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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의 묘미
브금 개필수 연하남 재질 도랐음
글고 미리 경고..
열라 길다
"뭘 쳐다봐."
"누나 봐요."
"어쭈, 재롱부리지 또."
"누나한테만 그러는 거지, 난."
“울 동혁이 누나가 그렇게 좋아용~?”
“이제 알았엉?”
동혁이 여주와 눈이 마주치자 능청스럽게 윙크를 날린다. 여주가 동혁의 윙크에 잠이 달아나 화면이 꺼진 노트북을 다시 켰다. 요거, 요거 아주 귀여워 가지고. 우리 동혁이 주머니에 넣고 다닐까? 누나 진짜 그렇게 함 해보면 안 돼? 응?
교수님의 나른한 강의에 눈이 뒤집어지기 시작하는 여주를 눈치챈 동혁이 손에 마이쭈를 쥐어준다. 또 재수강하지 말고 얼른 필기해요. 기말 여기서 나온다고 하셨잖아요. 이번엔 진-짜 누나 안 챙겨줄 거야.
말은 그렇게 해도 동혁은 여주은 꼭 중요한 요점만 빼먹고 필기하는 여주 몫까지 필기 중이었다. 내가 어떻게 김여주 신경을 안 써.
언제부터 시작이었을까. 이동혁의 김여주를 향한 맹목적인 사랑이. 거슬러 올라가자면, 그래. 아마 신입생 환영회부터였을거다. 지치지 않는 구애의 시작이었다.
이렇게 길이 막히면 곤란한데. 여주가 운전대에 올리고 있던 두 손을 떼어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얼마 만에 가는 학교인지 모르겠다.
무작정 휴학을 때렸으니 거의 1년 만에 가는 셈이다. 휴학을 할 동안 학교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몸이 기억하는 건지 용케 가는 길을 잊어버리지 않고 잘 운전 중이었다.
꼭 필참 하라는 정재현의 독촉을 아침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걔도 참. 애기들끼리 노는 자리에 복학생 불러다가 뭐 어쩌려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집에서 빈둥거리다가 늦어서 결국 차를 끌고 왔다. 차가 있으니 술은 거절해야 할 것 같다. 문제는 그게 아니라 차가 존나 막힌다는 거다. 이런 날마저 늦는다고 잔소리할 놈들이 벌써부터 무서워졌다.
겨우 겨우 차를 몰아 알려준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주차하기도 뭐 같은 데를 약속 장소로 잡고 그러냐. 차 문을 쾅 닫으며 밖으로 빠져나왔다.
아직 쌀쌀한 공기에 손을 싹싹 비비면서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가게 앞에 누군가 우리 과 과잠을 입고 쪼그려 앉아있었다. 내가 아는 얼굴이 아닌 걸 보니 신입생인가 보네.
"여기서 뭐해요?"
"헉...!"
"놀랐어요? 미안해요. 경영과 맞죠?"
"네, 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남자가 소스라치게 놀란다. 무지하게 큰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음? 이거 완전 초코 푸들이잖아. 눈도 동글, 코도 동글, 입술도 동글. 가뜩이나 동그란 두 눈을 더 크게 뜨며 눈을 끔벅인다. 어느 정도 술이 올랐는지 느릿하게 낙타처럼 눈꺼풀을 움직이는 게 솔직히 조금 귀여웠다.
괜히 미안하네. 놀라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는데. 싱긋 웃으며 과잠을 가리켰다. 내가 거기 화석인데 지나칠 수가 있어야죠. 덩달아 옆에 쪼그려 앉았다.
이 과잠은 누구 거예요? 어떤 선배님이 추우니까 입고 나가라고 하셨어요. 화석이 부담스러웠는지 팔을 파닥거린다. 나 조금 상처인걸. 복학생이 복학했지, 출소했냐. 괜히 코를 한번 훌쩍였다.
"나 너무 넌씨눈이었어요? 들어갈까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같이 이렇게 앉아있어도 될지 몰라서..."
어찌나 기합이 바짝 들어갔는지 그 짧은 말 한마디를 하면서도 손을 마구 휘젓기도 하고 폭풍 끄덕임을 동반한다.
나와 내 동기들의 새내기 시절을 보는 것 같아 웃음이 터졌다. 기분 나쁠까 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웃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이미 한번 터진 웃음을 참기란 쉽지 않았다. 이것마저도 신기한지 궁금증 서린 얼굴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왜 웃냐고요?"
"(끄덕끄덕)"
"귀여워서요. 누구랑 다르게 너무 귀엽다."
"...!"
“이름이 뭐예요?”
“이동혁이요...”
그 누구가 정재현이라고는 말 안 했다. 내 말에 입을 틀어막고 헙 숨을 들이마신다. 그 모습마저 새삼 진짜 고삐리구나 싶어 웃음이 자꾸 새어 나왔다.
