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을 만들다 ? 적을 품다 !
움베르토 에코의 [적을 만들다]를 읽고 by 김양현
얼마 전 팟 캐스트 방송에서 들은 이야기다. “아이폰을 사용하고, 포털은 다음, 그리고 구글의 g 메일을 쓰면 좌파로 규정된다.” 나는 아이폰, 다음, g 메일 유저인데 그럼 나는 좌파인가? 카카오톡 대신 텔레그램 쓰는 사람들도 좌파인가? 최근엔 검찰들이 대거 텔레그램으로 이동했다는 데 이건 어떻게 설명될까?
사람들은 끊임없이 범주를 만들어 낸다. 구분하고 구별하기 위함이다. 어느 학교 출신인지, 어느 지역 출신인지, 직업은 무엇인지, 종교는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는다. 그리고 피아식별을 한다. 나랑 같은 편인지, 적인지 집착적으로 구별해 낸다.
갑자기 산행을 할 일이 있어 등산화를 급하게 구입하였다. 등산화에 무슨 브랜드가 그리도 많은지 이것저것 돌아보다 머렐인가 뭔가를 사서 신었다. 발도 편하고 가벼워서 괜찮았다. 산으로 가는 길에 물었다. 그거 무슨 브랜드냐고? 우리와 다른 것 같다고. 그러고보니 다들 k2를 신었다. 리더가 k2라서 그런가? 누군가 한 마디 던진다. “김목사님은 미운오리새끼 같네요.”
왜 그렇게 구분을 하고 싶어할까? 왜 그렇게 굳이 나누려 할까? 그게 인간 본성인가? 하긴 아담이 그랬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하더니 금방 저 여자가 줘서 먹었다고 비겁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때부터 남자는 여자의 적이 되었다. 가인은 아벨이 자신과 달라서 싫었다. 그래서 들판에서 동생을 쳐 죽이고 자신을 사람들의 공공의 적으로 만들었다. 그랬다. 그것이 우리네 역사요, 우리네 삶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에코는 적을 만드는 메카니즘은 자신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안전을 도모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한다.
‘적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서 일 뿐 아니라, 우리의 가치 체계를 측정하고 그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그것에 맞서는 장애물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따라서 적이 없다면 만들어 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인류 역사는 끊임없이 공동체성을 강화하기 위해 적을 만들어 내었다. 로마는 기독교인을 공공의 적으로 규정하였다. 그들은 로마에 저항할 뿐 아니라 제국의 불순물로 취급되었다. 막상 그렇게 적으로 규정되니 그들에 대한 묘사가 왜곡된다. 그리스도인들은 남,녀 구분도 없고, 지위의 구분도 없고, 심지어 집단 혼음을 행하고 인육을 즐기는 자들로 묘사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제국의 안전을 위해 기독교인을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허나 따지고 보면 기독교인들이야말로 사랑의 사람들이었으며, 진정한 평등을 추구한 자들이었다. 그것이 제국의 체제와 가치에 위협적이었고 적으로 규정되고 제거될 명분이 되었다. 그렇게 기독교인들은 제국의 적으로 만들어졌다.
몇 세기가 지나 상황이 역전된다. 기독교가 제국의 공인종교가 되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제 이교도들을 맹비난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주일을 지키지도 않고 극장을 드나들며 시끌벅적한 술판과 축제들을 벌인다. 그들은 크리스텐뎀의 공공의 적으로 간주되기에 충분하였다. 그리고 이제 유대인들이 크리스텐뎀의 적으로 규정된다. 그들은 메시야를 죽인 자들일 뿐 아니라 전염병을 몰고 다니는 자들이었다. 아니 그래야 했다.
이후 마녀들이 등장하고 흑인들이 등장한다. 끊임없이 적들이 생산된다. 적으로 규정되면 그들에게는 온갖 박해와 공격이 감행된다. 적으로 규정되면 그들은 객관적 지위나 정당한 평가를 기대할 수 없다. 그들은 곧 마녀가 되고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되고 전염병의 원인이 되고 불건전한 집단이 된다. 그리고 사라져야 할 존재가 된다.
문명이 발달하고 민주주의가 발전되었다고 하는 오늘날도 예외는 없다. 끊임없이 적들이 만들어 지고 적들에 대한 공격이 이어진다. ‘악의 축’이 결정되고 미사일이 날아든다. 테러리스트들이 배치되고 끔찍한 살인과 보복이 브라운관을 넘나든다. 크고 작은 공공의 적이 끊임없이 양산되고 규정된다. 프레임이 그렇다.
