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왕 주몽이 태자로 전 부인의 아들인 유리왕으로 정하자 이의 알력을피하기 위해 형인 비류와 동생인 온조는 한성지역 까지 남하를 한다.이에 비류는 바다옆인 미추홀에 도읍을 하고 온조는 그를 따라온 10명의 신하와 함께 나라를 세우니 이를 십제라 하고 후에 백제라 하였다.이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내용이다.백제가 고구려씨에서 나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모양이다.오랜기간 동명왕의 제사를 지내고 이에 관한 기록이 중국 사서에 까지도 기록이 되어 있다.먼저 한성백제는 AD18에서 개로왕이 남한산성에서 전사할때까지인 475년까지를 말한다.실제로 백제시대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해당하지만 실제 많은 유물과 유구를 발견하지는 못한다.웅진백제는 고구려의 남하정책으로 부여로 옮겨 537년까지 지속한 시대를 말한다.동성왕과 무령왕의 노력으로 백제가 중흥의 기틀을 잡았다.이후 성왕때 다시 부여로 수도를 옮겨(537) 백제 멸망때인 660년 까지 성장을 거듭한다.성왕 위덕왕을 지나 무왕때 수도를 익산의 왕궁리로 옮길 계획을 세웠다가 결국 실행을 못하고 백제는 가장 화려했던 문명을 구가하고도 당이라는 외세로 인해 힘의 균형을 잃고 멸망하고 만것이다.성왕때에는 중국과의 교통로인 한강류역 대신에 서산의 운산계곡과 부여를 연결하는 고대 교통로를 만들었으니 이는 백제문화의 실크로드라 이름 붙일만 하다.
2)必要性
이상 대충의 백제의 역사흐름을 볼 때 한성백제가 450년 이상이라는 실로 엄청난 역사의 비중을 차지하고 정복국가로서 고대국가로서의 기틀도 이 시기에 다진 것을 생각해볼때 이 지역의 역사성외에 문화유산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할 기회를 가져야 하겠다. 이 지역의 문화유산은 개괄적으로 살펴보면 선사유적지인 암사동 선사유적지가 있다.이 지역은 신석기인 만이 산 곳은 아니고 백제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사람이 산 흔적이 토기를 통해서 알 수가 있다.둘째,토성이다. 비록 원형을 많이 잃었으나 백제의 토성이므로 많은 토기를 비롯한 유물이 출토되었다.또한 풍납토성,몽촌토성은 백제의 옛궁터라고 보므로 이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되겠다.셋째,한성지역의 백제 고분이다. 현재 한강을 따라 백제 고분은 상당량이 파괴되었지만 10여기가 석촌동,방이동에 남아있다.특히 석촌동 고분은 고구려의 적석총과 동일한 돌무지 무덤이므로 백제와 고구려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2.한성유역의 백제고분 개관
한성지역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상당한 기간 동안 잊혀져왔다.물론 한 때 조선의 수도로서 서울지역을 지칭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소위 삼국시대에 수도에 버금가는 중요했던 곳이라는 것은 아마도 기억해 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중요한 장소라는 것은 한강이라는 큰 강이 비옥한 평야지대와 운송수단이 발달되지 않은 시기에는 수로의 장악은 중요한 혜택을 주리라 생각한다.이에 고고학보를 중심으로 한성지역의 고분에 대해 대략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먼저 한성지역은 한강을 통해 북쪽의 문물을 받아들여 남으로 전달하고 황해에서 오는 문화를 소화하여 이 지역에서 융합한다고 한다.따라서 많은 산물이 남아 있고 그 중에서도 가장 종합적인 것은 고분이라 한다.고분은 문화의 복합체라 할 수 있다.고분을 분석함으로 그 지역의 문화를 밝히고 성격을 규정지을 수 있다.
1)가락동,석촌동 고분의 특성
한강유역의 고분이 학계에 알려지기는 1917연경이다.조선총독부에서 조선유적조사시기에 이 지역도 아울러 검토대상이 된것이다.그러나 이 시기의 조사는 지표면에 국한되었으므로 적석총과 봉토분,수량외에 구조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해방후 한강유역의 고분에 관심을 갖게된 것은 1960년 서울시의 급격한 확대로 석촌동,가락동지역의 택지 조성을 위해 이 지역의 사전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그리하여 처음 시작은 가락동 2호분 발굴조사이다.
