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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주몽 그리고 소서노
(1) MBC는 창사 45주년 기념으로 ‘주몽’이란 드라마를 방영하고 있는데 상당히 인기가 있는 모양이다. 작년에 방영된 드라마 ‘해신’에서 ‘장보고’(최수종 분)의 라이벌이던 ‘염장’역을 연기했던 송일국이 고구려 건국의 주인공 주몽 역을 맡고,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한 소서노 역은 한혜진이 맡았다.
또한 비슷한 시간대에 KBS는 ‘대조영’을, SBS는 ‘연개소문’을 방영함으로써 라이벌로 시청률 경쟁을 하는 것 같은데, 주몽이 단연 으뜸을 차지하는 모양이다. 나는 대조영이나 연개소문이나 주몽 모두를 편견 없이 보고 싶지만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 질금질금 볼 때가 많다.
아무튼 요즘 인기 있는 드라마, ‘주몽’을 보면서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여인 소서노에 대해 알고 보면 드라마를 보는 재미가 더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고 또 우리 역사니 만큼 알아두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에서 재야 역사학자 이덕일의 ‘여인열전’을 참고로 하여 ‘소서노’에 대해 알아본다.
삼한통일의 주역이었던 태대각간* 김유신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생질(甥姪)이자, 임금인 문무왕(김법민)에게 “개국하기도 어렵지만 수성(守城)하기는 더 어렵다”고 했다지만 그 옛날, 기원전 37년 무렵에 만주 졸본천(卒本川-요령성 혼강)가에 살던 소서노(召西奴)에게 객관적인 미래는 없었다.
* 태대각간(太大角干) 신라 최고의 벼슬(영의정)을 각각이라 했는데 문무왕은 김유신을 대각간이라 했다가 그것도 모자라 태대각간이라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졸본의 토착세력인 연타발(延佗勃)이었고, 남편은 북부여왕 해부루의 세손이었던 우태(優台)였으나 우태는 이미 사망한 뒤였기 때문에 남편과 함께 펼치려던 큰 포부는 남편의 사망과 함께 무덤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소서노에게 남은 인생은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잘 기르는 것뿐이었다. 전쟁이 일상화 된 고대 사회에서 남편 없는 여인이 할 수 있는 사회적 역할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2) 그 무렵 소서노 앞에 나타난 남자가 주몽이었다. 그 때 소서노 나이 서른 둘, 주몽은 스물한 살, 소서노에게는 비류와 온조라는 두 아들이 이었다면 주몽은 임신한 부인 예(禮)씨가 있었다. 연상의 과부 소서노와 주몽이라는 두 남녀의 만남은 만주 전역에 어떤 회오리바람을 일으킬지 그때까지 아무도 몰랐다.
소서노는 북부여왕 해부루의 손부(孫婦)였으니 북부여에서 망명한 주몽은 시가(媤家)의 정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과거의 악연보다는 미래의 새로운 가치를 위해 주몽과 손을 잡았다. 그녀는 졸본지역의 시대적인 과제를 ‘부족통합에 의한 국가창업’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졸본지역은 흔히 5부족으로 불리는 여러 부족이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녀는 자신이 이 과제를 수행하기로 결심했다.
처음에 졸본의 토착세력들은 주몽을 무시했다. 오이, 마리, 협보라는 세부하만 데리고 부여에서 도망친 주제에 ‘천제(天帝)의 아들, 하백(河伯-물의 신)의 외손’이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주몽을 달갑게 보는 토착세력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소서노는 토착세력의 기득권으로 주몽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 자신이 토착세력의 대표 연타발의 딸이었지만 정체된 현실에 만족하는 기득권자의 시각이 아니라 졸본의 변화를 추구하는 도전자적 시각으로 주몽을 바라보았다.