나는 김여주예요. 복학생인데 언뜻 보면 새내기 같지 않아요? 뻔뻔하게 묻자 활짝 웃으면서 네! 대답한다. 재롱도 잘 떨고 이쁨만 받겠어 아주.
그러다가 점점 다리가 저려오는 게 느껴져 일어서니 나를 따라 벌떡 일어난다. 이미 나 없는 동안 거하게 달린 것 같은데 뭐라도 사가야지 싶었다.
"나 아이스크림 사러 갈 건데, 같이 갈래요?"
"저도 같이 가도 돼요?"
"그럼요."
"그러면 저도 따라갈래요...”
동혁이 지속된 술자리에 지치긴 지쳤는지 여주의 따라 걸었다. 과하게 기뻐하는 것 같다면 내 기분 탓인가.
먼저 앞장서자 뒤를 쫄래쫄래 따라온다. 뭐, 약간 강아지 산책 느낌도 나고 나쁘지 않네. 워낙 사람을 좋아하는 탓에 호구조사가 몸에 배었는데 부담스러워하려나, 생각했을 땐 이미 입이 움직인 상태였다.
"나 많이 늙어보여요?”
"아니요? 절대 아닌데...!”
"근데 왜 그렇게 깍듯하게 해요.”
“어, 죄송해요...”
"그냥 편하게 누나라고 불러도 돼요.”
누나 소리에 눈이 커다래진다. 그렇게 파격적인 제안인가? 개인적으로 난 선배 소리도 소름 돋아하는 인간인데 ‘님’ 자까지 붙여가며 꼬박꼬박 존대하니 몸이 베베 꼬이는 기분이었다.
동혁이 놀랐는지, 감히 그래도 될까요? 제가? 같은 말만 반복해댄다.
아이고, 눈에 다 보인다 보여. 이 꼰대 파티에서 누나라고 불렀다간 제 대학생활이 꼬일진 않을지 걱정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싫으면 말고요~"
"안 싫어요. 그렇게 할게요, 누나.”
나 진짜 개저씨 다 된 듯. 누나 소리 들었다고 뿌듯하고 그러네. 쟤한텐 나도 화석인 건 마찬가지지만.
“뭐 먹을래요?”
“저는... 이거요.”
미간까지 찌푸리면서 열심히 고민하길래,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걸 먹으려고 고민하나 슬쩍 훔쳐봤더니 요맘때를 집어 든다. 딸기맛. 귀여워라. 꼭 자기 같은 것만 먹네. 정말 그걸로 되겠냐고 묻자 고개를 힘차게 끄덕거린다.
다른 애들 것까지 몇 개 더 집어 들고 계산대에 올려놨다. 카드를 꺼내 내미는데 동혁이 내 손을 막아 제 카드를 들이민다. 엥, 나 애기한테 얻어먹은 취미는 없는데.
“카드 넣어요. 이럴 땐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먹으면 돼요. 아, 헐, 나 방금 너무 꼰대 같았다.”
“완전 절대 아닌데! 누나가 어디가 꼰대예요.”
“그러면 다행이구요. 근데 진짜 괜찮으니까 돈 쓰지 마요.”
우리의 실랑이에 알바가 드르렁 한 얼굴로 쳐다본다. 알바생의 삐딱한 시선을 느꼈는지 개저씨같은 가득한 조언에도 재빠르게 본인 카드로 계산을 마친 동혁이 봉투를 손에 쥔다.
얻어먹으니까 마음 불편한데. 내 중얼거림에 히히 웃어버린다. 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귀엽냐. 나 새내기 땐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정신 못 차리고 수작 걸어대는 한남들 조지기 바빴지. 추억 회상에 빠져 있는데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린다.
어째 조용하다 했어. 귀찮아서 무시할까 했는데 귀에서 피가 나도록 징징댈 게 뻔해 그냥 받았다.
'김여주, 너 어디야!'
“야. 귀 떨어지겠다. 살살 해라. 엉?”
'온다고 한 게 언젠데 아직도 안 오냐고.'
“동혁이랑 아이스크림 좀 사가느라 늦었어.”
'동혁이? 네가 동혁이를 어떻게 알아?'
“그런 게 있어. 알면 다친다.”
서운함 가득한 목소리가 고막을 강타한다. 어우, 얘는 나이를 먹어도 징징대는 게 줄기는커녕 어째 다 심해진 것 같아. 않아. 별안간 동혁의 언급에 어떻게 알았냐며 나를 달달 볶는다. 잔소리 대마왕. 거의 다 왔다고 가서 얘기해 준다며 내 멋대로 통화를 끝냈다.
어우, 귀떼기야. 아이스크림 고마워요. 애기한테 얻어먹어도 되나 모르겠네. 중얼거리자 눈을 접어가며 웃는다.