-가락동 2호분-
내부에 목관을 안치하고 원형 봉토를 축성.표면에는 잡석을 덮고 봉토를 올린 형태이다.한분구안에 4기의 매장주체가 있은 점은 타 지역과의 연관성이 모호하다 하겠다.(1960년대)묘광에 목관을 안치하고 그 옆의 묘광에는 옹관묘가 있는 형태이다.따라서 이 고분이 내포한 모호한 점,의문점이,새로운 사실들이 한강유역 고분을 재검토하게 된다.
-석촌동 3號,4號 積石塚-
1975년 서울시에서 잠실지구의 개발사업을 서두르자 이 지역의 유적조사도 응급조사를 실시하는데.석촌동 3호분은 파괴가 심해 내부조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 반면,4호분은 분구도 대체로 양호하여 내부구조가 구체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봉토분처럼 보이는 분구가 표면을 걷어내자 적석총임이 밝혀지고 또 내부의 구조도 단순한 석곽이나 석실이 아니고 내부가 점토로 다져진 연도가 딸린 석실분임이 밝혀진다.1986년말 87년에 걸쳐 석촌동 3.4.5호분을 포함한 일대 17,000여평에 이르는 지역을 서울시,서울대,숭실대,경희대가 참여하여 조사를 했다.
2)석촌동 3號墳의 重要性
따라서 당시 한성백제 왕실의 공동무덤으로 볼 수 있는 석촌동,가락동 일대는 다양한 형태의 무덤과 내부구조를 가지고 있다.타계하신 김원룡 박사의 논문에 의하면 석촌동의 적석총들은 서울지구의 중기형식 실연대로 4세기 후반경에서 5세기 초에 걸친 걸로 편년하고 있으며 이러한 연대관은 출토된 토기자료에도 부합된다.또한 석촌동 3호분은 파괴의 정도가 심해 1차조사시에 높이 4M,1변의 길이를 약30M로 보았는데 금으로 된 영락이 추출되어 중심부의 위치를 잡아 이의 크기에 관한 재조사를 실시한 결과 당초보다 훨씬 상회하는 높이 4.5M 평면크기는 동서가 49.6M,남북이 43.7이라는 수치를 얻었다.그러나 이 발굴도 외형복원이 목적이었으므로 적석을 모두 들어내고 바닥까지 내려가는 작업을 하지는 못했다.86년 최종조사에서 남북길이는 48.4 동서는 50.8M로서 거의 방형임을 밝혔다.높이는 장군총의 예에서 보듯이 현재보다 3,4단을 더 있다고 보면 6M이상은 되었으리라 본다고 제시.하여튼 석촌동 3호분은 집안의 태왕릉,천추총 따위보다는 작으나 동양 최대의 피라밋이라 불리는 장군총(한변 32M)보다는 훨씬 크며 고구려식 적석총으로는 최대의 것임에 틀림없다.따라서 이 무덤의 주인으로는 계왕(346),근초고(384),침류왕(385),진사왕(392)등이 있는데 고구려 최대급 석총과 맞먹는 이 대릉의 피장자로서는 재위기간 30년이며 371년에는 평양성을 점령,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케 한 백제의 근초고 대왕일 가능성이 크다고 김원룡 박사는 말한다.
3.發掘調査書 內容
--아래는 당시 발굴조사를 맡았던 서울대팀의 발굴조사서를 간략히 소개한다.
1)석촌동 파괴분및 5호분
가)位置:발굴대상인 제 5호분은 4호분에서 남쪽으로 250M지점에 ,파괴분은 5호분에서 다시 남쪽으로 200M 지점에 위치해 있다.