졸본의 변화를 추구하려는 소서노에게 중요한 것은 토착세력이냐, 이주세력이냐가 아니라 능력이었다. 소서노는 편견을 걷어내고 주몽의 능력을 보았다. 그러자 주몽의 진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총명한 두뇌*와 이를 현실로 만들 무예실력이 있었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왕조에 주몽의 명석한 두뇌를 나타내는 일화가 있는데 ‘부여왕 금와는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은 말의 성질을 살펴서 준마에게는 먹을 것을 조금만 주어 파리하게 만들고, 둔한 말은 잘 먹여서 살찌게 하였다. 금와왕이 살찐 말은 자신이 타고 마른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주몽의 능력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활솜씨였다. <삼국사기> 동명왕조에 ‘주몽이 일곱 살 때 자신이 직접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번 쏘면 백번을 다 맞추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부여 속담에 ‘활 잘 쏘는 것을 ‘주몽’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같은 조에 <금와>왕이 들에서 사냥을 할 때 주몽이 활을 짤 쏜다하여 화살을 적게 주었으나 주몽이 잡은 짐승이 훨씬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서노는 주몽이 지닌 명석한 두뇌와 빼어난 활솜씨. 그리고 북부여라는 기존의 터전을 과감하게 버리고 망명한 벤처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주몽이 지닌 이런 능력을 높이 산 소서노는 과감하게 그와 손 잡은 것이다. 졸본의 변화를 추구하는 소서노와 벤처정신의 소유자 주몽의 결합은 엄청난 폭발력을 발휘하게 된다.
소서노와 주몽의 결합은 흔히 갈등으로 점철되기 쉬운 토착세력과 이주세력이 손을 잡고 만든 새로운 힘이었다. 새로운 가치관이 둘의 연합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만주전역을 아우르는 대제국으로서 통일제국 수,당과 천하를 놓고 정면승부를 펼칠 고구려는 이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었다.
소서노가 없었다면 스물한 살의 망명객이 토착세력의 텃새를 극복하고 고구려를 건국하기란 불가능했다. 고구려는 말하자면 소서노라는 자본주가 주몽이라는 전문경영인을 영입해 건국한 신흥국가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에 ‘주몽이 나라의 기초를 개척하며 왕업을 창시함에 있어서 소서노의 내조가 매우 많았으므로 주몽이 소서노를 특별한 사랑으로 후대했고 비류 등을 자기 소생처럼 여겼다’라는 기록은 여성에게 인색한 <삼국사기>의 기록으로서는 이례적인 것이다. 그만큼 고구려 창업에 소서노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삼국사기>동명왕조에는 고구려 건국기사 바로 뒤에 ‘일설(一說)에는’이라며 쓴 다음 내용은 소서노와 관련된 것이다.
“일설에는 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렀는데 왕이 아들이 없었다. 주몽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그의 딸로 아내를 삼게 하고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는 말도 있다.”
이는 졸본부여 소서노의 아버지 연타발이 자신의 딸 소서노를 주몽과 결혼시켜 졸본부여의 왕위를 잇게 했다는 기록인 것이다. 주몽이 먼저 졸본부여의 임금이 되었다가, 고구려를 개창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어느 경우든 소서노의 역할이 지대했음은 분명하다. 불과 세 명의 부하를 거느렸던 주몽은 소서노를 만나 결정적 지원을 받고 고구려를 건국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고구려를 창업한 소서노의 공은 기원전 19년 부여에서 주몽의 아들 유리(琉璃)가 찾아오면서 부인(否認)된다. 주몽은 부여를 떠나면서 부인 예씨에게 ‘일곱 모난 돌 위의 소나무 아래 감춘 유물을 찾는 자가 내 아들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남하했는데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유리명왕조에는 유리가 그 유물을 찾는 장면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유리가 산골짜기에 가서 칼을 찾다가 못 찾고 피곤하여 돌아왔다. 하루는 그가 마루 위에 있을 때 기둥과 주춧돌 사이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찾아보니 주춧돌에 일곱 모가 나 있었다. 곧 기둥 밑을 뒤져 부러진 칼 한 조각을 찾았다. 이것을 가지고 옥지・구추・도조 등 세 사람과 함께 부왕(주몽)을 찾아가 부러진 칼을 바쳤다. 왕이 자신이 가졌던 부러진 칼을 내어 맞추어보니 완전한 칼이 되었다. 왕은 기뻐하며 그를 세워 태자로 삼았다.’
