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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문학상'은 작가 지망생들에게는 등용문 역할을, 신인작가들에게는 새로운 도약을 위한 구름판 같은 역할을 하려고 합니다.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지닌 모든 신인들에게 활짝 열려 있는 푸른문학상 공모제도를 통해 새로운 감수성과 뛰어난 문학성을 지닌 작가와 작품이 탄생하기를 기대합니다.
작성 : 동화읽는가족 ( 12/02/28 14:50:54 , Hit : 2793 )
제목 : <새로운 작가상> 아동청소년문학 평론 「동물 의인화, 자유와 억압의 장치-창작 그림책을 중심으로」 /오주영
<제10회 푸른문학상 ‘새로운 작가상’ 아동청소년문학평론 수상작>
동물 의인화, 자유와 억압의 장치
-창작 그림책을 중심으로-
오 주 영
<목차>
1. 들어가며
2. 동물인가, 인간인가
3. 동물 의인화의 효과, 경계 흐리기
4. 동물과 닮은 아동의 종속성
5. 억압의 장치, 자유의 장치
6. 마치며
1. 들어가며
그림책 속 동물 의인화 장치는 종속성을 지니는 경우가 많다. 이 종속성은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장치의 사용에 의해 그림책 속에서 강화되며, 독자가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내면화된다. 그렇다면 동물 의인화 장치는 어떻게 그림책에서 종속성을 강화하고 있는 것일까. 동물 의인화는 고대의 물활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던가.
동물 의인화의 시작점은 고대의 물활론인 것은 분명하다. 고대인에게 모든 생물·사물에 생명과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믿음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고대인들은 돌, 나무, 동물 등 어디에나 영혼이 있다고 믿었고 큰 바위, 폭포, 해, 달, 비 등을 의인화해 숭배했다. 동물의 탈을 쓰고 엄숙한 춤을 추는 의식을 통해 동물의 힘이 옮겨온다고 믿었다. 자연은 경외의 대상이었으며, 인간과 동물은 자연에 속한 수평적 존재 곧 동등한 생명이었다. 인간은 동물이 가진 고유한 힘을 존중했으며, 그 힘을 취하기 위해 동물을 의인화했다. 이 같은 물활론적 믿음이 급격히 흐려진 것은 근대의 일이다. 과학과 이성으로 무장한 근대의 인간은 자연을 이용의 대상으로, 동물을 길들임의 대상으로 종속시켰다. 산업화의 물결 속에 대량생산 방식이 정착되었고 동물 또한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물적 존재, 교환 가치를 지닌 상품이 되었다. 이용의 주체인 인간은 스스로를 자연의 지배자, 동물의 주인으로 인식했다. 근대에 생긴 인간과 동물 사이의 위계 변화는 문학에도 투영되었다. 신화, 전설, 민담 등 옛이야기에 나오는 의인화된 동물은 물활론에서 비롯되어 생겨난, 인간과 동등한 존재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삶의 터인 숲에 살며 인간과 자연스레 어우러졌다. 반면 근대 이후 아동문학 속에서 나오게 된 동물은 인간을 풍자하거나 인간의 삶을 동물로 대신 드러내는 도구적 존재, 인간의 대리자가 되었다.
이 글은 문학에서 인간을 대리하는 존재가 된 동물이 아동문학 안에서, 그것도 동물 의인화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장인 창작 그림책 속에서 어떤 모습을 지니며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되었다. 창작 그림책에서 인간을 대신하는 동물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동물이 인간을 대신함으로 생기는 효과는 무엇인가. 동물 의인화는 아동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이에 대한 탐색을 통해 의인화 장치에 내재된 종속성을 확인하고, 그것이 어떻게 억압의 장치로 작용하는지 밝혀내고자 한다.
2. 동물인가, 인간인가
동물은 어미에게서 태어나고, 감각이 있으며, 유한한 생명을 가진다. 이런 점들에 있어서 동물들은 인간을 닮았다.1) 따라서 동물은 다른 어떤 대상보다 인간의 삶을 담기에 적절한 매개체가 될 수 있다. 동물을 주인공으로 한 대부분의 그림책, 그 중에도 논픽션이 아닌 창작 그림책에서는 대개 동물과 인간의 유사성을 전제로 인간처럼 행동하는 동물이 등장한다. 의인화된 동물 등장인물의 형태는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얼굴만 동물일 뿐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등장인물과 몸은 동물이지만 인간처럼 행동하는 등장인물이다.
