
馬韓時 有神女寶德者. 청학집⋅해동전도록, 218-219쪽.
청학집과 규원사화에 보이는 한국도교에 대한 고증 연구ㆍ임채우 23
못 檀儉의 도를 얻었다. 그 후에 向彌山의 영랑과 마한의 神女 寶德 등 뭇
사람들은 단지 그 한 부분만을 체득하여 정결하게 무위로서 속세를 벗어나
소요할 뿐이었으니, 이 또한 단군 할아버지가 만백성을 교화시키는 그러한
큰 뜻은 아니다.30)
규원사화에서도 청학집과 대체로 비슷한 내용을 말하고 있다. 다
만 2가지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하나는 단검의 아들 부루가 2
대 단군이 된 뒤에 아사달에 살던 문박씨가 단군의 도를 상당히 얻
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청학집에서 문박씨가 단군의 도를 자못 얻었
다(頗得檀君之道)고만 했는데, 규원사화에서는 문박씨 영랑 보덕은
단군의 선도를 일부 전수받았지만 만백성을 교화시키는 큰 뜻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그 가치를 제한하고 있다. ‘자못 얻었다(頗得)’는 것
은 전부는 아니더라도 긍정적인 의미인 반면, ‘큰 뜻은 아니다’라는
것은 부분적인 부정으로 어감상 서로 다른 듯하다. 하지만 양자는 모
두 전체를 얻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다만 ‘자못 얻었다(頗
得)’는 것은 이를 긍정적인 면으로 해석한 것이고, ‘큰 뜻은 아니다’는
것은 단군의 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라
고 본다면, 이를 모순되는 곳으로 보기보다는 보완적 관계라고 할 것
이다. 이렇게 보면 규원사화의 설명이 보다 자세한 내용을 전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규원사화 뒤 부분의 만설에서는 영랑과 보덕에 대해
추가적으로 기술한 내용이 보인다.
예전에 永郞이 인생의 덧없음을 한탄하고 앞선 성인들이 신이 되었음을
사모하다가 그 식솔을 버리고 향미산에 들어가 도를 닦더니, 나이 아흔에도
30) 규원사화 단군기, 於是夫婁率諸加及諸侯, 獻祭於朝天處, 以辛丑歲卽位于平
壤, 是二世檀君也. 後有文朴氏, 居阿斯達, 韶顔方瞳, 頗得檀儉之道. 其後, 如
向彌山之永郞及馬韓之神女寶德諸人,1) 只得其一斑, 淸淨無爲, 適遙塵外, 又非
檀祖用化萬民之大義也.
24 仙道文化 제14권
어린아이와 같은 얼굴 색을 하고서 백로의 깃으로 만든 관에 鐵竹 지팡이
를 짚고 호수와 산을 거닐었다. 신녀 寶德이 하루살이의 얼마 남지 않은 목
숨을 한탄하며 아침 이슬이 쉽게 사라지는 것을 애석해 하더니, 이에 스승
을 찾아가 도를 배우고는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부르니, 그 소리는 마치 영
묘한 하늘의 옥퉁소 같았고 그 모습은 마치 가을 연못의 연꽃과도 같았다.
이러한 것이 진실로 신선에 이른 것이라 할 것이다.31)
이 부분 역시 훨씬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청학집의 기록에
대해 보완해준다.
그런데 청학집과 규원사화에서 환인이 동방선도의 조종이 되고,
이 뒤를 이어 환웅-단군-문박-영랑-보덕등으로 전해지는 것으
로 보는데, 백악총설에서는 환인을 도맥의 시원으로 삼고 있으며,
환인-환웅-단군-문박-乙密-영랑-晏留-普德聖女로 전해진다
고 본다.32) 기본적으로 규원사화 청학집과 비슷한 내용이지만, 여기
에는 을밀과 안류등의 선인이 더 있어서 백악총설의 계보가 가장
자세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책이 전해지지 않아서 더 이상의 자
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다.
4. 암시선인과 참시선인
규원사화에서는 ‘암’시선인에 대해 언급한다.
