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8 과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 (고후 6:1-18)
이 본문은 3대지로 나누어 살필 수 있습니다. 1-10절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요, 11-13절은 “마음을 넓히라”는 말씀이며 14-18절은 “성도의 구별된 생활”입니다. 이 중의 첫 번째 대지로 총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1-10절)
1)1절에서 바울사도 일행은 자신들을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 아셨습니다. 하나님이 직분과 은사와 책임을 주셨고, 또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구원사역에 임하고 있은즉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구원사역의 주역은 주님이 하십니다. 사역자들은 주님의 일을 할지라도 보조역으로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고전 15:10)
2)사역자들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들로써 성령님의 지도에 힘입어 성도들을 권면하였으니 곧 “너희를 권하노니”하신 말씀입니다. 권면하신 내용은 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은혜는 하나님이 주십니다. 성도들은 이미 받은 은혜도 많고, 또 더 받을 은혜도 있는데 이것을 “헛되히 받지 말라”는 뜻은 쉽게 말하면 “은혜의 값을 하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은혜의 값을 할 수 있을까요? 은혜의 정도에 따라 보답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은혜의 보답은 먼저 은혜의 성격과 분량을 아는 것이고, 다음에 이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이며 그리고 또 은혜를 주신 목적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잘 활용하는 것입니다. 목적에 부응하지 못하는 은혜는 다시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마 25:29) ② “지금이 은혜받을 때임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2절의 “지금이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라”하신 말씀은 오순절 이후 신약시대가 은혜를 더 받을 만한 때이고, 또 이방인들에게까지 구원의 복음이 전파되는 시기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이란 말씀은 구약시대에 비할 때 신약시대가 은혜를 더 많이 주시는 때이므로 은혜받는 노력을 많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개인이나 민족에게도 때를 정하고 은혜를 주시기도 합니다.(전 3:1, 단 9:2)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는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사 49:8)을 인용하신 말씀으로 하나님이 은혜 베푸시는 분이심을 입증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메시야에게 은혜 베푸실 것을 미리 예언하신 말씀이었고, 또 메시야 시대에 예수님의 기도를 들으셨으며 메시야의 구원사역을 도우신 일로 성취하신 것입니다. 신약 시대가 구약 시대에 비하여 더욱 은혜받을 만한 때인 것은 계시(성경)의 분량으로 보나 구원사역의 성취(십자가와 부활)로 보나 또 성령님의 상주 사역과 이방에까지 복음 전파의 문이 열린 것으로 볼 때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설교문 참조)
3)3-10절에서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역자(바울과 그 일행)들이 맡은 사명을 성실히 감당한 일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의 사역자들에게 주신 모범입니다. ① 직책의 훼방을 받지 않기 위하여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한 것입니다. 무슨 일이나 어떤 대상에게나 거리끼는 일을 하면 직책의 훼방을 받습니다. 다시 말하면 “누구는 무슨 잘못이 있는데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 있느냐?”하는 식으로 훼방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역자는 모든 일에 최대한의 순결을 간직하여야 할 것입니다.(3절) ②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였으니(4절) 여기의 “자천”은 신분 자천이 아니고, 사역 감당하는 일에 솔선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군은 모든 일, 특히 어려운 일에도 솔선 봉사, 헌신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③ 그리고 많은 고난을 견딘 것입니다. 즉 환난, 궁핍, 곤난과(4절)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폭력, 폭언 등의 훼방)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등입니다.(5절) 이것은 복음 사역을 위한 여러 가지 고난을 잘 감수하고 견딘 것입니다. ④ 6절에서 그런 중에서도 사역자들은 “깨끗함과 지식과 인내와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없는 사랑을 간직하셨다” 하셨고, ⑤ 7절에서 또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의의 병기로 좌우하였다” 하셨으니 이것은 복음 사역의 무기를 말씀과 성령님의 능력과 의의 담대함을 내세워 마귀와 대항한 것을 의미합니다. ⑥ 8-10절에서 사명자의 승리를 위하여 고난을 개의치 않은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성도가 믿음과 사명을 위하여 고난과 욕을 당하였다면 그것은 마땅히 승리가 되고 영광이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욕을 당하나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 때문이며 악한 이름으로 비난을 받으나 역시 아름다운 명예를 인정받는 일이고, 또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십자가와 부활은 믿지 않는 자에게는 속이는 것 같음),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이며 죽는 자 같으나 영생을 살고 있는 자요, 징계를 받는 자처럼 고난에 방치되었으나 실상은 죽임을 당하지 않고 영생할 자이며 남 보기에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속으로는 항상 기뻐하고 물질로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하나님의 은혜로 부요케 하며 세상에서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하나님을 모셨으니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8절의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았다”는 뜻은 여기의 “말미암음”이란 원문 “디아”(διά)가 “원인을 주다” 또는 “무엇 때문에”란 뜻입니다. 따라서 영광 때문에 욕을 당하고 아름다운 이름을 얻기 위하여 악한 이름으로 비난 받는 것을 감수하셨다는 뜻입니다.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고, 또 초라하고 없는 것 같고 약해 보이며 불쌍해 보여도 실상은 속으로 강하고 부요하며 영광 가운데 거하는 것이 참된 사역자들의 생활임을 나타내주신 것입니다. 사실 그러함을 체험하셔야 할 것입니다. 참된 사역자가 이 세상에서 사람의 인정을 받지 못하여도 그 마음 속에는 하나님이 가까이 계셔 주시고 모든 것을 알아주시니(계 2:2-3) 큰 보람과 감사와 소망을 갖는다는 사실은 하나님과 그 당사자만 아는 비밀일 것입니다.