우선 얼굴만 동물인 등장인물을 보자. 이호백 글·그림의 『쥐돌이는 화가』(비룡소, 1996)의 주인공 쥐돌이는 얼굴 생김만 쥐일 뿐 인간과 유사한 몸을 가졌다. 꼬리가 사라졌기에 보다 인간에 가까워 보인다. 전시회장, 극장, 유치원, 마을과 집 등 쥐돌이의 배경은 인간 세상을 그대로 복제해 놓은 듯하다. 작품의 내용과 등장인물들의 행동도 지극히 현실적이다. 엄마를 따라 간 전시회장에서 그림에 빠진 쥐돌이는 극장 간판을 그리는 곰 아저씨를 찾아가 화가가 되는 방법을 묻는다. 쥐돌이는 곰 아저씨가 일러준 대로 마음속에 그림을 그린 다음, 종이가 마음이라 생각하며 그림을 그린다. 어른들은 쥐돌이의 실력에 깜짝 놀라고, 엄마와 아빠는 집안을 쥐돌이 그림으로 장식한다.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 『쥐돌이는 화가』에서는 동물 등장인물들의 얼굴을 인간으로 바꾼다 해도 아무런 문제나 어색함이 생기지 않는다. 인간의 이야기에 동물의 얼굴만을 덧씌웠기 때문이다. 『쥐돌이는 화가』가 보여 주는 것들은 풍성하다. 우선 쥐돌이의 경험을 통해 어렵게 생각하는 미술관이나 화랑의 그림이 사실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님을,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즐기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글로 설명하지 않고 그림으로 보여 준다. 또한 순수미술과 대중미술의 경계 나눔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고, 주어진 과제에 따라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이의 상상력을 제한하고 즐거움을 빼앗는 일이 될 수 있음을 드러낸다. 이와 함께 자유롭게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이 그림 그리기에 얼마나 큰 기쁨을 주는지도 자연스레 보여 준다. 이 과정에서 그림과 글이 결합됨으로써 의미를 풍부하게 만드는 그림책의 고유한 특성이 잘 활용되고 있다. 특히 글로서만은 완벽히 설명될 수 없는 화가의 작품, 쥐돌이의 작품 등이 진짜 그림으로 그림책 안에 담김으로써 생기는 효과가 특별하다. 그림책으로서의 정체성이 뚜렷한 작품이다. 헌데 이 작품의 쥐돌이가 생쥐라는 점은 유희적 즐거움을 주지만, 쥐돌이가 인간으로 바뀐다 해도 이 작품이 지니는 장점과 의미는 달라지지 않는다. 백희나 글·그림, 김향수 사진의 『구름빵』(한솔수북, 2004)에 나오는 동장인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치마를 두르고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는 고양이 엄마나 늦잠을 자는 바람에 양복 차림으로 집을 뛰쳐나가는 고양이 아빠, 비옷을 입은 두 고양이 아이를 인간으로 바꾸어 이야기를 되짚어 보자. 비온 뒤 나무에 걸린 구름을 아이들이 집으로 가져간다. 엄마는 구름으로 구름빵을 만들고, 아이들은 아빠에게 구름빵을 전해 주기 위해 시내를 날아간다. 만원버스 속에서 시달리고 있던 아빠는 구름빵을 먹고 훨훨 하늘을 날아 회사로 지각하지 않고 도착한다. 집으로 돌아온 아이들은 지붕 위에 앉아 또 구름빵을 먹는다. 이 이야기의 등장인물인 고양이 가족은 토끼 가족으로도, 생쥐 가족으로도, 돼지 가족으로도 대체될 수 있다. 인간 가족으로 바꿔도 『구름빵』의 내용이 변하거나 이야기의 흐름이 깨지는 부분은 생기지 않는다. 『구름빵』에서 중요한 건 그들이 고양이라는 점이 아니라 구름으로 빵을 만들어 날아다니는 상상력 그리고 따뜻한 가족이다. 『쥐돌이는 화가』와 『구름빵』의 등장인물은 고유한 동물성이 사라진, 동물의 가면을 쓴 인간과 같다. 인간의 몸을 가진 꼬리 없는 동물은 하나의 상징, 문명의 이름 아래 야성을 거세당한 동물의 상징으로 읽힌다.
얼굴뿐 아니라 몸까지 동물이면서 인간처럼 행동하는 의인화된 동물 등장인물은 크던 작던 어느 정도 동물의 생태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호백 글·이억배 그림의 『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재미마주, 1997)는 특히 수탉의 생태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알에서 태어나고, 수평아리 때 다른 병아리들과 우르르 몰려다니고, 자라서 어른의 상징인 꼬리털을 갖게 되고, 탁탁 홰를 치고, 새벽에 힘차게 울고, 다른 수탉과 우두머리 자리를 놓고 싸움을 벌이는 닭의 생태가 사람의 일생과 자연스레 연결되어 공감의 폭이 커진다. 닭장에서 알을 깨고 나온 수평아리는 태어나 가족의 일원이 되는 아기처럼 보이고, 수평아리의 깃과 꼬리가 자라는 모습은 청소년기를 보내며 어른이 되어가는 소년 같다. 홰를 치며 새벽마다 힘차게 우는 모습은 자신에 찬 청년처럼 보인다. 다른 수탉과 대장자리를 놓고 닭싸움을 하는 모습에서 성취를 위해 경쟁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수탉이 중심이 되어 대가족을 이루어 사는 모습에서 아들딸과 손자손녀를 둔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여기에 팔씨름하는 수탉, 술을 마시며 비틀대는 수탉, 책가방을 한쪽에 던져놓고 말뚝 박기를 하고 있는 중평아리 꼬마들, 가슴에 번호표를 붙인 젊은 수탉들의 힘자랑 대회, 수탉의 환갑잔치 등 인간사의 풍경이 함께 엮여 재미를 더한다. 『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이 궁극적으로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은 수탉의 생애가 아니다. 진짜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생애다. 