“그럼 다음에 밥 사주세요.”
“밥? 그럴까요?”
“네. 누나랑 밥 먹고 싶어요.”
“그래요. 밥 먹어요.”
“앗, 싸아...! 누나 그러면 저 번호 좀 주세요...”
“핸드폰 줘요.”
밥 무지하게 좋아하나 보다. 결의에 찬 눈빛으로 손을 쥐고 말한다. 번호를 찍어주자 눈빛을 반짝거리면서 손가락을 움직인다. 귀여워. 나도 모르게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놀랐는지 다시 파닥거린다.
어, 미안해요. 습관이 돼서 그랬나 봐요. 이런 내 말에 괜찮다며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이런 동생 있으면 좋을 텐데.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다.
이런 데 싫죠. 집에 가고 싶고, 술도 마시기 싫은데 괜히 붙잡고 있고. 나는 이런 자리 되게 싫어했는데. 그때 주제도 모르고 애들한테 들이대는 선배들이 너무 많았거든요. 다시 생각해도 열 받아. 급 떠오르는 기억에 열을 올리며 씩씩거렸다. 아마 동혁이도 마찬가지겠지 뭐.
“안 싫어요...”
“응?”
“좋은 것 같아요.”
여주는 문을 엶과 동시에 밀려드는 시끄러운 말소리 때문에 잘 듣지 못했지만 동혁은 암만 상관없었다. 아까까진 너무 싫고 그랬는데요. 이젠 좋아요. 누나가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 동혁은 차마 뱉지도 못할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
"누나 아침 안 먹었을 것 같아서 딸기 스무디."
"어어, 동혁이 땡큐. 역시 내 새낑.”
"헤헤.”
여주가 동혁의 과제를 봐주기 위해 아침부터 과방으로 향했다. 먼저 와있던 동혁은 누나는 언제 오나 다리를 달달 떨다가 눈에 들어오는 익숙한 인영에 단숨에 튀어올라 손을 흔든다.
강아지처럼 보이지 않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여주를 반긴다. 아싸, 오늘 누나랑 커플룩이다. 별 것 아닌 사소한 것에도 의미부여를 하는 게 습관으로 자리 잡았다.
역시 동혁이. 고마워. 여주가 동혁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손을 뻗자 자동으로 무릎을 굽혀 여주와 눈높이를 맞춘다.
뭐가 그렇게 어려워서 누나를 불렀을까? 여주가 필통을 꺼내면서 묻자 동혁이 짱구를 굴리기 시작했다. 무작정 모르겠다고 하긴 했으나 사실 이미 제출한 지 꽤 된 과제였다.
누나 김 교수님 수업 들었다고 재현이 형이 그러던데, 저 좀 도와주세요. 감이 안 잡혀요. 그래, 누나랑 같이 하자. 한번 봐 볼까.
아, 이건 저번에 설명하셨던 그 부분이고 이 부분은 공식 두 개를 섞어 써야 하는 거야. 동혁은 설명 따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같은 공간에 둘이 붙어 앉아 먹는 걸로 이미 목적 달성이었다. 누나를 자주 보려면 공부를 덜 못해도 될 텐데 이 잘난 몸뚱이는 두뇌까지 명석하니 원.
“누나, 어제 술 많이 마셨어요?”
“야, 술 얘기하지 마. 토 나올라 그래.”
“나 부르지...”
“으이구. 너를 어떻게 불러 미안해서."
"누나가 부르면 바로 달려가지."
아마 여주는 모를 사실. 동혁은 행여 여주에게 연락이라도 올까 전전긍긍하며 눈알이 빠져라 카톡창만 들여다보는데, 정작 오는 연락이라곤 왜 안 나오냐고 닦달하는 동기들 연락.
작은 알람에도 놀라 핸드폰을 뒤집어보면 술 취한 나재민 셀카만 한가득이었다. 미친 새끼. 동혁을 핸드폰을 던지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우리 동혁이 누나만 따라다니다간 연애도 못 할걸. 여주의 말에 동혁이 손에서 빙빙 돌려대던 샤프를 멈춘다. 누구 때문에 상사병 앓는지도 모르고, 김여주 바보. 여주와 동혁의 도란도란한 말소리로 채워지던 과 방의 고요하던 분위기가 단숨에 흐트러진다.
"뭐야. 이동혁 먼저 간다더니? 이러려고?"
"웬일로 과방에 눌어붙어 앉아있냐?”
“엇, 누나. 안녕하세요.”
재민과 인준이 요란하게 문을 열며 들어온다. 동혁을 발견하고 걸어오다가 옆에 앉아 있는 여주를 보고 눈빛 교환을 한다. 이동혁. 냄새가 난다, 냄새가 나. 무슨 냄새? 동혁쓰 애타는 냄새. 재민과 인준이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동혁의 주위를 둘러싼다.