2. 마음을 넓힘에 대하여(11-13절)
1)11절에서 복음 사역자들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축복하며 진리를 전파할 수 있는 입이 열려 있고(준비됨의 뜻) 또 그들을 이해하고 포용하며 사랑할 마음이 준비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넓지 못하면 갈등하는 상대를 포용하거나 사랑할 수 없을 것인즉 모든 성도들도 우선 전도의 입, 기도, 찬송, 감사의 입이 열리고(은사에 의함) 마음도 넓혀야 할 것입니다.
2)12절에서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라”는 뜻은 고린도교회 성도들(바울에 대하여 의심하는 성도들)이 바울사도의 일행(우리) 때문에 좁은 마음을 갖는 것이 아니고, 그들 스스로의 오해감 때문에 좁은 마음을 넓히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원인이 어디에 있든지 성도는 마음을 크게 넓힐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3)13절에서 “바울은 자녀에게 말하듯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너그럽게 사랑으로 대한다”는 뜻이요, 거기에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하신 것은 바울이 자녀를 대하는 부모처럼 성도를 대할 것이니 성도들도 부모의 말씀을 듣는 자녀처럼 마음을 넓히고 교훈을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바울에 대한 교인 측의 오해와 대립이 있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3. 성도의 구별된 생활에 대하여(14-18절)
1)14절에서 성도로 하여금 불신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 것을 명하셨습니다. “불신자와 멍에를 같이 한다”는 뜻은 불신자들에게 이끌리거나 합세하여 신앙 생활에 거리끼는 일들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신앙에 거리끼지 않는 일반적 생활을 함께 할 것이 많으나 함께 하면서 거리끼는 일도 많은 것입니다. 이에 대한 종류와 정도를 잘 분별하여 유익하고 덕되게 행하셔야 할 것입니다. 성도는 의나 불법을 혼돈할 수 없고 또 빛과 어두움도 혼돈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14절)
2)15절에서 “그리스도와 벨리알(마귀의 이름임)이 조화될 수 없는 것처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상관한다”는 뜻은 하나님의 뜻과 마귀의 뜻이 서로 상관할 수 없은즉 마귀의 역사와 성령님의 역사를 잘 분별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일치될 수 없음과 같은 것입니다.(16절)
3)16절에서 “성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고전 6:19에서 설명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 개인 중심에도 계시고 저희(단체) 가운데도 계시면서 두루 행하신다” 하셨고, 또 “저희 하나님이 되어 주시고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레 26:12과 출 29:45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저희 하나님이 되어주시고 또 성도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각별하다는 뜻입니다.
4)17-18절 말씀은 사 52:11을 인용한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것처럼 마귀에게 예속된 자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신앙 생활에 어긋나는 것)을 만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부정한 것”은 우상이나 우상의 제물을 염두에 두신 듯 합니다. 그것들을 “만지지도 말라”하신 것은 가까이 접근하는 일도 멀리 하라는 뜻입니다. 로마의 베드로 성당에는 큰 베드로 동상이 있는데 많은 순례자들이 축복을 받는다는 낭설 때문에 베드로 동상의 엄지발가락에 손을 대거나 입을 맞추는데 그것이 우상숭배적이라면 구테여 가까이 가거나 만질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살전 5:22에서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이 그런 성도를 영접하여(17절) “그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고 성도는 그의 자녀가 된다”고 하셨습니다.(삼하 7:14) 이 말씀은 “순결한 자에게 하나님이 가까이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라”하신 것은 말씀의 신적 권위를 또 한 번 강조하신 것으로 창 17:1과 겔 10:5 말씀의 의미를 그대로 전하신 것입니다.
설교보충 16. 은혜받는 기회 (고후 6:1-2)
이 시간에는 “은혜받는 기회”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1. 본문 1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히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복으로 거저 주시는 모든 선물이라고 말씀드렸지만 특히 본문에서 강조하신 은혜는 구속의 은혜를 의미합니다. 고후 5:20-21에서 “성도가 십자가의 공로로 구속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은혜를 헛되히 받지 말아야 할 근거도 십자가의 은혜가 크고, 중하며 또 성도가 죄사함받고 하나님과 화목되어 영생하게 되는 은혜가 크기 때문에 거기에 근거하고 거기에 준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려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2. 2절에서 “은혜 베푸실 때”가 있고, “구원의 날”이 있다고 하셨으니까 그 때와 시기를 잘 선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천하의 범사에 때가 있고, 또 때와 기한은 하나님께 있으며 그 하나님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전 3:1, 행 1:7, 히 4:16) 따라서 성도들은 때와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1)그렇다면 “지금이 은혜 받을 때”란 무슨 뜻일까요? 여기의 “지금”은 구약 시대에 비할 때 신약 시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는 구약 시대에 비할 때 구약의 모형적 계시가 십자가로 성취되었고, 예수님으로 하나님을 보여 주셨으며 오순절 이후 성령님이 계속 상주하시고, 말씀 계시가 완성되었고, 또 구원 대상이 이방인들에게까지 확대되므로 큰 은혜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2)여기에서 저희들은 “지금”이란 용어를 신약 시대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개인에 대한 현재 순간이란 것을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인간은 내일 일을 모르는 만큼 현재만 자기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청년의 때를 놓치지 말라” 하셨고,(전 12:1) “조지 뮬러”는 70세에 순회 전도를 시작하여 17년을 더 일하였으며 그 사이에 여덟 번이나 세계를 일주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 병이 있어서 군대도 못 갔지만 보는 이들이 다 “일찍 죽을 것이라”고 했지만 현재를 선용하는 바람에 성공을 한 것입니다. “크래머”란 사람은 60세에 진리를 깨닫고 늙어서 믿은 후 진리를 위하여 순교를 하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젊은이나 노인이나 아무 차별없이 현재가 기회라는 것을 꼭 아셔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이 은혜주시는 기회를 어떻게 포착할 것입니까? 무슨 징조가 있을 수 있습니까?
