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기 |
신원?서원복설 |
배척?서원훼철 |
1589(선조 22) 12. |
배명 등이 정개청 신원 상소 |
|
1595(선조 28) |
나덕윤 등이 신원상소, 유성룡의 계사 |
|
1596(선조 29) 12. |
전 의금부도사 나덕명 등이 정개청, 유몽정, 이황종, 조대중, 이발, 이길의 신원 상소 |
|
시 기 |
신원?서원복설 |
배척?서원훼철 |
1598(선조 31) |
화순사람 조수홍이 이발, 이길, 유몽정, 조대중, 이황종의 신원 상소 |
|
1599(선조 32) 8. 2 |
전 별좌 나덕준 등이 정개청 신원 상소 |
|
1603(선조 36) 3.17 3.18 4. 8
|
전 직장 안중묵이 정개청 신원 상소 의금부에서 협의하여 계를 올림 당상, 심희수, 송언신의 은전을 베풀어 주자는 계를 올림 |
|
1606(선조 39) 10. |
무장사람 전 찰방 오익창 등이 정개청, 이발, 이길, 유몽정, 조대중의 신원 상소 |
|
1607(선조 40) 1.21
4.29
|
유생 양극린 등이 정개청, 유몽정, 조대중, 이발, 이길 등 신원 상소 전 참봉 최홍우 등이 이발, 이길, 유몽정, 정개청의 신원 상소 |
|
1608(선조 41) 2. 2. ?
|
선조 승하, 광해군 즉위 전 의금부도사 나덕윤이 정개청 신원 상소 나주 생원 강봉람이 정개청, 이발, 이길, 유몽정, 조대중의 신원 상소 |
|
1609(광해 1) |
삼사에서 정개청, 이발, 이길, 백유양 등 4 신하의 신원을 전달하는 계를 올림 |
|
1610(광해 2) 2. 2~4
|
선조의 3년상 후 삼사에 바꿈이 있었음 4신하에 대한 신원 계사가 계속 됨.(2월 사헌부, 사간원에서 연하여 계를 올렸고, 17일 홍문관, 19일 홍문관, 4월 25일 삼사합계, 27일?28일?29일에 다시 합계하는 등 계사가 연이음) |
|
1611(광해 8) 6. 4 가을
|
유생 유광렬이 다섯 신하의 신원소를 정원에 내어 15일 윤허 윤암 옛터에 정개청 사우건립(직첩은 회복하지 못함) |
|
1611(광해 8) ?
?
|
생원 강봉람이 유몽정, 조대중에게도 은전을 베풀어 주기를 청원 나원길 등이 이발의 적물가산과 정개청의 관작 환급을 상소 |
|
1624(인조 2) 여름 |
다섯 신하의 복관(復官)에 대한 특명 수의(收議) |
|
1625(인조 3) 2. |
5인의 관작 복위 |
|
1657(효종 8) 9. 27 |
|
찬선 송준길 등이 건의하여 정개청의 사우가 훼철 됨 |
1658(효종 9) 6. |
정개청 증손 국헌이 상소했으나 도로 내주었음. 전 참의 윤선도가 정개청을 위해 상소 윤선도가 만언소를 올려 정개청의 신설을 제기 |
응교 이단상(李端相) 및 사학의 유생들이 정개청 배척 상소 |
1675(숙종 1) 4. 1 4. 10 |
나주 유생 나적 등이 정개청 설원, 사우 복건 상소 유학 안민유 등이 정개청 설원, 사우 복건 상소 |
|
1676(숙종 2) 4. |
무장사람 생원 오상옥 등이 정개청 사우 복건 상소 |
|
시 기 |
신원?서원복설 |
배척?서원훼철 |
1677(숙종 3) 5.22 |
우의정 허목이 정개청 사우 복건에 대한 장계(사우복설) |
|
1678(숙종 4) 겨울 11. 5 |
무안유생 서국빈 등이 정개청 사우 청액 상소 예조판서 목래선(睦來善)이 사액 장계 |
|
1680(숙종 8) 여름 ? 가을 |
전라감사 임규가 정개청 비방, 서원훼철을 상소 광주사람 유경서 등이 정개청 비방, 서원훼철 장계
|
자산서원 훼철
|
1689(숙종 15) 4.11 4.13
4. |
나주 유생 나두하 등이 자산서원 복설 상소 우의정 김덕원, 대사성 유명현, 우부승지 이시만이 복설논의 정개청의 우득록을 홍문관에서 등진 |
|
1691(숙종 17) |
자산서원 복설(대소 총 22칸) |
|
1692(숙종 18) 3.18 여름 |
자산서원으로 사액, 예조정랑 조세항 치제 우득록 발간 |
|