동혁은 들이닥친 제 친구들을 보고 당황스러웠다. 이 새끼들이 여기 왜 왔지. 차마 욕은 하지 못 하고 이를 꽉 깨물어 소리 없이 웃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어, 누나 동혁이 과제 봐주고 계셨어요? 응. 동혁이가 워낙 열심히 하잖아. 뇌물도 줬고. 그래서 봐주고 있었지. 여주의 대답에 건수를 잡았다는 듯 저들끼리 손뼉을 짝짝 맞대며 발을 동동 구른다.
"이상하다? 이동혁 이 과제 첫 빠따로 제출했는데.”
“야 너두? 나도 봤음.”
“이상하네. 어떤 걸 몰라서 누나한테 물어봤을까?”
동혁의 속이 타들어갔다. 이 망할 놈의 친구란 자식들이 찾아와서 깽판을 쳤다. 가뜩이나 진전 없는 사이에 속이 타들어가는데, 눈치는 개나 줘버렸는지 지들끼리 지지고 볶고 장구를 치고 난리가 났다.
뒤늦데 들어와 말없이 난리 통 속에서 관전하던 제노가 표정이 썩은 동혁을 보고 그제야 상황 파악을 한다. 얘들아, 우리 이럴 때가 아닌 것 같아. 이동혁 표정 좀 봐, 사람 한 명 죽일 기세야. 가장 소란스러운 재민의 가방을 뒤로 잡아당겼다.
아, 왜! 눈이 있으면 봐. 네 안부 책임 못 진다. 동혁의 싸해진 표정을 캐치한 재민이 떨떠름하게 웃으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난다.
"... 가라.”
"어, 음. 이거 아니야...?"
"가라고."
"... 쏘리."
뒷걸음치던 재민이 인준과 제노를 낚아채 그대로 달아난다. 과방을 뒤집어 버리고 줄행랑친 재민의 해결은 오로지 동혁의 몫이었다. 동혁이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린 깊은 한숨을 내쉰다.
여주는 이 상황이 너무 민망했다. 동혁이 자신을 꽤 각별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주에겐 후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생각할 이유도 없었다.
분명 그랬는데. 어쩐지 여주는 죄책감이 들었다. 꼭 내가 눈치 없는 사람이 된 것 같네. 괜히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 같아 여주가 슬쩍 동혁을 쳐다보니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친다.
"... 누나, 그, 이게..."
"괜찮아 괜찮아. 더 잘하고 싶어서 누나한테 물어본 거지? 다 알아~"
"네? 아, 네..."
반강제로 튀어나온 대답이었다. 동혁이 아니라고 대답 하면 여주가 부담스러워 할까 봐 눈치를 보며 대충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주가 동혁의 등을 토닥이며 말을 덧붙인다. 그래 그래, 우리 이거 마저 마무리하고 밥 먹자. 동혁이 여주를 따라 노트북으로 쳐다보지만 이미 멘탈이 갈려 글자가 눈에 들어올리가 없었다.
연하의 묘미
왜 몰랐을까. 생각해보면 동혁의 애정은 여주에게만 한정된 것이 분명했다. 난 그저 모른 척했을 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싫지 않았다.
예쁘고, 말 잘 듣고, 싹싹한 동혁은 여주뿐만 아니라 선후배를 아우러 어딜 가나 그 자리의 분위기 메이커였다. 어색하기 짝이 없던 자리도 동혁이 끼면 공기부터 달라져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동혁이는 진짜 어딜 가든 예쁨 받을 거야.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동의하는 의견이었다. 다만 동혁은 딱 그뿐이었다. 친화력 좋고 모두와 잘 어울리되 다정은 아무에게나 허락하지 않았다. 제 바운더리 안의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애정이었다.
자신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 것치곤 동혁은 홍길동마냥 여기저기 누비고 다니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 시간에 누나랑 연락을 한번 더 하고 말지.
여주도 그런 동혁이 맘에 드는 건 마찬가지였고, 친동생 같아 부쩍 더 챙긴 것도 없지 않아 있다. 그렇다고 동혁을 남자로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말 잘 듣는 귀여운 후배 정도. 문제는 동혁이 자꾸만 그 틈을 타 침투해오려는 거였다.
'야, 이렇게 하는 거 맞아? 악! 뭐야! 나 죽었어!'
'스탑, 동작 그만. 이 누나 안 되겠네 진짜. 나 하는 거 봐 봐.'
여주의 오버워치 타령에 pc방을 찾았다. 드디어 때가 온 거다. 이동혁이 누구냐. 초딩때부터 크아로 단련해온 게임의 신이었다. 동혁의 신문물에 신난 여주 대신 컴퓨터 전원을 켰다.
