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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농 : 중국 고대 신화에 나오는 세 명의 황제 중 한 명으로 농경을 가르치고 약초를 찾아내 병을 다스렸다.
▲ 복희 : 중국 고대 신화에 나오는 세 명의 황제 중 한 명으로 팔괘(八卦, 만물을 상징하는 8개의 기호)를 만들고 그물을 발명해 어획과 수렵의 방법을 가르쳤다.
▲ 전욱 : 중국 고대 신화에 나오는 다섯 명의 제왕들 중 한 명으로 사려가 깊고 백성들을 올바르게 이끌어 천하를 잘 다스렸다.
▲ 제곡 : 고대 신화에 나오는 다섯 명의 제왕들 중 한 명으로 70년간 재위하며 시간과 절기를 관찰하는 방법을 농업에 응용했다.
▲ 순임금
▲ 우임금
▲ 나루터를 묻고 있는 자로
▲ ① 춘추 시대 국가들(위) ② 전국 시대 국가들(아래)
▲ 공자
▲ 자공
▲ 노자
▲ 걸왕桀王
▲ 탕왕湯王
걸왕을 몰아내고 상나라를 세워 어진 정치를 펼쳤다고 한다.
◆ 정전제의 이상과 현실
정전제井田制는 하은주 삼대 시대에 시행되었다는 토지 제도로, 대토지를 보유한 귀족들이 나오기 시작한 춘추 전국 시대에는 이미 실현하기 어려운 이상적 제도에 불과했다. 백성을 위해 자기 땅을 내놓을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토지 문제는 당시 첨예한 갈등의 진원지였다. 전쟁이 끊이지 않는 것도 좀 더 비옥한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맹자는 토지를 균증하게 분배해서 갈등의 씨앗을 없애고 백성들의 생계와 조세 문제를 모두 해결하자고 주장했지만 대부분의 토지를 거머쥐고 있었던 지배층에게 이런 주장이 쉽게 먹힐 리가 없었다.
▲ 묵자
전국 시대 제자백가 중 묵가의 대표적 인물이다. 전쟁을 반대하고 차별 없는 사랑을 주장하여 평화가 유지되는 공동체를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 《묵자》와《묵경》은 다른 책인가?
묵가의 사상적 배경을 이루는 것이 바로 묵가의 책 《묵자》다. 그런데 《묵자》는 묵자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니다. 물론 짧은 시기에 이루어진 작품도 아니다. 《묵자》안에는 묵자 자신이 직접 쓴 것으로 보이는 글도 있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기록한 것도 있다. 더 나아가 묵자 사후에 묵가 집단에서 정리해 놓은 것도 있다. 후기 묵가들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몇 편에는 독특하게도 논리학적인 사상이 담겨 있기 때문에, 보통 '겸애'로 대표되는 묵자의 사상과 성격이 구분된다. 그래서 <경상經上><경하經下> 등 6편을 따로 모아 '《묵경墨經》'이라 부르고 이를 묵자와 구별해 '별묵別墨의 작품'이라 구분하기도 한다. 《묵경》을 묵자 사상의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것인가 아닌가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묵가 사사의 총괄적 성격을 갖는 결과물로 보는 경우가 많다.
◆ 전쟁터로 간 평화주의자들
묵가는 평화주의자들이었지만 그들 중 일부는 전쟁터를 떠나지 못했다. 더 큰 전쟁을 막기 위해 전쟁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묵가의 학자들은 전쟁 무기나 전술을 연구하고 직접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렇게 본다면 묵가들이 모든 전쟁을 반대하는 근본적 평화주의자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전쟁을 막기 위해 군주를 설득하고 실패하면 수비 위주로 전쟁에 참여해 전쟁의 피해를제3부 나를 넘어 최소로 줄이고자 했다. 이런 묵가의 수비 위주 <묵공>은 춘추 전국 시대 조나라의 10만 대군과 맞닥뜨린 인구 4천의 작은 성 '양성'을 위해 전쟁에 참가한 묵가의 지도자 '혁리'의 이야기로, 묵가가 활동하던 시대 상황과 묵가의 문제의식 등을 엿볼 수 있다.
제3부 나를 넘어 깨달음을 향해
아무나 성자는 아들에게 소금을 가져오게 한다.
"이 소금을 물에 넣고 내일 아침 다시 가져 오거라."
다음 날 아침이 되어 슈웨따께뚜는 소금물을 가지고 아버지 앞에 갔다.
"소금을 찾아보아라."
"소금이 녹아서 소금물이 되었으니 소금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소금을 맛보아라. 윗부분, 중간부분, 아랫부분의 물을 맛보아라."
"어느 부분이나 모두 짭니다."
