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라고도 한다. 동양화에 쓰이는 종이는 마지(삼베)·저지(닥종이) 등 여러 종류가 있다. 이 중 화선지가 동양화에 적당한데, 옛날 중국 선주 지방의 종이가 질이 좋다고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화선지는 서예 용지로도 쓰이며, 먹을 잘 빨아들이고 또 잘 번지며 내구성도 뛰어나다. 종류도 여러 가지가 있으므로 먹이 번지는 정도를 고려하여 먹의 농담과 화선지의 관계를 잘 고려해서 선택해야 한다.
수묵화는 화선지에 먹이나 염료성 안료 등의 입자가 고운 물감을 써서 스며들고 번지는 선염법을 이용하여 그린다. 그러나 채색화를 그릴 때는 물감이 스며들거나 번질 수 없도록 화선지에 호분과 아교물, 명반을 혼합한 바탕막을 씌우는 처리를 한 위에 그린다.
또 그림의 주제에 따라 종이의 선택이 달라져야 하는데, 화조화에는 먹을 적게 흡수하는 종이가 좋고, 산수화용은 먹을 잘 흡수하는 종이가 좋다. 닥종이는 질겨 글을 쓰는 서화에 알맞으며, 마지는 두꺼우므로 채색화에 좋다. 화선지를 보관할 때는 직사광선을 피하고 습기를 잘 빨아들이므로 습기가 있는 곳은 피하는 것이 좋다. 한국에서는 전주의 화선지가 특히 좋다.
붓 필(筆)
짐승의 털을 추려서 모아 원추형으로 만들어 죽관(竹管) 또는 목축(木軸)에 고정시킨 것으로 호(毫)의 끝을 봉(鋒), 호의 끝부분 반을 전호(前毫), 그 필두(筆頭)까지의 짧은 털은 부호(副毫)라 한다. 털로 된 모필 이외에도 죽필(竹筆)·고필(藁筆)·갈필(葛筆) 등 특수한 것이 있다.
호는 주로 토끼털(紫毫라고도 함), 양털을 비롯하여 이리·너구리·사슴·족제비·말·고양이·노루 등의 털과 쥐수염·닭털·태발(胎髮) 등으로도 붓을 맨다. 털이 부드러운 붓을 유호필(柔毫筆), 탄력이 큰 털로 맨 붓을 강호필(剛毫筆)이라 하고 유호에 강호심(剛毫蕊)을 박은 것을 겸호필(兼毫筆)이라 한다.
또 털의 길이가 긴 것을 장봉(長鋒), 짧은 것을 단봉(短鋒), 보통의 것을 중봉(中鋒)이라 한다. 토끼털은 중추(仲秋) 무렵의 것을 상질로 치고, 사슴털은 여름 것을 취한다. 필관은 대개 대나무를 쓰지만 나무·골각·보옥·금은·도자 등으로 만들기도 한다.
먹 묵(墨)
먹[墨]의 시초는 중국의 한대(漢代) 초라는 정설이 있다. 붓은 진대(秦代)의 몽염(蒙恬)이, 종이는 한대의 채륜(蔡倫)이 발명하였다고 하나, 먹의 발명자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다만 붓을 쓰기 시작한 때와 거의 같은 시기에 발명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먹이 발명되기 이전에는 문자를 골편(骨片)이나 금석(金石)에 새겼다. 이를 갑골시대(甲骨時代)·금석시대라 한다. 그 후 인지(人智)와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문자의 사용범위가 넓어지고, 갑골문이나 금석문만으로는 기록하기가 어려워지자 대나무 조각이나 나뭇조각 또는 천 등에 문자를 쓰게 되었다. 이때를 죽간시대(竹簡時代)라 한다. 당시 죽간에 쓰던 것은 붓이 아닌 죽정(竹挺)이란 것으로 옻[漆]을 묻혀 썼다. 그래서 그 문자의 획이 마치 올챙이 모양과 같다 하여 죽첩과두문자(竹牒蝌蚪文字)라고 하였다. 공자나 맹자가 쓴 글씨도 모두 이 죽간칠서(竹簡漆書)였다.