게임에 영 소질이 없던 여주를 위해 AI 봇과 함께하는 게임 모드를 설정했다.
제 친구였다면 이미 욕 한 바가지를 시원하게 들이부었을 테지만 좀처럼 보기 힘든 허둥지둥 대는 여주의 모습을 보니 도가 지나치게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게임도 집어치우고 넋 놓고 구경할 뻔했다.
멋모르고 여기저기에서 얻어맞기 바쁜 여주는 눈 깜빡하니 뒤져있는 제 캐릭터를 보며 울부짖었다. 아씨, 이동혁. 알려준다면서. 얼렁 뭐라도 좀 해 봐.
여주의 재촉에 동혁이 손을 풀고 제 원픽을 꺼내 하나둘 헤드샷으로 싹쓸이하자 여주가 감탄했다. 동혁이 능청스럽게 여주의 팔을 잡아당기며 은근슬쩍 제 속내를 드러냈다.
'허얼. 대-애-박. 야, 너 장난 아니다!'
'봤지. 개쩔지, 멋있지. 아, 우리 누난 나 없이 어떡할래 진짜.'
예를 들자면 게임이었을 뿐이지, 이뿐만 아니라 여주보다 어린 동혁은 제법 어른스럽게 행동했다. 칠칠치 못한 여주를 대신해 출석을 챙긴다던가, 아침밥을 거르고 오는 여주를 위해 샌드위치를 사 온다던가, 술에 약한 여주를 알고 흑기사를 자처한다던가.
물론 여주가 부담스러워하지 않을 선에서 끝내야 하는 사심이었다.
'누나. 언제부터 이런 거야, 응? 나한테 말을 하지, 왜 혼자 이러고 있어요... 진짜.'
'동혁아, 나 골 울려...'
'어어, 미안해. 너무 크게 말했지 내가. 이것만 챙기고 가자.'
다 죽어가던 여주가 핸드폰으로 동혁에게 연락을 남겼다.
동혁아 진짜 미안한데 재현이도 없고 애들이 다 집 간 것 같아서... 나 몸이 너무 안 좋은데 데리러 와줄 수 있어?
여주의 연락에 동혁은 망설이지 않고 미친 사람처럼 도서관으로 뛰었다.
잔뜩 흐트러진 머리에도 굴하지 않고 구석구석 훑던 동혁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여주를 보고 야마가 돌기 직전이었다.
제 부축에도 힘 한번 쓰지 못하고 손을 벌벌 떨며 엎어지는 여주를 보니 동혁의 눈 앞에 새하얘졌다. 시발. 응급실, 응급실, 아니야 택시 먼저 부르자.
택시를 부르고 여주를 업은 동혁이 가방을 챙겨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날따라 유난히도 잡히지 않는 택시가 원망스러웠다. 도대체 그 많던 택시들이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그 흔한 콜택시도 연결이 어려웠다.
불안한 마음에 울컥하던 동혁이 결국 택시를 잡았고 동혁이 탑승하자마자 주소를 불렀다. 도시대 병원으로 가주세요. 제발 빨리 가주세요, 부탁드릴게요.
병원으로 가는 길 내내 동혁은 힘 없이 제 어깨에 기대어 있는 여주의 손을 부여잡고 빌었다. 제발 누나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 두 눈을 감고 기도하던 동혁은 도착했다는 말에 만 원권 몇 장을 드리고 여주를 다시 업었다.
어떻게 접수를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병신처럼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하고 잔뜩 흥분한 저를 도와준 직원의 도움을 받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급성 위경련이란다. 의사의 말에 네, 네, 감사합니다. 하며 인사한 동혁이 여주의 옆에 앉아 한숨을 푹 쉬었다.
뭐가 얼마나 어떻게 안 좋으면 의사가 몸 좀 챙기라고 하냐고. 동혁이 마른세수를 했다. 김여 주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듯했다.
'누나 진짜 제발... 나까지 쓰러지는 줄 알았어.'
'야아, 나도 내가 이럴 줄 알았겠냐고... 놀랐어?'
'그걸 말이라고... 아프면 나 부르랬잖아요.'
'우리 동혁이 누나 걱정 많이 했구나?'
'웃음이 나와요 지금?'
여주를 알게 된 후로 병원만 몇 번째 들락날락거리는 건지 모르겠다. 심장이 발 끝까지 떨어졌다가 겨우 구사일생한 동혁이 고개를 숙여 침대에 얼굴을 파묻었다.
제발. 아프면 혼자 앓지 마. 응? 나 불러, 나. 멀쩡한 사람 두고 왜 혼자 아프냐고. 동혁의 부탁에 여주가 미안해하며 동혁을 토닥였다. 알겠어, 고마워.
