京畿의 魂과 만나다 /
높은 이상 펼치지 못하고… 날개 꺾인 짧았던 생애
정암 조광조 (靜唵 趙光祖)
‘왕도(王道)’ ‘선(善)’ ‘위기지학(爲己之學)’ 강의통해 젊은 신진들 이끌어
여악 폐지하고 풍속교화 추진... 정국공신에 대한 위훈삭제로 ‘정면충돌’
기묘사화에 개혁정치 못이루고 37세로 生 마감... 용인 심곡서원에 봉안.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203-2번지에 자리잡고 있는 심곡서원(深谷書院)
조선 중종때의 문신 정암 조광조를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으로,
전면에는 홍살문이 있고 외삼문(外三門), 일소당(日昭堂), 내삼문(內三門),
사우(祠宇), 장서각(藏書閣)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반도의 등뼈 백두대간은 한강 남쪽으로 한남정맥이란 가지를 뻗어놓고 있다.
그 주봉인 광교산에서 석성산을 바라보며 마루금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소실봉 못 미쳐 평지 정맥을 만난다.
이곳을 행정복합도시 건설로 바쁜 충청남도 연기와
금강산의 고장 강원도 고성을 남북으로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43번 국도가 교차한다.
바로 이 어귀에서 조선왕조가 낳은, 곧아서 애처로운 경기의 혼,
정암 조광조의 서늘한 유택과
그를 봉안한 심곡서원이 고층아파트에 갇힌 채 서슬 푸르게 손짓하며 우리를 맞는다.
세계로 향한 선진화의 깃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더 이상 다툴 수 없는
우리의 나아갈 길로 선언된 이즈음.
오늘 다시 조용히 철 지난 유행처럼 그의 그림자를 밟으며
후세인들이 왜 그리 그를 애처로워하며 기억하고자 했는지 더듬어본다.
서른일곱이란 너무나 짧았던 생애 때문일까?
그 이상이 너무 높아서였을까?
그것을 이룰 수 없게 했던 덜 닦여진 경륜이 안타까워서였을까?
그의 이름은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중반에 이르는
이른바 사화의 시기 한 가운데인 기묘사화에 굵게 새겨져 있다.
심곡서원 맞은편 야산에 있는 조광조의 묘소.
개국공신 온(溫)의 5대손이며,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로 한성에서 태어났다.
17세 때 지금의 평안북도 영변인 어천찰방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당시 무오사화로 희천에 유배 중이던 김굉필에게 수학하였다.
‘소학’, ‘근사록’ 등을 토대로 하여 성리학 연구에 힘썼으며,
특히 ‘중용’, ‘대학’을 중시하였다.
1510년인 28세 때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이때 임금의 학습을 돕는 강사로 뽑혀 ‘대학’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기묘명현의 한 사람으로서,
같은 43번국도 변 멀지 않은 죽전에 묻힌 김세필의 인정을 받은 것도 이때의 일이었
다.
이때 그는 당시 성균사성 김안국의 ‘논어’, 사예 김윤온의 ‘시경’과 함께
‘중용’을 배강하여 포상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명망으로 이듬해 도교 소격서 혁파를 주장하던 공서린의 천거가 있었지만,
그의 처신은 신중하였다. 학문에 뜻을 두어 쓸 만하기는 하지만,
학문을 폐지하고 벼슬길에 나가는 것은
그 역시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추천사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조광조의 공적을 적은 신도비.
절명시비 뒤편에 위치한 신도비는
조선 선조때 문장팔가(文章八家)로 전해지는 이상해가 직접 썼다고 알려져 있다.
드디어 1515년 ‘소학’을 강의하고는,
밝고 바르고 매우 곧다는 평을 받고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로 발탁되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봉양하더니,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초상, 장사, 제사를 주문공 ‘가례’ 대로 하며,
처자가 서울에 있었으나 한 번도 성안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도 곁들여졌다.