1)고난이 있거나 어떤 목적 의식을 가지고 은혜의 필요를 느낄 때입니다. 상황에 따라서 “어떤 은혜가 있었으면”하고 느낄 때입니다. 그 때는 꼭 기도를 힘쓰십시오. 빌 2:13에 보시면 “하나님이 성도의 마음에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소원을 갖게 하시고 행하신다”고 하셨습니다.
2)사모하고 갈망하는 마음을 가질 때입니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고 주린 자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시 107:9, 애 3:25) 이 경우에도 말씀과 기도로 사모할 수 있습니다.
3)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에게 접근해 올 때입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나 고넬료 가족이나 루디아의 집이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지요. 성경 말씀이 곧 은혜의 방편입니다. 성도가 예배당 강단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것은 그 강단에서 진리의 말씀이 은혜로 선포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선포되지 않을 때는 강단을 바라 볼 필요가 없겠지요.
4)회개하는 마음을 주실 때입니다. 시 34:18에서 “하나님은 마음이 상하고 통회하는 자를 살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회개의 심정 갖는 것이 곧 은혜받는 기회입니다.
5)자기 앞에 헌신적 일감이 생길 때 하나님이 “작은 일에 충성된 자에게 큰 것으로 맡기시는 기회”인 줄로 아시고 순종, 봉사하는 것입니다.(눅 16:10) 하나님은 성도를 쓰시려 할 때 은혜를 주시고 쓰시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그러하지 않았습니까?(출 7:1) 베드로도 그러하였지요.(행 3:6)
6)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속히 은혜주실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호 6:1에 보시면 “하나님이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신다” 하셨고, 또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이며....이틀 후에 살리고 3일 후에 일으키신다”하신 것은 징계로 치셧으니까 속히 깨닫게 하시고 은혜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7)자신을 비울 때인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을 주시는 것도 그 뜻입니다. 자기 부정, 자기의 생명, 자기의 육체, 자기의 삶, 자기의 계획과 취미까지 전부 하나님께 드리고, 자기라는 텅 빈 집을 만들었을 때 주님이 그 빈 집에 찾아오셔서 주인 역할을 해 주실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 속에 자기와 다른 것들(세속적)이 가득 차 있으면 은혜의 길이 멀어지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약 4:4)
4. 은혜 받으려는 자세가 어떠하여야 합니까?
1)뱃사공이 바람 불 때 돛을 달아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는 시종 겸손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되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벧전 5:5)
2)순종하는 자세를 취하여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에게 사명적 은혜가 임하였을 때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사 6:8) 하셨고, 히 3:7에서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요나는 거역하다가 풍파를 만났으며 모세와 베드로, 바울도 주님이 사명을 주실 때 순종하여 큰 일을 하였습니다.
3)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뺏고 하나님은 자기를 향하여 전심을 기울이는 자에게 능력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대하 16:9) 믿음으로 구하는 일과(약 1:16) 읽는 것과 전하는 일에 착념하는 것과(딤전 4:13) 충성하는 자세를 늦추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상당한 준비와 노력이 있을 때 하나님이 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개인이 은혜를 받는 것도 그렇고 교회가 은혜를 받는 것도 그렇습니다. 산모가 해산할 때가 되면 저절로 힘이 주어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도 은혜주실 때가 되면 부흥이 될 수 있습니다. 증경 총회장이신 선배 최기채 목사님이 그의 시무하시는 동명교회가 부흥될 때 자신은 그만한 기대를 못하였는데 감당 못할 정도로 교인이 들어오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이 바로 본문 2절 말씀처럼 “은혜를 베풀 때에 너를 도왔다”하신 말씀의 증거입니다. 이런 증거가 있을 때 노력을 멈추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은혜를 받는 기회에 대한 것과 은혜받을 자의 자세에 대한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설교보충 17. 은혜를 받자 (고후 6:1-3)
1. 성도는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받은 은혜도 많지만 부족한 것도 많기 때문에 은혜를 더 받아야 합니다. 본문에서도 “은혜를 받으라” 하셨지만 히 4:16과 12:15에서도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것과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은혜란 늘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복입니다.(요 1:14) 이 복에는 신령한 복도 있고, 일반적인 복도 있으며 또 받은 복, 누리는 복, 받을 복이 있으니 잘 분별하여야 할 것입니다.
1)신령한 복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이고, 영원히 누리는 복입니다. 믿음, 독생자, 성령님, 성경, 속죄, 양자, 부활, 천국, 상급, 성령 충만, 교회로부터 받는 신령한 은혜 등인데 여기에서 이미 받은 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 성령, 말씀, 속죄, 양자, 또 영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 등이고, 더 받아야 할 은혜는 성령 충만과 성화됨과 충성된 생활 등이라 할 것입니다.