기나긴 생각을 끝낸 여주는 이 상황이 조금 난감했다. 설마, 아니겠지. 아직 애가 어려서 착각하는 게 아닐까. 뭐가 좋다고 날 따라다니겠어. 예쁜 애들 널리고 널렸는데. 이런저런 추측에 머리가 지끈거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동혁이 다리를 달달 떨어대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안 봐도 김여주 때문이었다. 누가 봐도 퍽 불안정한 신경이 곤두선 행동이었다. 얌마, 다리 작작 떨어. 복 나가. 재민의 잔소리에도 굴하지 않고 더욱 박차를 가한다.
얘 왜 이러냐, 진짜? 인상을 팍 쓴 재민이 묻는다. 냅둬라. 누나가 자기 피하는 것 같다고 하루 종일 저러는 거임. 인준이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동혁 대신 대답한다. 재민이 알만 하다는 듯 혀를 찬다.
"이동혁 네가 누나를 너-어무 부담스럽게 한 거지. 그러게 내가 좀 숨기랬지."
"벌써 잊었냐. 시인 이동혁 왈, 사랑은 숨길 수 없는 것. 크으."
재민과 인준의 깐족거림에도 약이 오르긴커녕 속이 새까맣게 타버려 이 허심탄회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여주 또한 곤란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 후로 동혁의 얼굴만 보면 자꾸 심장이 벌렁거려 제대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새내기를 꼬셔낸 양심 재기한 복학생이 된 것 같아 무척 괴로웠다. 여주는 동혁과 제 사이의 거리를 벌려두는 게 맞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 마음가짐으로 동혁을 피해 다닌 지 일주일 하고도 이틀째, 동혁은 대가리에 피가 멎는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몸소 체험 중이었다. 보다 못한 재민이 다 먹은 과자 쓰레기를 집어던지면서 말했다.
야. 괜히 보는 사람까지 불안하게 하지 말고 그냥 얘기를 하자고 해. 막말로 누나도 언제까지 너 피할 순 없는 거 아냐. 재민의 말에 골똘히 생각하던 동혁이 벌떡 일어나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오후 수업이니 지금쯤이면 학교 근처에 도착했어야 했다.
'누나 어디예요? 나랑 얘기 좀 해.'
'갑자기? 나 곧 수업 들어가야 돼.'
'시간 많이 안 뺐을게요. 잠깐이면 돼요.'
'알았어. 그럼 기념관 앞에서 보자.'
건물을 벗어난 동혁이 기념관을 향해 뛰었다. 도착한 동혁이 구석에 있는 벤치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오긴 왔는데 막상 얼굴 볼 생각을 하니 손에 땀이 흥건했다. 축축해진 손바닥을 연신 바지에 쓱 닦아내는데 심장이 난도질을 당한 것처럼 쿵쾅거렸다.
힘이 쭉 빠져 머리칼을 마구 헤집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동혁은 서서히 고개를 들어 확인했다. 여느 때와 같이 두 손에 짐을 가득 든 채로 걸어오는 여주가 보였다.
벤치로 향하던 여주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란 얼굴을 했다. 그 짧은 순간에도 심장이 저릿했다.
"언제 왔어. 많이 기다렸어?"
"아니요. 저도 방금 왔어요."
어어 그래... 여주가 동혁과 좀 떨어져 살포시 앉았다. 모래를 끼얹은듯한 삭막한 분위기에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동혁은 머릿속으로 생각해둔 말들이 뒤엉켜 어디서부터 어떻게 얘기를 풀어나가야 할지 몰라 애꿎은 입술만 괴롭혔다. 고개를 돌려 여주를 보니 숨이 막히는 건 마찬가지인지 땅만 보며 발장난을 치고 있었다.
"누나 왜 나 피해요...?"
"어, 어? 내가? 나 안 피했는데?"
"거짓말... 누나 원래 안 그랬잖아요. 연락도 다 씹고... 왜 나만 보면 도망가요?"
동혁의 물음에 당황한 여주가 눈도 맞추지 못하고 변명하기 바빴다. 횡설수설하던 여주를 보던 동혁이 다시 물었다.
"내가 누나 좋아해서 그래...? 그게 부담스러워서 나 피하는 거예요?"
"동혁아 아니야. 누나 너 피한 거 아니야."
"그럼 왜 그래... 누나가 싫다고 하면 안 좋아할게요. 저 피하지 마요."
이렇게 감정적으로 대화할 작정은 아니었는데 너무 오랜만에 마주하는 얼굴이라서 그런지, 제 감정이 그 정도로 깊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가슴 한편에서 무언가 자꾸 울컥울컥 올라왔다. 동혁의 넋두리를 가만히 듣던 여주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동혁아. 내가 너한테 좋은 누나라서 네가 착각하는 거 아닐까... 누나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여주의 말에 헛웃음이 터졌다. 착각. 내가 착각을 한다고. 아무래도 여주는 아직도 저를 고삐리라고 보는 것 같았다.