"바로 그것이다. 물에 녹은 소금은 전혀 보이지 않지만 소금은 물의 모든 곳에 존재한다. 참된 존재 역시 볼 수 없지만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아뜨만이고 곧 너의 본질이다."
◆ 인도의 사상과 종교에 다가가기 위한 첫 번째 조건
인도인들에게 힌두교는 단순하게 종교만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고 문화며 인도인의 세계관이 축적된 사상 체계다. 그러나 힌두교에는 종교적 창시자도, 체계화되고 일관된 경전도 없다. 한 시대나 한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수천 년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축적되어 왔기 때문에 그 어떤 사상 체계나 종교보다도 다양하고 상대적이다. 일면 모순적으로 보이는 힌두교 세계관 내의 비균질성, 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인도의 사강과 종교를 바라보는 첫 번째 조건이 될 것이다.
▲ 고타마 싯다르타
고대 인도의 종교 지도자로 불교의 창시자. 카필라국의 왕자로 태어났으나 왕위와 가족을 버리고 출가했다. 그 후 깨달음을 얻어 많은 사람들에게 평등과 자비의 정신을 가르쳤다.
◆ 불교 vs 힌두교
불교는 힌두교의 고대 형태인 브라만교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했다. 붓다는, 브라만교가 제의를 주관하는 사제에게 막강한 권한을 주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와 힌두교의 큰 차이 중 하나는 아뜨만을 인정하는가의 여부에 있다. 힌두교도 불교도 인생이 무상하며 집착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르러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힌두교가 아뜨만이라는 본질적 자아를 이야기한 데 비해 불교는 그 어떤 본잘적 자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 삼장법사는 누구?
삼장법사三藏法師는 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원래 인도에서 넘어와 불경을 한역하던 사람들을 일컫던 말이었다. 그러나 명나라 때 소설인 《서유기西柳記》에 불경을 한역한 것으로 유명한 당나라 시대의 현장(玄奬, 602~664)이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등과 함께 불경을 구하러 서역으로 떠난 삼장법사로 소개된 후 현장을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다.
◆ 불교의 창시자는 노자?
전래 초기에 중국인들은 중화의식에서 비롯된 왜곡과 오해로 불교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왜곡의 예가 노자가 인도로 건너가 부처가 되었다는 '노자 화호설'이다. 중국 국경인 함곡관을 지난 노자가 인도에 도착해서 인도인들을 교화하고 부처가 되었다믄 것이 노자 화호설의 골자다. 이런 왜곡 또는 오해는 불교를 자신들의 전통 밑에 두고자 했던 중국인들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 한유
《맹자》를 높이고 불교를 배척하는 등 성리학의 학문 풍토를 만든 송나라 때의 사상가. 그가 개혁한 산문문체는 중국 산문문체의 표준이 될 정도로 문학에서도 공로를 세웠다.
◆ 불교의 오계 vs 유교의 오상
불교의 오계五戒는 속세에 있는 신자信者들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계율로, 살생하지 말라, 훔치지 말라, 음행淫行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술 마시지 말라 등이다. 유교의 오상五常은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의 다섯 가지 덕목을 말한다.
▲ 구마라집
구자국(龜玆國, 오늘날 신장 쿠차에 속함) 출신으로 불교 사상가 겸 번역가. 401년 후진왕後秦王 요흥姚興에게 국사로 영접되어 경전 번역에 종사했다. 그의 유려한 역문 실력으로 당시 유행하던 반야般若 연구는 그 깊이를 더했고 《대지도론大智度論》등의 대승논부大乘論部도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 천태종과 지의智顗, 538~597
천태종은 화엄종과 더불어 중국 불교의 양대 산맥으로 인정받는 중요한 종파이다. 천태종이라는 이름은 창시자인 지의가 천태산을 기반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천태종은 우리에게도 친근하다. 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대각국사 의천이 세운 종파가 바로 천태종이다. 의천은 당시 고려 사회의 문제였던 교敎와 선禪의 대립, 즉 이론을 중시하는 교종敎宗과 실천을 중시하는 선종禪宗 사이의 대립을 해소하고자 송나라에 유학해서 천태종의 가르침을 얻어왔던 것이다. 지의는 일찍부터 세파를 겪고 18세에 승려가 되기로 결심한다. 젊어서 불교의 진리를 깨달은 지의는 일찍부터 보통 사람들을 상대로 가르침을 편다. 지의가 활동한 수나라 때는 대중을 상대로 한 강연이 크게 유행했는데, 한번에 5천여 명이 지의의 설법을 들었을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지의는 이런 식의 대중 강연에 회의를 가졌던 것 같다. 제자가 많아질수록 부처의 진리를 깨닫는 사람의 수는 줄어든다고 느꼈던 지의는 결국 짐을 싸서 천태산에 들어가 수행과 집필에 전념한다.
