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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북 초등학교 설립 ( 추억 동문 사진 주세요추가 기록 2)
일제 침략기인 1924년 7월1일 운천리334-1번지 에 일본인에 의해 공립보통학교 4년제로 4학급 210명의 학생으로 개교 하였다.
8.15해방 이후에는 복한의 인민학교 로 6.25 동란 이후 1953년에 수복지구 되면서 현 영북국민학교가 설립 되였다. P 1
수복이 되자 영북면에 거주하면 교육 독지가 김상준씨는 어린이 교육에 뜻을 같이하는 주민 및 미국 제3사단 제15연대 의 협조로 운천 3리에 7개 교실을 신축하고 임시교장이 되어 민간인 4명 한국군 제 5군단에서 군인 2명을 지원 받아 6명의 교사를 구성하여 1954년 5월10일 부터 아동교육을 준비, 1954년 7월 1일 정부에 의해 정식으로 개교 하였다. P 2 (역사 주인공에 인적사항 정보 공유 부탁 드립니다. "주인공 찾기"
1955년 1월20일 초대교장 성낙성 씨가 부임 1956년 10월에는 정부에 지원하에 영북면 운천리 342-2번지에 본동 7개 교실, 별관 6개 교실을 신축하는 등 현재의 영북 국민학교 교육의 기틀이 마련 되였다.
발전
1950년 영북면은 군 전략상 요충지로 많은 군부대 및 주민들의 유임에 따라 1961년도의 경우 1,700명의 재학생이 당해 학년도가 바뀌기도 전에 4,000명이라는 학생수로 증가함에 따라1970년 3월 1일 학교가 분리되어 운암국민학교를 개교하는 등 커다란 학교의 변화가 있었다.
1982년부터 군부대 철수에 따른 학생수 감소로 운암국민학교가 폐교되어 본교에 통학된것을 비롯 1993년 에는 대회산분교가,1995년2월28일,
에는 보광분교와 산호국교가 폐교, 복교통합되는 등 또 하나의 큰 변화가 있었다.
1995년 3월 1일 현재 본교는 수복 후 제41회(통산제63회)의 개교 역사에 총 9,220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포천군 북부지역의 중심지 학교로 성장하고 있다. 특히 본교는 제15대 이남준 교장이 부임하여 교육철학인 세계인류 민주시민 양성을 실천하는 미래 지향적 교육자로서 어린이들의 시청각 교육을3원방송인 방송 시설, 27하급 전교실의 녹화 재생기 설치 등으로 완벽한 시청각 교육의 실천 및 학교의 공원화, 2년차에 걸친 경기도교육청 지정 병설유치원의 제5차 교워과정의 편성ㆍ운영에 대한 연구 등으로 경기도 교육의 내실에공헌하였다.
(1992년 3월1일 이전 자료.또 다른 확실자료 기다립니다. 2024년 5월 26일 임영선알림) P 3
학교 발전에 공헌한 분들
여기 기록된 분은 학교의 교육활동 지원에 남다른 성의를 베플어 주신 분이다. 반면에 자료 수집이나 남아있는 기록 등이 미진하여 많은 분들이 본기록에서 누락된 것은 매우 유감슨럽게 생각하며, 앞으로 수정 . 부완할 기회에 추가 등재키로 하겠다.(정보 부탁합니다.)P4
포천군 영북면 자일리 105번지에서 출생.1942년 심상소학교 6 졸업 1950년 국민대학교 2학련 편입ㆍ중퇴 6ㆍ25 동란 이후 1953년에 고향인 수복지 영북면에 돌아와 어린이들의 교육시설이 모두 없어진 것을안타깝게여겨 어린이들 교육에 뜻을 같이하는 지역 유지 및 미군제3사단 제15연대의협조를 받아 현재의 영북면 시장 근처에 가교사를 설치하고 민간인 4명, 군인2명 등6명의 교사를 확보하여 어린이들 교육을 시작하였다. 당시 본인의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불구 하고 임시 학교 운영자로서 학교의 개교 및 교육 활동 기반 조성에크게 이바지하였다.(정말 대단히 감사합니다. 개교100회 졸업생 전원 일동) P 5