착각은 누가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제 마음을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여주에게 고백 한번 못할지언정 제게 부담 가질 바엔 그대로 뒤지는 게 낫다고 줄곧 생각해왔다. 그렇다고 제 마음을 부정당한 지금 아무렇지 않냐. 그렇다고 하면 솔직히 거짓이었다. 고백도 전에 거절당한 건 예상에 없던 시나리오라 뒤통수를 때려 맞은 듯했다.
여기서 울어버리면 진짜 찌질할 것 같은데, 울면 안된다는 거 아는데. 생각은 하고 있지만 좀처럼 감정 컨트롤이 되지 않아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애써 참으려고 울음을 삼키는데 어깨가 들썩거리고 숨이 먹혀들어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가만히 땅바닥만 쳐다보고 있던 여주가 놀라 고개를 들자 동혁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씩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누나, 저도 알 건 알아요."
"......"
"그 정도 사리분별은 해요... 나 누나 생각만큼 애새끼 아니에요. 내가 얼마나, 얼마나..."
모르잖아. 모르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야. 알면 그렇게 말 못하지. 동혁은 자신 조차 감당 못할 사랑의 무게가 버거웠다.
“동혁아.”
"그냥 싫으면 싫다고 해도 알아 들으니까... 그만해요. 누나 진짜, 진짜... 나쁘다...”
일이 나고야 말았다. 기어코 김여주가 이동혁을 울렸다.
"저 누나 좋아한다고 한 거, 한 번도 가볍게 말한 적 없어요. 끅, 그냥 좋아서 좋아한다고 한 거지, 무시해달라고 한 말 아니에요. 왜... 왜 사람 마음 갖고 장난쳐요...?”
동혁은 말을 하면서도 서러움이 북받쳐올라 중간중간 목이 메어서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었다. 이동혁 등신 새끼. 왜 울어. 생각하면서도 눈물은 멈출 줄 모르고 끝없이 동혁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쩔 줄 몰라하던 여주가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주려 하자 동혁이 여주의 손을 탁 쳐낸다.
동혁은 제가 쳐내고도 깜짝 놀랐다. 여주의 손을 거둬냈다. 누가? 이동혁이. 감정 담은 손짓은 아니었고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덩달아 놀란 여주가 손을 내리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린다.
"미안. 닦아주려던 거였는데, 미안해..."
"... 아니에요. 미안해요. 누나 힘들게 해서."
동혁이 사과를 한다. 사과해야 할 쪽은 나인 것 같은데. 이렇게 울어버릴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정말이지 이러면 꼭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잖아.
동혁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한다. 앞으로 누나 곤란하게 안 할게요. 그러니까 괜히 나 때문에 안 피해도 돼요.
동혁의 말에 여주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렇게 상처 줄 의도는 아니었단 말이야. 여주가 당황스러운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 말문이 막혔다.
그 말을 끝으로 동혁은 여주를 거절하고 제 손으로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붉게 달아오른 눈가에 생채기가 올라와 쓰라릴 법도 했지만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대놓고 까였는데 이보다 더한 상처가 어디 있을까. 그 와중에도 수업에 들어가야 할 여주가 생각나 동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동혁에게 손도 못 대고 이도 저도 못해 어정쩡하게 앉아있던 여주 화들짝 놀라 쳐다보자 인사를 하고 뒤를 돌아 걸어간다.
잡기도 뭐해서 우두커니 걸어가는 뒷모습만 쫓는 게 다였다. 시발? 저렇게 가버리면 난 어떡하라고... 여주가 머리통을 감싸 안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나 어떡해.
그 날을 기점으로 여주와 동혁의 처지가 뒤바뀌었다. 여주만 보였다 하면 쌩- 달아나버리고, 항상 자리를 맡아두던 교양 시간엔 모른 척은 옵션, 조별과제 팀원까지 바꿔버렸다. 학식 먹다가도 여주랑 눈 마주치면 진공청소기처럼 흡입하면서 컥컥거리고 자리를 뜨기 일수였다.
세상 모든 사람들한테 소문내려고 작정했냐, 그건 또 아니었다. 학교 내에서, 특히 선후배 모두 모인 자리에서는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 어쩌다 단 둘이 남게 되면 뚝딱거릴 뿐.
학식이 영 시원찮아 친구와 편의점에서 대충 몇 가지를 골라잡아 과방으로 올라왔다. 문을 벌컥 열었는데 에어 팟 끼고 눈 감고 있는 동혁이 보였다. 얘는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이럴 때만. 여주가 그대로 멈춰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야. 안 들어가고 뭐해, 나 팔 떨어질 것 같아. 목석처럼 서있던 여주가 친구에게 질질 끌려 과방으로 입성했다. 십분 컷으로 먹고 나갈 테니까 제발 그때까지 깨지만 말아라. 속으로 외치던 순간 동혁이 눈을 떴다.