최고의 자리에 선 청년의 당당함, 최고가 아니어도 가치 있는 노년의 아름다움, 우리 인생을 아우르는 가족의 소중함 등을 수탉의 일생에 빗대어 『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이 담고 있다. 인간의 삶에 대한 작가의 가치관이 동물 주인공의 행동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호백 글·그림의 『도대체 그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재미마주, 2000)의 주인공 흰 토끼는 말 그대로 토끼의 외양을 지녔다. 북슬북슬한 흰 털과 순한 눈, 쫑긋 선 귀. 흰 토끼는 어느 집의 애완동물로 베란다에서 키워지고 있다. 헌데 지극히 평범한 애완동물처럼 보이던 흰 토끼가 사람이 모두 외출하자 갑자기 두 발로 서 앞발로 베란다 문을 열어젖히고 집 안으로 들어온다. 흰 토끼는 냉장고를 열어 밤참을 차려 먹고, 과자를 먹으며 만화영화를 보고, 화장대에 올라 립스틱을 바르고, 옷장을 뒤져 돌 옷을 꺼내 입고, 책상에 앉아 책 읽는 척해 본다. 뿐만 아니라 벽장에서 꺼낸 롤러 블레이드를 타고 젓가락을 이용해 신 나게 달린다. 토끼가 하루 종일 하는 일은 도무지 토끼답지 않은 행동뿐이다. 마지막으로 침대에서 한 잠 달게 자고 난 토끼는 식구들이 돌아오기 전에 살며시 베란다로 돌아가 시치미를 뗀다. 흰 토끼가 집안에서 벌인 행동만 놓고 보면 마치 부모의 눈을 피해서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은 어린 아동같이 느껴진다. 토끼가 집안에서 한 모든 일은 ‘인간 따라하기’다. 흰 토끼는 인간들의 행동을 따라함으로써 자신의 영리함을 드러내며, 인간처럼 도구를 사용해 독자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낸다. 더욱이 토끼의 생김새는 아동을 떠올리기 충분할 만큼 작고 귀엽다. 토끼의 인간 같은 행동과 토끼의 생김새가 가진 이미지는 독자로 하여금 어렵지 않게 아동을 연상하도록 만든다. 한편 이 그림책에서 가장 절묘한 장치는 토끼 똥이다. 집안으로 들어온 흰 토끼는 작고 동그란 토끼 똥을 곳곳에 떨어뜨려 놓는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동물의 자연스런 생리현상이다. 토끼 똥은 인간과 꼭 닮은 행동을 벌이는 주체가 누구인지 환기시키고 토끼가 아무리 인간처럼 행동하더라도 사실은 동물임을 보여 준다. 인간의 이성을 상징하는 도구와 동물의 본능을 상징하는 똥이 대비되며 만드는 울림이 의미심장하다. 『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과 『도대체 그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의 등장인물들은 동물의 몸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동물들이 행동을 통해 보여 주는 것은 인간의 삶이다. 『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이 남자의 일생을 담고 있다면 『도대체 그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의 등장인물은 아동의 모습을 담고 있다.
『쥐돌이는 화가』와 『구름빵』처럼 얼굴만 동물인 등장인물이든, 『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과 『도대체 그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처럼 몸 전체가 동물인 등장인물이든 이들은 공통적으로 인간의 역할을 수행한다. 동물 의인화가 그림책 속에서 인간의 삶을 보여 주기 위한 장치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현실과 맞닿아 있는 듯 보인다.2) 동물이면서 인간처럼 행동하고, 인간의 삶을 보이지만 동물이라는 이 어정쩡한 위치가 만드는 효과는 무엇인가. 동물 의인화 장치가 무용하다면 굳이 인간 대신 동물을 등장인물을 내세울 필요도 없을 것이다.
3. 동물 의인화의 효과, 경계 흐리기
서점의 그림책 코너에 가면 의인화된 동물 주인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아기를 키우는 집이라면 적어도 서너 권은 동물 의인화 그림책을 가지고 있을 터다. 동물 의인화 그림책은 왜 이토록 많이 창작되고 있을까. 아동이 동물을 좋아한다는 것도 한 이유겠지만, ‘장치’로서의 역할을 해낸다는 점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듯하다. ‘의인화된 동물은 성별이나 인종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아 독자 어린이가 주인공에 자신을 대입하기 쉽다.’3)는 마쓰이 다다시의 말처럼 동물 의인화는 나이의 경계, 성별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이와 더불어 현실과 환상의 경계까지 흐려 놓는 효과를 발휘한다.
나이 흐리기의 효과는 실제 동물이 대체로 나이를 알기 어렵다는 점에서 생긴다. 특히 애완동물은 오랫동안 귀여운 외양을 유지하므로 노견이라도 겉보기에 어린 동물처럼 보이는 일이 흔하다. 『도대체 그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에서 흰 토끼의 나이는 알 수 없고, 굳이 알 필요도 없다. 그림을 통해 표현된 작고 귀여운 모습을 보고 ‘이 토끼는 어린가 봐.’라고 독자가 짐작할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정성훈 글·그림의 『토끼가 커졌어!』(한솔수북, 2010)의 토끼나, 박재철 글·그림의 『팥이 영감과 우르르 산토끼』(천둥거인, 2009)의 산토끼들도 그렇다. 이렇듯 주인공의 나이를 가늠할 범위가 넓으니 그림책을 보는 어린 독자는 주인공을 자신의 연령대에 맞춰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보다 넓은 나이대의 어린 독자들에게 만족감을 주게 된다.