1694(숙종 20) 2.27 |
정개청, 중훈대부사헌부집의 증직 |
자산서원 훼철논의 일어남 |
1702(숙종 28) 5.26 6.16 9.17 |
시강관 이만성, 자산서원 훼철을 청하는 계를 올림 무장 유생 오정훈 등이 정개청의 원통함을 진언하는 상소(7.18 나주 추선사, 8.19 나주 쌍계사에서 17읍 유생 300명이 소회를 열어 17명이 상경, 전달) |
자산서원 다시 훼철(3차)
|
1752(영조 28) |
자산서원 복설(4차) |
|
1762(영조 38) |
자산서원 훼철(4차) |
|
1789(정조 13) 4. |
복설(강당, 사우), 제동서원이라 부르다가 제동사라 함(5차) |
|
1791(정조 15) |
사우완건 |
|
1868(고종 5) |
|
훼철 |
1987~1998 |
사우 복설 |
|
2. 동족(同族) 마을의 확대와 서원 사우
서원이 정치?사회적으로 주목되며 그 역할이 커지는 것은 이른바 산림세력이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17세기 중반 이후부터이다. 이 시기는 붕당정치가 성리학적 이념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명분과 의리 중심으로 전환되어 향촌사림의 여론이 정치의 향방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당시 향촌의 사림은 이러한 붕당정치의 전개과정 속에서 중앙정치세력과 연계하여 향촌에서의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고 하였으며, 중앙관료들은 지방의 서원조직을 통해 자파의 정치적 입장을 강화하려 하였다. 따라서 당시 향촌사림의 여론을 수렴하는 일차적 거점이었던 서원의 역할은 더욱 증대될 수 밖에 없었다. 예컨대 17세기 중반 이후 붕당정치 전개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유림의 집단상소인 유소(儒疏)는 대체로 향교?서원조직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편 동성촌락(同姓村落)의 발달과 함께 동성집단 내부의 상호결속과 사회적 지위 유지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서원은 족적 기반의 중심기구로 그 사회적 역할을 증대시켜 나갔다. 이는 향촌사회에서 기존의 사족지배(士族支配)가 점차 위기에 봉착하고 있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특히 이 시기 향안?향약 등 사족간의 결속을 보장하던 자치조직이 쇠퇴하던 현상은 사족들로 하여금 문중적 보장의 필요성을 절감케 하였다. 이러한 가문의식의 현저한 발휘속에 서원의 역할도 문중내 명조(名祖)?현조(顯祖)의 제향을 통한 향중의 벌족으로서의 사회적 지위 유지, 문중자제의 교육과 교화를 통한 문중내 윤리질서의 유지 등을 도모할 수 있었던 것이다.
17세기 전반까지만 하더라도 원(院)?사(祠)의 건립은 향중(鄕中) 공동의 관심사에서 출발하였으나, 17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자기중심적 이해관계에서 지역?씨족별로 개별화 추세를 보이면서 문중의 파벌로 더욱 세분화되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원장?유사 등 당시 서원 운영을 실질적으로 책임지고 있었던 원임의 구성에서도 나타나 시기가 내려오면서 점차 피봉사자의 후손의 비중이 커지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이 시기 서원은 이전까지의 향촌공동체적 성격에서 벗어나 점차 가문중심적으로 전환되고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의 양상이나 그 시점은 각 서원의 형편이나 성격에 따라 다소 달랐다.
