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파도
소흔 이한배
지난겨울 나는 한 번도 눈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겨우내 눈은 TV 속에서만 보았다. 지난해 11월 말경 겨울 바다의 파도가 보고 싶어 강구에서부터 고성까지 가보려고 길을 나섰었다. 그러나 갑자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강구에서 하룻밤만 자고 돌아와야 했다. 그러다 보니 겨울 사진 한 장 제대로 못 찍어보고 보내야 하나 싶어 안달이 났다.
벼르고 벼르다가 며칠 전 아내와 새벽공기를 가르며 달려간 곳이 ‘정동심곡 바다부채길’이다. 아내가 몇 년 전에 갔다가 파도가 너무 세서 출입을 막는 바람에 구경을 못 했다고 아쉬워하는 곳이다. 파도가 세면 못 들어가다니…. 그곳의 파도가 궁금했다. 바람이 좀 세게 부는 것 같아 전화해보니 탐방은 할 수 있는데 오후 3시 반까지 입장하란다. 홍천에 부모님 산소에 들렀다가 늦어져서 도착한 시간은 3시 20분. 조금만 늦었어도 못 들어갈 뻔했다.
바다부채길은 원래 정동진에서 출발해 심곡항까지 오리 정도 되는데 지난해 태풍피해로 심곡항 쪽에 일부분이 망가져서 가다가 되돌아와야 한다. 매표소에서 4시 30분까지 나오란다. 코스가 왕복 십 리가 채 못되니 한 시간이면 넉넉하리라 생각했다.
입구로 들어가 층계를 내려가면서부터 내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가히 천하제일 급 절경이다. 기암절벽에다 갖가지 모양의 바위들, 그리고 옥빛 바다 수평선 저 너머에서 질주하듯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 ‘역시 파도는 동해야’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정동심곡 바다부채길’은 전국 최장 거리 해안단구라고 한다. 동해 탄생의 비밀인 2,300만 년 전 지각변동을 관찰할 수 있는 곳으로 천연기념물 제437호이다. 부채바위, 투구바위와 육발호랑이 등 전설을 품고 있는 기암괴석과 깎아지른 절벽, 동해의 옥빛 바다가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그 절경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카메라에 담아내려 열심히 셔터를 누른다. 기암괴석은 보는 사람마다, 갈 때마다 다르게 보일 수 있다. 게다가 위치에 따라서도 다르게 보여 마치 숨은 그림 찾듯 자세히 봐야 한다. 결국 나는 곰 한 마리를 찾아냈다, 저만큼 앞서가는 동생을 불러 보라고 했더니 “아니 왜 내 눈엔 안 띄었지?” 하며 신기해한다.
그렇게 황홀경에 빠져 가다 보니 고만 가라고 막아 놨다. 되돌아서려는데 심곡항쪽에서 한 사람이 온다. 다가오는가 싶더니 나갈 시간이 됐으니 어서 나가란다. 감시원인가보다. 아니 벌써? 그러고 보니 4시다. 빨리 나가라고 재촉을 해대는 모습이 어렸을 때 많이 보던 완장 찬 사람을 떠오르게 한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은 완장 찬 사람이 많아진 느낌이 들어 좀 그랬는데 예서 만나다니….
들어올 때 속으로는 좀 늦어도 되겠지 생각했었다. 그 완장 찬 사람을 보니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가슴이 철렁했다. 무서운 완장이 거기서 나타날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 했기 때문이다. 딴은 북한 사람이 또 넘어왔으니 그러려니 하면서도 왠지 불쾌해진다. 그러나 어쩌랴. 완장 찬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무서운 법. 계속해서 양 떼를 몰듯 바짝 뒤쫓아온다. 무언의 압력으로 재촉을 해대는 것 같아 쫓기듯 부지런히 발길을 옮길 수밖에 없다. 완장은 처음 와본 바다부채길의 감동을 모두 부숴버려 머릿속에 남지 않게 했다. 파도가 무참하리만큼 저렇게 부서지는데 나는 추억이라도 부숴버려야 되겠지 하는 생각에 쓴웃음을 지으며 추암으로 간다.
추암에 도착하니 어둑어둑 땅거미가 진다. 숙소를 정하고 저녁을 먹고 밤바다를 보러 간다. 추암은 일출을 보기 위해 오다 보니 대개 밤에 도착하여 잠을 자게 마련이다. 그러니 밤바다를 보는 것은 덤이다.
추암의 육지 쪽은 오래된 집들을 다 부숴버리고 새 건물로 완전히 달라졌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덕지덕지 시멘트 숲을 만들어 놨다. 저쪽 산 위에는 커다란 호텔인 듯한 건물이 올라앉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추암의 화려해진 밤 풍경이 낯설고 어색하다.