나)現況:파괴분은 약간 높은 대지 상에 위치하였으나 서울시의 정리작업으로 평지로 조성되어 있으며 고분의 봉토역시 불도저에 의해 깍기어서 잔구만 노지에 일부남아 이를 '석촌동 파괴분'이라 명명한다.고분 자체뿐 아니라 주변지역도 넓게 정지작업이 완료된 까닭에 고분의 외형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석촌동 5호분은 고분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수령 수백년 되는 향목이 자라고 있다.5호분은 5호분은 동내에서 가장 높은 지대이나 3,4호분과 마찬가지로 평지에 있다. 발굴을 착수전 5호분의 봉토 표면에는 잡초더미와 아카시아 가지
들이 밀생하고 있었으며 군데군데 석괴들이 노출되었으나 봉토자체는 완만한 경사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조선 고분도보에 의하면 이 일대에 약90여기가 있어야 했으나 현재는 이 5호분만 유존할 뿐이며 나머지는 없어졌거나 민가에 묻혀 버린 실정이다.현재 5호분은 남북 장경이 14.2M,동서 단경이 11.0M로 그 평면은 장방형 에 가까운 타원형이고 높이는 2.0에서 2.6M로 보인다.
다)發掘方法:파괴분은 고분의 중심부로 생각되는 곳에 약 1M의 간격으로 탐색트렌치를 구획하여 파나감.각 트렌치에 나타난 유구를 조사하기 위하여 2M*2M의 피트를 파나감.몇개의 피트를 구획하여 최하부의 명갈색 점토 층까지 파나감.각 토광묘의 규모나 축조과정이 밝혀진 다음에는 토광묘간의 차이를 규명하기 위해 주위에 있는 유물의 배치에 주안점을 두면서 각 토광묘별로 유물을 채집. 석촌동5호분은 조사되지 않은 것중 비교적 원상이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예이므로 발굴방법에 많은 논의가 잇따름.조사의 계속성을 위해서는 4분법이 유리하다고 결정되어 남북.동서로 고분을 4분함.토광의 처리가 간단한 북서부를 중심으로 제토하여 표토하 1.6M에 이름.
라)構造:석촌동 파괴분은 앞서 말한 대로 파괴의 정도가 심해 분구의 크기는 알 수 가 없으나 지하부의 잔존유구 상태로 그것을 복원할 수 있고 축조과정및 구조도 밝혀 낼 수 있다.본고분은 한마디로 일거봉토다광묘의 집단묘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 본래의 평지 위에 약간 높은 점토대지를 판축한 다음 그 위에 여러 개의 토광묘를 만든 다음 소봉토로 덮고 이 소봉토상을 하나의 큰봉토로 씌운 것이다.두개의 소봉토분과 후세에 증축한 소봉토를 합한 거대한 타원형 분묘이며 4모퉁이에는 유토를 방지하기 위해 잡석을 할석과 하천석으로 덮은 것이다.따라서 소분구의 크기는 15M내외지만 전체적인 남북직경은 38M로 거대한 봉토분인 것이다.적석 하부에는 흑색의 점토층이 덮여 있으며 그 밑에는 회색 점토층이 소분구 면을 덮어 유수를 방지하는 한편 분구의 보호작용도 겸하고 있다.
마)土廣墓의 個別構造
토광묘1.
토광묘는 거봉토 북서부에 있는 지경 약15M 내외의 소 봉토 내부의 주광으로 명갈색 점토층내에 토광을 파고 목관을 안치한 후 좌우 양측에 옹관을 묻은 일종의 복장이다.관의 크기나 기타 유물로 봐서 성인으로 보이며 가락동 1,2호분과 동일하게 옹관이 있다.
토광묘2.
토광묘2는 1과는 다른 소봉토내에 있는 것으로 토광묘1이 축조된 후에 흙을 다시 제거하여 다시 흙을 덮어 거대 분구를 만든 것이다.토광묘2에서는 관저면에 얇은 판석을 깔고 관 상부에는 할석을 덮고 있는 점이 다르다.머리 부분에 할석과 하천석이 많이 남아 있다.
토광묘3.
토광묘2처럼 판석 같은 것은 없으나 토광의 관에 할석을 올려 두었고 완형토기가 주위에 있었다.
토광묘4.
철제품의 발견과 완형토기가 노출되었다.
토광묘5.