후세에 가락국 房登王 때 嵒始仙人이 있어, 七點山으로부터 내려와 招
賢臺에서 왕을 뵙고 이르기를 「임금께서 자연의 도리로서 다스림의 기본을
31) 규원사화 만설, 昔者永郞, 恨人生之無幾, 慕先聖之化神, 乃棄其率, 入向彌山
中, 修道行, 年九十有嬰兒之色, 鷺羽之冠, 鐵竹之杖, 逍遙于湖山. 神女寶德,
歎蜉蝣之殘命, 惜朝露之易消, 乃求師學道, 抱琴以歌, 音若靈霄之玉簫, 貌若秋
水之芙蓉. 是固, 仙之達者也.
32) 이능화, 조선도교사, 359쪽 참조.
청학집과 규원사화에 보이는 한국도교에 대한 고증 연구ㆍ임채우 25
삼으면 곧 백성들도 자연의 도리로서 풍속을 이루어 갈 것입니다. 다스림의
기본이 되는 道는 예로부터 그 법도가 있는데 임금께서는 어찌하여 이를
체득하지 않습니까」라고 하기에, 왕이 크게 희생을 잡아 보내 주었으나 사
양하며 받지 않고 떠나가 버렸다. 그가 말한 도는 앞선 성인이 남긴 비결을
터득한 데서 나온 것이다.33)
암시선인에 대해서는 청학집에도 등장한다.
거등왕 때에 참시선인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칠점산에서 내려오니 그
모습은 차가운 옥같이 빛나고 말소리는 경읽는 소리 같았다. 임금을 초현대
에서 뵙고 말하기를 임금이 자연의 이치로 백성을 다스리면 백성도 저절로
성속할 것입니다 하니 왕이 기뻐하여 큰 소를 잡아 대접하니 이를 사양하
고 풍향과 도라지를 찾아 먹었다. 이는 곧 표공의 유파이다.34)
이종은은 거등왕의 ‘탐’시선인으로 읽었는데, 탐은 ‘참(旵)’의 誤讀
으로 보인다. 김성환은 다만 가람문고본과 국립중앙도서관본에 모두
방등왕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거해서 금관가
야 제2대왕 거등왕이 맞는 것으로 교감을 하고 있다.35) 그러나 이미
홍만종의 해동이적에 ‘旵始仙人’의 전이 있고 거기에 가락국의 ‘거
등왕’때의 일로 밝혀져 있다.36) 아무튼 규원사화와 청학집의 기록을
전체적으로 볼 때, 거등왕의 居자가 방등왕의 房자로, 참시선인의 旵
자가 ‘암’시선인의 嵒자나 ‘탐’자로 誤讀했거나 誤記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필사로 전해지는 판본들속에서 비슷한 한자들로 인해 발생하는
통상적인 오류이다.
33) 규원사화 단군기, 後世, 駕洛國.房登王時, 有嵒始仙人者, 自七點山而來, 見王
於招賢臺曰: 「君以自然爲治, 則民[自以](以自)然成俗. 爲治之道, 古有其法, 君
何不體之.」 饋以大牢, 辭不受而去. 此道, 破先聖之訣也.
34) 이종은, 해동전도록 청학집, 17쪽 인용.
35) 김성환, 운학선생실기, 188쪽.
36) 홍만종, 해동이적, <<홍만종전집>>, 태학사, 1980. 397쪽 참조.
26 仙道文化 제14권
아무튼 규원사화의 암시선인은 청학집의 참시선인의 기록 내용이
서로 일치하며 같은 인물로 판단할 수 있다. 다만 표공이라는 선인은
규원사화에 나오지는 않지만 청학집의 기록에 의거해서보면 참시선
인이 표공의 제자임을 추정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청학집이 규원사
화보다 좀 더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5. 최치원과 李茗
주지하다시피 최치원은 신라말 헌안왕 원년(857)에 나서 12세때
(868) 당나라에 유학하여 18세(874)에 급제하고 당시 당나라 절도사였
던 高䮁의 종사관이 되어 활동하다가 28세(884)되던 해에 귀국했다.
그러나 귀국한 이후는 뜻을 얻지 못하고 불우한 세월을 보내다가 세
상을 마쳤다.