교원 및 학생수
1대 성락성 교장 1955. 1. 20~1956. 9.30. 학생수 665 명
2대 김남손 교장 1956.10. 1~1959. 9.29. 학생수1,054명
3대 홍영식 교장 1959. 9.30.~1961. 5. 7. 학생수 1,700명
4대 이진수 교장 1961. 5. 8.~1961.10.29. 학생수 1,700명
5대 박광윤 교장 1961.10.30.~1967. 2.28. 학생수 4.041명
6대 김덕준 교장 1967. 3. 1.~1968. 5.31. 학생수 4,365명
7대 김천은 교장 1968. 6. 1.~1970. 8.31. 학생수 2,256명
8대 이효중 교장 1970. 9. 1.~1973. 8.31. 학생수1,464 명
9대 김병하 교장 1973. 9. 1~1974. 2.28. 학생수 1,414명
10대 한순보교장 1973. 3. 1~1976. 8.31 학생수 1,312 명
11대 남태우교장 1976. 9. 1.~1983. 9. 1. 학생수 1,721명
12대 정몽수교장 1983. 9. 1.~1987. 8.31. 학생수 1,314명
13대 심현구교장 1987. 9. 1.~1989. 8.31. 학생수 1.,256명
14대 송주한교장 1989. 9. 1.~1992. 2.28. 학생수 1,155며
15대 이남준교장 1992. 3. 1.~ 현 재 학생수 1,084명
조직상황
학교체육진흥회장
1대 1981년 황영옥
2대 1982년 김순찬
3대 1983년 황영옥
4대 84~85 최양환
5대 86~87 김진세
6대 88~89 심용태
7대 90~92 류흥섭
8대 93~94 전상수
9대 95~ 이부휘
영북국민학교 대회산분교장
(사진)
■ 경기도 포천군 영북면 대회산리 453
1. 설립과 폐교
1960년대 포천관내 수복지역에 세워진 분교나 국민학교 대부분은 1950년대말 수복지역 개발로 지역주민의 입주에 의해서 분교에서 국민학교의 설립과정을 거치게 된다.
대회산국민학교도 1962년에 영북국민학교 대회산분실로 출발하였다. 2개 교실을 준공하면서 2개 학급, 그 이듬해 다시 미 제3연대의 원조로 가교사 2실을 준공하면서 4개 학급(4개 학년 2복식)을 운영하는 분교장으로 개교를 보았다. 1969년 3월에는 6학급 정규학교로 승격하였다.
그 후 정문을 세우고 수목 울타리를 조성하는 등 초대 이민섭 교장과 교사, 학생들은 '내학교 가꾸기' 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후 1980년대에 들어 사회 발전에 따른 이농현상과 산아 제한의 영향을 받아 서서히 인구가 감소되면서 1983년에는 다시 영북국민학교 대회산분교로 격하되어 1985년에는 3학급 편성으로 2복식 분교가 되었다. 이 때 재학생이 40명 내외에 이르고 계속 분교로서 유지되다가 당국의 통합정책에 따라 주민들의 여론을 수렴하고 영북국민학교에 폐교·통합이 되므로 대회산분교는 분실 개교 이래 30년간 그 명맥을 이어왔으며, 본교 재학생들은 '통학버스' 로서 5km 떨어진 본교로 통학하게 되었다. 폐교·통합은 1993년 2월에 이루어졌다.
