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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시대 그리스 문명
요약 :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가 번성했던 고전시대의 역사. BC 500~386년에 페르시아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최대 관심사였으며 예술과 웅변에서 흔히 다루어지는 주제였다.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의 대결은 BC 500년경 아시아 지역의 그리스 식민지에서 일어난 이오니아 반란으로 시작되었다. 이 반란은 금방 진압되었기 때문에 그 원인을 규정하기는 어렵다. 반란이 끝난 뒤 양보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이 반란의 장기적 결과로 일어난 페르시아 전쟁은 아테네가 페르시아 옆에 있는 아나톨리아 서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확립하게끔 만들었다. 반란 이후 페르시아는 아테네를 적대했고 페르시아 통치자 다리우스 1세는 반란을 지원한 아테네에 대해 보복을 결심했다. 그 결과가 유명한 마라톤 전투(BC 490)이다(→ 마라톤 전투)헤로도토스 그러나 밀티아데스의 지휘를 받는 아테네군은 페르시아 기병대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적군을 단숨에 공격해 압승을 거두었다. 페르시아가 6,400명의 사상자를 낸 반면, 아테네군의 사상자는 192명에 불과했다. 마라톤 전투는 당장 신화적인 사건이 되었고 그 당시의 모든 예술가들은 이 전투에 찬사를 바쳤다. 이것은 그후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아테네 시대의 시작이었다. 이 시대의 아테네는 군사 및 문화적 업적을 근거로 삼아 자신들은 어느 도시도 따라갈 수 없는 독보적인 존재로서 마땅히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다리우스가 BC 486년에 죽자 크세르크세스 이러한 야욕은 그리스 세계의 공동 방어 계획을 유발했고, 페르시아에 맞서 결성된 그리스 동맹은 BC 481년 중요한 결정들을 내렸다. 테살리아에 방어선을 치려던 최초의 계획은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곧 폐기되었지만 그대신 그리스인들은 에우보이아의 북동쪽 끝으로 후퇴해 육지에서는 테르모필레에, 바다에는 아르테미시움에 방어선을 쳤다.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 페르시아군은 그리스인 반역자가 가르쳐 준 우회로를 통해 배후에서 공격했다. 레오니다스를 비롯한 스파르타군은 치열한 전투 끝에 전멸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이 입은 손실도 막대했다. 아르테미시움에서 벌어진 해상 작전은 좀처럼 결말이 나지 않았다. 페르시아 전함은 에우보이아 섬을 돌 때 폭풍우를 만나 많은 손실을 입었다. 그 직후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는 페르시아군에게 약탈당했다. 그들은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신전을 파괴했으며, 옛 참주 히피아스의 동생인 히파르코스를 BC 514년에 암살했던 두 사람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기톤의 동상을 가져갔다(이 동상들은 150년 뒤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아테네로 되돌아왔음). 승리를 눈앞에 둔 페르시아군이 살라미스 해협으로 들어갔을 때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리스 함대에게 기습을 받은 페르시아 함대는 크세르크세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여지없이 참패를 당한 것이었다. 영토의 크기나 자원에서 볼 때 페르시아가 그리스보다 훨씬 더 크고 또한 페르시아의 전함이 훨씬 더 빨랐다는 점에서 이 살라미스 해전 그러나 좁은 해협에서 싸움이 벌어졌기 때문에 그리스군은 페르시아군의 배에 올라타 육박전을 벌일 수 있었고 그리스의 배는 가벼운 만큼 훨씬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었다. 페르시아가 참패한 뒤 그리스 전역에서는 축하 행사가 벌어졌다. 