불우한 그의 삶을 최치원은 종종 신선사상과 매우 깊은 관련을 지
닌 인물로 거론되었다. 주지하다시피 최치원은 본래가 당나라에 유
학해서 과거에 급제한 엄연한 유학자 출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시대부터 그는 仙人이라 일컬어졌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최치원
이 과연 도사였다거나 도교수련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
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37)
먼저 규원사화에서의 최치원에 대한 기록을 보자.
최치원은 鸞郞碑 서문에서 이르기를 “우리나라에는 심오한 이치를 지닌
도가 있으니, 실로 三敎를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뭇 삶의 무리들을 가까이에
서 교화한다. 또한 들어오면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나서면 임금에게 충성함과
같은 것은 노나라 공자의 요지이고, 행함이 없는 듯이 일을 다스리고 말함이
없는 듯이 가르침을 펴는 것은 주나라 노자의 근본 되는 생각이며, 모든 악
37) 김낙필, 최치원과 신선사상, 고운 최치원의 철학 종교사상, 도서출판문사
철, 2009, 215-216쪽 및 최영성의 견해 참조.
청학집과 규원사화에 보이는 한국도교에 대한 고증 연구ㆍ임채우 27
함을 짓지 말고 모든 선함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천축국 태자의 교화이다”라
하였다. 최치원은 문학에 정통하고 재주가 뭇 사람들 보다 뛰어나며 고금의
일에 대해 두루 통하고 글의 명성이 자자한데, 그의 말은 앞선 성인들이 후
세에 전한 교훈의 진수를 잘 가려 뽑았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38)
여기에서는 최치원이 우리의 고대사상이 儒道佛 삼교의 사상을 포
함하고 있음을 평한 말만 전하고 있을 뿐이다. 청학집에서는 최치원
의 선인 행적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기록을 남기고 있다.
최치원은 위인이 精敏하고 문장이 다른 사람보다 탁월하여 열두살에 당
나라에 유학하여 스물여덟에 돌아와 승 정현과 현준과 도우를 삼고 지냈다.
그가 노닐던 곳은 경주의 남산 강주의 빙산, 합천의 청향산 지리산의 쌍계
인데 이곳은 모두 산세가 좋고 경계가 아름다운데 만년에 가야산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이는 大世 仇柒의 여풍을 이은 것이다. 그 후 청평산에 사
는 李茗과39) 두류산에 사는 곽여는 다 대세 구칠의 일파다.40)
최치원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스물여덟에 돌아와 남산 빙산 지리산
가야산 등에서 노닐며 승 정현 현준과 道友 관계이며 대세 구칠의
제자라는 것이다. 다시말해 청학집에서는 환인의 도를 아들인 환웅
이 잇고, 다시 단군으로 계승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는 문박을
38) 규원사화 단군기, 後世, 駕洛國.房登王時, 有嵒始仙人者, 自七點山而來, 見王
於招賢臺曰: 「君以自然爲治, 則民[自以](以自)然成俗. 爲治之道, 古有其法, 君
何不體之.」 饋以大牢, 辭不受而去. 此道, 破先聖之訣也. 又崔孤雲.鸞郞碑序曰:
「國有玄妙之道, 實乃包含三敎, 接化羣生. 且如入則孝於親, 出則忠於君, 魯.司
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
太子之化也.」 孤雲, 精敏文學, 卓越諸人, 博通古今, 文名飄動, 其言可謂善採
先聖垂訓之精華矣.
39) 李茗은 북애자 규원사화의 저본이 된 진역유기의 작자로 고려말의 학자
인 것으로 추정된다. 규원사화 「단군기(檀君記)」 :古有淸平山人.李茗高者(者
高)麗時人, 有震域遺紀三卷, 引朝代記, 備載我國故史, 比於一然之書, 甚相
逕庭中, 多仙家語. 참조.
40) 이종은 역, 해동전도록 청학집, 18쪽, 158쪽 인용.
