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부석 설화 (望夫石 說話) ▒
신라 눌지왕 때의 충신 박제상이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왕자를 구한 후
자신은 죽음을 당하는 설화이다.
그의 아내가 기다리다가 죽어 망부석이 되었다는 아내의 죽음 설화도 포함된다.
[삼국유사]에는 김제상으로 되어있다.
박제상은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간
왕제 보해(寶海:삼국사기에는 卜好)를 구하러 변복을 하고 가서
왕의 추격을 무릅쓰고 같이 탈출하여 무사히 귀국하였다.
다음에는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 있는 왕제 미해(美海:삼국사기에는
未斯欣)를 구하러 가서 신라를 도망해 왔다고 하며
왕의 신임을 얻은 후에 미해를 탈출시키고
자기는 붙잡혀서 문초를 받았다.
일본왕의 문초와 설득에도
[차라리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어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으며
차라리 계림의 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벼슬이나 녹을 먹지 않겠다.]라는 말로
계림사람임을 주장한 후에 발바닥의 껍질을 벗기운 채 불타 죽었다.
[삼국사기]의 기록과 대조해보면 등장인물의 이름에 차이가 있고,
왕제의 부하 이름이 [삼국유사]에는 보이지만 [삼국사기]에는 보이지 않는데,
이것은 사실상 부사가 따라간 것을 밝힌 것도 되고, 박제상이 귀환 활동을 할 때
협조를 얻어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이 귀국할 수 있게 설정한 것이기도 하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왕을 설득하였더니
순순히 왕제를 풀어 주었다고 하여 박제상의 언변을 중시하였고,
'삼국유사'는 야간 탈출을 하였다고 해서 담력과 지혜를 중시하였다.
두 기록 다 박제상이 집에 들르지 않고
즉시 일본으로 떠났다고 한다.
이것은 부부나 가정의 정보다 국가가 더 중요하다는
박제상의 충성심을 드러내면서도 인간적인 고뇌를 함께 드러낸 대목이다.
그러나 이들 문헌은 박제상의 사실(史實)을 중심으로 기록된 것이므로
민간 설화 측면에서는 박제상 부인편을 드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남편이 집을 떠나자 몸부림쳐 울었고
(그래서 망덕사 앞 모래탑을 장사(長沙)라고함),
만류를 뿌리치고 다리를 뻗고 울었고 (그래서 그곳을 伐知旨라함)
일본에 간 남편을 치술령에 올라가 그리워하다가 죽어서 치술령 신모가
되었으며, 그 사당이 지금까지 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삼국사기]보다 설화적인 증거를 많이 제시하고 있다.
박제상의 아내는 일본에 간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지쳐 죽어서
망부석이 되었는데, 그곳의 주민은 아직도 부인의 정렬을 칭송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망부석이 있는 치술령은 경남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 동쪽
울산과 경북 외동읍 경계에 있는 767m의 높이의 위용을
자랑하는 치술령이 하늘 높이 솟아 있다.
이 치술령에는 신라 충신 박제상과 그의 부인에 관한 애절한
전설이 있어,[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박제상은 눌지왕 즉위 후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잡혀 있던
두 왕제를 구출코자, 먼저 고구려에 가 있는 복호를 구출해
귀국시킨 후, 일본으로 건너가 미사흔을 구출해 내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일본에 잡혀 심한 고문 끝에 소사 당했다.
이때 박제상의 김씨부인은 두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 일본에
간 남편을 기다리다 죽으니 그 몸은 돌로 변하여 망부석이 되고,
그 영혼은 날아가 숨었는데 그 곳을 은을암이라 한다.
그 후 왕은 박제상의 딸을 미해공의 부인으로 삼고 박제상에게
대아찬으로 관위를 높혀주고,김씨부인은 국대부인에 추봉하였으며
사당을 짓고 그 뜻을 기리는 제를 봉행토록 한 곳을
치산서원이라 한다.
이 치산서원에서 1㎞쯤 가면 하천을 끼고 갈림길이 나온다.
바로 가면 망부석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은을암(국수봉(580m)에
자리 잡고 있는 절)으로 가게 된다.
망부석쪽으로 가면 충효사라는 절이 나오고, 절 위에 망부석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조그만 팻말이 있다. 이 길을 따라 차로
법왕사까지 갈 수 있다.
법왕사에서 40분 정도를 정상을 향해 거의 일직선으로 오르면
정상부근에 이르면 멀리 동해가 펼쳐진다.정상 근처에서 왼쪽으로
돌아 30m를 걸어가면 망부석이 임을 기다리는 자세처럼 서 있다.
큼큼~ 다비드를 위해서-- ^(^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