그러나 그리스를 정복하려고 하는 페르시아의 야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리스 영토 내의 패권은 스파르타로 넘어가 있었으며, 아직도 페르시아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그리스 동쪽 지역의 국가들은 스파르타에 의존했다. 스파르타가 제안한 해결책은 이오니아 주민을 다른 곳에 정착시키고 이오니아를 비워 두라는 것이었다. 아테네는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테네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던 세스토스를 BC 478년에 점령하고 BC 476년 아테네 주위에 성벽을 쌓은 것은, BC 480~479년에 아테네가 순순히 받아들였던 스파르타의 지도적 지위를 거부하고 독립하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스파르타는 고립주의와 제국주의 사이를 오락가락했지만 어쨌든 아테네가 그리스 영토 내에서 강자로 군림하는 것을 앉아서 보기만 할 수는 없었다. 투키디데스의 책에는 이제 동족이라는 이유로 아테네에 접근해 자신들을 이끌어달라고 부탁하는 '이오니아인과 새로 해방된 주민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테네에 대한 이 호소는 결국 그뒤 아테네 역사의 성격을 결정하게 된 아테네 제국 즉, 델로스 동맹을 낳았다(→ 델로스 동맹) 이 회의에서 아테네는 표결권을 하나만 갖고 있었지만 그 한 표의 비중은 컸다. 로도스를 비롯한 도리스계(系) 도시, 레스보스 같은 아이올리아계(系) 도시, 심지어는 그리스계가 아닌 키프로스의 도시들도 델로스 동맹에 가입했다. 이러한 그리스 세계의 새로운 통일은 BC 476년에 열린 올림픽 제전으로 상징되었다. 이 제전에서는 스파르타·아르고스·아이기나·시칠리아 등에서 온 선수들이 우승을 다투었다. 또한 아테네는 BC 476년 스트리몬 강변의 에이온을 점령해 델로스 동맹이 겉으로 내세운 범(汎)그리스 운동, 또는 반(反)페르시아 계획과 완벽하게 보조를 맞추었다. 아테네는 BC 462년에 이른바 에피알테스 아르콘은 이제 예비 심리만 담당했고 정식 재판은 많은 사람들로 구성된 시민 배심원단이 맡았다. 에피알테스 개혁과 그에 뒤이은 개혁은 뚜렷한 민주주의 철학을 가진 특정 개인들이 신중하게 궁리한 결과로 보인다. 아테네가 아르고스 및 테살리아 그러나 아르고스가 전에 코린트 이 전쟁은 본래 아테네와 코린트의 싸움이었고 스파르타도 이따금 개입했다. 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아테네가 어디에 야심을 두고 있었는지는 그 무렵에 일어난 다른 사건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우선 아테네는 대규모 이집트 원정(BC 460~454)에서 참패했는데 이 원정은 분명 페르시아에 대한 싸움의 연장이었다. 둘째, 아테네는 피레에프스뿐 아니라 해안까지 이어진 '장성'(長城)을 쌓아서 장차 필요하다면 제국을 건설할 때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셋째, 아테네는 BC 5세기 중엽에 델포이와 동맹을 맺었는데, 이 무렵 대체로 스파르타에 호의적이었던 델포이의 신탁이 이제 아테네야말로 '항상 하늘 높이 떠 있는 독수리'라고 선언을 한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전쟁 초기에는 아테네가 유리했지만 BC 459년 아테네가 아이기나를 점령했을 때부터 전쟁의 판도는 바뀌었다. 핀다로스는 〈네메아 송가(頌歌)〉에서 항해가 생업(生業)이고 인정이 많은 아이기나의 전통과 고대의 대도시였던 아이기나의 당당한 도리스 주의를 강조했다. 아테네가 이런 아이기나를 정복한 것은 중대 사건이었다. 그전까지 아테네는 자기 방어를 위해 기꺼이 참여한 이오니아 도시들의 연합체를 이끌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런 핑계는 아이기나의 정복으로 거짓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BC 458년 스파르타는 모시(母市)인 도리스의 호소를 받아들여 전쟁에 개입했다. 도리스인들은 자기네 조상들이 도리스에서 일어난 것으로 여기고 이 도시를 자신들의 고향이라 생각했다. 스파르타군은 보이오티아의 타나그라에서 아테네군과 맞붙게 되었는데(BC 458), 이 전투는 대규모였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아테네군은 그후 오이노피타에서 승리해 10년 동안 보이오티아를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집트 원정의 참패로 아테네는 BC 451년 스파르타와 휴전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휴전협정 뒤에도 스파르타는 자신의 영토인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완전히 철수하지 않았다. 