28 仙道文化 제14권
거쳐 신라시대의 영랑-보덕-표공-참시선인-물계자 등으로 전해
지고 대세와 구칠을 거쳐 최치원에게 그 도가 계승되었다는 것이
다.41)
그런데 위 청학집의 인용문 말미에서 대세 구칠의 제자로 이명이란
인물을 거론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자세한 언급은 없다. 그
런데 이명에 대해서는 규원사화에서 비교적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
다. 규원사화는 상고시대의 역사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한 진역유기
를 토대로 기술되었다고 한다. 규원사화의 작자인 북애자는 과거를
단념하고 전국을 방랑하며 역조의 사적지를 두루 답사하던 중 濊貊
(지금의 춘천지방)의 산골에서 우연히 고려말의 인물인 李茗이 저술
한 고대사서 震域遺記를 얻었는데, 이는 선가의 저술이라고 한다.
과거에 청평산인 李茗이란 분이 있었다. 고려시대 사람으로 진역유기
3권이 있었는데, 朝代記를 인용해서, 우리나라의 고사들을 갖춰 기재했
다. 일연의 책과 비교해보면 아주 큰 차이가 있었으며, 仙家의 말이 많이
있었다.42)
淸平山의 李茗이 지은 진역유기에는 우리나라의 고사들을 수록
한 책으로, 선가적 경향을 갖고 있었음 알 수 있다. 진역유기란 역
사서에는 선가의 말이 많이 들어있었다고 하니, 이명 역시 강원도 청
41) 청학집에서는 조선 선가의 도맥에 대해 상세하게 수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는 대략 4개 계통으로 전해지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본파와 별파로 크
게 나뉘어지고, 본파에서 보덕의 분파(分派)가, 별파에서 대세(大世)⋅구칠
(仇㓒)의 일파가 갈라져 나온 것으로 본다. 선가의 본파는 고선인(古仙人) 광
성자(廣成子)와 명유(明由)를 시작으로 환인진인(桓仁眞人)→환웅천왕→단군→
문박씨(文朴氏)→영랑(永郞)→신녀 보덕(寶德)으로 이어지며, 별파(別派)는 신
라의 표공(瓢公)을 시작으로 암시선인(嵒始仙人)과 옥룡자(玉龍子)에게 계승
되는데, 암시선인의 도맥은 직접 물계자(勿稽子)→대세(大世) 구칠(仇㓒)→
원효 최치원 이명등으로 계승된다고 본다.
42) 규원사화 단군기에 古有淸平山人.李茗高者(者高)麗時人, 有震域遺紀三卷,
引朝代記, 備載我國故史, 比於一然之書, 甚相逕庭中, 多仙家語.
청학집과 규원사화에 보이는 한국도교에 대한 고증 연구ㆍ임채우 29
평산에서 살았던 선가의 인물로 추정된다. 그래서 청학집과 규원사
화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이명은 고려말 청평산에서 살았던 선가 인
물로 대세와 구칠로부터 선도를 익혔으며, 진역유기란 역사서를 남
겼다고 정리할 수 있다.
Ⅳ. 청학집과 규원사화의 관계 고증
이상에서 보면 청학집과 규원사화의 기록이 상당부분 겹쳐지면서
도 약간 다른 내용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간의 차이
점이 반드시 상호 모순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 보완관계로서 본다
면 그들의 행적과 사상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나아가 자료가 부족한
한국선도사를 정립하는데 중요한 자료들을 제공해준다고 할 것이다.
청학집은 필사본과 유인본 등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조선말기에는 널리 알려져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왜냐면 이미 이규
경(1788-1856)이 청학집의 존재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음이 그의 저술
오주연문장전산고속에서 확인된다.
위한조(魏漢祖)라는 사람이 지었다는 운학집(雲鶴集)이라는 것은 비기
류(祕記類)이다[속전(俗傳)에 이르기를 명종⋅선조 때의 사람으로 호남에서
살았으며,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이 사사하였다고 한다. 운학집은 청
조(靑鳥)의 요지로 비결(祕訣)이 있다고 한다.43)
인용문에서 말한 위한조가 지은 예언집이라는 雲鶴集은 바로 청
학집의 이명이다. 아무튼 청학집의 존재를 이규경이 알고 있었고, 그
43) 五洲衍文長箋散稿, 人事篇, 技藝類, 卜筮, 祕緯圖讖辨證說 “魏漢祖者著雲
鶴集 祕記類也【俗傳明宣兩朝時人 居湖南 李土亭之菡師云 其集卽靑鳥之旨
而有祕訣云】”.