2)일반적인 복은 만물을 주신 은혜, 물질 공급, 건강, 사회적 축복 및 현실 생활에 수반하는 모든 것입니다. 현재까지 살아온 것이 다 일반적 은총을 받은 결과입니다. 그러나 더 받아야 할 것은 이웃까지 함께 누리는 풍족한 생활과 성도 인격의 도덕적 변화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 중에 예수님을 많이 닮고 예수님의 향기를 많이 발하면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볼 수 있으나 아직도 인간 냄새와 현실성이 강하면 은혜를 더 받아야 할 자라고 판단하여도 과히 틀린 것은 아닐 것입니다.
3)또 본문에서는 은혜를 받되 “헛되이 받지 말라”하셨으니까 마땅히 은혜를 받고 또 은혜받은 값을 헛되지 않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2. 무슨 은혜를 더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성도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1)우선 말씀에 끌리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경과의 관계로 믿는다면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말씀에 사로 잡혀 시간을 보내는 것이 가장 고상한 은혜 생활이라고 아셔야 합니다.(행 17:11) 그것이 곧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외출 중에 있을 때도 “빨리 집에 가서 성경을 상고해야지”하는 마음 때문에 조급하고 또 뉴스 시간에 뉴스를 들을 계획을 가졌으나 말씀 상고에 몰두하다 보면 두 번, 세 번 씩 뉴스 시간을 놓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가장 취미롭게 여기는 상태요, 말씀을 꿀처럼 사모하는 일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시 119:97,103)
2)하나님을 항상 의식하고 기도하는 마음을 항상 갖는 은혜입니다. 성도가 기도하는 마음을 항상 갖는 것이 곧 쉬지 않고 기도하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살전 5:17) 기도에 끌리고 기도에 간절함을 나타내는 심정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단 9:3,23) 말씀과 기도는 은혜받는 방법의 기본 요소입니다.
3)도덕적 결함을 보충하는 은혜입니다. 조급한 성격, 말의 실수, 욕심, 교만, 명예욕, 현세욕, 자기 고집 등 십자가에 못박지 못한 인간 정욕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없애고 예수님의 인격을 가까이 닮는 것이 도덕성 회복입니다.
4)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기 위하여 봉사성을 키우는 은혜입니다. 봉사성이 많은 성도가 있는가 하면 아쉽게도 부족하거나 봉사하는 방법을 모르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어떤 교회 여집사는 구역 예배 때 교인을 수송할 목적으로 차를 산 경우가 있고, 어떤 이는 충실하지 않은 선물을 골라서 교역자를 섬기는 이도 있습니다. 따라서 알맞는 봉사를 잘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5)성도 간의 친교와 화해를 잘 하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성도의 세계는 자유로운 친교와 화목이 있어야 합니다. 고후 5:18에 보시면 성도에게 “화목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세계가 혼인 잔칫집 같고 “선하고 아름답다”는 칭찬을 받을 만큼(시 133:1) 이루어져야 하는데 여기에는 친교와 화목을 잘 이루는 은사자가 있어야 합니다. 악한 것이 없어도 말을 너무 안 하거나 친교를 잘 못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나 이런 사람들과 잘 동화되는 것도 은혜에 속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선 이 시간에는 “은혜를 받자”는 제목 아래 은혜의 성격과 받아야 할 은혜 다섯 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말씀과 기도에 끌리는 은혜, 도덕적 결함을 보충하는 은혜,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기 위하여 봉사력을 키우는 은혜, 또 성도와의 친교, 화해를 이루는 은혜받기를 기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은혜받는 방법이 무엇입니까?(이 방법은 성경의 사례도 많습니다. 행 8:1-40, 9:1-18) 필자의 경험으로 말씀드리면
1)우선 은혜받을 필요를 느끼고 방법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필자는 청년 시절에 믿음 생활을 좀 더 뜨겁게 할 필요를 느끼고 기도하는 전도사님께 은혜받는 방법을 물었더니 “새벽기도 출석과 성경 읽는 일에 힘쓰라”하여 그 일을 결심하고 또 결심한 것을 잘 시행할 것을 서원하듯 기도하고 시행하였습니다. 다른 성도보다 먼저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고 제일 늦게 나온 후 또 집에 오면 성경 읽기에 몰두하였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밥상이 들어오면 늘 읽던 성경을 끝가지 읽고 식사를 하였습니다.
2)약 2개월 후에 찬송을 부르다가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슬픈 마음이 생기고 눈물이 나기 시작하였는데 그 상태가 약 1개월 계속 되었고, 죄에 대하여 두려운 생각이 들고 무슨 일이나 적은 실수만 생겨도 용서를 구하며 회개하였습니다.
3)그 후부터 하나님의 인도가 따르는 것을 체험하였고, 그 인도에 따라 군 생활과 신학 공부를 하고 교회의 일도 맡았으며 목사가 되고 지금까지도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아 생활하고 있습니다. 제가 받은 은혜라면 30여년 목사 생활을 겨우 하면서 그 동안의 경험과 신앙 양식에 대한 메시지를 요약하는 일인데 필자는 이것이 큰 교회에서 목회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큰 은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주신다”하신 말씀이나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뺏는다”(마 7:3, 11:12)하신 말씀이 다 노력하라는 말씀입니다. 노력 없이는 은혜의 발전도 없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각자 형편에 알맞는대로 노력하여 더 큰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설교보충 18.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고후 6:1-2)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받은 은혜가 많았으면서도 교회에 문제들을 많이 일으키므로 은혜가 헛되어진 것을 지적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전 12장에 보시면 많은 은사를 주셨다는 말씀이 있고, 일반 은총에 대하여도 풍족한 은총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는 개인적으로 단체적으로 역시 문제가 많아서 복음사역자들을 퍽 괴롭게 하였습니다. 성도들은 먼저 받은 은혜와 못 받은 은혜를 잘 분별하셔야 합니다. 먼저 일반 은총과 신령한 은혜에 대하여 받은 것을 아시고, 꼭 받아야 할 은혜가 무엇인지도 잘 아셔야 할 것입니다. 모든 은사가 많아도 사랑이 없으면 헛되듯이 무엇이 없으면 은혜가 헛된 것인지를 살펴보셔야 할 것입니다.