이해 가을 문과 전시에서 유학 15인 중
을과로 선발되어 성균관 전적이 되고, 곧 이어 사간원 정언으로 나아갔다.
바로 이때 뒤에 원로파와 신진사류의 대립으로 발전한,
기묘사화의 단서가 되기도 했던 ‘박상, 김정의 구언 사건’이 터졌다.
즉 중종의 제1계비인 장경왕후가 죽자 계비 책봉을 둘러싸고 의견을 구했는데,
순창군수 김정과 담양부사 박상이 중종의 왕비 신씨를 복위시키고
그의 폐위를 주장한 박원종을 처벌할 것을 상소하였다.
이 때문에 대사간 이행의 탄핵을 받아 이들이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 조광조는 대사관으로서 상소하는 자를 처벌하는 것은
언로를 막아 국가의 존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 주장하여
오히려 이행 등을 파직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이른바 ‘공론(公論)’이 표방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듬해 김안로의 발의로 관리 수를 줄일 것,
인재를 합당하게 쓸 것 등의 개혁안이 나타났다.
이때의 분위기를 정광필은 ‘행동은 비록 경솔한 것 같았으나,
그 뜻만은 마땅한 것 같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 해에 홍문관 부수찬을 거쳐 수찬이 되었다.
왕과의 강의를 통하여
그의 이상인 ‘지치(至治)’, ‘선(善)’, ‘왕도(王道)’, ‘종학(宗學)’,
‘위기지학(爲己之學)’ 등을 거침없이 쏟아내었다.
그는 하늘에서 받은 인간 본성을 온전하게 하는 방법으로
오로지 교화로써 이끌 것을 주장하였다.
오직 온량공검(溫良恭儉)하여 백성을 병자처럼 생각하는
관후한 장자(長者)라야 형벌이 방편에 불과할 뿐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뒤에 을사사화 때 대윤을 몰아내고
공신이 되었던 정옥형은 동일한 강의 자리에서 형정으로 징계할 것을
동시에 주장하여 그 변절의 싹을 보였다고 사신은 논평하고 있다.
조광조는 또한 천문사습관을 겸하면서
자연재해를 인간 행위와 연관시켜 반성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화되어 1517년에는 ‘군자, 소인’론으로 나타나게 되고,
이는 음양과 주야로 대비되고, 의리(義理)와 공리(功利)로까지 확대되어갔다.
이른바 ‘사우의 도’인 사습(士習)과
‘정국공신’의 위훈(僞勳)의 대립각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이는 바로 권세 있는 간신과 선류(善類)의 대립으로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조광조는 홍문관 부교리를 거쳐 응교에 올랐다.
이러한 여세를 몰아
정몽주, 김굉필을 설총, 최치원, 안유의 반열에 놓는 문묘 종사 논의를 일으켰다.
이 움직임을 주도한 성균관 유생들은 조광조의 행동을 따라
‘글을 읽지 않고 마치 참선하듯이 종일 단정하게 앉아 있는 자’같았다고
사관은 논평하고 있다.
벼슬이 전한(典翰)에 이르렀을 때,
세력이 크게 치성하여 지위는 낮으나 권세가 삼공(三公)을 기울였으므로
젊은 신진들이 모두 붙좇았다고도 하였다.
출신한 지 30개월이 채 못 되어 홍문관 직제학이 되고,
음사(淫事)와 석교(釋敎)로 된 악장을 고쳐 짓는 작업을 하였다.
드디어 48개월째에 당상관인 부제학에 올랐다.
그러나 이때부터 조광조에 대한 중종의 견제 기미가 보이기 시작한다.