따라서 원?사는 종래의 교육기관으로서의 의미가 크게 축소되었고, 사현(祀賢)의 기능만이 강조되면서 오히려 향촌에서의 문중의 우위권 경쟁을 위한 도구로 이용되고 한편으로는 그들 문중의 사회?경제적 이해를 대변하는 도구로 전락되어 갔다. 또한 17세기 이후 서원이 급격히 남설되면서 폐단이 노출되자 설립과 사액에 대한 국가적 통제책이 수립되고 이에 대한 권한은 지방관에 귀속되었다. 서원유림들이 지방관으로 대표되는 관권(官權)에 대해 일정하게나마 그들의 자유로운 향촌내 활동을 담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국가의 공적 승인이라 할 수 있는 사액을 받는 것 뿐이었다.
한편 이러한 추세에 따른 양반층의 급증은 동족 마을을 형성시키기도 하였다. 동족마을은 유교의 실천윤리가 지체를 자랑하는데 내세워지는 사회적인 위세에서도 연유된 점이 적지 않지만, 광대한 전지(田地)를 기초로 해서 지방의 문벌들이 동조의식(同祖意識) 아래의 생활조직에서도 기인했다. 동족마을은 동조의식을 가진 동성동본의 남계 친족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마을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한 마을에 동성동본의 사림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한다는 사실만을 가지고 동족 마을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이것은 동족이 그 마을의 사회생활에 지배적인 영향을 주느냐 주지 못하는냐 하는 질적인 면과 집단적으로 거주하되 어느 정도로 많은 동족이 모여 사느냐하는 그 마을에 있어서의 동족의 양적인 면도 아울러 다루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동족 마을의 형성은 이미 다른 주민이 마을을 형성한 곳에 새로운 동족이 입주하여 그 마을의 지배적 동족으로 발전하는 경우와 새로운 개척지에 거주지를 정하여 동족 마을로 발전하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동족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삼국시대로부터 고려시대까지 소급시켜 보는 경우도 있지만 동족 마을이 우리 사회에 보편적으로 출현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초, 혹은 그보다 훨씬 후대가 아닌가 한다.2)
동족집단은 가계(家系)의 계승을 중요시하는 전통적 가족의식의 강화와 함께 출현한 것이며, 동조의식에 바탕을 둔 혈연집단이다. 따라서 동족집단은 가족제도 특히 상속이나 제사와 밀접히 관련된다. 조상숭배는 제사를 강조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남계 친족집단의 강화는 상속에 있어서 남녀의 차별, 장유(長幼)의 구분을 촉진하였다. 이러한 면에서 상속제도나 제사 양식의 변천은 동족집단의 형성?발전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동족집단의 형성은 조상 숭배(제사의 중시)의 강조와 또 남계친족집단의 강화(차등상속)와 때를 같이 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분재기(分財記)의 분석을 통해서 제사 대상의 범위와 그 변동을 살펴보면 다음의 표와 같다.