1.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았다 하여도 예수 닮은 것이 부족하면 은혜를 헛되이 받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우리 교회 나이가 지난 주일이 26세 되는 날이었습니다.) 26세 된 사람이 철이 안 들었다면 그가 교육 받은 효력이 헛것이 되겠지요. 이와 같이 오래 된 교회에 예수님 닮은 사람이 많지 않다면 그 동안 받은 은혜에 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 예수 닮은 성도가 많아지는데는 바로 “나 개인이 예수님을 얼마나 닮아 있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롬 8:29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여 구원하시는 것은 “아들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이라” 하셨고, 갈 4:19에서는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예수님의 인격을 닮은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2. 만족과 자유를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시고 나는 죄사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인즉 부족함이 없다”(시 23:1)는 확신 속에 살아야 할 것입니다. 구약의 수넴 여인은 “나는 내 백성 중에 거하므로 장관에게 구할 것이 없다”하였고,(왕하 4:13) 바울사도는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한다”고 하셨습니다.(롬 5:3-4) 또 요 8:32에서는 “진리를 알고 자유를 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자유를 누릴 때 비로소 은혜가 헛되지 않는 것입니다. 가난과 비천의 염려에서 해방되고 고통과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며 죄와 마귀의 속박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난, 비천, 고통, 죽음을 다 당하신 분입니다. 십자가는 죄에서 해방시키고, 부활은 죽음에서 해방시키며 상급은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서 해방시키고, 윗사람을 섬기고 복종해야 하는 속박은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종의 형상이 해방시켜 주는 것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상전의 유세가 아니꼬와서 회사에 취직을 못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엡 6:5에 보시면 “육체의 상전을 그리스도 받들 듯 하라”하셨고, 딛 2:9에서는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기 위하여 종이 상전에게 순종하고 충성하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믿는 성도는 어떤 형편에서나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나 자유 얻었네 너 자유 얻었네”하는 찬송이 바로 그런 뜻이 아닙니까?
3. 사랑의 실천입니다. “은혜를 받았다”하면서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사랑 실천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고 최고의 은사입니다. 자신을 부정하고 죽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에 심취되고 천국의 소망을 바라보지 않으면 참으로 실천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 실천에는 단계가 있어야 합니다. 금방 형제를 위하여 내 목숨 버리는 것이 쉽겠습니까? 그래서 이 사랑을 실천하시려면 ①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뼈에 사무치도록 느끼셔야 하고 ② 매일 매일 나 자신을 죽이는 연습을 하셔야 하며 ③ 다른 사람을 간섭하기 전에 먼저 내가 주님의 형상을 닮아야 하고 ④ 남에게 손해 안 주는 일부터 하고 ⑤ 남에게 조금씩 덕을 베푸는 일을 하다가 ⑥ 나중에 진정한 사랑의 궤도에 올라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은혜가 헛되지 않기 위하여 주님의 형상을 닮고 만족을 느끼며 자유를 누리시고 사랑 실천자가 되어서 큰 영광을 돌리셔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19. 교회가 생산할 것 (고후 6:1-10)
본문 1절에 보시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란 말씀이 있습니다. 이 뜻은 하나님의 사업체에서 동업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업체는 교회이고, 따라서 교회를 기업체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교회를 기업체로 생각한 것은 결코 세속의 의미를 나타내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교회가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을 생산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하나님이 자기의 선민(교회)을 기업이라고 말씀하신 곳이 있습니다. “기업의 백성을 삼으셨다”(신 4:20), “나의 산업, 나의 기업, 나의 낙토, 포도원이라”라고 하셨습니다.(삼하 20:19, 시 79:1, 94:5, 렘 12:7,8,10) 기업체는 어떤 종류이든지 제품을 생산하여 돈을 버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기업체인 교회도 좋은 제품을 생산하여야 할 것입니다.