토광묘5는 토광묘1에서 남쪽 방향으로 23m지점에 있으며 다른 토광 보다는 약간 낮은 편이다.명갈색 점토층내에 목관을 북북서 방향으로 안치하고 있고 저부에 목관흔이 그대로 보존된 채 남아있는 유일한 토광이다.주위에 별 다른 시설이나 할석은 보이지 않는다.
바)전체적인 구조
전체적으로 볼 때 평지상의 점토로 약간 높은 대지를 만든 후 사자를 묻고 봉토를 씌우고 있으나 또다른 사자가 생겼을 경우 이미 있던 봉토를 약간 제거한 후 토광묘를 만든 다음 다시 봉토를 덮은 뒤,전체적인 한봉토하에 여러 사자를 묻은 집단묘의 구조를 가진 백제 초기의 특수 양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2)서울 地域 古墳의 性格
서울의 강동구 가락동, 석촌동 일대에는 백제초기의 여러 산성과 고분 군들이 산재되어 있고 아직껏 정확한 백제 도읍의 위치라든지 초기의 역사를 문헌상의 자료만으로는 해명할 수 없는 차제에 이들 고분의 발굴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그러나 현재 조사는 미미한 지경에 있으나 고려대에 의해 가락동 2기의 조사 서울대의 석촌동 조사,잠실 지구 유적 발굴 조사가 있다.이미 조사된 자료를 살펴보면 백제 초기에는 2가지의 형식으로 분류된다.
봉토분의 형식이다.
첫째 평지에 목관을 넣을 묘광을 판뒤 주위 시설없이 흙을 덮어 봉토를 만든 토광묘식.
둘째 평지에 묘광을 파고 장방형의 목곽을 설치한 뒤 그 상부에 돌을 얹지면서 흙을 덮은 소위 적석목곽분식
셋째 석실봉토분식이 있다.또한 토광묘내에 1~2개의 옹관을 합장한 것은 백제 초기묘제의 특징적인 장법인데 옹관의 크기로 보아 성인장이라고는 할 수 없고 유아용옹관이라 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적석총류이다.
광주풍납리토성(廣州風納里土城)
풍납동 96번지 일대에 위치한다.백제초기의 토축성곽으로 길이 2,680m, 면적 126,004m2(38,183평), 성벽의 높이는 곳에 따라 동일하지 않으나 북벽은 약 7~8m이고 기부(基部)에서의 폭은 약 30m이다.(사적 제11호)1966년 7월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팀에 의하여 발굴되었다. 발굴 결과 이 토성의 성벽은 판축(版築)방법을 사용하여 고운 모래로 한 층씩 다져 쌓았음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축성방법은 돌이 별로 없는 중국의 평야지대에서 성을 쌓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이것이 백제에 전해져 풍납리토성,몽촌토성을 비롯하여 백제의 성곽이나 목탑기단 축보에 주로 이용되었다.이 토성의 형태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한강에 연한 평지에 축조된것으로,백제 초기의 국도(國都)를 살펴 보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성벽의 표면은 잔디와 잡초로 덮여있는 곳이 많으며, 높이는 일정하지 않다. 특히, 동벽에는 거의 같은 간격으로 네 군데가 크게 뚫리어 외부로 통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축성 당시부터 존재하던 성문으로 추측되고 있다. 문헌상에 나타난 토성의 연대는 <삼국사기>에 286년(책계왕 1)의 성(蛇城)의 기록으로 보아 3세기 후반이 가장 올라가는 것이다. 삼국사기의 책계왕 1년의 기록에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정벌하니 우리에게 구조를 요청해 왔다.
이 보다 먼저 왕은 帶方의 왕녀 보과(寶菓)를 부인으로 맞았는데,
이 때문에 帶方은 이 구생(舅甥)지국이라 하여 그 요청에 부응할 수
밖에 없었다. 드디어 출사(出師)하여 이를 구원하니 고구려에게는
원한을 사게 되었다. 왕은 (고구려)의 침범을 염려하여 아차성과 사
성을 수축(修築)하여 이에 대비하였다.