그러나 추암의 밤바다는 여전한 모습으로 나를 반긴다. 밤이면 야시시한 형제바위를 비롯해 철석 쏴아 파도 소리가 밤의 적막을 헤집는 추암의 밤바다는 언제 봐도 좋다. 우리 부부와 같이 온 동생 부부가 아무 말 없이 모래사장을 걸으며 밤바다 파도 소리에 취해본다. 추암의 밤바다는 어둠 속 어느 머언 곳에 하얀 전설을 모래 위에 하염없이 흩뿌려 놓는다.
다음 날 아침에 하늘을 보니 해 뜨는 자리에 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그래도 모두 일출을 보려고 나선다. 촛대바위 있는 곳에는 벌써 몇몇 사람들이 서 있다. 사실 내가 추암에 오는 것은 일출도 일출이지만 황금파도를 보기 위함이다. 아침 해가 뜨고 나면 보는 각도에 따라 파도의 색깔이 황금색인 것을 볼 수 있다. 십수 년 전에 이곳에서 우연히 보고 다른 곳에서도 찾아봤지만 보질 못했다. 여기서도 한 5년 전에 또 한 번 봤을 뿐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혹시나 했는데 이번에도 안 보여 준다.
아쉬움을 촛대바위 위에 남겨 놓고 동생 내외는 서울로 먼저 출발하고 우리는 삼척 초곡항으로 간다. 이곳도 지도에서 보고 처음 가보는 곳이다. 이름하여 ‘초곡 용굴촛대바위길’이다. 여기도 바다 부채길처럼 기암절벽을 걸으며 볼 수 있는 곳이다. 초곡항은 황영조 마라톤 선수의 고향으로 황영조 기념관도 있다. 초곡항을 들어서는데 벌써 파도가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어제보다 파도가 더 거칠어서 좋다. 끝내 길가에다 차를 세우고 카메라를 꺼내게 한다.
탐방길엔 촛대바위, 피라미드 바위, 거북바위, 사자바위, 용굴과 출렁다리가 있다. 총길이는 660m밖에 안 되지만 무척 인상적이다. 여긴 완장 찬 사람도 없고 입장료도 없다. 마음껏 사진도 찍고 파도도 감상한다.
겨울이 떠날 채비를 하고 봄이 시작될 때쯤엔 바람이 많이 분다. 어느 바다고 파도가 센 날이 많다. 그래서 요맘때 바다를 찾으면 센 파도를 볼 수 있어 좋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도 파도를 보면 마음이 설레어 가슴이 뛴다.
동해의 파도는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차다는 것이다. 억겁을 밀려와 부서지는 처절한 아픔을 내가 어찌 감당하겠는가! 저렇게 가슴 저미는 한 많은 아우성을 내가 어찌 감당하겠는가! 하염없이 밀려와 통곡하는 저 울부짖음, 나더러 어떡하라고! 여북하면 깨지고 부서지며 그 긴 세월을 보냈겠는가! 제 마음의 아픔도 제대로 이겨내지 못하고 허우적대기 일쑤인 나의 모습이 초라해질 뿐이다.
그래도 새봄이 오기 전에 동해의 파도는 꼭 봐야만 한다. 감당키 어려운 그 커다란 파도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다. 파도는 말한다. 나의 아픔에 댈 것도 안 되는 너의 조그만 아픔이 뭔 대수냐고. 그걸 1년에 한 번은 들어봐야 정신을 차리는 아둔한 자가 바로 나다. 그래서 봄이 오기 전에 동해안에 와서 파도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어보아야 한다. 새봄은 정신 차려서 맑은 마음으로 맞아야 하니까.
한참을 정신없이 파도 촬영을 하였다. 밀려오는 파도, 부서지는 파도, 밀려오고 밀려가다가 부딪혀 깨지는 파도, 바위를 삼켜 버릴 듯한 파도 열심히 찍고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지른다.
“인제 그만 가요. 추워 죽겠어요”
아내였다.
첫댓글 아! 동해. 파도.
가 보고 싶습니다.
한 번 가보시지요.
코로나 때문에 오히려 한적합니다.
몇 년 전 바다부채길 개방하고 1~2주 만에 다녀온 적 있습니다. 7월 이었어요. 더운 여름 오전에 정동진에 도착하여 심곡항까지 갔었지요. 심곡항 도착까지 계속 작렬하는 햇빛을 받으면 걷느라 힘이 들었어요. 파도는 없었답니다. 너무 더워 그 절경을 만끽하지 못했었지요. 트레킹하는 관광버스를 탔기 때문에 시간도 맞추어야 하고. 여유스러움없이 다녀왔던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로 이런 봄에 가면 부서지는 파도를 보는 재미가 있군요.
황금파도라는 말도 처음 들었습니다.
제가 처음 바다를 본 것은 대천 앞 바다였구요. 그다음은 스물두 살때 부산 태종대였어요.
이른 아침 절벽에 부딪히는 파도 장면이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 경이로움, 강렬하게 절벽에 부딪히는 파도와의 첫 만남. 선생님의 느낌을 알 것 같네요..
잘 읽었습니다
바다부채길은 다음에 제대로 구경할 것입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쫒기면서 보는 것입니다.
찬찬히 감상하며 느껴가며 생각하며 사진찍으며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