성별 흐리기의 효과는 실제 동물의 암수 구분이 쉽지 않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동물 가운데 암수가 뚜렷이 다르게 생긴 종도 있지만, 전문가가 아닌 보통 사람의 눈으로 봤을 때는 암수가 비슷해 보이는 동물이 더 많다. 그래서 동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그림책은 글과 그림 양쪽, 혹은 그림 텍스트에서 성별이 드러나지 않게 만들기가 쉬우며 이를 통해 암컷과 수컷, 남성과 여성이 늘 분명한 성향으로 나뉜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성에 대한 이원화를 흐려놓을 수 있다. 일례로 『구름빵』은 주인공의 성별을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림책이다. 이 그림책에서 부모 고양이는 성별과 역할이 뚜렷한데 반해, 화자인 ‘나’와 동생의 성별은 불분명하다. 글 텍스트에서나 그림 텍스트 양쪽에서 성별을 분명하게 알아낼 수 있는 단서가 보이지 않는다. 그림 텍스트 속 아이들은 성별을 알 수 없는 티셔츠와 바지, 비옷을 입고 있다. 글 텍스트 안에서는 동생이 ‘나’에게 형, 오빠, 누나, 언니 등 독자가 성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말을 일체 하고 있지 않다. 이 작품에서 고양이 아이들의 성별이 불분명한 것은 작가의 분명한 의도로 보인다. 『팥이 영감과 우르르 산토끼』에서 뒷동산에 사는 명랑한 산토끼들은 팥이 영감네 팥 밭에서 팥 따먹기를 좋아한다. 팥이 영감은 눈엣가시인 산토끼들을 붙잡으러 별별 꾀를 다 쓴다. 어느 날 팥이 영감은 죽은 척으로 토끼들을 방심시켜 모두 붙잡고, 산토끼들을 마당의 가마솥에 삶아 먹으려 한다. 그러나 토끼들은 꾀를 내 가마솥을 빠져나가, 마당을 벗어나, 팥이 영감을 골려주며 뒷동산으로 가 버린다. 이 작품 속 산토끼들이 형제로 설명되었다면 어땠을까. 독자는 명랑하고 낙천적이고 장난 많은 산토끼들의 성격을 남자아이의 전형적인 성향으로 보고 이를 통해 남성성에 대한 관습적인 시각을 강화했을 터이다. 반대로 산토끼들이 자매들로 그려졌다면 이 그림책은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한 작품에서 성별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등장인물이 자신의 성에 따라 전형적인 행동을 할 경우 ‘남자는 활발하고 능동적이며 이성적이고 강자이다.’라거나 ‘여자는 얌전하고 수동적이며 감성적이고 약자이다.’라는 식의 남/녀의 이원화된 정체성을 강화하게 될 위험이 있는데, 등장인물의 성별이 드러나지 않는 의인화 그림책은 이런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성을 전형화 할 위험이나, 성과 연관된 이데올로기적 문제를 비켜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별이 두드러지지 않는 의인화 주인공은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모두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고 읽힐 수 있다는 장점도 함께 지닌다. 한편 성의 정체성이 뚜렷한 동물 의인화 그림책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쥐돌이는 화가』는 쥐돌이라는 이름에서부터 옷차림, 생김새 등을 통해 쥐돌이가 수컷임을 보여 준다. 『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의 주인공도 성정체성이 뚜렷한 수탉이다. 『도대체 그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의 흰 토끼는 본래의 생김새만 봐서는 암수를 구분할 수 없지만 립스틱을 바르고 고운 한복 치마를 두르는 등 인간 여성을 따라함으로써 여성성을 드러낸다.
이제 현실과 환상의 경계 흐리기의 효과를 보자. 의인화된 동물에게는 태생적으로 옛이야기적 환상성이 잠재되어 있다. 동물이 인간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모습에는 동화의 근원이 된 옛이야기의 세계관이 담겨있으며, 물활론적 사고가 희미할지언정 이어져 있다. 옛이야기의 ‘옛날옛날에~’라는 첫 문장이 마법의 주문처럼 아이들을 환상의 세계로 인도하듯, 의인화된 동물 또한 아이들을 무엇이든 가능한 환상의 세계로 이끈다. 마법적인 매개체가 나올 수도 있고,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 펼쳐질 수도 있다. 등장인물이 놀라운 변신을 할 수도 있다. 채인선 글·이억배 그림의 『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재미마주, 2001)는 옛이야기적 성격이 강하다. 손 큰 할머니는 설이 다가오자 숲 속 동물들과 나눠 먹기 위해 만두를 만든다. 만두소를 버무리고, 만두피를 만들고, 동물들과 함께 만두를 빚는다. 섣달 그믐날 밤에 커다란 가마솥에 만두를 넣고 끓여, 설날 아침 모두와 함께 만두를 나누어 먹는다. ‘사람과 동물이 공존하는 민담의 세계, 마을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일을 하고, 그 결과를 향유하는 공동체의 생활상’4)이 담겨 있는 그림책이다. 과장과 반복은 이 그림책의 묘미다. 할머니는 만두소를 버무리려고 헛간 지붕으로 쓰는 함지박을 번쩍 들어 끌어와 가득 담는다. 할머니가 만든 만두피 반죽은 집에서부터 소나무 숲까지 뻗어나간다. 엄청나게 큰 가마솥을 끌어와 돌 위에 올려놓는 일도 뚝딱뚝딱 해치운다. 