1. 중요한 제품이 말씀 생산입니다. 성경을 더 기록한다는 뜻이 아니고, 주신 성경을 풀어 증거한다는 뜻입니다. 말씀 생산은 곧 원료 생산입니다. 늘 말씀드렸지만 성경은 하나님이시고, 성경은 믿을 근거이며 구원의 지혜와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시고, 나가서는 실천의 능력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다”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히 4:12) 교회가 말씀을 생산하는 기업체라면 우리 교회야말로 말씀 생산을 많이 하는 교회입니다. 저는 한 주간에 약 20편의 설교, 강해문을 씁니다. 성경을 잘 풀어 설명하고 공급하며 성도들로 하여금 깨닫도록 가르치는 사명이 교회에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을 생산하는 기업체란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생산하는 단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는 성도의 기도를 통해서 주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항상 기도하라” 하셨고, “시험에 들지 않기를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개인과 단체가 기도를 많이 할 때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시 121:7에 보시면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떻게 면해 주실까요? 우선 성경에서 계 12:14-17을 보시면 “사탄을 상징하는 용이 교회를 상징하는 여자를 핍박하는데 용이 여자를 죽이기 위하여 입으로 물을 토하여 강을 만들면 틀림없이 그 여자가 그 강물에 떠내려 갈 것이라하여 많은 물을 토해냈는데 땅이 입을 벌려 그 물을 먹어주므로 강물이 창일해지지 않아서 헛탕을 쳤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 성도를 사망의 위기에서 보호해 주시는 섭리를 뜻하는 것입니다. 삼상 23:28에 보시면 “사울왕은 다윗을 죽이기 위하여 많은 군사로 다윗을 수색하게 하였고 다윗에게 접근하는 중인데 별안간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략해 와서 다윗 쫓기를 그치니 비로소 다윗이 도망할 기회를 얻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런 보호의 섭리는 얼마든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구 신천교회 박무순 권사가 마산에 사는 며느리의 해산관을 해 주고 세 살짜리 손자를 데리고 대구로 오게 되었습니다. 삼랑진에서 대구로 오는 특급 기차를 타고 오는데 별안간 손자가 보채면서 우니까 그 아이를 업고 차 안에서 산책을 나왔습니다. 7호차 중간 좌석에서 6호차로 온 것입니다. 6호차로 오자 청도역에서 내리는 사람이 있고, 좌석이 비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잠시 앉았는데 그 차가 경산 대구 사이에서 큰 충돌사고를 일으킨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고에 죽지 않고 나와서 자기가 앉았던 7호차를 본즉 완전히 대파되어 많은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기도 생산이 없으면 하나님이 이렇게 보호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성도를 보호하시는 은혜가 특별한 것을 꼭 체험하셔야 할 것입니다.
3. 교회 기업체는 사랑을 생산하여야 합니다. 인간 세계에서는 사랑의 값이 제일 클 것입니다. 사랑에 대하여 더 이상 설명드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물론 성도의 주인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기의 피로 값을 주시고 교회를 사셨다”(행 20:28) 하셨고, 또 성도들도 자기의 희생으로 구속하셨습니다. 그런데 현실 교회는 사랑 생산에 소극적일 뿐 아니라 너무 이기주의가 심한 것을 회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 부흥되는 것을 싫어하면서 자기 교회의 부흥만 욕심내는 성도와 교역자가 없지 않은 것입니다. 교회는 반드시 모든 이웃에게도 사랑을 베풀고 특히 교회의 이기주의를 떠나는 일에도 사랑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교회가 되고 말씀 전파와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을 많이 생산하는 산업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설교보충 20. 마음을 넓히라 (고후 6:11-13)
이 시간에는 본문 말씀에 근거하여 “마음을 넓히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바울사도와 그 동료자들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입이 열려져 있고 마음도 넓혀져 있다”고 하였습니다. ① “입이 열려져 있다”는 뜻은 “무엇이나 가리울 것 없이 말하고 의논할 수 있는 자세를 취할 수 있다”는 뜻이고, ② “마음이 넓혀 있다”는 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아량있게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시게 되었느냐?하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사도를 불신하는 풍조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고린도교회 안에 파쟁이 일어난 중에 거짓 선지자들(유대주의자들)이 바울사도를 비난하는 말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 대하여 기탄없이 말할 수 있는 입이 열려 있고, 또 포용할 수 있는 마음도 열려 있으니 성도들도 보답하는 마음으로 같이 “마음을 넓히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 12절에서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령에서 좁아진 것이라”는 말씀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마음 닫힘이 (넓지 못한 마음을 가진 원인이) 바울사도 측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 자신의 심령(마음)에서 좁게 가진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는 누구를 대하든지 열린 입과 넓은 마음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1. 복음 사역자들이 “열린 입”을 가졌다는 점에 대하여 이 말씀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기탄없이 말할 수 있는 입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찬송하고 기도하며 전도하고 가르치는 신령한 입도 가졌다”는 뜻입니다. 롬 10:15에서는 “전도하는 자의 발도 아름답다”고 하셨는데 찬송하고 기도하며 전도하고 가르치는 입이야 더 아름답지 않겠습니까?(롬 11:16 제사하는 첫 곡식 가루가 거룩하면 그 떡도 거룩함) 여러분들에게도 이 신령한 입이 열려져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성령님께서 열어주셔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 6:6을 보시면 “이사야의 입을 성령의 숯불로 지져주셨다” 하셨고, 사 50:4에서는 “하나님이 학자의 혀를 주셔야만 곤핍한 자를 말로 도와줄 수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저희들도 찬송의 입, 기도의 입, 감사의 입, 전도의 입, 안위의 말을 전하는 입이 활짝 열려지기를 기도하셔야 하겠습니다. 좋은 말을 할 수 있는 입이 열리기 위해서는 기도 외에도 몇 가지 힘써야 할 일이 있습니다. ① “학자와 같은 지식을 소유함이 좋다”고 사 50:4에서 말씀하셨고, ② “항상 말할 것을 준비하라”고 벧전 3:15에서 말씀하셨으며 ③ 참된 말만 하되(엡 4:25)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같이 하라”(벧전 4:11) 하셨고, ④ 함부로 입을 열거나(전 5:2) 급한 마음으로 말하지 말고 듣기는 속히 할지라도 말하기는 더디 하라(약 1:19)고 하신 것입니다. 여하튼 신령하고 덕스러운 입이 크게 열려져야 하겠습니다.