라는 기사가 있다. 그러나 이 토성의 발굴조사에서는 풍납리식무문토기(無文土器),조질유문(粗質有文)토기.김해식토기.신라식토기.풍납리흑도(黑陶) 등의 토기와 도제(陶製) 그물추.물레가락바퀴(紡錘車).개와(蓋瓦).철편(鐵片) 등의 유물이 출토되어, 이 성의 축조가 삼국시대 초기에 이루어졌음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이 토성은 고고학적 발굴조사와 <삼국사기> 등의 기록을 토대로 보면, 1세기경에 만들어져 475년(문주왕 1)에 웅진으로 도읍이 옮겨질 때까지 약 5백여년간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처럼 백제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이 성의 사용 목적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문헌비교>에 나오는 평고성(坪古城)을 풍납리토성에 비정하고, 이것을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는 위례성(慰禮城)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또한, 평고성을 풍납리토성으로 보고 이 성이 서울 성동구 광장동 뒷산에 있는 아차산성과 연결되어 방어적 기능을 담당했던 사성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사성은 풍납리토성이 아니라 이성산성(二聖山城)을 주성(主城)으로 하여 방사선상으로 축조 되었던 현재의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선리부근에 위치한 토성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의한 몽촌토성의 발굴 결과,이토성은 한성시대(서기전 18~475년)의 주성 중의 하나로 추정되며, 초기백제의 유적으로 가장 크고 출토된 유물이 많아 높이 평가되고 있다.
몽촌토성(夢村土城)
방이동 88-4 올림픽 공원내에 면적 441.765m2(136,634평)에 달하며 둘레 2.3km쯤 되는 타원형의 자연의 야산을 이용하여 쌓은 백제토성이 사적 제 297호로 지정되어 있다. 토성의 둘레에는 방어용 개천인 해자시설이 되어 있고, 성채에서는 목책과 망루의 흔적이 남아 있다. 신라의 서울인 경주의 월성과 매우 흡사한 지형에 이룩되었으면서 그 보다 더 넓고 백제성의 특
징 그대로 해자도 둘러져 있어서 적이 밖에서 공격하기가 어렵게 조성되어 있다. 이 성안에서는 백제의 회백색 연질(軟質)토기가 보다 많이 채집 되어었고 경질토기도 발견되고 있어서 학계 일부에서는 여기가 바로 백제 초기의 위례성(慰禮城)이라고 추정 하기도 한다. 곧 1983년 11월과 1984년 7월.8월 도합 3개월에 걸쳐 서울.한양.단국.숭전 등의 4개 대학교의 발굴조사단이 이곳을 발굴한 결과를 중간 종합한 견해로서 여기에서는 몽촌토성이 풍납토성.삼성토성 등으로 이루어진 백제 한성시대의 수도였던 하남 위례성의 주성임을 고고학적으로 밝혀주는 판축(板築)움집과 지하저장혈(貯臟穴), 철족(鐵鏃), 옹관(甕棺), 원통형토기(圓筒形土器, 갈색회유전 문도기편(灰釉錢紋陶片) 등 중요한 유적과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이 중 원통형토기편은 백제 초기의 일본과의 교류관게를 시사 해 주고 있으며, 갈색회유전문도기편은 중국의 서진시대(A.D. 265~316)의 도기로서 몽촌토성의 축조시기를 3세기까지 올려보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몽촌토성은 그 곁의 풍납리토성, 한강 북안(北岸)의 아차산성과 함께 강안(江岸)요지에 위치하여 삼국시대의 각축장이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니,고구려의 장수 온달과 백제의 개로(蓋鹵)왕이 죽은 곳이 이 근처 아차산이었다. 개로왕이 죽고 그 아들 문주(文周)가 왕위에 나아가 도읍을 웅진으로 옮겼다. 그리하여 이 한강연안의 지역은 고구려의 땅이 되었다. 성왕(聖王)때 이 일대를 완전 수복하기도 하였지만 신라 진흥왕(540~575)에 의해서 빼앗기고, 그 후는 고구려.백제 각축장이 되었다가 고구려가 북의 수.당(隋.唐)의 침공을 대비에 여념이 없게됨에 한강 남안의 풍납성과 몽촌성은 신라의 영역이 되었다. 한편 몽토성이 잇는 일대는 바로 한강 남안에 임하고, 그 후면으로는 높고 낮은 구릉과 산록이 둘러있어 풍광이 매우 아름답다. 따라서 옛날부터 많은 고관 명사들이 이곳을 찾아 복거(卜居) 또는 별서(別墅)를 두고 문인 묵객들이 자주 왕래하며 아름다운 풍물을 시양에 넣어서 전하여 온다. 그 중에서도 고려 초기 명사 조운흘과 조선 전기의 문호 서거정의 몽촌생활과 명시 일화는 이곳 몽촌의 역사 풍물을 더욱 돋 보이게 한다.
