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길이 언제났냐?"
"몇년 됐죠. 이젠 해운대서 여기까지 20분이면 온다는 거 아닙니까.“
“그렇군!”
울산은 많이 변했다. 전날 저녁 도착해서 보았던 삼산벌의 변화뿐만 아니라 길도 넓어졌고 새 길도 많아졌다. 울산대공원 예정부지 뒤로 새로 난 길을 따라 ‘언양-울산’ 고속도로에 접어들었다. 한 시간 정도 걸렸었는데 30분도 소요되지 않은 듯하다. 눈에 익은 아파트 건물들이 보였다. 오른쪽으로 울산시 범서면 일대, ‘선바위’ 입구에 있는 현대아파트 주변은 전과 다름이 없는데 왼쪽으로 새로 들어선 아파트가 꽤 많았다.
언양 인터체인지로 나가 경주로 향하는 국도에 접어들었다. 양산 방향에서 언양을 지나는 2차선 35번 국도는 경부 고속도로 아래위를 들락날락하면서 경주로 이어진다.
“전에 반구대 입구까지는 가 봤어요. 각석 있는 데까지는 저도 처음입니다.”
“나도 울산 살 때는 관심 없었어.”
“내려가는 길이 꼭 쥬라기공원에 나오는 길 같습니다. 오늘 랩터 안 나올려나...”
“하하하.”
“잘 모르는 사람은 지나쳤다가 U턴해서 다시 옵니다. 국보가 있으면 표시라도 잘 해 놓지.”
과연 그랬다. 2차선 도로를 따라 경주 쪽으로 6,7킬로 가면서 산길 모퉁이를 돌자마자 오른쪽에 작은 간판이 보였다.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국보 제 285호, 4Km’
초행길인 사람이 그 간판을 볼 때는 우회전 기회를 놓친 다음일 것이다. 좁은 ‘새마을 형’ 시멘트 포장길에 접어들었는데 완만한 내리막 꼬부랑길이 계속 이어진다. 계곡을 따라 거의 3킬로 정도. 무성한 숲 사이로 난 오솔길 수준이다.
아기자기한 계곡과 무성한 숲 사이, 마주 오는 차나 사람이 눈에 뜨이지 않는 그 길의 드라이브 분위기는 손에 꼽을 만큼 좋은 곳이 아닌가 한다. 계곡을 흐르는 냇물은 1급수로 보인다. 그 물을 모으는 사연댐은 울산 일대의 상수원이 된다.
국보 285호인 반구대 암각화는 계곡을 이루는 암벽에 있다. 인적이 별로 닿지 않는 개울 건너편 암벽에 있기 때문에 눈에 잘 뜨이지 않는다. 얼핏 봐서는 평범해 보이는 낙서가 반구대 암각화이다. 어떤 동네 주민이 그 ‘바위 낙서’가 심상치 않다고 여겨서 관련 기관에 연락했고, 한 대학교수가 현지 답사를 거쳐 청동기 시대의 유적으로 추정했다. 고인돌 이외에는 그 시절의 유적이 별로 남아 있지 않은 이 땅에서 대단한 발견이었다.
그 반구대 각석을 찾아가는 것이다. 마주 오는 차가 있으면 어렵게 물러나면서 비켜야 하는 길. 그 길이 끝나는 지점에 가게와 음식점들이 서너 개 있는데 흔히 볼 수 없는 간판이 보였다. 암각화 사진을 사용한 큰 간판이 있는 ‘암각화 사진속으로’ 란 카페. 문을 연지 1주일 밖에 안되었다는 그 카페 입구와 내부는 온통 암각화 사진이 걸려있었다.
“차 한잔하시면서 구경이나 하시라고. 실제로 가서 보면 잘 안 보이거든요. 거기서는 그냥 그런 게 있구나하고 생각하고, 자세한 건 여기서 보시라고.”
“아이디어가 좋네요.”
“좋으면 뭘 해요. 아직 손님도 없는데.”