동물들은 할머니를 도와 이레 동안이나 만두를 빚고 또 빚는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 그림책에서는 모든 일이 자연스럽다. 『팥이 영감과 우르르 산토끼』는 팥을 키우는 영감과 그 팥을 몰래 따먹는 토끼 사이의 지혜 대결이 담긴 우리 옛이야기 『팥이 영감 설화』를 가지고 만든 그림책이다. 동물과 사람이 만나 지혜 다툼을 벌이고, 산토끼들이 팥이 영감 몰래 가마솥에서 탈출하는 과정이 반복과 과장을 통해 들썩들썩 자연스럽게 펼쳐진다. 옛이야기의 환상성이 가진 힘이다. 옛이야기 형식의 작품이 아니더라도 의인화된 동물이 나오는 작품은 대체로 유희적이고 환상적이다. 그 작품의 배경이 아무리 현실적이라고 해도, 의인화된 동물 등장인물은 그 자체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쉽게 흐트러뜨려 놓을 수 있다. 『구름빵』에서는 고양이 가족이 구름으로 만든 빵을 먹고서 날아다니고, 『도대체 그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는 ‘우리가 안 보는 곳에서 토끼가 어떤 일을 벌일까?’라는 상상을 현실로 구현해낸다. 『토끼가 커졌어!』의 작은 토끼는 거인처럼 쑥쑥 커져 호랑이와 늑대를 삼킨다. 환상적인 사건이나 마법적인 도구 등은 의인화된 동물 등장인물과 만나 더 유연하고 자연스럽게 작품 안에 녹아든다. 끝으로 동물이 주인공이라고 해서 모두 환상 그림책은 아님을 덧붙인다. 예로 『쥐돌이는 화가』는 의인화된 동물 주인공이 등장해 환상성을 가질 여지를 지니지만, 그 안에 초현실적인 다른 어떤 것도 나오지 않고 현실의 법칙을 따라 이야기가 진행되므로 환상 그림책이 아니다. 그리고 논픽션 그림책이나 동물 그림책, 예를 들어 권정생 글·송진헌 그림의 『아기너구리네 봄맞이』(길벗어린이, 2001)처럼 동물의 생태에 충실하며 현실의 법칙을 벗어나지 않는 그림책에는 환상성이 담기지 않는다.
동물 의인화 장치의 연령, 성별 그리고 현실과 환상의 경계 흐리기 효과는 연령 폭의 확장, 성의 이분법적 사고 벗기, 현실의 벽 허물기를 해낼 수 있다. 의인화된 동물을 등장인물로 선택한 작가들은 대부분 작품 속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경계 흐리기의 효과를 활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4. 동물과 닮은 아동의 종속성
작가가 동물 의인화를 선택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경계 흐리기 효과가 하나의 이유라면, 또 다른 이유로 동물과 아동의 유사성을 들 수 있다. 애완견을 떠올려 보자. 작은 몸, 몸에 비해 큰 얼굴, 동그란 두 눈. 어딘가 아동과 비슷한 점이 있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애완동물에게 “우리 아기.”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진짜 어린아이를 대하듯 사랑을 쏟곤 한다. 아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어른들은 아이에게 “우리 강아지.”라고 하거나 “예쁜 내 새끼.”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것만 봐도 작은 동물이나 애완동물은 아동을 대신해 아동의 역할을 하기에 적당한 듯하다. 그런데 동물과 아동의 닮은 점은 작고 귀엽다는 외형적인 생김새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다. 아동과 동물의 사회적 위치도 서로 유사한 면이 있다. 먼저 동물의 위치를 보자. 동물은 우리 사회에서 인간의 지배를 받고 있다. 가축은 인간에 의해 생산되고, 가공되고, 팔려나간다. 애완동물은 주인의 관심과 보호를 받으며 아이처럼 다루어진다. 동물은 가축으로든 애완동물로든 인간과 종속적 관계를 맺는다. 다음으로 아동의 사회적 위치를 보자. 아동은 어른의 보호와 관리를 받는다. 부모와 교사 등 어른에게 우리 사회의 주도적인 가치관을 교육받고,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이 되기 위한 사회화 과정을 거친다. 어른과 아동의 관계는 보호하는 자와 보호받는 자, 교육하는 자와 교육받는 자의 수직적 위계로 파악할 수 있다. 동물과 아동은 서로 유사성을 지니며, 그 유사성은 생김새 뿐 아니라 동물과 아동의 사회적 위치가 닮아 있다는 점에서도 비롯된다. 동물 의인화 그림책의 주인공이 대부분 작고 약한 것은 어른의 눈에 비친 아동의 모습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창작 그림책의 동물 등장인물을 봐도 그렇다. 『쥐돌이는 화가』에서는 쥐가, 『구름빵』에서는 고양이가, 『도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와 『토끼가 커졌어!』, 『팥이 영감과 우르르 산토끼』에서는 산토끼들이 등장한다. 동물 의인화 장치와 아동의 연관성에 대해 페리 노들먼은 작고 어려 보이는 동물 캐릭터가 어른들이 아동기 본성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고 말한다.5) 조셉 조네이도는 아동의 이야기가 성인과 아동 관계의 문화적 산물이며 아동문학 속 의인화 된 동물들이 아동과 성인이 맺은 권력관계를 보여 줌으로써 노예 아동의 지배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고 있다고 지적한다.6) 최기숙은 아동의 사회적 위치가 동물 등과 같이 종속적이며, 사회적 불평등 관계 속에서 창작된 작품 안에는 어린이를 바라보는 어른의 시선에 어린이에 대한 ‘기대’나 ‘관념’이 투영된다고 말한다.7)
