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妓臨老說故事”
기생 추월이 늙어서 옛일을 이야기하다
추월(秋月)은 공산(公山) 기생이다. 가무와 자색으로 상방(尙方)에 뽑혀 이름값이 최고가 되니 풍류배들이 다투어 흠모했다. 화려한 자리에서 이름을 날리면서 수십 년이 흘렀다. 늙은 뒤에 매번 평생 세 가지 웃을 일이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추월이 이 판서댁에 있을 때였다. 요란한 생황 소리에 잡가를 부르고 현줄도 급하게 굴려 소리가 어지러워졌을 무렵 한 재상이 들어왔다. 풍모가 단정하고 곁눈질도 않으니 얼핏 봐도 정인군자(正人君子)임을 알 수 있었다. 주인대감과 인사를 나눈 뒤 노래를 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면서 흔쾌하게 놀다가 헤어졌다. 이 자리에는 금객(琴客) 김철석(金哲石), 가객(歌客) 이세춘(李世春), 기생 계섬(桂蟾)과 매월(每月) 등이 함께 하였다.
며칠 뒤 종이 와서 아무개 대감이 부른다고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급히 대령하였는데, 가객과 금객, 여러 기생들이 따라갔다. 가보니 전에 이 판서댁에 왔던 그 대감이었다. 대감은 단정히 앉아 있었는데 문안을 드리자 마루로 올라오게 하고는 좀 부드러운 얼굴로 대해주지도 않고 곧바로
“노래를 불러라.”
라고 하였다. 도무지 흥이 나지 않았지만 부르기는 했다. 초장에서 다음 장으로 넘어가 그 곡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감이 노기를 띠면서 모두 아래로 끌어내리게 하고는 말하였다.
“너희들 전에 이 판서 댁 잔치에서는 풍악과 노래가 시원해서 들을 만했는데, 오늘은 낮고 가늘고 느려 싫증나는 기색이 완연하구나. 흥취라고는 하나도 없어. 내가 음율을 모른다고 이러느냐!”
영악한 추월이가 그 뜻을 금방 눈치 채고 사죄하였다.
“잔치가 막 시작하여 소리가 그렇게 낮고 가늘게 되었사옵니다. 죄송하고 죄송하나이다.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신다면 구름을 뚫고 들보를 흔드는 소리가 금방 나오도록 하겠습니다.”
대감은 특별히 용서한다며 노기를 풀고는 다시 부르도록 하였다. 기생과 가객들이 서로 눈짓을 하고 자리로 나아가서는 바로 우조(羽調)로 잡가를 불렀는데 높은 소리를 크게 내어 어지러이 부르짖고 난잡하게 화답하니 전혀 곡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대감은 무척 즐겨워 하며 부채로 책상을 두드렸다.
“좋다. 좋아! 노래란 응당 이래야 하는 거지!”
노래 소리가 조금 주춤해져 잠시 쉬게 되었다. 술과 안주를 내어와 먹게 했는데 저질 술에 건포가 전부였다. 요기가 끝나자 곧바로 말하기를,
“모두 물러가라!”
하였다. 그래서 인사를 하고 돌아왔다.
또 하루는 한 하인이 찾아왔다.
“우리 댁 나으리께서 불러 오라신다!”
무수히 성화를 해대어 금객 가객들과 함께 따라 가보니 동대문 밖 연미동(燕尾洞)의 초가집이었다. 사립문을 들어가니 단간방에 바깥 마루도 없이 흙섬돌만 있었고 그 흙섬돌 위에 초석 한 닢이 깔려 있을 뿐이었다. 그 위에 앉아 줄을 고르고 노래를 불렀다.
주인은 폐포파립(弊袍破笠)에다 얼굴도 혐오스럽게 생겼다. 탕건을 쓰고 시골사람 몇과 방안에 마주앉았은데 음관(蔭官)에 불과했다. 노래 몇 곡이 끝나자 주인이 손을 저어 중지시키며 말했다.
“별로 들을 게 없구나!”
그리고는 탁주 한 잔을 주기에 마시니 불러가라고 해서 돌아와버렸다.
또 한 번은 여름날에 세검정(洗劒亭) 연회에 참석하였다. 재자 명사들이 운집해서 맑은 물 흰 돌 사이에다 잔치자리를 펼쳐두고 가무를 했는데 구경꾼들이 담을 쌓았다. 그때 의복이 초라하고 꼴이 초췌하여 떠돌이 거지 모양을 한 촌사람이 멀리 연융대(練戎臺) 아래에서 추월을 주목하였다. 추월이 괴이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손짓으로 불렀다. 일단 가서 보니 이렇게 말했다.
“나는 창원 상납(上納) 아전이네. 자네의 향기나는 이름을 익히 들은지라 오늘 다행이도 만나보니 이름이 헛되지 않은 걸 알겠네.”
그러고는 허리춤에서 돈 한 꾸러미를 꺼내어 주었다. 추월이 속으로 웃으며,
“천하의 어리석은 사내는 바로 너로구나.’
하면서도 부드러운 낯으로 거절했다.
“명분 없는 물건을 어찌 받을 수 있겠습니까? 특별히 주시는 뜻은 감사하옵니다. 받지 않아도 받은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 사람은 기어코 주려했지만 끝내 받지 않고 입을 가리며 돌아섰다.
대감의 몰풍류와 음관의 무취미, 상납 아전의 큰 어리석음, 이것이 추월이 평생 잊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