몽촌에서의 조운흘의 생활을 노래한 시로는...
누런 소 타고 청산을 지내는데 騎黃牛榜靑山 (기황우방청산)
거칠은 몸 차림이 芻芻乎其身彩 (추추호기신채)
한필의 베로 족하도다 一匹布也不植 ( 일필포야불식)
가 있다. 또 <사가시집(四佳詩集)>에는 [동복경수모귀몽촌(憧福慶隨母歸夢村)]이라는 제목의 아래와 같은 서거정의 시가 있다.
내가 간지 사흘인데 그리운 마음 십년도 더 된다.
不見今三日 相思倍十年 (불견금삼일 상사배십년)
정을 쏟으니 내가 늙어서인가 어진 사람 되기만 소원이다.
鍾情因我老 發願望渠賢 (종정인아노 발원망거현)
강산에 초가집 있고 산중엔 돌밭이 많다.
江山有茅屋 山中多石田 (강산유모옥 산중다석전)
남겨줄 물건 이것 뿐이니 전가지보로 삼으리라
傳家惟此物 準擬作靑氈 (전가유차물 준의작청전)
그동안 방치된 상태로 있다가 이 일대가 '88올림픽경기장 건설부지로 지정되면서 역사적 공원으로 하여 토성을 보수하고 경역을 조경하는 한편 성안에 백제역사관을 꾸미고 서울지역에서 출토된 백제유물을 보존 전시하고 있다.
岩寺洞 先史 遺蹟
*** 地理的인 條件은...
한강유역은 남북의 완충지대(緩衝地帶)로서 지리적 조건,풍부한 수원,기름진땅 등으로 인해 인간들의 생활조건에 들어맞는 곳이었기에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 되어왔다.특히나 한강하류지역은 청동기시대 이후로는 남북문화권의 경계지대로서 북문화권의 남한계이면서 남문화권의 북한계,시발지로 되어왔다.한강유역중에서도 아차산과 남한산 사이에 위치한 암사동 지역은 넓은 모래사장과 강물이 흘러가는 속도가 비교적 완만하여 사람이 사는 곳으로는 적격이었다.
*** 유적(遺蹟)의 발굴(發掘)은...
암사동의 유적은 오랜세월동안 지하에 매몰되어 노출되지 않다가 1925연에 일어난 대홍수로 말미암아 한강변의 모래언덕 지대가 심하게 패어져 수많은 빗살무늬 토기파편들이 노출되면서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지 임이 밝혀지기 시작했다.그후 1967년 대학련합 발굴단,1968년 서울사대 조사팀,1971~1974년 국립중앙 박물관,1983년 서울대 암사동 유적 발굴단 등에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많은 빗살무늬 토기와 석기는 물론 청동기 시대의 유물도 출토되었다.발굴된 자료에 의한 지층 구조를 살펴보면 제일 밑바닥이 수혈주거지가 있는 밝은갈색의 모래층이고,그위 두번째 지층이 두께 30cm쯤되는 불모층이며,세번째 지층이 즐문토기편과 무문토기편이 섞여나오는 회흑색 모래층이고 네번째 지층은 백제문화층 이었으며,그 맨위 다섯번째 지층이 표토층으로 역시 모래층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암사동 일대는 후기 구석기 시대의 석기 채집과 함께 청동기시대에 고아세아족의 일파가 북쪽으로 이곳으로 퍼져 들어옴으로써 청동기시대의 두드러진 취락지를 이루었다.이들은 네모꼴 움집에 살면서 지석묘,석상묘를 썼으며,채도,홍도,무문토기등의 그릇에 석부,석촉,석검,반월형석도따위의 마제석기를 다룬 이른바 예맥 퉁구스의 청동기 시대는 신석기 시대와는 달리 고기잡이와 사냥 그리고 농사일까지도 영위하였다