심지어 에코의 지적대로,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조차 적을 필요로 한다. 우리의 적 만들기 매카니즘과 적 만들기 DNA는 사라지지 않는다. 니체가 그랬던가? ‘괴물과 싸우다보면 자신도 괴물이 되어간다.’고.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투사조차도 적을 규정하고 적을 공격하고 자신들이 규정한 적들 때문에 투사가 되며, 심지어 자신들도 그렇게 혐오하고 타도하고자 했던 적의 모습을 투사해 간다.
교회조차도 이런 매카니즘이 작용한다. 무슨 교단이 그리 많은지, 무슨 교회가 그리 많은지, 교회 내에서 목사와 장로는 서로 적이 되어 죽고 죽이는 난투극을 끊임없이 자행하고 있다. 진보와 보수가 서로 적이 되고, 자유주의와 근본주의가 적이 된다. 그렇게 적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규정하면서 자신이 옳다고 외쳐댄다. 에코의 진단이 옳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에코의 탄식에 동의하면서 적이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하는가? 달리 방법은 없는가? 적 만들기는 어찌 해야 종결되는가? 자신이 적이 되고, 적 만들기의 현장에서 끔찍한 희생을 경험한 볼프는 이 문제에 진착하였다. 어쩌면 좋은가? 그는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볼프는 몰트만을 인용하면서,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폭력의 희생자들과 동일화’하는 동시에, ‘희생자들을 하나님과 동일화’ 하심으로 연대하셨다고 주장한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주적이 되셨을 뿐 아니라, 만인의 적이 되셨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만인을 향하여 용서와 사랑을 선포하심으로 이 매카니즘의 사슬을 끊어 버리셨다.
그렇다. 십자가의 예수가 답이다. 그 분이 제시한 길이 적을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스스로 적이 되셨으나 적대감을 극복하시고 그 적을 사랑하신 예수의 길이다. 그것이 적과의 동침이요, 적 만들기의 극복이다. 이 예수와의 연대가 적을 재상산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자신을 내어주는 동시에 사랑하는 삼위일체의 길이다.
반 세기 전 사르트르는 탄식했다. ‘지옥은 곧 타인이다.’ 적을 만들어 내고 규정하는 타인과의 공존은 지옥 그 자체에 틀림없다. 허나 타인이 곧 천국이 되는 길이 있다. 예수와 연대한 타인, 예수의 십자가와 희생을 체현해 내는 타인들의 공동체는 천국이다. 지금 우리가 가야 할 길이고 추구해야 할 삶이다. 그렇게 할 때 적은 설 자리를 잃고 친구들이 서 있게 될 것이다. 기억하자. 진짜 적은 적으로 규정된 자가 아니라 적으로 규정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그들이 곧 우리의 주적이다. 허나 사랑하고 품어야 할 주적이다. 우리가 들어갈 천국에는 적이 없으므로.
첫댓글 김목사님, 넘 조아요. 근데 제목을 고쳐주세요 공유하게요
ㅋ 오랜만에 써서 감이 살아 있나 모르겠어요 ^^
책을 읽어보지 않고 평하긴 조심스럽지만~^^ 이글만으로도 참 좋습니다 ᆞ읽고 싶은 책에 줄세워 볼래요 .가을이 깊어가며 감도 익어가겠지요 ᆞ저는 홍시를 참좋아해요~^^
최고입니다!!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다시한번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예수와 연대한 타인들의 공동체가 천국이란 말, 큰 공감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와! 일목요연한 글 감사합니다.
책 한 권을 읽은 것 같은! 오늘 오전 아가페교회(김병호 목사님 담임)에서 들은 '십자가 신앙'설교 말씀 요지입니다.(남양주 온누리교회 백상욱 목사님 설교)
이런 좋은 글을 읽도록 배려해 주신 김양현 목사님 감사합니다.
좋은글 읽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정말 좋습니다. 근데 우리(내)가 주적을 품을 수 있을까요?
^^ 역시 공유하니 감동이 더 커지는 군요!
어려울 것 같은 책을 술술 쉽고 재미나게 들려주셨어요.
목사님의 멋진 서평 자주 읽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