2. 학교연혁
· 1962. 6. 20. 영북국민학교 대회산 분실 개교
· 1962. 9. 5. 임시 2개 교실 준공
· 1963. 9. 15. 미 제3연대 원조로 임시교사 2실 준공
· 1968. 3. 1. 4학급 편성
· 1968. 12. 15. 2개 정규교실 준공
· 1969. 3. 1. 대회산국민학교 승격 인가 (6학급)
· 1969. 3. 1. 초대 이민섭 교장 취임
· 1969. 3. 2. 개교식 거행
· 1969. 3. 9. 교육좌담회 개최 (유지학부형 학교운영협의)
· 1969. 4. 4. 교사 주위 정리정돈 수목 이식 (2,000주)
· 1969. 8. 25. 반공관 설치
· 1969. 9. 30. 개교기념 체육대회 개최
· 1969. 10. 15. 정문 설립 준공
· 1969. 10. 22. 사택 준공
· 1969. 11. 30. 계단공사 준공
· 1969. 12. 1. 교사 주위 철조망 완비
· 1979. 1. 1. 문교부 급식학교 운영
· 1983. 3. 1. 영북국민학교 대회산분교장으로 격하
· 1985. 3. 1. 3학급 편성
· 1993. 2. 28. 대회산분교장 폐교 영북국민학교에 통합
3. 학교현황
1대 학교장 이민석 재직기간 69. 3. 1 ~ 70. 2. 28
2대 학교장 고중한 재직기간 70. 3. 1 ~ 71. 8. 31
3대 학교장 운병은 재직기간 71. 9. 1 ~ 73. 2. 28
4대 학교장 강광형 재직기간 73. 3. 1 ~ 76. 8. 31
5대 학교장 임용기 재직기간 76. 9. 1 ~ 80. 8. 31
6대 학교장 안태순 재직기간 80. 9. 1 ~ 83. 2. 28
운암국민학교
■ 경기도 포천군 영북면 운천2리
1. 설립과 발전 그리고, 폐교
운암국민학교의 개교는 6.25 이후 휴전협정이 이루어지면서 유엔군으로 참전했던 미군, 태국군과 우리 국군 부대가 영북면 운천리 일대에 주둔하면서 그 주변에 모여든 인구의 증가에서 부터 비롯된다. 1960년대 초 이후 계속 증가 일로에 있었던 운천지역에는 영북국민학교 단 1개교 뿐이었는데 1960년대 말에는 재학생이 3,500명으로 60여 학급을 편성 운영 하였는데 이는 한국에서는 물론 세계에서 가장 다인수 학교가 된 셈이었다.
1970년대 16개 교실을 짓고 영북국민학교에서 1,2,3,4학년중 1,200여명 이상의 학생을 분리 수용하면서 3월 1일 개교하게 되었다.
초대 교장에 정몽수 (奠夢秀) 씨가 부임하면서 신설학교의 스탠드 공사, 상수도 공사, 교실 증축 등 1975년까지 시설정비에 힘써 학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고 영북국민학교와는 교육활동에서 경쟁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말부터 사회가 안정되면서 또, 미군, 태국군이 감축, 부대가 이동하자 주민의 수효가 점차 줄면서 영북국민학교와 운암국민학교는 재학생이 현격히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운암국민학교 재적이 1,300명에서 900명으로 감소) 당시 학부모의 여론 (통합) 과 교육 재정을 감안하고 또 영북중학교의 이전 등이 고려되어 1982년 제 11회 졸업식을 끝으로 운암국민학교는 폐교되고 학생은 영북국민학교로 편입되고 20여명의 교직원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이는 운암국민학교 개교 12년만의 일이었다.