*** 當時의 生活相은...
암사동 유적은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의 집터로써는 제일먼저 알려졌으며 남북한을 통틀어 집터가 밀집되어 취락이 이루어진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연대는 기원전 4~3천년 경으로 추정된다신석기 시대는 거의 대부분 땅을 깊이 파고 움집을 견고하게 지어서 살았다.움집터들은 깊이 50~100cm,지름 6cm 정도 크기의 원형이거나 한변이 5cm 정도 크기의 방형인데 움집은 기둥을 세우고 긴 나무나 억세풀을 이용하여 그위를 고깔모양으로 덮어씌어 지붕을 만든 것이다.움집의 출입은 계단을 이용했으며 동물의 가죽이나 돗자리 같은것을 깔고 생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움집에 설치된 시설물중 화덕은 둥근 강돌이나 판석을 이용하거나 둥글거나 네모지게 만든 것으로 거의 집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다.저장수단으로는 토기 또는 모래땅을 파고 만든 순수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곳 암사동 유적지에서는 저장구멍이 여럿 발견 되었다.또한 지리적 조건을 봐서도 그들의 생활기반이 고기잡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나타내 주는 어망추,작살등 어로도구들이 출토되었다.그리고 수렵과 밭농사 일부 이루어졌음을 추정케하는 화살촉,갈판,갈돌,도토리,보습,돌낫같은 것들도 출토 되었다.
*** 집터[竪穴居住地(수혈거주지)]는...
신석기 시대의 살림집은 동굴을 이용한 경우도 있으나 움집이 일반적이다.움집이란 일정한 넓이와 형태를 가진 구덩이를파 집바닥을 땅밑에 두고 구덩이안은 별도의 시설없이 서까래가 바로 땅에 닿게 된 집을 말한다.신석기 시대의 움집은 해안,구릉이나 큰 강변의 대지에 지어졌다발굴 조사된 주거지를 살펴보면 대부분 말각방형이 대부분이며 평면 형태가 원형인 것은 3호의 1기 뿐이다.주거지 크기는 한변이 5~6cm이며,깊이는 70cm 내외이다.규묘가 가장 큰 6호 주거지는 중앙부를 다시 파내어 2단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는점이 특이하다 하겠다.노지는 주거지마다 각기 중앙에 1기씩 놓여있고,출입구가 마련되어 있는 경우는 그 방향이 대체로 남쪽을 향하고 있다.기둥구멍은 1기의 주거지내에 상당수가 나타나 있지만 그것들이 모두 동시에 세워진 기둥 자리라고 추정키는 어렵고,기둥을 교체해 나가면서 새로운 기둥구멍을 파내었거나
주된 기둥을 보조해주는 기둥자리였다.대개 기둥구멍은 한 주거지당 4개로서 기둥은 네모서리에서 수직으로 올려지고 그위에 들보를 붙들어 매었다.다만 11호만이 주공이 중앙에 하나더 있다.
** 貯藏手段--貯藏孔(저장공)--은...
저장수단으로 보여지는 저장공은 모두 4개가 확인되었는데 모두 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크기는 직경 85~230cm에 깊이가 28~43cm로 이루어져 있다.저장공에는 바닥을 파고 바닥없는 토기를 거꾸로 묻었거나,벽쪽을 파서 별도의 독립저장 시설을 마련한 것이 있다.저장공에서 출토된 토기는 전형적인 빗살무늬 토기로 기형은 직립연부에 첨저(尖底)바닥으로 이어지는 포탄형이 기본이다.바탕흙은 주로 운모가 혼입되었으나 석면,골석이 혼입된 것도 있다.기표면은 이가 하나 또는 여러개로된 시문구로 긋거나 눌러서 생긴 문양으로 장식되어있다. 구연부(口緣部)에는 평행밀집사단선문(平行密集斜短線文),열점문(列点文),사격자문(斜格子文)이 주로 새겨졌으며,기복부(器腹部)에는 주로 위 아래 방향 또는 옆으로 놓여진 어골문이 새겨졌다.암사동의 토기는 구분계전시문형토기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데 색상은 적갈색이 대부분이나 황갈색,회갈색,회흑색도 일부 보인다.이런것들은 노천요에서 구운탓으로 불길이 고루 미치지 못하여 생긴 현상으로 여겨진다.