30 仙道文化 제14권
비기류의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44)
청학집이 후대에 일부 가필이 되었을 가능성은 있을지언정 책자체
가 위작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문제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더 이상의
문제제기는 없다. 하지만 규원사화에 대해서만은 몇몇 사학자들이
일제강점기 초기의 위작으로 규정하고 있는 점은 특이한 일이다. 조
인성은 규원사화는 해동역사 지리고등을 참고하여 작성된 것이
분명하며 20세기 초에 일본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결국 “규원사화
는 환단고기와 마찬가지로 단군신앙과 관련된 종교사화일 뿐 우리
한국고대사 연구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45) 박광용은 한말에서 1920년대의 작품이며, 그
저자는 한말 계몽적 사학 내지 사관직책 관련자이거나, 1910년대 조
선편찬위원회나 1920년대 조선사편수회에 관계가 있는 인물일 것이
라고 구체적으로 주장하였다.46) 김성환은 규원사화가 1910년대 중반
부터 1920년대 이후의 위작이며 규원사화가 청학집의 내용을 베꼈다
고 판단했다.47)
만일 어떤 위작론자의 말대로 규원사화가 청학집을 베껴서 20세기
초에 만든 위작이라고 한다면 본고에서 고찰했던 바와 같이 청학집
과의 비교결과 규원사화에만 나와있고, 청학집에 없는-더구나 다른
어떤 서적에도 발견되지 않는-내용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할 것인
가? 만일 규원사화가 청학집을 베낀 것이라면 당연히 청학집에 들어
있는 내용의 범위내에서 그 일부를 인용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규
원사화에는 그 범위를 벗어나있거나 다른 내용을 담고 있음을 앞에서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경우로 우리는 2가지 가능성밖에 생각
44) 현재 전하는 대부분의 청학집은 표지의 제명이고, 내지의 제명은 ‘운학선
생사적’으로 되어있다고 한다. 선도문화6집, 95-96쪽 참조.
45) 조인성, 揆園史話와 桓檀古記, 韓國史市民講座2輯, 1988, 78-88쪽.
46) 박광용, 대종교 관련 문헌에 위작 많다, 역사비평 1990. 가을호, 208쪽 참조
47) 김성환, 재야사서의 사료적 검토-규원사화의 진서론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청학집과 규원사화에 보이는 한국도교에 대한 고증 연구ㆍ임채우 31
할 수 없다. 즉 첫째 청학집 외의 또 다른 한국도가서를 인용했거나,
둘째 완전히 가공으로 꾸며냈거나 둘 중 하나로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학계에 전연 알려져있지 않은 1920년대에 인용했던
도가서가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할 것이고, 또 설혹 그렇다고 하
더라도 청학집에 없는 새로운 내용이 있다면 그것대로 가치를 지닌
다고 할 것이다. 더구나 규원사화속에서 청학집과 상호보완적으로
이해되는 내용이 확인됨에도 불구하고, 규원사화가 삼국유사 이후
단군 관련한 기록들과 전혀 다른 것이어서 이를 받아들이기 주저되며,
오히려 고조선 연구와 인식에 많은 혼란을 준다는 투의 시각은48) 객
관적이지 못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규원사화가 1920년대에 완전히 허구로 꾸며졌다는 두 번째 가능성
도 거의 성립하기 어렵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사실 국립도서관소
장본 규원사화 책 자체에 대해 1972년에 이미 서지학자들의 공식적
인 검증과 확인을 거쳤기 때문이다. 위작설이 제기되기 한참 이전인
1972년 11월 3일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금석학과 서지학자의 감정결과
숙종 당시의 진본으로 공식 인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규원사화
위작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이 감정결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계속 위작설을 제기하는지에 대해서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서지
학이란 책에 사용된 종이와 제본 인쇄 조판 제작과정등 책의 물리적
특성을 분석하는 학문으로서, 적어도 전적의 연대문제에 관해서는
서책에 대한 직접 고증이 없는 관념적 역사학보다는 더 신뢰할 수
있다. 위작설이 나오기 10여년전에 이미 공식 인정을 받았음에도 불
구하고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계속 위작설을 제기해
오기 때문에, 일부학자들이 주변 학문과의 학제간 연구를 기존의 통
설에 입학해서 제한한다는 오해를 받거나, 의도적으로 서지학등의
48) 김성환, 재야사서의 사료적 검토-규원사화의 진서론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
로-, 79-81쪽, 95쪽 참조.