<제사의 대상자>
명 칭 |
1500 - 1659 |
1660 - 1749 |
1750 - 1880 |
봉사(奉祀) |
21 |
20 |
3 |
제사(祭祀) |
? |
2 |
? |
승중(承重) |
1 |
2 |
? |
사위(祀位) |
1 |
? |
? |
본종봉사(本宗奉祀) |
? |
1 |
? |
부모봉사(父母奉祀) |
? |
4 |
5 |
조부모?부모봉사 |
? |
2 |
1 |
증?조?부모 |
? |
? |
2 |
고?증?조?부모 |
? |
? |
1 |
조부모?조상제사 |
? |
1 |
? |
부모?선세(先世)봉사 |
? |
1 |
? |
7대위사(七代位士) |
? |
? |
1 |
원봉사(元奉祀)?신봉사(新奉祀) |
? |
1 |
? |
조상제수?부모기제?외조부모 |
1 |
? |
? |
외가제사 |
? |
1 |
? |
본종?처변(妻邊)?부모 |
? |
1 |
? |
외가제사?승중 |
1 |
? |
? |
불명 |
2 |
? |
? |
계 |
27 |
36 |
13 |
이와 같이 동족이 집단의식을 가지고 집단생활을 영위하는 경우에 이들 동족에는 대개 하나의 조직체가 구성된다. 이 조직체를 문중 또는 종중이라 한다. 이 종중은 공동 조상의 제사에 의해서 맺어진 자손의 집단이므로 자연적인 집단이라 하겠지만, 일정한 범위의 동족이 의식적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일종의 인위적인 집단이다. 다시 말하면 동족이 한 마을에 집단적으로 거주한다고 해서 반드시 종중이나 문중이 구성되는 것은 아니고 그들이 집단의식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구성할 때 형성되는 것이다. 참고로 함평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들의 전국분포를 1985년 경제기획원의 인구 주택 센서스 통계로 살펴보면 다음의 도표와 같다.
<함평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들의 전국분포>
본 관 |
가구 |
인구 |
함평김(金)씨 |
223 |
943 |
함평이(李)씨 |
24,776 |
103,697 |
함평정(鄭)씨 |
1,462 |
6,425 |
함평오(吳)씨 |
747 |
3,282 |
함평문(文)씨 |
158 |
850 |
함평임(任)씨 |
25 |
116 |
함평노(魯)씨 |
6,125 |
25,852 |
함평모(牟)씨 |
3,656 |
15,539 |
함평윤(尹)씨 |
198 |
910 |
함풍이(李)씨 |
1,487 |
7,162 |
함풍정(程)씨 |
5 |
24 |
이러한 동족의 위세를 표시하는 기록의 대표적인 것이 족보와 문집이다. 족보에는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여줄 수 있는 조상의 관직명이 모두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조상이 베푼 선정, 왕으로부터 받은 포상 등이 자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동족의 사회적 위세는 족보에 기록되어 있는 조상의 관직의 크기와 수에 의해 결정되며, 그들의 행정과 학문의 정도에 따라 대우를 받는 것이다. 동족의 사회적 위세를 과시하기 위하여 그들은 반드시 동족의 중심인물인 가장 높은 관직을 지낸 조상을 내세우게 한다. 이 조상이 또 하나의 파(派)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족보 외에 동족의 사회적 지위를 높여주는 또 하나의 기록은 조상의 문집이다. 문집은 조상의 학업을 과시하는 것으로서 때로는 서원 등에 보관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서 그들 동족의 위세를 인정받고자 하는 경우도 있다. 이외에 교지(敎旨)도 소중히 보관하는 문서의 하나인데, 대체로 한국사람이 금전에 관한 기록은 소중히 보관하지 않으면서 족보?문집?교지 등의 문서를 소중히 하는 것은 이를 통해서 동족의 사회적 위세를 높이려 하는 욕구가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위세를 표시하는 물적 시설로는 묘지?열녀비?효자비?정려?신도비?재실(齋室)?사당 등등 대단히 많다. 동족의 중심인물의 존재나 효자?열녀?충신 등의 존재는 단지 기록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물적인 시설에 의해 과시함으로써 더욱 확고하게 보장받게 되는 것이다. 열녀비?효자비?신도비?정려 등이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곳에 설립되는 것은 이때문이다. 또 동족의 위세를 높여 주는데 크나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서원 및 향교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다. 서원이나 향교에 자기 동족의 조상을 모시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고, 자기 동족의 조상이 배향된 서원, 향교를 거대하게 건축하거나 수축하는데 거액의 해당 동족의 종중재산을 기부하였던 것이다.