*** 土器및 石器는...
이곳은 즐문토기유적으로서 알려지는 하였으나 여기에서 나오는 토기나 석기에 관해서는 상세한 보고가 없어 정확한 지식을 가지기는 어렵다.그 이유는 1925연의 대홍수로 인하여 파손유실된 것과 지상채집에 의해 채집된 토기파편들은 각처로 분산수장되어 버린 까닭이라 할 수 있다.초기 발굴에서 들어난 토기군을 살펴보면 다량의 변화가 많은 즐문토기가 나오며 철기철편도 나왔다고 한다.즉 무문토기와 즐문토기가 함께하는 혼합형유적이며 문양이 정교세련된 즐문토기와 사립함유의 무문토기가 출토되고 석기로는 마제(磨製)가 우세하고고 타제(打製)는 희소하다.
--櫛文土器에 關해서...
암사동즐문토기는 현지의 흙을 사용한것으로 사질토에 운모입(雲母粒)이 섞인것이 가장 많고 그 밖에 석선을 섞은것이 소수있다.토기의 견도(堅度)는 비교적 단단한편이지만 그래도 표면은 사람손톱으로 금이 그어질 정도이며 흡수성이 많다.기형은 V자형 또는 U자형의 첨저(尖底) 또는 환저(丸底)로된 도토리 형이며 예외로 바닥이 세수대야 처럼 편편한 기의 파편도 있다.당시의 토기 제작기술을 추측컨데 현대와같은 돌림판은 없었지만 그래도 원시적인 돌림판을 이용한것으로 추정된다.문양은 일반적으로 기외벽전면에 시문(施文)되고 기저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알수 있다.문양은 그 시문위치와 문양내용에 따라 구연부문과 기복문의 크게 둘로 대별할수 있다.구연부문은 구연부주위에 돌아가는 문양대(文樣帶)이며 크게 나우어 평행사단선(平行斜短線)과 점열(点列)의 두종류가 있다. 평행사단선이라 함은 문자그대로 짧막한 사선을 밀집시킨것인데 그 단선이 정성을 드린것에 있어서는 8자를 양측에서 눌러 길게 느린것같이 상하단이 중앙부보다 굵은 것인데 이것은 특수한 패곡(貝穀)이나 골편을 이용하여 눌러찍은 것으로 추정된다.그리고 그러한 시문패(施文貝)를 하나만 가지고 한것이 아니라 2-3개 내지 4-5개를 겹쳐 잡고 한번에 여러개식 눌러 찍었으며 그것으로 구연을 1회전하고 나면 독특한 시문이 형성되는데 바로 이러한 점이 즐문토기의 이동경로, 즉 서북 러시아로 부터 시베리아로 동류한 제3기 토기의 직접전래를 말해주는 것이라 여겨진다.이러한 점선교대배치예는 여기이외는 없는것으로 보면 이 토기는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곧 문양이 각각 분리되어 단사선문.점열문으로 격리(隔離) 시문(施文)되고 그것도 구연부에만 국한되는 변화를 이르킨 것으로 추측된다.이렇게 구연부문이 독립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만 특히 서해안 즐문토기에서 주로 볼수 있는 현상이며 구연부문이 선문과 점문의 두갈래로 분리된것과 함께 그러한 변화발전이 서해안에서 먼저 이루어 졌으리라는 추측을 가능케 하고 있다.이상의 점,사선문으로 구연부문 이외에 또 사격문이라 할수 있는 문양이 있다.토기 이외의 유물로는 연석,연석봉,석촉,타제석부,마제석부,괭이,돌낫,보습,속이빈 원통형의 토제(土製) 및 석제,어망추,가 출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