32 仙道文化 제14권
연구결과를 외면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받는 것이다.49)
필자의 다른 연구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지금 규원사화의 위작논
쟁을 하고 싶다면 먼저 이 서지학적 감정결과에 대해 과학적 분석을
통해 새로운 반론의 근거를 찾는 것이 나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규원사화가 갖고 있는 자료적 가치를 더 연구하고 새로운 사실들을
더 발굴해내는 것이 훨씬 생산적인 일이 될 것이다. 또한 그것은 잃어
버렸던 한국선도사를 복원하고 풍부하게 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바로 위에서 언급한 바대로 규원사화가 삼국유사 이후의 기록들과
다르다면 규원사화가 위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규원사화의
사료적 가치를 증명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더구나 규원사
화가 숙종 당시의 전적으로 규명이 된 이상, 규원사화는 청학집과 별
도의 저작이거나, 최소한 규원사화가 청학집 이외의 또다른 조선중
기 이전에 나온 저본을 가지고 인용한 것이라고 추론해야 정상적인
추리이다.
Ⅴ. 결론
이상에서 청학집과 규원사화라는 두 종의 서로 다른 책에 기록된
선가자료를 중심으로 상호 대조 교감해보았다. 그 결과 양자는 상당
히 일치하고 있으면서도 또한 내용상 차이점을 갖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결코 우연의 소치로 돌릴 수 없는 상당량의 일치 중복된
부분은, 그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점에서 우연의 일치라고 볼 수
는 없다. 여기에는 양자 간에 직접적인 참조 인용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고 혹은 양자가 같은 저본을 참조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다.
49) 김동환, 논평 : 김성환박사의 재야사서의 사료적 검토, 122쪽 참조.
청학집과 규원사화에 보이는 한국도교에 대한 고증 연구ㆍ임채우 33
그러나 어느 일방이 다른 쪽을 베꼈다고 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추론이다. 더구나 일치하는 부분을 가지고 어느 일방의 가치를 부정
하거나 위서로 간주하는 방식의 추론은 선입관의 소치일 뿐이다. 왜
냐면 양자 간에는 무시해버릴 수 없는 상당한 차이점도 동시에 존재
하는데, 일방적으로 인용했다고 본다면 앞의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이 차이점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양자 상호간에 차이점을 보이는 내용들은 앞에서도 언급했듯
이 다른 전적들에서도 전연 보이지 않는 내용들이다. 그러니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베꼈다고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그 내용을
분석해보면 상호 연관되며 상호 보완적으로 한국의 선도사를 구성하
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양자의 차이점은 상호모순되
거나 전연 엉뚱한 내용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볼 때 상호보완적으로
한국선도사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일방적 인용이
라고 보는 관점도, 단순히 위조해냈다는 주장도 성립할 수 없음은 물
론이거니와, 이 차이점의 상호보완성이란 사실로부터 우리는 양서가
의도적으로 계획한 것은 아니지만, 양서에서 인용서로서 언급하고
있는 진역유기이든 사문록이든간에, 또는 공통적이었든 독립적이었
든지 간에 양서에는 참조한 제3의 텍스트가 존재한다는 점을 가정하
는 추론을 정당화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본고의 검토를 통해 청학집과 규원사화의 선도자료를
교감한 결과 아래와 같은 몇가지 사실을 추론해낼 수 있었다.
첫째, 한국 고유의 선도는 단군을 중심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해동전도록을 제외한 청학집과 규원사화를 비롯해서 해동이적
과 백악총설등 조선시대 전해지는 도가자료에서 공통적으로 언급하
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고유선도는 해동전도록 등에서 수록
하고 있는 중국에서 전래된 중국도교의 흐름과 더불어 한국도교의 2
대 흐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34 仙道文化 제14권
둘째, 적어도 조선중기에는 자생적으로 한국고유의 도가 혹은 선
도의 맥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었다. 유교 성리학이 압도했던 당시의
주류사회의 밖인, 山中에서 전해지던 이러한 고유선도의 사상사적
흐름에 대해 더 주목해서 연구할 필요가 있다.
