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파공(農坡公) 정임규(鄭任圭) 조부의 생애를 기록한다.
생존연대 ; 1880(고종17)~1951 음 2.1(6.25 전쟁 이듬해), 72세 졸, 호적명 ; 정도익(鄭道益), 자(字) ; 기선(基善), 호(號); 농파(農坡), 재사(齋舍) ; 농파정사(農坡精舍), 배위 ; 김해김씨(金海金氏) 김대금(金大今, 1881~1973 음 3.1. 93세 졸)이다.
註 ; 조정자 형수(78세, 정삼영 형님 배우자)의 증언에 의하면, 4남 정종대가 1972년 음 12.11(1973년 양 1.15)에 태어났는데, 정종대가 태어나고 3개월 후 김대금 할머니는 태어난 아이를 보고서 1973년 음 3.1에 별세 했다. 김대금 조모의 제사는 음 2.30(졸한 하루 전이 된다)이다.
부는 정연일(鄭演溢)로 1842(헌종8)~1884(고종21)로 43세로 일찍 돌아가셨고, 모는 밀양박씨(密陽朴氏)다.
형제는 4형제로 큰형님은 정의규(鄭義圭, 1862~1920)로 59세로 졸하였고, 둘째형님은 정상규(鄭常圭, 1868~1927)로 60세에 졸하였다. 셋째형님은 정정규(鄭正圭, 1873~1934)로 62세에 졸하였다.
막내 정임규 대비 정정규와는 7살 차이요, 정상규와는 12살 차이요, 큰형님 정의규와는 18세 차이다.
4형제 중 막내 정임규는 5살 들면서 아버지를 여의고. 밀양박씨 홀어머니와 정의규 큰형님 그늘에서 자랐다.
돌아가신 아버지(정연일)의 산소가 가야면 혈곡리에 있고, 어머니 밀양박씨의 산소가 함안면 파수리에 있는 것으로 보아, 부모 때까지는 가야읍 혈곡리에 살았다.
당시 딸만 4명이던 숙부 정연류(鄭演流, 1848~1909, 62세 졸)에 양자 입적을 20살 이전 미혼에 한 것도 아버지를 일찍 여인 연유로 어머니 밀양박씨와 숙부 정연류가 경제적 공동 부담(혼례 및 분가 비용)으로 상호간 맞아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와 숙부 정연류가 돌아가신 후 셋째 숙부 정연호(鄭演湖)와 정임규 4형제는 가야면 혈곡리 여항산(艅航山:770m)의 서쪽 산줄기가 되는 미산(眉山: 650m, 의상대:義湘臺, 원효암:元曉庵 뒤산) 아래의 골짝 혈곡리에서 군북면 유현리로 이주했다.
큰형 정의규(정병열 양증조부)와 둘째형 정상규(정기영, 정영대 조부)는 유전마을에, 숙부 정연호(유전 정한식의 증조부)와 셋째형 정정규(정무영 조부, 정병열과 정병우의 증조부)와 정임규는 평촌마을에 정착하였다.
정연류의 산소가 평촌 골짝 큰등 산에 있는데, 그곳은 옛날 남양홍씨 산으로 남양홍씨가 한겨울 이장해간 자리에 땅김이 모락모락 나서 그것을 지켜본 정임규 할아버지가 명당이라 여겨 양부이자 숙부인 정연류의 혈곡묘를 이장해 왔다고 한다. 이 사실 하나로 정연류까지는 혈곡에 세거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큰등 산은 남양홍씨 소유에서 정형규(鄭亨圭, 족보명 ; 鄭泰圭) 로 넘어와 그 증손자되는 부산 정운화(족보명 ; 정상운:鄭相云:정영진:鄭永珍의 子) 소유이다.
또, 기록과 구전에 의하면 사촌 여동생(양자로 갔기에 친동생) 정봉아 고모할머니는 초혼으로 신음리 181번지 함안조씨 명문가 조용대와 혼인했으나 사별하여 재가하여 부산 김이꼬 아지매의 아버지를 만난 것으로 호적부에 나와 있다. 김이꼬 아지매 위로는 배가 다른 본댁 소생 오빠가 있는데 정봉아 고모할머니가 전처 소생 어린 아들을 양육했다. 정봉아 위로 세 분의 언니는 김해김씨 소생으로 의령으로 출가한 언니, 은진송씨 소생의 친언니로 부산 윤성환 할머니 되는 언니, 군북 사랑목 언니가 있다. 사랑목 고모할머니(실제 촌수는 종고모할머니가 된다)는 제사 때 자주 왔기에 우리가 잘 안다.
