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비 숲길을 맨발로 걷는다. 딱딱한 트레킹화는 벗어 지팡이에 걸고 어깨에 둘러멘다. 특급안마사 흙 알갱이들이 발바닥을 보듬어주고, 발가락 사이론 흙물의 포말이 꽃으로 핀다. 문경새재는 한낮의 가픈 숨을 토해내며 빛으로부터 벗어난다.
입추에 들어선 8월 9일, 서울과 수도권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진 날이었다. 2차 장마로 들이닥친 수군폭군은 도로, 건물의 침수와 파괴로 삶을 마비시키고도 위협을 가세한다. 기어이 가여운 사람들을 물속에 가두고, 실종과 죽음으로 몰고 간다. 번번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힘든 이들, 저 울음 어쩔거나. 폭우 예보의 두려움으로 잠시 성지순례에 망설였지만, 아픈 이들의 기도와 깨달음을 위해 떠나기로 했다.
오후 3시, 경북 문경의 힐링 휴양촌 양업명상센터에 순례자들이 모였다. 승합차로 문경새재도립공원 제3관문 앞에 도착했다. 문경새재는 천주교 박해시대 때 사제와 선교사, 순교자들이 어둠을 타고 충청도, 경상도를 오가며 선교와 신앙 활동을 하던 길이다. 옛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떠나던 고갯길로, 선비길, 과거길, 금의환향길이라고도 한다. 대하드라마 촬영장의 관광지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서 1위를 차지한 풍광 좋은 곳이기도 하다.
장마도 벗개어 잠포록한 날, 하늘엔 구름결이 깔렸다. 산골짝의 골안개도 차분히 내려앉는다. 가끔은 맞아도 좋은 이슬비 가랑비가 심신을 촉촉하게 적셔준다. 순례의 산길을 지켜주시려고, 그분께서 폭우는 잠시 거두셨음이리라. 참가자들이 폭우에 놀라 취소하니, 모녀 둘과 나, 목자 신부님과 수녀님, 5명의 동행으로 단출하다.
우리는 제3관문에서부터 2관문을 거쳐 1관문까지 약 8km의 숲길, 임도를 걷는다. 길은 폭도 넓고 시야가 트여 있어, 사브작사브작 대화하며 걷기 좋다. 큰비 만난 계곡물소리가 온 산을 울리며 끝도 없이 이어진다. 병풍처럼 둘러선 조령산, 주흘산 자락엔 붉은 기둥 금강송과 이름 모를 아름드리나무들로 울울창창하다.
순례의 시작기도를 드릴 때, 목자는 걸음의 속도를 늦추고, 마음의 여유를 넓히라 하신다. 물기를 한껏 머금은 진 고동색 나무기둥이 정신을 번쩍 나게 하고, 진초록의 나뭇잎들은 생기를 돋아준다. 모든 걸 벗어버리고 자연에 몸을 맡겨본다. 대나무 반쪽의 물받이가 연신 물줄기를 이루고, 물레방아가 정겹게 돌아가는 길은 여러 갈래로 비슷해 헷갈릴 법하다. 목자는 눈감고도 아시는 표정으로, 그저 일상이라 하신다. 쉼 없이 숱한 발걸음 수, 그 얼마나 될까. 굳이 멀고 힘든 길을 수없이 오가며 양들을 이끄시는 착한 목자에게서, 진정 수고로움의 반짝이는 빛을 본다.
두어 시간 쯤 걸었을 때다. 목자는 신발 벗고 맨발로 걸어보라 하신다. 처음엔 당황스러웠으나, 발바닥, 발가락에 닿는 흙의 속살들이 찰싹찰싹 리듬을 타준다. 삼십분 쯤 지나 폭포수처럼 내리치는 계곡물에 발을 담그는 짜릿함이여! 발등을 간질이며 흘러가는 물방울, 스치며 떠가는 나뭇잎들이 고된 발걸음을 달래준다. 천국이 아닌가 싶다. 뿌듯함을 섞어 비벼먹는 주먹밥과 과일은 성찬이 아니고 무엇이랴.
목표점 가까운 제1관문 근처, ‘교귀정’ 정자에 앉아 야외미사를 드린다. 교귀정은 신, 구 경상감사가 인수인계하던 중요한 장소다. 앞자리에 정좌하고 앉으신 목자는 손수 제대 보를 펴시고, 십자고상, 성합, 촛불 등 준비해온 작은 성물로 제대를 꾸미신다. 하얀 제의를 입으시고 빨간 어깨띠를 두르시니, 주님의 현시顯示됨이다.
신부님의 강론을 듣는 가운데 사위는 캄캄해졌다. 저녁 8시는 된 듯하다. 고즈넉한 계곡의 폭포는 가슴으로 쏟아져 내리고, 밤벌레의 합창은 더없이 구성지다. 제대 위의 작은 촛불 하나가 숲속 어둠을 뚫고 온통 산속을 밝힌다. 아. 한 줄기 빛일 뿐이다. 어둠 속 신부님의 말씀은 빛이다. 천지를 울리고, 심금을 울린다.
“우리는 왜 이 밤, 이 산속에 와 있습니까? 폭우 예보에도 순례 길을 걸으시는 여러분과, 참가를 취소하신 분은 무엇이 다릅니까? 저마다 생각이 다르고 행동이 다른 것이 우리들입니다. 선택은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주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가 함께 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낮의 빛 속에 이어, 밤의 어둠 속을 걸으셨습니다. 정녕 빛이신 주님의 존재를 깊숙이 느껴보셨습니까?”
문득 성경 속 창세기, 천지 창조 제1장의 구절이 떠올랐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시를 “빛이 생겨라.”하시자, 빛이 생겼다.’
빛은 태초에 주님이 만드셨다. 주님이 낮과 밤을 가르시고, 밝음과 어둠으로 극명하게 구분해주셨다. 이제, 주님이 빛을 거두어 다른 곳으로 비추러 가시니, 빛은 사라지고 어둠이 엄습했다. 잠시 겁나던 순간, 곁에는 신부님과 수녀님, 순례자의 동행이 있었다. 무섭지 않았다. 새재 관문을 나오는 길에 반딧불이가 맴을 돌며, 반짝반짝 빛을 쏘아준다. 아, 그래, 반딧불이, 촛불, 등대를 통한 빛의 삶이 떠오른다.
낮과 밤은 늘 이어지고 또 지나가기에 무심히 흘려버렸다. 빛의 소중함이나 빛의 의미엔 무관심했었다. 낮이고 밤이고 인공적인 조명 빛들이 난무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빛은 처음이고, 희망이며, 빛을 바라봄은 주님을 향하는 일임을 깨달았다.
밤 10시 경, 문경성당에 돌아와 교육관 숙소에 눕는다. 또 다시 세 번째로 찾을 문경순례가 가로세로 달력에 퍼즐을 맞춘다. 잠의 은총 속에 내일의 첫 빛을 기다린다.
첫댓글 빛과 어둠의길 ...
먼저 걸으신 많은분들을 기억하며
최양업 신부님도 이길을 걸으셨구나!!!
넘 ~~~ 좋은 은총의 시간 이었네요
시간은 달리 걸었지만 글을 읽으며 함께 했어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아.
김루치아님.
댓글 주시고
글 속에서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도 루시아,
박온화 입니다.
루시아(루치아)성녀가
빛의 성녀이지요.
문경성지 순례
둘째에도 첫째에 이어
느낌과 울림이 컸습니다.
세번째로 내려가
순례할 날을
찾고 있습니다.
영육간 주님의 은총
가득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