2.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1)넓은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연구해보나 마나 “사랑의 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고전 13장에서 “사랑의 성격”을 말씀하셨지요. 따라서 사랑의 마음은 욕심, 투기, 자랑이 없고, 교만, 무례, 성냄이 없으며 악함이 없고 불의를 기뻐함도 없으니 참으로 순결한 마음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또 무엇이 있느냐?하면 인내, 온유가 있고, 믿어주는 것이 있으며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는 욕심은 없으니까 자동적으로 남을 유익하게 하는 덕스러운 일만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사랑의 최고봉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 독생자의 희생을 통하여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으로 최고로 사랑의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넓은 마음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2)성도가 이 마음을 가지면 사랑의 표현만 나타낼 것입니다. 사랑의 색깔은 빨갛다고 비유할 때 빨간 안경을 쓰면 모든 사물이 다 빨갛게 보일 것입니다. 반대로 사랑없는 마음의 색깔을 검은 색으로 비유할 때 검은 안경을 쓰면 모든 사물이 검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감사의 마음을 가지면 매사가 감사하고 희망의 마음을 가지면 매사를 희망있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군인 부대의 구호가 “되게 하라”는 것이기 때문에 굉장히 어려운 것도 성취시키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성도가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는다면 거의 안 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성도는 노력이나 투자나 모험을 할 체를 하지 않고 안일한 입장에서 “안된다. 못한다”하면서 부정적 마음을 갖는다면 매사가 다 어렵게만 여겨질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가 사랑의 넓은 마음을 가지면 우리 앞에 많은 부조리가 나타나도 그것을 이해하는 마음으로 여겨주게 되고 참는 마음으로 기다려 주게 되며 희망을 가져주는 마음으로 믿어주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나를 괴롭혔을 때 사랑의 넓은 마음을 가진 성도가 그것을 어떻게 포용할 것인가?할 때 ① “내가 손해를 보는 것은 저 사람의 탓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 앞에서의 부족함 때문에 하나님이 저 사람을 통해서 나를 징계하심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삼하 16:10에 근거한 것입니다. ② 상대방이 나를 해롭게 하고 내 앞에 죄를 범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그 범죄하는 사람을 증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죄인을 미워하면 나도 하나님 앞에서 “미워하는 악”을 범하는 죄인이 되기 때문에 피해는 당하지만 사람은 미워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심판하는 권세가 하나님께만 있다”고 요 5:22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③ 악한 자의 입장을 이해하는 상태로 생각해줘야 하는 것입니다. “오죽 배가 고팠으면 도적질을 했을까? 어쩌다 순간적으로 실수했겠지. 급하게 말을 하다가 실수했겠지. 고의적으로 그래 본 것이겠지. 전달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겠지. 나도 자주 넘어지는데”하는 식으로 자기의 연약을 생각하면서 이해를 하면 마음에 안정이 오고 분한 생각이 많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④ 사랑하는 마음은 상대방을 믿어주고 바라주는 것입니다.(소망) 저는 제 자식이 “잘못한다”는 말을 들으면 아직 인생 경험이 적으니까 저렇지 철들면 좀 나아지겠지 저래도 나중에야 잘 되겠지 내가 교육을 소홀히 해서 그렇지 하고 믿어주고 바라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 모든 원수 같은 사람에게도 그같이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⑤ 사랑의 마음은 포용의 마음입니다. 마치 바닷물이 강물을 삼켜도 표를 내지 않는 것 같고 큰 배가 풍랑에 요동하지 않는 것처럼 넓은 마음은 그만큼 포용성이 강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⑥ 사랑은 성내지 않는 것입니다. 성내면 대인 관계는 다 망가지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는 19 자녀를 키운 어머니로 한 번도 혈기 낸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자기 자녀 하나가 무엇을 알기 위하여 20번을 질문한 적이 있는데 그 어머니는 꼭 같은 질문에 꼭 같은 대답을 20번을 했다는 것입니다. 곁에서 보던 자가 너무 지루해서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하니까 “중간에 대답을 피하면 그 전에 대답한 것이 헛되어지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하더란 것입니다.
아무쪼록 저희들은 예수님과 바울사도의 심정을 본받아서 ① 신령한 입이 열리고 ② 사랑의 마음이 넓어지는 성도가 되셔야 하겠습니다. 사랑의 마음은 이해하는 마음이고, 포용하는 마음이며 참는 마음이고, 희망을 갖게 하고 믿어주는 마음입니다.