막내 작은 숙부 정연호(1851~1912, 62세 졸)는 조카 정임규 조부보다 29세 위로 임규가 33세 때에 평촌서 졸하여 산소가 평촌 골짜기 돈밭갓(옛날 마른아재 밭 옆)에 있다.
현재 돈밭갓 900여 평은 내가 조형제로 부터 1993년에 찾아 '초계정씨 함안경충종중'에 귀속시켰다. 현재 평촌에서 유전으로 이주하여 증손자에 정한식(족보 ; 鄭出永)이가 있다.
정임규할아버지는 5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에 양자로 들어간 후 숙부의 늦둥이로 태어난 동생되는 정기규(鄭琪圭)는 2~3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 숙부에게 어린 정기규가 태어났지만 양자를 파기하지 않는 게(원위치 하지 않는 게) 옛날의 법도였다. 족보와 일제시대 호적부에는 그대로 되어 있다. 옛날에는 홍역, 천연두 등 전염병으로 어릴 때 죽는 경우가 많았고, 정기규가 4살 때 생부 정연류가 졸(卒)하였기에 양자를 파기하지 못한 이유도 있다.
이심전심으로 임규가 동생 정기규(댁호:기산 종조부)를 돌본 것은 그런 태어난 비슷한 가정환경의 배경이 뒷받침 된 것이다. 4형제 중에서 정임규 할아버지가 당시 연배로는 72세로 가장 장수하였다. 정기규의 손자로는 정두영, 정낙곤 등이다. 현재, 정연류와 두 배위 김해김씨, 은진송씨는 '초계정씨 유은(정현락) 후손 종중'에서 벌초, 묘사를 주관하고 있다.
정임규(정현락의 父) 조부는기골과 용력도 좋지만 성격도 온화하여 바로 윗 형님인 정정규가 군북장에서 거나하게 취하여 늦게 올적에는 꼭 등불을 들고서 3km가 넘는 개고개까지 마중을 나갔다고 한다. 형제간에 우애도 지극한 아우였다.
이 사실을 유은(柳隱) 정현락(鄭鉉洛) 아버지로 부터 수십번 들은 얘기다. 정정규는 민첩하고 여력이 절륜하여 군북 일대에는 알아주는 장사로 장날에는 놀다가 늦게 돌아와 정임규 동생이 장날마다 마중을 나갔다고 한다. 정정규는 김해김씨와의 아들 정현용(鄭鉉用, 택호 ; 지실아재)을 두고 사별하여 군북 명관리 인천이씨(택호 ; 평관할매)를 새로 들였는데 군북장날에 늦게 돌아오는 이유도 이들 새 처가 사람들과 어울린 것으로 보여진다. 인천이씨 소생은 정현순(鄭鉉淳: 호적부에는 정현철)이 있다. 정무영(鄭武永)의 아버지가 된다. 정현용의 직계 손자는 정병열(鄭秉烈)과 정병우(鄭秉宇)가 된다.
정임규, 김해김씨 김대금 조부모의 자녀는 5남매로 정순이(鄭順伊), 정현락(정현락:鄭鉉洛:정광식:鄭光植), 정현중(鄭鉉中: 정정식:鄭正植), 정순덕(鄭順德), 정봉순(鄭鳳順)을 두었다. 정현락 아버지 위로 2명의 아들을 3~6살 때 잃었다고 한다.
정순이는 함안 법수면 대송리 달성서씨 서두이(徐斗伊)로 출가하여 서수부, 서징수, 서수원(생존) 외 여형제 3명(2명 생존)이 있다. 정순덕은 의령 정곡면 중교리 경주김씨 김영곤(金永坤)에 출가하여 김효진, 김광원, 김상진 외 여형제 2명(5남매 모두 생존)을 두었다. 정봉순은 함안 가야읍 가야리 광주안씨 안두찬(安斗贊)에 출가하여 안인길(생존)을 남기고 젊은 시절 졸하였다. 안인길은 장남으로 4명의 이복동생을 둔 계모를 함께 모시고 살았던 이름난 효자이다. 서두이는 8.15 해방 후 일본에서 귀환하여 처가 마을인 유현 평촌의 현재 이을순(정승표 母) 집터에서 살다 법수면 윤외리 석무를 거쳐서 마산 석전동으로 이주하였다.
정현락(鄭鉉洛), 함안조씨 조복희(趙福熙)에는 8남매로 정영조(鄭永祚), 정영만(鄭永萬), 정을남(鄭乙南), 정삼영(鄭三永), 정갑영(鄭甲永), 정창영(鄭昌영), 정봉영(鄭奉永), 정태영(鄭泰永)을 두었다.