아테네의 페리클레스가 반란을 진압하러 보이오티아로 들어가자 스파르타는 아티카를 공격하려고 했다. 스파르타 왕 플레이스토아낙스는 엘레우시스와 트리아시아 평야까지 진격했지만 아티카 침략은 실현되지 않았다. 플레이스토아낙스는 아티카를 침략하는 대신 페리클레스와 흥정을 한 것 같다. 아테네가 최근에 잃어버린 보이오티아와 메가리스 및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일부 지역을 되찾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스파르타도 에우보이아에 개입하거나 아티카를 침략하지 않겠다는 타협이었다. 제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또는 펠로폰네소스 대전)의 원인을 파악하려면 적어도 BC 430년대초까지 거슬러올라갈 필요가 있다. 이 전쟁이 아테네의 팽창에 대한 스파르타의 두려움 때문에 일어났다는 투키디데스의 설명이 옳다면 BC 6세기말부터 BC 5세기 전반에 걸쳐 일어난 사건도 이 전쟁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BC 430년대초 페리클레스는 흑해로 원정을 가서 예로부터 코린트의 세력권이었던 지역 근처의 아카르나니아와 동맹을 맺었다. 그는 또한 칼키디키 반도 포티다이아에 있는 코린트 세력권 전초 기지와 바싹 붙은 암피폴리스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로 인해 코린트의 서쪽과 북동쪽은 간접적으로 아테네의 압력을 받게 되었다. 코르키라의 식민지를 둘러싸고 코르키라와 코린트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자 아테네는 코르키라를 지원하는 소규모 함대를 보냈다. 코린트 함대는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아테네 전함과 격돌하게 되었다. 그후 아테네군은 포티다이아에 있는 코린트 행정관들을 고국으로 귀환시키라고 요구했다. 포티다이아는 반란을 일으켰고 코린트군의 지원을 받았지만 아테네군의 포위 공격에 무릎을 꿇었다. 투키디데스는 아테네의 전략과 초기의 전술 방식을 매우 개인적인 관점에서 보고 있다. 그는 당대의 거물이었던 페리클레스 스파르타의 아티카 침공은 아르키다모스 전쟁(BC 431~421) 전반기의 성격을 결정했다. 이 전쟁의 명칭은 스파르타 왕 아르키다모스 2세의 이름을 딴 것이다. BC 431년말 페리클레스는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선동적인 연설을 했는데 이 연설은 '장례식 연설'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유명한 연설은 대부분 투키디데스가 쓴 것으로 아테네의 힘과 제도의 강성함에 바치는 영원한 찬사였다. 전쟁 2년째인 BC 430년도 아티카 침공으로 시작되었다. 투키디데스는 아테네에 무서운 전염병이 창궐해 1만 4,000명의 중장 보병과 기병 가운데 1/3이 죽었다고 기록했다. 페리클레스도 이 병으로 쓰러져 BC 429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죽기 전에 원정대를 이끌고 에피다우로스를 비롯한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여러 도시를 공격했다. BC 428년 아테네 제국에 속해 있던 레스보스 섬의 미틸리니 아테네는 즉각적인 봉쇄작전으로 반란에 대응했다. 스파르타는 미틸리니에 원조 물자를 보냈지만 섬이 봉쇄되었기 때문에 어떤 도움도 주지 못했다. 미틸리니 주민들은 대량으로 처형당하거나 노예로 끌려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BC 427년에 투항했다. 이 무렵 아테네는 서쪽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모험을 감행했다. BC 427년경 우선 20척의 원정대를 서쪽으로 보냈고, 그후 2년 동안 60척을 더 파견했다. 다른 지역에서도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총 80척의 전함은 큰 병력이었지만 그 목표가 과연 그만한 가치를 갖고 있었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아테네가 이런 원정을 일으킨 동기로는 몇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아마 해군을 훈련시키고 코린트로 곡식을 싣고 가는 배를 차단하며, 시칠리아를 지배하고 싶었기 때문인 듯하다. 