실제 아동과 동물이 종속성을 지니듯, 의인화된 동물 등장인물은 종속성을 지닌다. 의인화된 동물의 종속성은 보호자가 있는 가족 이야기와 만나면 더 크게 두드러진다. 예로 『쥐돌이는 화가』를 보자. 쥐돌이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자 부모와 곰 아저씨, 선생님 등 어른들이 쥐돌이를 조력한다. 이상적인 환경 속에서 쥐돌이의 창의력도 쑥쑥 자란다. 어른들에게 안전하게 보호받고 인정받는 환경은 쥐돌이가 꿈을 키워나갈 수 있는 토양이 된다. 이를 뒤집으면 어른의 보호와 조력 없이는 쥐돌이의 성장도 어렵다는 이야기다. 아동에게는 보호가 필요하다. 쥐돌이가 가진 작고 어린 생쥐의 얼굴은 이런 메시지를 더 강렬하게 만들고 있다. 『구름빵』은 어떨까. 안락한 집에서 고양이 부모와 살고 있는 두 고양이 아이는 구김살 없이 씩씩하다. 고양이 엄마는 상냥하고, 고양이 아빠는 믿음직해 보인다. 고양이 아이들은 집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고양이 아빠에게 구름빵을 전하기 위해 모험을 떠났다 돌아온다. 이 책에서 고양이 엄마는 어딘가 신이하다. 구름빵을 만들고, 둥둥 뜬 구름빵 앞에서 홀로 태연하다. 고양이 엄마는 모든 걸 알고 있는 듯 보이며, 아이들이 창을 통해 집 밖으로 떠날 때 묵인을 통해 승인해 준다. 다시 말하면 어른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고, 좋은 부모가 있기에 고양이 아이들은 행복하며, 모험을 떠나려면 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아동은 보호가 필요하며 어른은 아동의 관리자다. 여기에 작고 귀여운 아기 고양이의 얼굴을 한 두 아이의 모습이 종속성을 강화한다. 『쥐돌이는 화가』의 쥐돌이와 『구름빵』의 고양이 아이들의 행복은 모두 안전한 집, 든든한 부모라는 견고한 공식에서 나오는 듯 보이며 보호자의 존재는 작은 동물의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듯하다.
많은 동물 의인화 그림책에서 어른의 보호를 받는 평온한 환경이 반복되어 나온다. 등장인물은 밝고 명랑하며 충분한 보살핌과 가르침을 받는다. 보호자는 대부분 온화하고 친절하며 집은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 준다. 등장인물들은 보호받는 만큼 순종적이다. 보호에는 어느 정도의 통제가 뒤따르는데 『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에서 어른의 아동에 대한 통제의 시각을 확인할 수 있다. 손 큰 할머니는 이 작품 속 유일한 인간으로 모든 동물들의 할머니와 같다. 손 큰 할머니는 설맞이 만두를 빚기 위해 종을 쳐서 숲의 동물들을 초가집으로 불러 모은다. 동물들은 설날 고향집으로 향하듯 할머니의 집으로 북적북적 모여든다. 손 큰 할머니는 평범한 시골 할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반달곰이나 호랑이보다도 크고 힘이 세다. 할머니 앞에서는 어린 동물이나 어른 동물이나 다 아이에 불과한 듯하다. 그림책 속 그림으로 보는 손 큰 할머니는 언제나 동물들보다 높은 위치에 서 있고, 모든 것을 지시한다. 문제가 생기면 앞서서 해결한다. 동물들이 만두를 잘 빚고 있는지 망원경으로 감시하고 호령하는 이도 손 큰 할머니다. 이런 할머니 덕에 동물들은 다 함께 만두를 나누는 즐거운 설을 맞는다. 이 안에는 아동에 대한 어른의 보호와 통제는 더 나은 결과를 만들므로 아동은 어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들어 있다. 인간인 손 큰 할머니와 의인화된 동물들의 대비는 이 메시지를 더 강조한다. 커다란 할머니와 그보다 작은 동물들, 옷을 입은 할머니와 옷을 벗은 동물들, 놀라운 힘을 발휘하는 할머니와 이에 따르는 동물들의 모습은 의인화 등장인물의 종속성을 강화한다.
5. 억압의 장치, 자유의 장치
현실의 어른들은 언제든 아동을 통제할 준비가 되어 있고 또 그렇게 하고 있다. 어린이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어른의 보호가 어린이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믿음으로, 무수히 많은 이유를 붙여 아동을 관리하고자 한다. 이때 보호자가 있는 동물 의인화 그림책은 어른 독자들의 생각에 확신을 준다. 아동에게는 보호가 꼭 필요하고, 수동적, 종속적인 아동을 어른이 잘 가르치고 이끌어야 한다는 확신이다. 어린 독자는 자신들이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이며, 부모의 통제는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당연한 방편이라고 믿고 스스로를 수동적인 작은 동물과 더욱 동일시할 수 있다. 어른과 아동 사이의 수직적 관계에 대한 믿음이 반복적으로 재생산되며 아동의 종속성이 강화되는 억압의 장치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동물 의인화가 늘 억압의 장치로서만 기능하는 것은 아니다. 보호자가 없는 환경에서는 ‘아동은 어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만들어지지 않으며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 생기는 종속관계가 생길 수 없다. 따라서 동물 의인화 장치는 종속성을 발휘하기 어렵다. 다만 보호자의 유무와 상관없이 동물의 작은 몸집과 귀여운 외모에서 느껴지는 아동과의 동질성은 변하지 않는다.