즉 동궁요속의 자리에 이자, 김정, 조광조가 추천되었지만,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 시점에 이학(理學)을 중시하고 문학(文學)을 경시한다는 핑계로
월과(月課)를 짓지 않아 추고당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소인이 군자를 배척할 때 당(黨)이란 말로 죄를 꾸민다”고 주장하며
그의 개혁 동류를 등용 하기위한 현량과의 실시를 향해
정해진 궤도를 쉼 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계속하여 승정원 부승지를 거쳐 홍문관 부제학,
성균관 동지사 등을 역임하면서
유향소 혁파, 소격서 혁파, 향약 시행 등에 관여해 나갔다.
그런 한편 이들을 견제하는 상징적 사건이 일어나고도 있었다.
의정부, 사간원 문에 신진사류를 비난하는 글이 묶인 화살이 꽂히기도 했던 것이다.
조광조 묘소 입구의 절명시비(絶命詩碑).
조광조가 유배지인 전라도 능주(능주)에서 죽음을 당할 때
마지막으로 남긴 시(詩)가 적혀있다.
‘왕도(王道)’ ‘선(善)’ ‘위기지학(爲己之學)’ 강의통해 젊은 신진들 이끌어
여악 폐지하고 풍속교화 추진... 정국공신에 대한 위훈삭제로 ‘정면충돌’
기묘사화에 개혁정치 못이루고 37세로 生 마감... 용인 심곡서원에 봉안.
드디어 운명의 기묘년 그는 사헌부 대사헌으로 여악(女樂)을 폐지하고,
풍속을 교화하며, 정몽주, 이존오, 김굉필, 정여창의 사당을 세우는 일에 관여하면서,
정국공신에 대한 위훈삭제로 정면충돌의 길을 치닫고 있었다.
‘인정을 어겨 들끓게 한 잘못’을 지고 날개가 꺾이고 말 것을.
훈구파 남곤이 홍경주를 부추겨 ‘위망의 화가 조석에 다가왔다’고 고한 것은
드러난 현상에 불과하였다.
중종은 이들에게 밀지를 내려 다음과 같이 자신을 보위하고 있었다.
“임금이 신하와 함께 신하를 제거하려고 꾀하는 것은 도모(盜謀)에 가깝기는 하나,
간당(奸黨)이 이미 이루어졌고, 임금은 고립하여 제재하기 어려우니,
함께 꾀하여 제거해서 종사를 안전하게 하려 한다”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류들의 개혁 시도와 그 실패인 사화는
어떤 역사적 위치를 차지하며, 그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
왕조도 하나의 생명체이다.
말하자면 나고, 자라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과정을 거쳐 간다는 것이다.
먼저 나고, 자라서 그 자신이 가진 생명의 에너지를 키워가는 시스템이 있는데,
그것은 당연히 늙고, 병드는 과정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 늙고, 병드는 과정을 억제하여
그 생명을 연장하고자 하는 또 다른 시스템이 작동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죽는 과정이 따르는데,
그것은 단순히 생명의 종말로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죽어가는 생명을 새롭게 잇는 재생산의 시스템도 동반하게 된다.
첫 번째 시스템이 조선왕조를 개창하고 이를 전면에서 이끌고 간 주류 그룹의 몫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시스템은
이른바 부패한 체제를 개혁하고자 했던 세력들의 몫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시스템은 왕조의 에너지가 다해 가면서
새롭게 대체 에너지를 만들어가고 있었던 세 번째 시스템으로부터
끊임없이 그 건강성과 힘을 수혈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곧 그 반대편인 부패 세력에 동화되거나
그 세력의 견제를 받아 몰락할 운명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사림도, 조광조도, 사화도 당쟁도 그러한 맥락 하에 있었다.
우리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
조선 후기 실학에 주목하는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선진화의 길속에서 어떻게 건강성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것인가도 여기에서 그 해답의 일단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경기일보 2008-2-13] 윤한택 / 기전문화재 연구원 전통문화실장·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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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 독바위쪽에 趙씨들이 사신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요 영동설렁탕 맞은편에도 잘 정비된 묘소들이 있던데요 그분들의 선조들이 아니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