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회사 22
(복음의 전래와 수용의 갈등, 시대적 배경 1)
1882년 조선은 미국과의 조약을 통해
세계에 개방되기 시작했지만
당시의 조선은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모르는,
열악하다 못해 참혹한 형편이었다.
지금은 상상도 할수 없을 정도로
그 때는 양식으로 지어진 집이
한 채도 없었으며
우편물도 자주 배달되지 않아
선교 초기의 선교사들은 아주 심한
고독과 시련으로 힘들었다.
시골은 물론 수도인 한양 (서울)조차
길은 협소하고 흙투성이었으며
선교사들도 흙집에서 모기, 파리떼에
시달리고 천연두, 이질, 설사병,
장티푸스 등이 자주 발생하여
모든 선교사들이 이 병들과 싸워야만 했다.
1886년 콜레라가 발생하여
언더우드 가정의 요리사가
요리를 하다가 갑자기 식당에서
죽는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 뿐 아니라
비 우호적인 조선 정부와 서양인이라면
무조건 적대적인 민중,
원활하지 못한 언어와 미신 등 선교사들이
겪어야 하는 많은 문제가 있음에도
복음은 전래 되었다.
개신교의 태동과 복음전래
이와같은 외적 환경과의 싸움도 힘들었지만
오랫동안 한국인들을 지배해 온
토착신앙과의 싸움은 더욱 힘든일이었다.
한국인들은 불교를 믿든, 유교를 믿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온갖종류의 미신이
삶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으며
당시 모든 질병은 악귀가 가져다
준 것이라 하여 무당의 힘을 빌리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미국 공관에서는
매 주일 공식적으로 예배를 드렸다.(1886년)
한국정부는 공식적으로 복음 전파는
찬성하지 않았으나 선교사들이 일하고
가르치는 학교나 병원에서 개인적으로
전도하는 것은 금하지 않았다.
이 즈음 알렌의 한국어 선생님이었던
노춘경이 어느날 알렌의 책상에서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을 몰래 보다
집으로 가져가 밤새 읽고
그것이 진실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확신하여
알렌에게 고백하고 알렌은 노춘경에게
언더우드를 소개해 언더우드의 양육속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비밀리에 세례를 받는다.
중국선교에서 7년 만에
첫 신자를 얻었던 것에 비하면
한국은 언더우드가 입국한지 1년만에 첫 결실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소래교회에 이어
두번째 한국 개신교회인 새문안 교회가
설립되었고(1887년) 그 해에 정동 감리교회도
7명이 창립예배를 드렸다.
정동 감리교회는 주변에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이 있어 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갑작스런 금교령
1888년기독교에 대해 비교적 온건했던
조선정부로부터 기독교 전교를 금지하라는
금교령이 내려진다.
금교령은 천주교를 겨냥해 내려진 것이지만
개신교 단체에도 영향을 미쳤다.
갑작스런 금교령의 이유는 명동성당 건축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주교가 명동성당을 한양이(서울)
훤히 보이는 시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세우려 하자
다른 곳을 선택하라는 조선정부의 입장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프랑스 신부가 프랑스 정부를 등에 업고 강행하자
조선정부는 금교령을 내린 것이다.
당시 개신교가 천주교보다 선교를 후에 시작했음에도
선교열이 뜨겁자 약간의 위기의식을 느껴
장소 선택을 강행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