그림책 속 보호자의 부재는 어린 동물을 보다 능동적으로 바꾸는 환경이 된다. 동물 의인화 장치는 동물이 가진 특성상 보호자나 부모가 없는 고아 등장인물을 창조하기에 좋다. 인간과 달리 동물, 특히 야생의 동물이 일찍부터 홀로서기를 해 살아가는 까닭이다. 야생의 동물은 독립적이며 스스로의 힘으로 먹이를 구하고 가정을 이룬다. 이들은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지만, 이들을 지키는 울타리가 없기에 그만큼 자유롭다. 예로 『토끼가 커졌어!』와 『팥이 영감과 우르르 산토끼』을 살펴보자. 두 그림책의 주인공은 모두 숲에 사는 야생의 토끼로 보호자 없이 독립해 살고 있으며, 이 같은 환경은 작은 동물 등장인물이 지니게 되는 종속성을 상쇄한다. 『토끼가 커졌어!』의 작은 토끼는 그간 힘이 센 동물들로부터 괴롭힘 당하고 도망쳐 다니며 살아왔다. 토끼의 내면에는 크고 힘센 동물이 되어 모두를 삼켜버리고 싶은 분노가 숨어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해가 뜸과 함께 토끼의 몸이 불쑥 커진다. 거인 토끼는 자기를 괴롭히던 늑대를 잡아먹고, 동물의 왕 호랑이까지 삼켜버린다. 거인 토끼의 행동은 어른과 아동의 권력관계를 뒤집는 것이며, 억눌려 있던 어린 독자들의 분노를 해소하는 일이다. 해가 지자 거인 토끼는 다시 작은 토끼로 돌아가지만, 분노를 풀어낸 토끼의 마음은 처음과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한편 이 그림책은 아이의 감정, 그 중에도 부정적인 감정을 당당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함을 지닌다. 수많은 창작 그림책 속 어린 등장인물들이 대부분 밝고 명랑한 이유는 어른이 그런 아동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늘 없이 바르고 건강한 모습은 어른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아동의 모습이다. 그러나 실제의 아동은 보다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의 층위를 지니고 있다. 어린 독자들에게 세상이 늘 행복하고 따뜻한 곳일 수는 없다. 아동이 가장 먼저 사회적 관계를 맺는 곳인 가정은 크고 작은 사건이 터지는 곳이다. 부모와 아동간의 힘겨루기, 부모의 기대와 강요, 형제자매간의 갈등 등 수많은 문제가 존재하고 부딪히고 골을 이룬다. 아이의 내면에는 어른과 마찬가지로 슬픈 일과 기쁜 일, 행복한 일과 불행한 일, 좋은 일과 나쁜 일, 즐거운 일과 우울한 일이 혼재한다. 아동은 어른과 똑같은 인간이기에, 아동이라는 이유로 어두운 면에 대한 감정이 결여될 수는 없다. 아이들은 다만 그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이 어른에 비해 미숙할 뿐이다.8) 『토끼가 커졌어!』가 지닌 매력은 토끼를 통해 아동이 지닐 수 있는 부정적인 감정을 발랄하게 드러냄으로써 누구나 그런 감정을 가질 수 있음을 건강하게 승인하는데서 나온다. 다음으로 『팥이 영감과 우르르 산토끼』를 보자. 이 그림책의 다섯 마리 산토끼는 보호자가 없는 고아들이다. 토끼의 생김새를 보면 삼등신 정도의 작은 몸과 둥그런 눈, 명랑한 표정과 장난스럽고 활기찬 행동 등이 아동을 떠오르게 한다. 반대로 산토끼들 앞에 등장하는 팥이 영감은 토끼들의 몇 배나 크고 위압적이다. 한 손에 낫을 든 채 부리부리한 눈으로 토끼를 쏘아보는 팥이 영감은 사납고 심술궂은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들 산토끼들은 팥이 영감에게 붙잡혀 가마솥에 푹푹 삶아질 위험에 처하지만, 꾀를 내어 산토끼 고기에는 무를 넣어야 제 맛이라고 없는 말을 떠들어댄다. 솔깃한 팥이 영감이 무를 가지러 간 사이 산토끼들은 가마솥을 빠져나와 우르르 도망쳐 버린다. 산토끼들은 죽음의 위험 앞에서 스스로의 지혜와 용기로 위기를 벗어난다. 어른의 도움이 아닌 자신들의 노력에 의해, 더 큰 폭력이 아닌 지혜와 용기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이 값지다. 이 그림책은 위기를 외적 힘이 아닌 내면의 지혜를 통해 극복함으로써 아동과 성인 사이에 진실인양 존재하는 힘의 우열관계, 종속적 권력관계를 와해시킨다.