2. 학교 연혁
· 1970. 3. 영북국민학교에서 분리 독립 (16개 교실)
· 1970. 3. 초대 정몽수 교장 취임
· 1970. 9. 스텐드 준공
· 1970. 10. 2개 교실 증축
· 1972. 2. 제 1회 졸업식 (161명)
· 1972. 6. 상수도 준공
· 1973. 2. 제 2회 졸업식 (198명)
· 1973. 5. 분수대 준공
· 1974. 2. 제 3회 졸업식
· 1975. 2. 제 4회 졸업식
· 1975. 9. 제 2대 구본확 교장 부임
· 1975. 11. 정구장 준공 (1코트)
· 1976. 2. 제 5회 졸업식 (184명)
· 1976. 10. 18개 교실
· 1977. 2. 제 6회 졸업식
· 1977. 4. 탄 창고 설치
· 1977. 8. 정구장 준공(2코트)
· 1978. 2. 제 7회 졸업식
· 1979. 2. 제 8회 졸업식
· 1980. 2. 제 9회 졸업식
· 1980. 9. 제 3회 이근호 교장 취임
· 1980. 11. 종합 교실 준공
· 1980. 12. 7개 교실 인조석 깔이 준공
· 1981. 2. 제 10회 졸업식
· 1982. 2. 제 11회 졸업식
· 1982. 3. 운암국민학교 영북국민학교로 통폐합
3. 학교현황
1대 학교장 정몽수 재직기간 70. 3. ~ 75. 8. 31
2대 학교장 구본확 재직기간 75. 9. 1 ~ 80. 8. 31
3대 학교장 이근호 재직기간 80. 9. 1 ~ 82. 2. 28
영북국민학교 보광분교장
■ 경기도 포천군 영북면 야미리 276
1. 개교에서 폐교까지
영북면의 남쪽 사향산과 관음산 자락 사이에 위치한 보광분교장은 지역 특성상 일제시대때에는 철을 생산하는 광산이 있어서 일찌기 쇠골이라는 촌락을 형성하였던 지역으로 38선 이북에 위치해 있어서 해방과 동시에 북한 공산 치하에 들어가 있다가 6.25 전쟁 후 수복되면서 다시 인구가 유입되고 본교인 영북국민학교가 취학 아동수는 늘어나는데 비해 수용 능력은 한계에 이르게 되었고, 이 지역의 아동도 늘고 있었다. 따라서 지역주민들의 협조와 정부의 정책으로 1968년 3월 1일 야미분교장이 설립되었으며, 본교에 다니던 이 지역의 아동들이 옮겨와 학업을 하게 되었다.
그 후 1970년대초 새마을운동과 농어촌 발전을 위한 국가정책에 힘입어 축산 및 원예 영농을 위한 인구의 유입으로 취학 아동수가 증가하였다. 1972년에는 6학급을 인가 받아 같은 해 6월 5일 보광국민학교로 승격되었다. 1984년부터 1988년까지 병설유치원이 존속될 정도로 독립된 학교로 성장 발달하다가 고도성장의 도시화, 산업화에 밀려 이농현상과 출생아 감소로 급격히 취학아동이 줄게 되었다.
따라서 1989년 3월 1일에는 보광국민학교가 영북국민학교 보광분교장으로 격하되기에 이르렀고, 정부의 소규모학교 통폐합 정책과 맞물려 1995년 폐교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보광분교장은 개교하여 폐교되기까지 22회에 걸쳐 588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폐교 이후에는 이 지역의 학생들은 정부에서 제공한 통학버스에 의하여 영북국민학교로 통학하고 있으며, 시설물은 경기도 포천교육청에서 시설 일부를 개조하여 포천군 관내 학생들의 심신단련을 위한 수련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2. 학교 연혁
· 1968. 3. 1. 영북국민학교 야미분교장 설립
· 1972. 6. 5. 보광국민학교 승격 개교 (6학급)
· 1989. 3. 1. 영북국민학교 보광분교장으로 격하
· 1995. 2. 15. 보광 제 22회 졸업
· 1995. 2. 28. 영북국민학교에 폐교로 통합
3. 학교 현황
1대 학교장 양재창 재직기간 72. 9. 1 ~ 78. 2. 28
2대 학교장 장서은 재직기간 78. 3. 1 ~ 85. 2. 28
3대 학교장 나영균 재직기간 85. 3. 1 ~ 88. 2. 28
4대 학교장 이용한 재직기간 88. 3. 1 ~ 89. 2. 28
이동국민학교 장암분교장
■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장암 3리
1. 설립과 발전
6.25 전란 후의 복구기구로써 사회가 안정되지 못한 1960대초 북한에서 온 실향민들과 화전민들이 어려운 생활을 하던 장암 3리 여우고개에 국방부산하 정보대대 (일명 MIG) 장병들이 야학을 시작하면서 학교 교육 역사가 발현되었다.