정현중(鄭鉉中), 순흥안씨 안봉락(安鳳樂)에는 6남매로 정영남(鄭永南), 정점영(鄭点永), 정진영(鄭晉永), 정덕영(鄭德永), 정상영(鄭祥永), 정수연(鄭秀連)을 두었다.
정현락의 1차 도일은 먼저 일본에 진출한 3종형님(8촌)되는 가야 혈곡 정현대(鄭鉉大, 호적명 ; 鄭和守, 1899년 생으로 13살 위의 형이다)의 고향 방문 때 주선으로 함께 따라 갔다. 시기는 장남 정영조와 차남 정영만 사이 나이 터울이 4살인데 그 시기로 1930~1933년으로 3년간이다. 2차 도일은 1937~1939년 사이로 2년간이다. 삼남 정삼영까지 태어나 4명의 자녀를 두고 다시 도일한 것이다. 1940. 음 8.20에 4남 정갑영이 태어났다. 정갑영(鄭甲永)의 이름은 농파공(農坡) 정임규의 회갑년(回甲年)에 났기에 이름도 '甲永'이 된 것이라 한다.
1940년 61세에 농파 정임규의 회갑연을 하면서 한우 한 마리와 돼지 두 마리를 잡아 함안, 의령 유림을 초청하였는데 그 유고집으로 '농파원운(農坡原韻)'이 '대동문헌보감(大東文獻寶鑑) 상권' 함안군편 168~180페이지에 원문과 한글 번역본이 실려있다.
2번의 도일과 농사일을 열심히 하여 유현의 부자로 살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시 정현락의 나이 29살로 가야 혈곡리 정원규(鄭原圭, 7촌숙이 된다) 권유와 주선이 있어 회갑연을 함안, 의령의 유림을 초청 크게 잔치를 한 것이다. 정원규(택호 별호 ; 딧끌 할배)가 초청장을 전파하여 유림를 초청한 것이다. 정원규의 후손에는 혈곡 인실마을 정재영 등이 있다.
1919년 군북장날인 3.20 독립만세운동 사건이 있었다. 유현 사람도 모두 장에 갔기에 그 중에 정임규(당시 40세)도 그 속에 있었다. 당시 장날이라 군중심리도 발동하여 5천여 명의 가장 격렬한 항일 시위였기에 희생도 컷다. 21명이 현장에서 총에 맞아 순국하고, 부상자가 18명(다른 사료 ; 사상자 37명), 체포되어 옥고를 치룬 의사가 16명(다른 사료 ; 32명) 등으로 무려 55명(다른 사료 ; 69명)이나 된다. 군북 3.20 독립만세운동은 삼남(영남, 호남, 충청)지역에서 가장 격렬했기에 사상자도 가장 많아 전국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고 한다. 군북 중암리에 군북 3.1운동탑이 세워져 있다. 묘비에도 군북 3.20 독립만세운동 참가 내용이 들어있다.
※농파 정임규의 가족사(家族史)로 사료 발굴되는 대로 추가 보충할 예정이다.
1940(광복 5년 전)년 촬영한 회갑 사진을 첨부한다.
2015.1.7 자, 민초나라 밴드에 올린 것을 카페에 게재한다.
첫댓글 2017.9.12 자,
초계정씨 유은후손종중(草溪鄭氏 柳隱後孫宗中) 단체카톡(그룹채칭)의 군북 유현 정태영 弟의 子, 서울 정범평(鄭汎平)의 댓글입니다.
다음~
''큰아버지 잘 봤습니다~!^^''
가족사의 뿌리를 대충이라도 알겠금 정리해 본 것이다.
회사의 일로 바쁠텐데 서울의 정범평이가 읽고서 댓글까지 달아주니 고맙다는 말을 전하네~!
회사일에 충실하고 항상 건강하길 바라네.
좋은 인연의 배필을 만나 장가도 가고~!
유현리 평촌 선산 벌초일 확정
2017.9.18(월) 오전 6시부터 작업 개시(장유 출발 ; 5시 30분)
참가자(베어 넘겨진 풀 정리) ; 서울 정창영 형님, 정봉영, 정태영 정병권(이상 4인 확정)
예상 참가자 ; 정승표(일정이 비면~)
예초기 기술자 ; 장유 마영한씨(현대 로템 조경직 출신 은퇴) ; 20만원 계약, 전체 풀베기 책임지는 조건으로~
큰등의 증조 2기, 영만형님 산소까지 모두 포함할 예정임(영만형님 산소는 확인하니, 승표가 미리 내려가서 완료)
평일이라 직장인은 불참해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