델로스 동맹이 창설되었던(BC 478) 델로스 섬에서 아테네가 BC 426년에 이오니아풍(風)의 아폴론 축제를 웅장하고 화려하게 부활시킨 것은 분명 도리스계(系) 식민 도시 헤라클레아에 대한 하나의 응수로 보아야 할 것이다. 스파르타인은 이 식민 도시 건설에 크게 이바지한 바 있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가장 훌륭한 장군들 가운데 한 사람인 아테네의 데모스테네스 이듬해 아르키다모스 전쟁(BC 425)에서 데모스테네스는 멀리 떨어진 필로스의 메세니아 곶, 즉 나바리노 만(灣) 북쪽 끝에 불쑥 튀어나온 땅을 점령했으며 그곳에 요새를 쌓았다. 420명 중 절반이 시민이었던 스파르타군은 어리석게도 필로스 남쪽에 있는 스팍테리아 섬에 상륙했다. 아테네군은 이 부대의 퇴로를 차단해 앞으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는 귀중한 수단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스파르타가 자신의 동맹국들과 관계없이 평화 조약을 맺자고 요구하자, 아테네의 클레온은 터무니없는 요구조건을 내세우면서 아테네인들을 설득해 스파르타의 제의를 거절하게 했다. 외교적 해결을 거부한 뒤 클레온 그는 스파르타의 시민을 120명이나 사로잡아 아테네로 압송하는 데 성공했다. 이 극적인 승리 덕분에 BC 424년 스파르타는 절대로 아티카를 침공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얼마 뒤 전세는 다시 스파르타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전쟁터에 도착한 스파르타의 브라시다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BC 423년 휴전을 했지만 브라시다스는 그뒤에도 다른 몇몇의 지역을 함락했다. 암피폴리스를 놓고 벌인 전투에서 클레온과 브라시다스가 둘 다 전사하자 스파르타인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원했던 평화 협정의 가장 큰 장애물이 한꺼번에 제거되었다. 니키아스 평화조약(BC 421)에 따라 양쪽이 그 동안 얻은 전리품들은 대부분 원상태로 되돌려졌다. 스파르타는 아테네 제국을 해체하는 데 분명히 실패한 것이므로 이런 뜻에서 보면 아테네가 전쟁에 이겼다고 말할 수 있다. 투키디데스는 이 평화조약을 한 전쟁의 2단계 사이에 잠깐 생겨난 막간으로 보았다. 코린트와 보이오티아는 처음부터 평화조약을 거부했고, 아테네의 혈기 왕성한 젊은 정치가 알키비아데스 아테네와 아르고스, 엘리스, 만티네이아는 동맹을 맺고 BC 418년 만티네이아 영토에서 스파르타와 싸웠지만 참패를 당했다. 아테네는 다른 곳을 공격할 수밖에 없어 BC 415년 시칠리아로 공격의 화살을 돌렸다(→ 시칠리아 원정). 오늘날 알려져 있듯이 시칠리아의 재난은 시라쿠사 항구에서 벌어진 해전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 해전은 아테네 함대가 마음대로 기동력을 발휘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 벌어져 아테네 함대는 주요지휘관들과 함께 사실상 전멸했다. 아테네는 긴급 건조(建造) 계획으로 간신히 펠로폰네소스 함대와 동등한 해군력을 갖출 수 있었다. 아테네의 군사력 복구는 주목할 만했지만 급진적 민주주의가 받고 있던 정치적 신뢰는 완전히 무너졌다. 부자는 돈을, 하층계급은 목숨을, 모든 계층은 환상을 잃었다. 민주주의를 싫어하는 지성적 행동주의자인 소피스트알키비아데스 그러나 그의 동기는 이기적이었고 근시안적이었으며(그의 목표는 자신에 대한 추방령을 철회시키는 것이었음) 원하던 바를 얻지 못하자 그는 과두정의 지배자들을 저버렸다. 결국 BC 410년 민주주의가 완전히 회복되었고 법률을 집대성하기 위한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테네는 헬레스폰토스 반도 지역과 아르기누사이에서 스파르타에 승리를 거두었지만, 아테네 지휘관들은 생존자를 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불법적인 대중재판을 받고 처형당했다. 이것은 어리석은 짓이었고 전투가 끝난 뒤 스파르타가 평화조약을 거듭 제의했지만 아테네는 이를 거부하는 어리석은 짓을 다시 저질렀다. 스파르타에는 리산드로스가 새로운 지도자로 등장했고 페르시아에서는 왕의 아들인 젊은 키루스가 새 지도자로 떠올랐다. 이 지도자들이 이끄는 두 나라는 노티움 전투에서 아테네를 무찔렀지만 아테네는 계속 평화조약을 거부하다가 아이고스포타미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했다(BC 405). 