이때가 주몽 재위 19년(BC 19)4월이었다. 소서노는 당연히 자신의 장남 비류가 태자가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정작 태자는 북부여에서 온 유리였다. 소서노는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자신은 미모나 교태로 남자를 사로잡아 왕비가 된 여자가 아니었다. 고구려는 예씨와 유리가 아니라 소서노와 두 아들 비류, 온조가 함께 세운 나라였음에도 후계자는 유리가 된 것이다.
유리를 태자로 삼은 지 6개월 만에 주몽은 나이 40세로 세상을 떠났고 태자 유리가 뒤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
이때 소서노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하나는 유리왕과 권력투쟁에 나서는 길이었는데 졸본은 소서노의 고향이자 세력기반이었다. 부러진 칼 조각과 역시 세 부하를 이끌고 내려온 유리는 졸본지역에 자신의 세력이 전무한 상태였다. 토착세력인 소서노가 두 아들과 손잡고 유리왕 축출에 나선다면 유리왕이 승리하기는 극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소서노는 내부 파쟁 대신에 다른 길을 선택했다. 새로운 나라 창업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과거 주몽을 선택할 때 그랬던 것처럼 기존가치에 안주하기보다는 새로운 변화에 미래를 걸기로 한 것이었다. 장남 비류가 그의 뜻에 동조해 동생 온조를 설득했다.
“처음 대왕께서 부여에서 난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 오셨을 때 우리 어머니께서 가진 재산과 노력을 모두 기울여 나라를 세우도록 도왔다. 지금 대왕이 세상을 떠나신 이후 나라가 유리에게 돌아갔다. 우리가 여기에서 불필요한 혹처럼 우울하게 지내느니 차라리 어머님을 모시고 남쪽 지방으로 가서 좋은 땅을 선택해 나라를 세움만 같지 못하다.”
(4) <삼국사기>는 이때 오간・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많은 백성들이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만큼 소서노의 세력이 막강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는 막강한 세력으로 내부의 유리왕과 대결하기보다 외부로 나가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로 했다. 그는 주몽처럼 보다 넓은 세계, 미지의 세계에 자신의 미래를 걸었다.
만주를 떠나 한반도로 남하한 소서노는 푸르게 넘실대는 한강을 보고 이 일대가 새 나라의 도읍지라고 직감했다. 그러나 장남 비류가 반대하고 나섰다. <삼국사기> 온조왕조의 관련 기록은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岳)에 올라서 살만한 땅을 살폈다. 비류가 바닷가에서 살자고 주장하자 열 명의 신하가 간(諫)하여 말하기를 “생각하건데 이곳 하남의 땅은 북으로 한수(漢水-한강)가 띠를 둘렀고, 동으로 높은 산악에 의거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비옥한 들판이 바라보이고, 서로는 큰 바다에 막혔습니다. 이러한 천험의 좋은 땅이야말로 얻기 어려운 것이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비류가 듣지 않고 따르는 백성들을 나누어 가지고 미추홀(彌趨忽)로 가서 살게 되었다.」
장남 비류와 차남 온조의 의견이 둘로 갈렸을 때 소서노는 장남에게 얽매이지 않았다. 소서노는 자신의 견해가 있었다. 그는 한강 유역이 새로운 도읍의 적격지로 보았다. 장남 비류가 고집을 꺾지 않자 소서노는 장남 대신 차남 온조를 선택했다. 그는 온조와 한강유역에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풍납토성)을 쌓고 새 나라를 건국했다. 한반도와 일본 그리고 요서(遙西)를 아우르는 해상왕국 백제(百濟)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소서노는 온조와 함께 백제의 기틀을 잡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낯선 망명객 주몽과 함께 고구려를 건국했던 그의 경험과 능력은 백제 건국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온조왕 즉위 원년(BC 18)여름 5월에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는데 여기서 동명왕은 고구려 시조 주몽이 아니라 부여의 시조를 뜻하는 것이다. 중국 사서인〈위서(魏書)〉백제조에는 “저희는 고구려와 함께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습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백제가 고구려와 함께 부여의 정통성 계승을 놓고 다투는 관계임을 뜻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소서노의 전 남편 우태가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란 점은 시사(示唆)하는 바가 크다. 소서노는 부여 시조 동명왕의 사당을 세움으로써 부여의 정통성을 고구려가 아니라 백제가 계승했음을 내외에 과시하려 한 것이다. 주몽의 아들 유리왕이 있는 고구려가 아니고, 장남 비류가 세운 비류백제도 아니고, 자신이 있는 온조백제에 부여의 정통성이 있음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강 유역을 도읍지로 정한 그녀의 선택은 미추홀을 선택한 비류가 ‘습하고 물이 짜서 백성이 편하게 살 수 없어서 후회했다’는 점에서 탁월함이 입증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미추홀이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백성이 살 수 없게 되자 위례성으로 돌아온 비류는 이곳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태평한 것을 보고 그만 부끄럽고 한스러워 병이나 죽고 그의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귀속되었다고 하였다.
