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이게 어디죠?”
“제가 왜 여기 와있는 거예요?”
“지금 시간은?”
“나 얼른 가야되는데....”
2001년 10월 6일, 성남에서 열린 하프대회에 출전한 초보마라토너가 생각지도 못했던 병원응급실에서 정신을 차리며 내뱉은 말들이다.
마라톤에 입문한지 9개월 째, 몇 차례 하프대회에 출전해 본 경험이 있어서 내가 완주를 못하고 쓰러지는 이런 사태가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터라 실로 그 충격은 엄청났던 것이다.
대회당일 새벽 전주고속버스터미널, 6시에 성남으로 떠나는 버스는 언제라도 문을 닫고 떠날 기세인데 함께 가기로 약속했던 형님은 연락조차 되지 않는다.
간신히 버스출발 3분전에 연결이 되었는데 이제야 일어나셨단다.
재빨리 버스표를 환불받고 2Km쯤 떨어진 집까지 서둘러 뛰어가며 전화를 한다.
“얘들이랑 빨리 챙겨! 버스 놓쳤어, 차 가지고 갈 거니까 서둘러”
과속카메라에 두 번이나 사진이 찍혀가며 간신히 대회시간에 맞춰 도착한 성남운동장, 화장실을 다녀오랴 물품을 수령하랴 어수선하기만 하다.
진행자의 주의사항 전달이 요란하게 계속되었지만 오직 언제 출발 총성이 떨어질 것 인가에만 관심이 집중될 뿐 들리지 않는다.
10시 30분에 출발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엄청난 인원들이 경기장에서 쏟아져 나와 성남과 분당을 잇는 대로를 채운다.
날씨는 출발한 직후부터 급격히 기온이 올라가는 것 같은데 도심한가운데 그것도 대로의 가운데 한차선 만을 통제한 채 진행되다보니 바로 옆 2차선을 달리는 대형트럭이나 버스 등에서 내뿜는 뜨겁고 매캐한 배기가스로 인해 숨을 쉬기가 불편할 정도이다.
반환점에 이르는 주로는 그야말로 엽기적이기만 하다.
차량들을 피해서 주자들이 죽기 살기로 달리는 것도 부족해 좌회전이나 유턴을 하려고 주로에 들이닥치는 운전자와 달리던 주자와 멱살잡이가 벌어지는 것이 한두군데가 아니고 박수는커녕 위협운전과 욕지거리를 하고 지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 되어놔서...
지면의 온도가 올라가는지 햇살이 따거워서인지 반환점에 다가서며 신발이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지금도 평상화로 신고 다니는 검정색 신발인데 구입한지 일주일만에 신고 나선 것이 아무래도 적응이 되지 않은 것 같다.
그전에는 국산 마라톤화(르까프 로드런)를 신었는데 대부분 초보자가 그렇듯이 연습 때건 대회 때건 간에 늘 신고 다니는 것을 이웃의 전문가가 지적하며 체중과 용도에 맞는 신발을 구해 신으라기에 딴에는 심혈을 기울여 인터넷을 통해 각종 신발의 장단점을 비교해보고 또 해서 매장에 갔는데 정작 구입한 신발은 매장 주인이 강력하게 권하는 캠퍼스화 스타일의 이것이 되었던 것이다.
다른 때보다 유난히 힘이 더 든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대로 가면 개인기록은 넘어서겠다며 반환점을 돌았는데 놀랍게도 형님이 뒤돌아서 뛰어오고 있지 않은가?
“야! 난 양말도 미끌어지고 컨디션도 좋지 않으니 너나 끌고 가야겠다”
“자, 힘을 내고 왼발 오른발... 하나 둘, 하나 둘 ...”
15Km이정표가 나온 뒤 도저히 힘이 들어서 형님에게 제발 먼저 가시라고 사정을 했다.
이제 저 멀리 운동장으로 꺾이는 사거리가 눈에 들어오고 오르락 내리락 하는 굽이를 두어 번만 더 반복하면 될 것 같다.