위의 두 편의 그림책을 통해 알 수 있듯, 보호자가 부재하는 야생의 환경에서 아동을 대신한 동물 등장인물은 보다 능동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 동물 의인화가 아동에게 독립성을 부여하는 자유의 장치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작품 속 보호자의 부재는 동물을 보다 큰 위험 앞에 던져 놓지만 등장인물 스스로 그 위험을 헤쳐나감으로써 능동성, 독립성을 획득할 수 있다. 이런 고아 등장인물은 보호자의 보호가 필수적인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어른의 보호가 아동을 위하는 한 방법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오로지 하나뿐인 절대적인 방법인 것은 아니다. 어린 등장인물은 자신의 힘으로 세상과 맞설 수 있고, 노력을 통해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다. 세상은 수많은 다른 가능성으로 열려 있는 곳이다. 아동은 자신과 닮은 작은 동물 등장인물들이 사건을 터트리고 위기와 맞서는 것을 보며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쌓아나갈 수 있다. 보호자가 없는 동물 등장인물들은 아동의 이미지를 수동에서 능동으로, 종속에서 독립으로, 억압에서 자유로 뒤집고 변화시킨다.
6. 마치며
지금까지 창작 그림책 속 동물 등장인물의 형태, 동물 의인화가 만드는 경계 흐리기 효과, 동물 의인화 장치의 종속성, 종속성을 피할 수 있는 보호자 부재의 그림책 등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림책 속 동물은 인간 대신 인간의 삶을 담고 있다. 『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의 동물성을 간직한 수탉에서 『구름빵』의 꼬리 없는 고양이까지 의인화된 동물들은 저마다 나름의 인간을 떠오르게 만든다. 그러나 인간을 대신하는 동물은 완전한 동물일 수 없고, 동물이 꼬리를 떼고 옷을 입었다고 해서 완전한 인간이 될 수도 없다. 의인화된 동물의 이 미묘한 위치는 아동을 설명하기에도 적절한 듯하다. ‘아동은 인간이지만 동물적이므로 어른이 가르치고 길들여야 한다.’는 사회의 고정관념을 무엇보다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의인화된 동물이다. 또한 동물 의인화 장치는 동물의 외적 특성을 살려 성별과 나이의 경계를 흐릴 수 있고,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의인화된 동물의 등장 자체가 현실과 환상의 간극을 좁힐 수 있다.
의인화된 동물 등장인물은 대부분 아동을 대신하며, 어른이 아동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시각을 드러낸다. 또한 아동과 어른이 맺고 있는 권력관계 및 동물이 인간과 맺고 있는 권력관계를 투영한다. 의인화된 ‘동물’은 인간의, 특히 ‘아동’의 삶을 담는 ‘도구’로 쓰이기에 도구로, 아동으로, 동물로 종속성을 지닌다. 특히 보호자가 있는 가족 이야기에서는 그 종속성이 두드러진다. 의인화 동물의 종속성은 그 동물이 보호받아야 하는 대상이며, 보호해 줄 보호자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동물 의인화는 결국 아동과 어른의 보호받고 보호하는 관계를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고 아동을 수동적, 종속적 자리에 더 견고히 위치시킨다. 동물 등장인물을 보호자가 부재하는 고아로 내세우는 것은 의인화 장치의 종속성을 없애는 한 방법이며, 이는 동물 의인화가 아동에게 종속성을 부여하는 억압의 장치로서가 아닌 독립성을 부여하는 자유의 장치로도 쓰일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덧붙이자면 어느 동물 의인화 그림책도 종속성의 유무만으로 그 작품을 평가하거나 폄하할 수 없으며 폄하되어서도 안 된다. 작품은 전체로 파악되어야 한다. 이 글은 동물 의인화 장치에 대한 탐색을 목적으로 썼고, 여기서 다룬 그림책들은 모두 장치의 쓰임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했음을 밝혀둔다.
창작 그림책의 동물 의인화 장치에 대해 앞으로 더 논의되고 탐색 되어야 할 점이 많다. 추후 다양한 의인화 작품을 분석하고 성찰할 기회가 오기를 바란다.
* 각주*
1) 존 버거, 박범수 역, 『본다는 것의 의미』, 동문선, 2000, 10쪽.
2) 현대에 동물이 인간의 통제 없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자리는 거의 없다. 인간은 애완동물을 키우고, 가축을 생산한다. 동물을 보기 위해 동물원으로 가고, 멸종 위기 동물의 개체수를 보존하고, 균형을 위해 동물을 방생한다. 인간은 동물들의 관리자이다. 동물의 위에 선 만물의 영장이다. 그림책 속 동물 등장인물이 동물 자신의 삶 대신 인간의 삶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이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동물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의 반영일 것이다.
3) 마쓰이 다다시, 이상금 역, 『어린이 그림책의 세계』, 한림출판사, 1996, 57쪽 참조.
4) 엄혜숙, 「그림책 꼼꼼하게 들여다보기 -『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 <<꿀밤나무>> 제5호, 1998, 8쪽.
5) 페리 노들먼, 김서정 역, 『어린이 문학의 즐거움2』, 시공주니어, 2001, 313쪽 참조.
6) 조셉 조네이도, 구은혜 옮김, 『만들어진 아동』, 마고북스, 2011, 219-220쪽 참조.
7) 최기숙, 『어린이 이야기, 그 거세된 꿈』, 책세상, 2001, 15쪽 참조.
8) 리 와인담, 이상금 역, 『동화 쓰는 법』, 보성사, 1988, 33쪽 참조.
오 주 영
1974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수료했다. 2008년 ‘제 13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저학년 부문 대상을 받았다. 평론 「동물 의인화, 자유와 억압의 장치-창작 그림책을 중심으로」로 제 10회 푸른문학상 ‘새로운 작가상’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 『이상한 열쇠고리』, 『한입 꿀떡 요술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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