한편 원래 서원은 선현의 봉사와 자제교육의 뜻으로 설립된 것이지만 전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면세?면역(免役)이 특권을 가지고 있어 피역자들이 모여들었으며 지방 농민을 괴롭히고 지방행정에 압력을 가하기까지 하는 등 그 피해가 막심하였는데, 대원군의 과감한 철폐로 그 폐단이 없어지게 되었다. 대원군은 지방 양반들의 세력 기반이 되었던 서원을 대폭 정리하여 전국에 47개소의 서원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철폐하였는데, 이때 철폐된 서원은 600여 개나 되었다. 함평의 서원 및 사우(祠宇)의 존폐상황을 대원군에 의하여 고종 6년(1868)에 실시된 서원 철폐를 전후로 구분하고, 이후 복설된 사우를 별도로 정리하면 다음의 표와 같다.
<표 12> 서원 훼철령 이전에 폐철된 함평의 사우
사 우 이 름 |
소 재 지 |
배 향 인 물 | |
모양사 |
牟陽祠 |
나산면 초포리 |
이유인(李有仁, 침랑) |
매당사 |
梅堂祠 |
나산면 상곡리 |
윤삼거(尹三擧) |
분충사 |
奮忠祠 |
신광면 월암리 |
이송재(李松齋), 이창석(李昌碩), 이태희(李泰熙), 이치오(李致五) |
달덕사 |
達德祠 |
월야면 월야리 |
최익현(崔益鉉) |
분매사 |
盆梅祠 |
해보면 상곡리 |
1868년에 해제면 분매리로 이전, 윤길 외 2명 |
월계사 |
月溪祠 |
해보면 대각리 |
진흠봉(陳欽鳳), 진만재(陳晩宰) |
동암사 |
東巖祠 |
대동면 월송리 |
오철검(吳哲儉) |
화전사 |
花田祠 |
나산면 화 전 |
강자순(姜子順) |
양림사 |
陽林祠 |
함평읍 진양리 |
장남기(張南騎) 장두익(張斗翊) |
효동사 |
孝洞祠 |
손불면 동암리 |
정준(鄭浚) 정오찬(鄭五贊) 현재 원모재(遠慕齋)로 개칭 |
산정사 |
山亭祠 |
신광면 복흥리 |
심안평(沈安枰) 심지선(沈之渲) |
<표 13> 서원 철폐령 때 훼철된 함평의 사우
사 우 이 름 |
소 재 지 |
배 향 인 물 (配享人物) | |
자양서원 |
紫陽書院 |
나산면 우치리 |
주자, 송시열 |
유 애 사 |
遺 愛 祠 |
함평읍 기각리 |
박정원(朴鼎元) 등 현감 |
수 산 사 |
水 山 祠 |
함평읍 수호리 |
임영(任泳, 대사헌) |
증 산 사 |
甑 山 祠 |
나산면 이문리 |
김덕생(金德生, 좌명공신) |
월 산 사 |
月 山 祠 |
대동면 향교리 |
이순신(李舜臣, 동제사) 이덕일(李德一, 우후) |
임 천 사 |
林 泉 祠 |
해보면 상곡리 |
윤길(尹吉, 한림) 윤덕생(尹德生, 생원) 윤예형(尹禮衡,부사) |
나 산 사 |
羅 山 祠 |
나산면 나산리 |
안충달(安忠達) 안여해(安汝海, 진사) 안치택(安致宅, 지평) |
월 호 사 |
月 湖 祠 |
월야면 월악리 |
정경득(鄭慶得, 처사) 정희득(鄭希得,진사) |
초 포 사 |
草 浦 祠 |
나산면 초포리 |
이순화(李舜華, 통훈) |
성 산 사 |
城 山 祠 |
해보면 용산리 |
윤영상(尹榮商, 참봉) 윤형필(尹衡弼, 호조공신, 호참) |
지 산 사 |
芝 山 祠 |
해보면 금계리 |
정충량(鄭忠良, 선무원종공신) 정득량(得良, 부장) 정대명(鄭大鳴, 직장) |
선호서원 |
船湖書院 |
나산면 이문리 |
김석규(金石奎), 김몽복(夢福,임란공신), 김몽성(夢成), 김여정(汝淨), 김선창(善昌) |