여성주자하고도 나란히 뛰어보다가 단체로 뛰는 일행들 틈에도 섞여보기도 했는데 신발이 자꾸만 뜨거워지고 급수대는 어디에 있는지 보이질 않고 정신은 혼미해지는 것 같다.
... ...
그러다가 내 몸이 차갑다는 것을 느끼며 깜짝 놀라 깨어난 곳은 병원응급실 침상이다.
얼음배게에 얼음팩을 머리에 올려놓은 채 링거주사를 팔에 꽂고 옷은 다 찢겨서 나체에 가까운 상태로...
“지금 가면 아직도 대회는 끝나지 않았는데...”
“여기는 어디예요? 대회장하고 멀리 떨어진 곳인가요?”
서둘러 일어나서 상황을 살피려는데 간호사가 가만 누워있으라고 호통을 친다.
옆을 둘러보니 나와 비슷한 처지의 주자들이 두 명 누워있다.
아직도 깨어나지 않은 중년남자의 회사 직원들인 듯한 남자에게 어찌된 일인지 궁금한것들을 물어봤지만 대답은 영 신통치 않다.
(쓰러진 지점이 하프 반환점에도 못 미친 지점이라고 말하는 것 등으로 봐서)
이곳은 대회장하곤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라는데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할지 마음만 바쁘다가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 12시 30분이 넘었으니 아직도 들어오지 않는 남편과 아빠, 그리고 후배를 얼마나 기다리고 있을까?
기억 기능도 손상이 됐는지 내 전화번호가 제대로 떠오르지 않아서 몇 번 반복한 끝에 집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최대한 안심을 시키려고 노력한 탓인지 화들짝 놀라는 것 같진 않았고 한참 뒤에 집사람과 두 아들 그리고 함께 뛴 형님이 병원에 나타났다.
뭔 놈의 대회가 주로에서 쓰러진 사람이 교통사고 당한 사람처럼 엉뚱한 병원에 실려온 것도 부족해서 자기 돈으로 응급치료비를 전액 부담한 다음에야 병원을 나설 수가 있으니...
누구나 그렇듯이 사고를 당하면 처음엔 왜 하필이면 자신에게 그런 일이 생겨야만 하는지 무척이나 억울하다고 생각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자기 속의 원인을 찾아낸다고 한다.
전주로 내려오는 차 속에서 나름대로 실패한 원인을 정리해본다.
첫째, 수면부족과 피로누적
대회당일 버스를 타고 상경하면서 눈을 좀 부치려고 했던 계획이 예상치 못했던 일로 무산되면서 가중된 것 같다.
둘째, 무리한 욕심과 오버페이스
여러 상황이나 연습량이 기록을 낼만한 조건이 못되는데도 무리하게 욕심을 냈고 그것도 부족해서 형님까지 거들어 한 술 더 떴으니...
셋째, 부적절한 신발 착용
상식적으로 마라톤대회에 신을 만한 신발이 아님에도 매장주인의 말에 따라 구입하였고 그나마 일주일 동안 단 한번만 신어본 뒤 대회에서 신었다는 것.
넷째, 높은 기온에 급수 부족
출발 전에 충분히 물을 마셔 두고 주로에서도 매 급수대마다 목이 마르기 전에 마셔두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함.
다섯째, 너무나도 열악한 주로 상황.
높은 기온, 탁한 공기, 각종차량의 간섭, 거리표지의 미비 등 다시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로 나쁜 조건이었음.
후기 : 대회가 끝나고 한달쯤 지난 어느날 대회기록증이 집으로 배달되어 왔다.
1시간 58분에 완주했노라고...
칩을 사용하지 않은 대회라서 확인해 볼 길이 없다.
‘내가 정말로 골인했던 것일까?’
이 대회에서 1시간 40분 이내로 뛰어보려다가 이와 같은 변을 당한뒤 꾸준한 노력과 준비로 한걸음씩 기록을 당겨 최근엔 1시간 24분대까지 기록을 당기며 감히 상위그룹의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런너스코리아 수기 응모글
"아름다운 실패기 수기 공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