견백(絹帛)이란 천(명주)은 종이보다 다소 먼저 발명되었다. 죽간시대에 이미 명주에 글씨를 썼으며, 이 글씨는 붉은 단서(丹書:붉은 광석이나 돌가루를 반죽하여 그것을 붓에 묻혀 쓴 글씨) 아니면 검은 묵서(墨書)였다. 이때 묵서의 원료는 자연산 석날(石靭)이라는 일종의 광물이었다. 석날이란 오늘날 연필심으로 쓰이는 흑연(黑鉛)의 일종인 듯하며, 거기에 옻을 섞어서 썼던 모양이다. 그 후 문화가 발달됨에 따라 점차 그을음, 즉 연매(煙煤)를 옻 대신 썼다. 이어서 아교풀과 섞어 쓰게 되면서 드디어 제묵(製墨)의 단계로 옮겨지게 되었다.
전한(前漢)시대에도 오늘날과 같은 먹은 만들지 못한 듯, 당시에 쓰였던 얇고 편편한 벼루와 마묵구(磨墨具)가 낙랑채협총(樂浪彩瑩塚), 그 밖의 한대(漢代) 고분에서 출토되었다.
25∼220년 후한(後漢)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오늘과 같은 먹을 만들게 되었는데, 그것은 종이의 발명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처음에는 송연묵(松煙墨)을 생산하였고, 유연묵(油煙墨)을 사용하게 된 것은 오대십국(五代十國)시대에 이르러서다. 당시 남당(南唐)의 후주(後主)가 먹의 사용을 장려하여 이정규(李廷珪)와 같은 유명한 묵공(墨工)이 나왔고, 그 후 송(宋)·원(元)·명(明)·청(淸) 등으로 이어져 오면서 많은 묵공이 배출되고 일품(逸品)이 생산되었다.
한국의 제묵 연혁을 살펴보면, 고대부터 먹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위만·낙랑시대에 중국의 것을 본받은 것이 사실인 듯하며, 신라시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정품(精品)의 먹이 생산되었다. 신라의 양가(楊家)·무가(武家)의 먹은 모두 송연묵으로서 그 품격(品格)이나 질이 매우 좋았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는 조선묵(朝鮮墨)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일본에서도 먹은 매우 귀하게 여겼으며, 그들이 먹을 처음으로 만든 것은 고구려의 담징(曇徵)이 제지법과 제묵법을 610년에 전해준 데서 비롯되었다. 일본인 자신들도 이 사실을 시인하고 있으며, 이 밖에도 신라의 먹을 수입하여 매우 소중히 여겼다 한다.
벼루 연(硯)
간다는 뜻에서 '硏'자를 동의자로 쓴다. 대개는 돌로 만들지만 와연(瓦硯), 도연(陶硯)도 있고 옥·유리·비취·수정 등 보석류라든가 금·은·동·철·목(木)·죽(竹) 등으로도 만든다. 형태는 직사각형·사각형·원형·타원형·풍자(風字)형 등이 있다. 물론 다른 의장(意匠)으로 만들어진 것도 더러 있다. 먹을 가는 부분을 연당(硯堂), 또는 묵도(墨道)라 하고 갈려진 먹물, 즉, 묵즙이 모이도록 된 오목한 곳을 연지(硯池), 또는 연홍(硯泓), 연해(硯海)라 한다.
벼루가 구비하여야 할 첫째 조건으로는 먹이 잘 갈리고 고유의 묵색이 잘 나타나야 한다. 연당의 표면에는 숫돌과 같은 꺼끌꺼끌한 미세한 봉망(鋒芒)이 있어 여기에 물을 붓고 먹을 마찰시킴으로써 먹물이 생긴다. 따라서 봉망의 강도가 알맞아야 한다. 봉망이 약하면 먹이 잘 갈리지 않고 반대로 강하기만 하면 잘 갈리기는 하나 먹빛이 좋지 않다. 그래서 벼루는 실용의 기능을 충족시킬 수 있는 좋은 재질의 것을 첫째 요건으로 하지만 구석기시대부터 중국인의 돌에 대한 강한 애착은 벼룻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다만 먹을 가는 도구라는 차원을 넘어 돌의 빛깔이라든가 무늬의 아름다움을 취하고 나아가 연면(硯面)을 고도의 미적 의장으로 조각 장식하여 문방사우의 하나로서 감상의 대상으로 소중히 여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