매 곡 사 |
梅 谷 祠 |
현 무안군으로 |
김득남(金得男) |
고 양 사 |
高 陽 祠 |
함평읍 대덕리 |
최금수(崔錦壽) 최경헌(景憲, 판관) |
송 암 사 |
松 岩 祠 |
나산면 송암리 |
신극례(辛克禮), 신극경(辛克敬), 신효돈(辛孝敦) |
<표 14> 복설된 사우
명칭?소재지 |
배 향 (配享) 인 물 |
참 고 |
증산사(甑山祠) 나산면 이문리 증산마을
|
?주벽?김덕생(金德生. 본관:상산, 호:증산, 시호?충간-忠簡), 좌명 공신추증, 가선대부 동지중추원사) ?배위?김중선(金重璿.1659-1702, 충간공의 9대손, 호?최락당-最樂堂, 성리학자) ?배위?김한로(金漢老.1646-1687, 충간공 8세손, 호:선계당善繼堂, 관작:현령?춘추관 기주관) |
세종대 건립 1597년 정유재란때 소실 1693년 재건 1868년 훼철 1873년 복설 제향일 음력 2월 20일
|
사산사(射山祠) 나산면 초포리 사산마을
|
?주벽?이언(李彦.950-975) 함평이씨 시조, 관작:고려 신무위 대장군 ?배위?이춘수(李春秀, 관작:전라좌수사) ?이종생(李從生,1423-1495), 함성군(咸城君), 시호:장양(蔣襄) 관작?병마절도사 ?이긍(李兢), 기성군(箕城君), 관작?이조판서 ?이접(李摺), 호:효우당(孝友堂), 성리학자. ?이주(李稠), 호:경재(敬齋), 관작?함평현감 |
1790년 창건 1868년 훼철 1936년 복설 제향일?음2월중정일
|
원모사(遠慕祠) 함평읍 진양리 양림
|
?배향?장백림(張百林. 1123-1204), 본관:인동 호:원모재(遠慕齋), 관작?의정부 우참찬
|
1649년창건,1868년훼철 1956년 복설 1981년 증설개축 제향일:음10월1일 |
명칭?소재지 |
배 향 인 물 |
참 고 |
표산사(杓山祠) 학교면 마산리 표산
|
?주벽?정분(鄭?.1224~1298, 본관:진주, 호:애일당(愛日堂) 시호?충장(忠壯) 관작:우의정 ?배위?정감(鄭?, 선무원종1등공신, 임진?정유란의 진주성 전투를 참조할 것. |
1935년 창건 제향일?음 3월 5일
|
덕천사(德川祠) 신광면 삼덕리 덕천
|
?주벽?모순(牟恂.1373-1460), 본관:함평, 호:절강(截江) 관작:의정부 사인. 효자 ?배위?모유추(牟有秋.1637-1709), 호:금석당(金石堂) 관작:현감, 찰방 |
1947년 창설 제향일:음 3월 17일
|
오산사(鰲山祠) 월야면 용월리 외세
|
?주벽?정가신(鄭可信.1224-1298), 본관:나주, 호:설재(雪齋),시호:문정공(文靖公).한림학사 ?배위?정훈(鄭薰.1401-?, 문정공의 6세손), 호:기재(棄齋). 관작:사헌부감찰, 단종조 충신 ?정응(鄭鷹. 기재공의 5세손), 임란공신 ?정홍(鄭鴻), 임란공신 ?정진(鄭縉), 임란공신 ?정회(鄭繪), 임란공신 ?정민수(鄭民秀), 임란공신 |
1778년 창건 1868년 훼철 1929년 복설 제향일?음 3월 1일
|
수벽사(修闢祠) 해보면 상곡리 모평
|
?배향?윤관(尹瓘.?-1111) 본관:파평, 호:묵재(?齋), 시호:문숙(文肅), 고려중기의 명신, 관작:수태보 문하시중 관병부사
|
1957년 창건, 함평군 문화재 3호 1980년 증축 단청 제향일:3월 중정일 |
사매사(四梅祠) 해보면 용산리 소성 |
?배향?윤삼거(尹三擧.1644-1718), 본관:파평, 호:사매당(四梅堂), 성리학자
|
1882년 창건 제향일:음 9월 9일
|