셋째, 청학집과 규원사화를 통해서 보면 仙家를 유교 불교와 더불
어 솥발처럼 맞서는 조선사상의 3대조류로 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 고려이전까지는 불교와 유교, 조선 이후는 유교사상
중심으로 정리해왔던 철학사적 이해가 수정될 필요성을 보여준다.
앞으로의 보다 자세한 연구가 진행되어야겠지만, 적어도 고려시대까
지는 선가(한국선도)가 적어도 불교 유교와 비등한 세력을 형성해왔
다가 조선시대 이후로 친명사대주의의 분위기속에서 맥락을 같이하
면서 산중의 불교나 羽類속으로 들어가 나름대로의 전통을 이어온
것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50)
50) 규원사화 단군기, 古有淸平山人.李茗高者(者高)麗時人, 有震域遺紀三卷, 引
朝代記, 備載我國故史, 比於一然之書, 甚相逕庭中, 多仙家語. 余以爲我國以
神設敎, 從古爲俗, 沈漸於人心者, 久矣. 故說史者, 不可只擬班.馬之筆而跼蹐
焉. 夫漢自是漢, 我自是我也, 豈堂堂震域, 必擬漢制, 以後乃足乎! 况國史蕩失
於屢經兵火之餘, 今僅存者, 只是道家及緇流之所記傳, 而僥倖得保於岩穴者也.
道家旣承檀儉神人所創之源流, 而又得文獻之殘脈 및 규원사화 만설, 然何幸,
峽中得淸平所著震域遺記中有三國以前故史, 雖約而不詳, 比於巷間所傳區區
之說, 尙可吐氣萬丈. 참조. 오히려 규원사화에서는 발해에서는 고유의 종교
사상과 선가사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가, 나중에 유교 불교가 들어와 성
행하게 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규원사화 단군기, 淸平云: 「粟末水之陽, 有
渤海.中京.顯德府地, 此乃檀君始都處, 故壬儉城卽平壤也. 北去上京.忽汗城六
百里云, 又曰: 「高王夢有神人, 授以金符曰 天命在爾, 統我震域故, 國號曰
震, 建元曰天統, 恒敬祀于天. 及至子孫, 驕逸而漸廢, 亦幷事儒.佛, 國遂衰」云
청학집과 규원사화에 보이는 한국도교에 대한 고증 연구ㆍ임채우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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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투고일 : 2013년 1월 17일
게재확정일 : 2013년 2월 14일
심사완료일 : 2013년 2월 13일
청학집과 규원사화에 보이는 한국도교에 대한 고증 연구ㆍ임채우 37
【中文抄錄】
在靑鶴集 與揆園史話
看見的韓國道敎之考證硏究
林採佑
(國際腦敎育綜合大學院 國學科 敎授)
靑鶴集與揆園史話 達到20世紀以後 才人們普遍認識到了, 考慮只有儒
家獨尊的朝鮮中期時代背景的話, 我們可以說它們帶了以韓國道敎史書之
獨特性和稀貴性,. 兩書具有了多種方面的類似點, 特別發現關於韓國固有
仙道類似內容. 本稿注意這種脈絡, 校勘考證揆園史話與靑鶴集之仙家關
聯記錄, 分析兩者之關聯性而考察韓國固有之仙道.
揭載在兩書上的韓國仙道之內容 都有同異兩點. 不過分析其內容之結
果 確認了其差異點 不是互相矛盾 衝突, 就是互相補完性的構成韓國仙
道史. 通過以上分析 我們確認了靑鶴集與揆園史話 都具有關於韓國仙道
之重要內容和朝鮮中期的資料價値, 而且韓國固有仙道就是 以檀君爲起
源而 繼承發展了, 到後來 儒敎佛敎外來思想輸入以後 與它們一起成爲
傳統3大思想之一了.
关键词:善道, 善家, 趙汝籍, 北崖子, 海東傳道錄, 海東異蹟, 檀君,
偉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