당시 이곳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은 화전을 일구어 약초, 나물들을 재배하여 생활하다 비행기 사격이 있는 날이나 탱크 사격이 있는 날은 사격장으로 달려가 탄피나 포탄 파편을 파헤쳐 매각하여 생계를 근근히 유지하며 살아 왔다.
자녀들의 교육문제로 장암 3리 부락과 가까운 학교로는 이동국민학교로 5km의 험악한 산길이라서 어린 자녀들이 학교를 다니기에는 어려움이 커 포기상태에 봉착해 있었다. 이러한 지역주민들의 딱한 사정을 알게된 여우고개 아래 장암 4리에 주둔한 정보대대 (MIG) 장병들이 군인 천막을 이곳 장암 3리에 설치하고 봉화학원이라는 명명으로 야간 학교를 개설 교육을 시키기에 이르렀다. 얼마 기간 동안 운영한 뒤에 정보를 수집한 포천군 교육청에서는 1966년 2월 20일 군부대와 절충 봉화학원을 인수 이동국민학교 장암분실 1개 학급으로 인가를 받아내었다. 이듬해인 1967년 3월에는 2학급 장암분교장으로 승격 1,2,3학년 (교사 1, 보조교사 1) 으로 학급경영을 하였으며, 4학년이 되면서 부터는 본교인 이동국민학교에 다니다가 6학년 졸업을 하였다.
1970년 산정호수 (현 예절관 설립지) 부근에 분교장으로 있던 산호분교장이 국민학교로 승격되자 이동국민학교 분교로 있던 장암분교장이 산호국민학교 장암분교장으로 편입되었다. 개교 당시 50여명의 재학생이있었으나 지역주민들의 고도의 산업화 및 탈이농현상으로 학생수가 급속도로 감소되어 1980년 2월 28일 16년기간의 역사로 산호국민학교에 통폐합되었다.
학교부지에 관해서는 개인 소유였던 대지를 대여하여 학교를 건축하였으나, 포천군 교육청의 부지대 체납으로 등기소유가 학교로 되지 못하고 현재까지 개인 소유로 되어있으며, 장암분교장 건물은 장대처럼 우거진 잡초속에 묻혀 폐허 건물이라는 역사의 장속으로 잊혀지고 있다.
2. 학교 연혁
· 1964. 6. . 야간학교 봉화 학원 설립개설 (국방부 정보대대)
· 1966. 2. 20. 봉화 학원 인수 후 이동국민학교 장암분실 인가 개교
· 1967. 3. 1. 이동국민학교 장암분교장으로 승격 인가
· 1967. 4. 2. 장암분교장 2학급 인가
· 1967. 10. 30. 2개 교실 준공
· 1973. 3. 1. 1학급 증설
· 1980. 2. 29. 산호국민학교 장암분교장으로 통폐합 (학생수 감소로 폐교)
4. 장암분교장 학교 발전에 공헌한 분
MIG 중앙정보부장 상병 이해룡, 방송길 (신상미상, 사진자료 미발굴)
1960년 이전 일명 여우 고개라 불리는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장암 3리의 마을은 깊은 산골 마을로 이 곳의 어린이들은 초등교육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처지에 있었다. 평소 어린이들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당시 육군 8사단 소속의 MIG 중앙정보부 군인 상병 이해룡 (중앙대 재학)과 상병 방송길 (동아대 재학)은 학교에 가지 못하는 이곳 어린이들을 위해 도유지인 장암분교 자리에 군인천막을 치고 봉화학원이라 명명한 임시 교육 시설을 마련하고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이듬해에는 군천막의 교실 대신 흙벽돌로 교실을 지어 학원 운영을 하다가 포천군교육청으로부터 이동국민학교 분실로 인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당시 교육의 불모지인 깊은 산골 여우 고개에서 국민학교 교육의 기초를 마련한 두 사병의 헌신적인 노력은 오늘의 교육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는 산 교육의 한 예라 하겠다. 아쉬운 것은 현재 두 사병의 거처를 알지 못함이다.