“앞으로 많이 찾겠죠. 그나저나 여기 있는 것들 마련하는데...”
“돈 생기는 대로 하나 둘 사고 만들고.”
그 카페에서는 암각화 사진이 든 책받침과 엽서 셋트를 만들어 팔고 있었다. 학생들이 지역 문화재에 대해 알아보려고 와서 찾는다는 것이다.
사진으로 암각화에 대해 충분히 예비공부를 한 다음 현장을 찾았다. 카페가 있는 주차장에서 숲길을 따라 걸으면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곳에 있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주위는 사연댐의 수위가 낮아져 모래, 뻘, 풀밭이 꽤 넓었다. 중학생 이삽십 명이 한 암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어서, 그 뒤쪽이 암각화가 있는 곳이라 짐작하고 살폈지만, 물 건너편 암벽에서는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인솔교사에게 다가가 물어보니 손가락으로 암각화 주위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안 보입니다. 물을 건너가야 하는데...”
냇가에는 너댓 명이 탈 수 있는 허름한 거룻배가 있었다. 동행자가 살피더니 배에 타란다. 묶여 있던 배를 끌러서 암벽으로 노를 젓는데, 폭은 20미터도 되지 않을 듯 좁아도 제법 깊어 보였다. 다행히 암벽 아래에는 발을 디딜만한 공간이 있어서 사진에서만 보던 반구대 암각화를 생생하게 살필 수 있었다.
반구대 암각화는 인물상(사냥꾼, 어부), 동물상(고래, 거북이, 사슴 등)과 배, 그물 등 모두 200여 개의 작은 그림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석기 후기 내지 청동기 시대의 유적으로 추정된단다. 폭 10미터, 높이 3미터의 암벽에 음각으로 다양한 그림을 음각으로 그렸다. 그런데 몇년전 홍수에 반이 넘는 암벽이 떨어져 나갔다. 전체적인 모습은 사진으로 밖에 남아 있지 않다.
사연댐의 수위에 따라 암각화가 물에 잠겼다 나왔다 하면서 바위벽이 물러진 결과일 것이다. 수천 년 동안 보존되던 조상의 흔적이 국토개발의 부작용으로 인해 대책 없이 훼손되고 마는 것이 안타까웠다.
“놔둬! 그냥 사진 찍는 사람들이구만.”
아무도 없던 건너편 숲에 노인 몇 명이 나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양한 앵글로 사진을 몇 장 찍고 다시 배를 타고 건너와서 그 노인들에게 다가갔다. 주위의 풀을 베는 모습을 보니 ‘공공취로사업’에 나온 듯한 모습. 한 분은 ‘관리요원’이었다.
“오늘은 한가하지만 주말에는 사람들 많이 오지... 탁본 뜬다고 난리여.”
“그렇겠습니다. 이 동네 분들이 교대로 관리를 맞나보지요?”
“그렇지!”
“탁본이 있으면 그걸 복사해서 팔아도 될텐데...”
“누가 사나... 나한테 완전한 탁본이 하나 있어. 누가 물어보면 어디 뒀는지 모른다고 하지만.”
“잘 보관하세요. 나중에 손자분이나 그런 사람들이 진품명품에 들고 나가서.”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게 반구대 암각화를 뒤로하고 인근에 있는 또 하나의 국보 천전리 각석을 찾아 차를 돌렸다. 그런데 옛집이 하나 있었다. 얼핏 살피니 ‘반구서원’이란 현판이 걸려있었다.
“차 세워! 한번 보자. 이렇게 작은 서원도 있네.”
작은 강당 한 채만 달랑 있고 뒤에는 사당과 근래에 세운 비각이 있었다. 옆에 지은 살림채에 젊은 부부가 살고 있어서 물어보니, 정몽주와 이언적 등의 위패를 모시고 있단다. 고려말의 충신 정몽주의 유배지에 머물던 집이 서당을 거쳐 서원으로 발전된 것이다. 그렇게 ‘보너스’ 유적을 하나 더 살피는 기회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