▲ 대각국사 의천
고려 왕족 출신의 승려. 고려 중기에 5교로 나뉜 교종을 합쳐 새로운 천태종을 열었고 부처의 가르침과 선종의 참선을 아우르는 교관겸수를 주장했다.
▲ 법화경 그림
법화경 제2권의 변상도. 화면 오른쪽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오른손을 들어 설법에 열중하고 있다. 그 주위를 아난과 가섭존자, 8대 보살, 그리고 사천왕이 에워싸고 그 앞에 청중들이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고 있다.
▲ 측천무후
당나라 고종 이치의 황후이며 중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여 황제. 음탕하고 간악한 요녀라는 비난과 민생을 보살펴서 나라를 훌륭히 다스린 여걸이라는 칭송을 같이 받고 있다.
◆ 오악이란?
오악五岳의 개념은 중국의 오행사상五行思想에서 비롯되었으며, 오악에는 나라의 수호신이 거처한다고 믿어 성산으로 여겨 제사를 지냈다. 신라 때에는 토함산 · 계룡산 · 지리산 · 태백산과 부악(父岳, 지금의 팔공산)을 오악으로 삼았다.
▲ 김명국의 달마도
달마대사는 선종화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재의 인물로 손꼽힌다. 상반신의 옆모습을 포착했는데 달마대사는 두건을 쓰고 있다. 특히 팔자 눈썹, 부릅뜬 눈, 주먹 같은 메부리코, 짙은 콧수염과 구레나룻 등은 독특하고도 이국적인 풍취를 잘 드러내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우리나라 사람들은 언제부터 달마도를 그렸을까?
우리나라에서 달마도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고려 시대 중기부터라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없지만 공민왕도 직접 달마도를 그렸다고 한고 17세기 중엽부터는 스님들뿐 아니라 직업 화가들도 그렸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도 지금처럼 달마도가 유행했는지 풍속화로 유명한 김홍도도 달마도를 많이 그렸다고 한다. 이후 달마도의 인기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물론 이런 인기에는 불교 신앙 이외의 복잡다단한 기복적 요인들이 뒤섞여 있을 것이다.
▲ 10대 제자
부처의 많은 제자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10명의 제자. 각기 한 방면에 뛰어난 능력을 가졌으며 노장 가섭과 소장 아난이 대표적이다.
▲ 보조국사 지눌
선종의 가장 큰 종파인 조계종을 고려 불교의 중심으로 세운 고려 후기의 승려다. '내 마음이 곧 부처卽心卽佛'임을 강조하며 불교의 수행과 이론을 통합하고자 했다.
◆ 중국화된 선禪, 조사선祖師禪
달마의 전통을 계승한 중국적 선을 조사선이라고 한다. 조祖란 부처의 마음의 근본을 밝혀서 실천과 앎이 완전히 합일되는 상태를 말한다. 부처의 교설에 근거한 실천을 강조하는 여래선과는 달리 조사선은 경전 속의 이론을 넘어서 온갖 언행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을 강조한다. 경전을 파격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물론 경전 자체를 부정하기까지 한다. 조사선으로서의 중국 선종은 나중에 일곱 가지 종파로 나뉜다. 다섯 종파와 다섯 종파 중 하나인 임제종에서 분화된 2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오가 칠종五家七宗이라고 부른다.
▲ 혜능이 방아 찧는 광경을 그린 <육조도정도六祖搗精圖>
혜능이 양자강을 건너 기주 황매黃梅의 빙무산으로 흥인대사를 찾아왔다. 대사가 혜능에게 물었다."너는 어디 사람인데 나를 찾아왔으며, 여기서 무엇을 구하려 하는가."
"저는 영남 사람으로 신주의 백성입니다. 스님을 찾아온 것은 오직 부처가 되는 법을 구하기 위함입니다."
대사가 혜능을 질책하며 말했다.
"너는 영남 사람이고, 또한 오랑캐다. 어찌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사람에게는 남과 북이 있어도, 불성佛性에는 남과 북이 없습니다. 불성에 어찌 차별이 있겠습니까."
흥인대사가 한눈에 혜능의 사람됨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주변에 있으므로 혜능에게 방아 찧는 일을 하게 했다.
◆ 임제종과 도가사상
임제종은 임제의현(臨濟義玄, ?~866/867)이 세운 종파로, 선종에 끼친 도가 사상의 영향을 가장 분면하게 읽을 수 있는 종파이기도 하다. 구속 없는 자유를 추구하는 '무위진인' 등의 표현에서 장자의 영향이 확연히 드러난다. 임제종에서 강조한 '언어를 넘어선 직관의 세계'라는 구호 역시 '언어에 고착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장자 사상의 핵심과 연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