설교보충 21. 성별된 생활 (고후 6:14-18
이 시간에는 “성별된 생활”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성도란 본래 “구별됨을 받은 자”란 뜻으로 죄와 마귀와 세속에 거한 죄 많은 인생을 하나님이 선택 구별하심으로 특수한 사람이 되게 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죄 많은 상태에서 특수해졌다는 내용은 ①마귀의 노예가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었고, ② 불결이 성결로 바뀌였으며 ③ 유한한 세속에서 신령하고 영원한 천국의 백성이 된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 만큼 구별된 생활이 뒤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1. 지금 읽은 본문 말씀은 성도가 “특별히 구별된 생활”을 힘써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따라서 오늘 졸업을 하는 가족들은 교회에서 “믿음 생활을 배우는 목적”이 “성도의 구별된 생활을 하게 하는데 있음”을 꼭 깨달으셔서 더욱 성별된 생활을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곧 어느 때 어느 장소를 물론하고 불신앙의 사람들 사이에서 신자의 생활이 샛별같이 두드러지게 빛날 수 있어야 되고, 또 특수함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본문 14절을 보시면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믿지 않는 자의 형편과 믿는 자의 형편을 대조적으로 설명하셨는데 믿는 자의 형편은 신앙이요, 의와 빛이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성전이라면 불신자의 형편은 불신앙이요, 불법과 어두움이며 벨리알이요, 우상의 전당이니 이 두 가지 상황은 완전히 서로 일치할 수가 없는 것인 만큼 이 두 가지 사이에서 멍에를 같이 하지도 말고 함께 하거나 사귀거나 조화, 상관시키지도 말며 만일 이들을 상관하다가 혼돈과 범죄의 위험이 올 때는 차라리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들을 만지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성전이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2. 그러면 믿는 성도가 죄 많은 세상에 살면서 불신앙의 세계와 조화, 상관할 수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말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성질상으로 악에 동화되지 말며 또 건덕에 손해되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성도를 가르쳐서 “빛과 소금”이라고 하셨는데 빛은 어둠을 상대하는 것이고, 빛이 어둠을 상대하여 어두움을 물리칠지언정 어둠에 먹히는 일이 없고, 또 소금이 마땅히 부패성있는 물질을 상대로 하되 소금의 짠 성분을 변함없이 지니고 있는 것처럼 성도가 어떤 환경에서나 성도의 본질을 잃지 말고, 건덕에까지 손해됨이 없도록 처신할 것을 교훈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자칫하면 이 말씀을 악을 떠난 은둔 생활로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셔야 할 것은 예수님이 거룩하신 분으로 죄악 세상에 오신 것이 기독교이기 때문에 성도는 악으로 뛰어들어가서 의의 역군으로 싸우는 군병이요, 악에 대한 도피자는 결코 아닌 것입니다. 마치 모세가 미디안에서 연단을 받고 고난 당하는 백성들의 세계로 들어간 것과 배드로가 변화산에서 즐거운 광경을 맛본 후에 (그 곳에 머물기를 좋아하는 마음은 있었으나) 산 아래로 내려오게 된 것처럼 성도는 언제나 악의 세계에서 의의 사자로 일해야 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비유로 설명한다면 배가 물을 접촉하나 그 물이 배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용납지 않고 물과 기름이 함께 있을 수는 있으나 그 성분상으로 혼동되지 않는 것 같으며 또 닭과 오리가 한 울타리 안에서 살 수는 있으나 닭이 오리를 닮을 수 없는 것과 같이 행하라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죄악 세상에 오셔서 한결같은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가 없으신 것처럼 죄악 세상에서 죄에 물들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신자가 불의한 세계에 동참했다가 빛과 소금처럼 영광스런 사명을 잘 하면 좋지만 만일에라도 성질상으로 악에 동화하게 될 때는 차라리 나와서 따로 있고, 그 세계에 가까이 접촉하지 않음이 더욱 현명한 것입니다.
3. 그러면 어떤 면에 특별한 구별이 있어야 할까요?할 때 대략 네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신앙성에 대하여 성도다운 바른 신앙의 입장을 확고히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무조건 불신앙적인 것은 다 배격하여야 되는데 문제는 같은 성경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을지라도 그 해석과 교훈에 따라 정통 신학도 나오고 불건전한 신학도 나오며 이단도 나오고 교파도 나오는 것이니 만큼 성도는 여기에 대한 바른 신앙의 확신을 가져서 어떤 경우에서라도 내가 가진 바른 신앙이 불신앙과 불건전한 신앙에서 뚜렷이 구별되도록 신앙성의 성별된 자세를 취하여야 할 것이요
2)행위성에 대하여서도 성도다운 바른 입장을 확고히 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14절에 보시면 “의와 불법이 또 빛과 어둠이 사귀지 못한다”하셨으니까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나 의와 정도에 확고하게 서는 구별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은 그 행동표준이 자기 자율에 있기 때문에 물질이나 명예나 현세적 실리 타산에 따라 무조건 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행동 표준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서라도 진리대로만 하고 신앙적으로만 한다는 뚜렷한 원칙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많은 사람이 불법을 행한다 하더라도 “죄되는 것이면 못한다”하고 혼자라도 행위의 정당성으로 구별된 자세를 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3)교제성에 대한 성도다운 바른 입장을 확고히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15절에 보시면 “그리스도와 벨리알은 조화될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닮은 인격자와 마귀를 닮은 사람 사이에 분별있는 교제를 가지라는 교훈인 것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사람은 다 죄인이지만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사람과 마귀를 닮으려는 사람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도는 하나님과의 우선적 교제가 필요한 것이고, 마귀에게 속한 사람들은 교제의 분별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여러 사람들을 교제할 때 전도를 위한 교제라든지 또는 공동체적 책임을 위한 교제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시간 교제하다보면 혼돈의 위험이 올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속히 교제를 멀리함이 좋은 것입니다. 만일 교제를 위한 교제를 장시간했다고 하면 그만큼 성도에게는 영적 손실이 오기 때문이고, 또 도덕적 손실도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성경은 이방 혼인을 금한 것입니다. 불신자와의 친교를 혼인할 만큼 가까이 했다고 할 때에 따라오는 영적 손실이 큰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딛 3:9, 요2 10)
4)장소성에 대한 구별도 확실하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16절에서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은 일치될 수 없다”하셨는데 성전만큼 거룩한 곳이 없고, 우상의 제단 만큼 역겨운 장소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장소나 행사의 모임에 가서 유익할 것이 있고, 무익할 것이 있으며 때로는 부덕할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상의 제단 앞에 제사 행위자들과 함께 동참했다”하면 무익한 일이요, 큰 문제로 여길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옳은 장소 옳은 모임에만 참석하도록 장소성의 구별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는 신앙성, 행위성, 교제성, 장소성에 각별한 구별이 있도록 힘쓰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