산호국민학교
■ 경기도 포천군 영북면 산정리 114번지
1. 설립
1960년대초 영북면 운천리에는 영북국민학교가 있었으나 운천에서 12km 떨어져 있는 산간 벽지인 산정리 학생들은 교통이 불편하여 학교에 다니기가 힘들었다.
이때 학교 부근에 있던 제 272포대 장병들이 천막을 치고 아동들에게 한글과 산수를 가르치면서부터 산호의 교육은 시작되었다.
1964년 10월 1일 영북국민학교 산정실교로 인가되어 교실 2칸에서 교사 2명이 교육을 실시하였으나, 교실 수가 부족하여 초대 육성회장인 김신원씨가 교실 2칸을 새로 지어 주었다. 이렇게 산정분실에서 5 · 6년 교육을 해오던 중 1967년 3월 1일 산정분교장으로 1970년 3월 1일 산호국민학교로 승격 독립하여 6학급으로 편성 개교하였다.
2. 발전
초대 교장으로 가인섭 교장이 취임하였고, 산정리 조합장 조석환씨로부터 운동장 및 실습지 3,000평을 저렴하게 구입하여 학교 가꾸기에 온 힘을 기울였다. 특히 통일 동산과 학교 환경 개선에 온 힘을 기울여 학교 환경 우수교로 표창을 받는 등 새마을 모범 학교로 발돋움하였다.
1978년에는 벽지형 급식학교로 지정을 받아 식당을 신축하고 급식후원회를 조직 운영함으로써, 아동들에게 양질의 점심 식사를 제공하게 되어 학생들의 체위 향상에 이바지하였다.
1980년 3월 1일에는 이동면 장암리에 있는 이동 국교 「장암 분교장」을 인수하여 덕재 고지에 사는 아동들이 산호 국교에 적을 두게 되었다. 장암 분교는 2년간 운영되다가 1982년 2월 28일 폐교가 되고 학생들은 본교로 다니게 되었다.
본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학교에서는 관찰원 및 교재원을 조성하는 등 학교 가꾸기를 꾸준히 실시하여 국민 관광지인 산정호수에 있는 아름다운 학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1985년 9월 10일에는 산호국민학교에 병설유치원이 개원하여 학구내 유아들의 조기 교육에 큰 힘이 되었다.
교육에 박차를 가하게 된 학교에서는 전교생 농악 놀이 지도를 학교 특색 사업으로 정하고 꾸준한 연습을 통해 포천군 체육 행사 등에 참여하여 우리 민족 고유의 농악을 공연함으로서 민속 놀이 교육에 이바지 함은 물론 학교의 명예를 높이면서 나날이 발전하여 왔다.
그러나 학구내의 학생수 감소로 인하여 1994년 12월 현재 4학급 50명으로 줄어 1995년 2월 16일 제 25회 졸업을 끝으로 영북국민학교에 통폐합되게 되었다. 1995년 2월 말로 폐교된 산호국교는 재학생들은 학교통학버스에 의한 등하교를 하고 있지만 산호국민학교 주변은 산촌지역으로 산세가 아름답고, 또 지금은 아스팔트가 학교 앞으로 포장되어 영북~이동간 관광로가 지나는 길목이 되었다. 교사(校舍)를 헐고 「포천교육청 예절관」설립을 계획하여 현재 추진중이다.