백야사(百野祠) 월야면 백야리 679번지
|
?배향?정도성(鄭導誠.1725-?), 호:삼근당(三近堂), 성리학자
|
1756년 영당 심근당 건립 1868년 훼철 1950년 복설 제향일?음 3월 7일 1978년 현건물 개축 |
충의사(忠毅祠) 나산면 덕림리 죽림
|
?주벽?김문기(金文起.1387-1465), 호:백촌(百村), 시호?충의, 관작:이조판서 ?배위?김현석(金玄錫.1410-1456), 호:여병재(女甁齋), 영월현감 ?김정호(金定浩.1566-1593), 호:일성재(日星齋), 관작:증 한성부판윤 ?김응무(金應武.1590-1624), 호:해은(海隱), 관작:선전관 ?김 당(金 ?), 호:관암(冠岩) ?김태원(金泰元), 항일의병장 |
1930년 창건
|
상곡사(上谷祠) 학교면 죽정리 상곡 |
?배향?정현보(鄭賢補), 본관:진주, 성균관생원, 임진란 공신
|
1870년 창건 제향일:음 9월9일
|
명칭?소재지 |
배 향 인 물 |
참 고 |
삼일사(三一祠) 손불면 죽장리 장동
|
?부벽?김두삼(金斗三), 1884-1931, 본관:광산, 호:영빈(潁賓)성리학자 ?배위?김규일(金珪馹.1894-1979), 호:현재(玄齋) 성리학자 |
1931, 영당창건 1964, 3. 1당 창건 1983. 3. 1사 개칭 제향일:음 2월그믐 |
송계사(松溪祠) 나산면 송암리 송계 |
?배향?노극창(盧克昌.1482-1568), 본관:광산 호:송계, 남원부사, 광주목사
|
1946년 창건
|
해강사(海岡祠) 학교면 죽정리 정자동 |
?배향?정윤경(鄭允京.1885-1950), 본관:진주 호:해강, 성리학자 |
제향일:음 4월 6일 1970년 창건 |
제동사(濟洞祠)
|
자산서원 훼철 이후의 이름. <붕당대립과 자산서원 치폐 항을 볼것> 지산서원 복설(1988-1998) |
|
동족의 사회적 위세를 높이는 행동은 혼인관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동족 내부에서 항렬이나 연령의 권위를 중요시 하는 것도 동족의 위세에 관계되는 것이다. 조상의 제사나 장례식을 대규모로 거행하여 타 종족에 과시하는 것은 동족의 위세에 관계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학에 조예가 깊은 자가 유림에 많이 참여하게 되는 것도 동족의 사회적 위세를 높이는 것으로 인식한다.
요컨대 한국 동족의 중심적 기능은 생활의 협동이 아니라 조상의 제사와 사회적 위세를 과시하는데 있다고 하겠다. 그 중에서도 후기로 내려올수록 특히 사회적 위세를 과시하는 기능이 가장 중심적으로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제사를 성대히 거행하는 이면에는 그들의 사회적 위세를 과시하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히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1) 김동수(金東洙), 「16~17세기 호남사림(湖南史林)의 존재형태에 대한 고찰 ―특히 정개청의 문인집단(門人集團)과 자산서원의 치폐(置廢)사건을 중심으로 ―」『역사학연구』7집, 1977
2) 최재석, ?한국사(韓國史)? 13, 국사편찬위원회, 1990, 5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