아테네군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항복했고 장성은 허물어졌으며 함대는 12척으로 줄어들었다. 아테네 제국은 마침내 지상에서 사라졌으며 아테네는 스파르타가 과두 정치를 강요함에 따라 '30인(人) 참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페르시아 전쟁이 문학 전쟁은 아이스킬로스 전쟁이 철학에 미친 영향은 그렇게 직접적이지는 않았다. BC 5세기에 그리스에서 성행한 자아비판적 사변철학은 새로운 정치제도의 등장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되어 왔다. 합리적인 정치 토론의 분위기가 조성되면 좀더 일반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고 그 주장을 논증하는 것이 요구된다는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철학과 과학 발전의 원동력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뚜렷한 수사학적 원칙에 따라 이루어진 주목할 만한 토론이 이미 호메로스의 작품에 제시되어 있다는 반론도 있으며, 위대한 전사들은 설득력 있는 연설가가 되어야 할 필요도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 책임은 BC 460년대말 아테네에서 이루어진 에피알테스 개혁의 주요 원칙이었으므로 지식인의 책임도 정치적 책임과 나란히, 또는 정치적 책임의 결과로서 발달했을지 모른다. 아테네를 제외한 다른 도시에서 지식인이 활발하게 활동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이것은 BC 5세기의 문화를 다루다 보면 결국 아테네 문화를 다루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의 비극과 희극은 오늘날에도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 있다(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 및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반면 플라톤 이전 철학에 대한 연구는 후세 작가들이 보존한 단편을 토대로 추론할 수밖에 없다. 지금 남아 있는 문헌들 중 아테네에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시인의 작품도 아닌 것이 한 질 있는데, 그것은 바로 도리스 지방의 코스 섬에서 BC 5세기에 태어난 히포크라테스 이 저술은 부분부분 놀랄 만큼 정확하게 사물을 묘사하고 있으며 수사학적으로 논쟁하기 적합한 성격을 띠고 있다. 그리스 비극은 정치 토론에 직접적으로 기여하기 위해 쓰인 것은 아니지만 문제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웅변술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Oidipous Tyrannos〉과 〈필록테테스 Philoktetes〉뿐만 아니라, 에우리피데스의 〈페니키아 여인들 Phoinissai〉과 〈애원하는 여자들 Hiketides〉에도 이런 영향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아이스킬로스의 〈에우메니데스 Eumenides〉(BC 457)에서는 아이스킬로스가 당시의 최신 정치 개혁을 지지하고 있는지, 아니면 개혁에 대한 요구조건을 밝히고 있는지가 분명치 않다. 이와 마찬가지로 에우리피데스의 〈애원하는 여자들〉에는 민주주의 제도를 찬양하는 대목이 분명히 많이 들어 있지만, 민주주의가 낳은 새로운 정치가들을 맹렬히 비난하는 말도 포함되어 있다. 〈애원하는 여자들〉이 정치 토론에 기여하기 위한 작품이라고 보기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소피스트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극작가가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말하는 것에서 극작가 자신의 정치적 견해나 그밖의 생각을 직접 추론할 수는 없다.개요
아테네 제국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제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BC 5세기의 그리스 문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