(5) 그러면, 소서노의 종말은 어땠을까. <삼국사기> 온조왕조 13년(BC 6)은 ‘왕모(王母)가 61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삼국사기>에 왕모의 죽음을 기록한 것은 극히 희소하다는 점에서 소서노의 백제에서의 위치를 짐작하게 해 준다. 그녀가 백제 건국의 주역이었던 것이다.
백제 건국에 있어 그의 역할이 얼마나 컸는지는 소서노가 사망한 해 5월 온조가 신하들에게 한 다음의 말에서도 알 수 있다.
“나라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서 우리 강역을 침범하기 때문에 편안한 나날이 적다. 하물며 요즘에는 요상한 조짐이 계속 나타나고 국모마저 세상을 떠나셔서 스스로 편안 할 수 없는 상태이니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소서노의 공백은 온조에게 천도(遷都)를 결심하게 할 만큼 컸던 것이다. 온조는 “내가 순행하다가 한수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져서 마땅히 그곳을 도읍으로 정해서 영구히 편안할 계책을 도모할 것이다”라는 말도 하였다.
(6) 비록 후대의 역사가들에 의해 고구려 개창의 공은 남편 주몽에게, 백제 개창의 공은 아들 온조에게 돌아갔지만 이 두 나라의 창업에 소서노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남성 중심의 역사관 때문에 그의 이름은 역사서에게 점차 지워져 관련된 내용 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삼국사기>가 일설로 그의 이름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 자체가 소서노의 활약상을 짐작하게 해준다.
소서노에 대해 가장먼저 주목한 인물은 단제 신채호(丹薺 申采浩)선생이었다. 신채호는 <삼국사기>와 다르게 해석하고 있는데 그는 소서노가 주몽의 아들 유리를 태자로 인정해 주는 대신, 많은 금은 보주를 주몽으로부터 얻어와 마한왕에게 뇌물을 주고 미추홀과 하북위례홀 등을 얻어서 소서노 자신이 왕호를 칭하고 국호를 백제라고 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소서노 일행이 한강유역에 도착한 직후 비류백제와 온조백제가 갈리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신채호는 소서노가 여왕일 때 두 아들이 모두 함께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신채호가 쓴<조선상고사> 를 보자.
「소서노가 붕(崩 : 임금이 죽음)한 후에 비류・온조 양인이 상의하여 가로되 “서북의 낭랑(樂浪 : 한사군의 낙랑이 아니라 최씨 낭랑)과 예(濊)가 침핍(侵逼 : 침략하여 핍박함)하여 모씨(母氏 : 어머니 소서노)같은 성덕이 없고서는 이 땅을 지킬 수 없으니 차라리 새 터를 보아 천도함이 가하다”하고, 이에 형제가 오간・마리 등과 함께 부여악에 올라 서울로 삼을 만한 자리를 살필 새, 비류는 미추홀을 잡고 온조는 하남위례홀을 잡아 형제의 의견이 충돌되었다.」
신채호는 소서노가 죽은 후에 두형제가 갈라지는 것으로 보았는데, 소서노가 사망한 온조 13년(BC 6)은 온조의 연조가 아니라 소서노의 연조라는 것이다. 즉 온조 13년은 소서노 재위 13년이며, 다음해가 온조 14년이 아니라 온조 원년이라는 것이다. 신채호는 백제 시조를 온조가 아니라 소서노로 본 것이다.
- 2006. 11. 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