3. 학교 연혁
· 1964. 10. 1. 영북국민학교 산정분실 인가
· 1967. 3. 1. 영북국민학교 산정분교장으로 승격
· 1968. 5. 1. 벽지학교 지정 (병)
· 1970. 3. 1. 산호국민학교로 승격, 제 1대 가인섭 교장 취임
· 1975. 5. 20. 제 2대 이근호 교장 취임
· 1978. 3. 1. 벽지형 급식 학교로 지정
· 1978. 9. 1. 제 3대 김운기 교장 취임
· 1980. 3. 1. 이동국민학교 장암분교장 인수
· 1982. 2. 28. 장암분교장 폐교 통합
· 1983. 8. 31. 김병하 교장 정년 퇴임
· 1983. 9. 1. 제 5대 홍종훈 교장 취임
· 1985. 9. 1. 제 6대 한춘우 교장 취임
· 1985. 9. 10. 산호국민학교 병설유치원 개원
· 1986. 5. 29. 급식소 증축 (식품창고, 갱의실 신축)
· 1987. 9. 1. 제 7대 권진만 교장 취임
· 1989. 9. 1. 제 8대 이남준 교장 취임
· 1992. 3. 1. 제 9대 김영배 교장 취임
· 1993. 12. 20. 컴퓨터 21대 설치 (한국통신 지원)
· 1994. 3. 1. 4학급 편성 (복식 2학급)
· 1995. 2. 16. 제 25회 졸업식 (19명) 총 461명 배출
· 1995. 2. 28. 영북국민학교로 통폐합
4. 학교 현황
1대 학교장 가인섭 재직기간 70. 3. 1 ~ 75. 5. 20
2대 학교장 이근호 재직기간 75. 5. 21 ~ 78. 8. 31
3대 학교장 김운기 재직기간 78. 9. 1 ~ 80. 8. 31
4대 학교장 김병하 재직기간 80. 9. 1 ~ 83. 8. 31
5대 학교장 홍종훈 재직기간 83. 9. 1 ~ 85. 8. 31
6대 학교장 한춘우 재직기간 85. 9. 1 ~ 87. 8. 31
7대 학교장 권진만 재직기간 87. 9. 1 ~ 89. 8. 31
8대 학교장 이남준 재직기간 89. 9. 1 ~ 92. 2. 28
9대 학교장 김영배 재직기간 92. 3. 1 ~ 현재
(교가)
6. 학교 발전에 공헌한 분
여기에 기록된 사람들은 학교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힘쓴 분들이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누락되었다는 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동안 각 학교를 통하고, 관공서를 통하여 수집된 자료만을 가지고 기록하였기에 송구스러운 마음 금할 길 없다. 차후에 수정 보완할 기회가 있으면 그 때에 추가 등재하기로 한다.
포천군 영북면 산정리 마을에 소수의 어린이들은 있었으나 국민학교가 없어 어린이들이 공부를 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던 김신원씨는 당시 동리의 유지들과 협의하에 임시로 학교 설립을 하기로 결심을 하였다. 어린이들의 교육을 맡은 육성회장 김신원씨는 산정리 마을과의 자매부대였던 제 5군단 포병사령부 (제 272부대)의 협조를 얻어 국민학생 교육을 맡을 임시 교사 1명 (사병으로 이름 등은 알 수 없음)을 추천 받았다. 또한 현 산호국민학교 자리에 가교실 1실, 임시 교사가 기거하던 숙직실 1실을 신축하여 어린이들의 교육을 시작하였다. 그 후 산정리의 많은 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하여 학교 설립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학교 육성회장 김신원 등은 교육청에 학교 설립의 건의를 하기에 이르렀고, 교육청은 이 요구를 영북국민학교 산정리 분실 인가를 함과 아울러 정규 교사 유형재씨를 발령하기에 이르렀다.
교육청에서 학교 설립을 계획할 당시 학교 부지 마련의 어려움이 있게 되자 육성회장 김신원씨는 현 산호국민학교의 대지를 교육청에서 학교부지로 매입하는데 적극적으로 토지임자를 설득하는 등 노력을 한 결과 가분실로 시작한 산정리 초등교육이 산호국민학교로의 교육으로 발전하였다.
전교생이 51명에 교사 7명이 전부인 영북면 산정리의 산호국민학교 (교장 : 김영배)가 1995년 2월 25회 졸업을 끝으로 폐교되어 졸업 앨범 속에서나 추억의 역사를 더듬을 수 있게 되었다.
본교 어린이, 교사, 학부모들의 아쉬움 속에 마지막 졸업식이 거행되었는데 식순 마지막인 교가가 우렁차게 불려질때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이들이 눈시울을 적시며 서운함의 마음을 나눴다.
25회 졸업생 대표가 답시를 낭독할 때 또 한 번의 울음 바다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