'...'
'... 딸꾹!’
놀란 여주가 딸꾹질을 시작했다. 야, 괜찮아? 뭐 잘못했어? 왜 이래. 기다려 봐. 물 떠 올게. 시발, 나가지 마. 말하고 싶었는데 딸꾹질에 가로막혀 말도 제대로 할 수 업었다. 결국 친구가 텀블러를 손에 쥐고 그대로 과방을 나갔다.
동혁과 단 둘이 남겨진 여주가 가시방석 같은 이 자리를 피하려고 핸드폰을 찾았다. 이 미친 핸드폰은 발이 달렸는지, 가방을 아무리 뒤져봐도 나오지 않았다. 시발 미친 거 아니야? 여전히 딸꾹질은 멈추지 않아 딸꾹거리는 소리만 가득한 그때,
'제가 나갈게요.'
'딸꾹...!'
보다 못한 동혁이 일어섰다. 원인 제공자가 나가는 게 맞는 것 같아 얼굴에 구멍이란 구멍은 죄다 확장시키고 쳐다보는 여주를 뒤로 하고 밖으로 나왔다. 동혁이 나가자 거짓말처럼 딸꾹질을 잦아들었다. 이게 다 뭐야. 제대로 꼬여버렸다.
나도 저 정도까진 아니었던 것 같은데, 무슨 사람을 벌레 보듯이 피하고 앉았다. 여주는 심기가 아주 불편했다. 왜 마음이 불편한지 매일 밤 대가리가 빠개지도록 생각하고 생각했다.
분명 내가 원하던 결과였다. 동혁이는 귀여운 후배라고 생각했고 애초에 희망고문하기 전에 싹을 잘라버린 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지금 이동혁 뒤꽁무니만 쳐다보고 있냐고, 나는.
"동혁이랑 뻔질나게 붙어 다니더니 요즘은 어색해 보인다?"
"엉? 아니야."
"아니긴. 네 꼬라지를 보아하니 뭔가 있구만. 너 쟤랑 뭐 했어?"
"ㅇ, 야! 하긴 뭘 해! 말을 왜 그렇게 하냐?"
체육대회라고 며칠 내내 수업이 끝나고도 단체로 남아 예선전을 치르고 있었다. 여주가 출전하는 거라곤 2인 3각이 전부였는데 경영하면 의리라며 응원을 강요했다. 다들 유치하다 싶어 집에 가려다가도 동혁이 눈에 밟혀 못 이긴 척 운동장 구석에 자리 잡아 동혁을 훔쳐봤다.
오늘은 계주를 연습하는지 다들 형형색색의 유니폼을 껴입고 한 곳에 모여 있었다. 물론 동혁도 포함이었다. 멍 때리면서 그쪽을 쳐다보는데 앓는 소리를 내며 여주의 옆에 앉은 친구가 물었다. 별생각 없이 던진 말에 찔린 여주가 괜히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도 모르게 사자후를 내뱉자 친구가 심상치 않다며 여주의 옆구리를 콕콕 찔러댔다.
야. 너는 얼굴에서 다~ 티나. 뭔데, 이 언니가 들어줄게.
그 소리에 혹 했지만 내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닌 것 같아 거절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자꾸 루머 유포하면 고소하겠습니다. 강경대응을 하겠다며 팔로 엑스자를 그렸다.
한참이나 계속된 끈질긴 친구의 꼬드김에 넘어간 나는 결국 술술 불어버리고 말았다. 아니, 사실... 동혁이가 어쩌고저쩌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내 얘기를 듣던 친구가 시간이 지날수록 개똥 씹은듯한 표정을 하며 그라데이션 분노를 표출했다.
에라이, 이 나쁜 년아. 울릴 게 없어서 새내기를 울려? 너 존나 나쁘다. 와... 내 친구지만 너는 실드를 칠 수가 없다. 니는 지옥 갈 듯. 친구가 혀를 내둘렀다.
아니! 내가 그렇게 잘못했냐? 어? 솔직히 쟤가 나한테 고백을 했어, 뭘 했어! 난 그냥 이런 게 아닐까. 하고 물어본 게 다야! 갑자기 뿌엥, 울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냐고. 쒹쒹거리면서 발을 쿵쿵 구르자 등짝에 스파이크가 꽂혔다.
"아! 왜 때려! 씨발 존나 아파!"
"진지하게 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 쟤 행동이 단순한 후배라서 하는 행동이냐? 그리고 너도 좋았어, 안 좋았어? 너도 즐겼잖아. 이 나쁜 년아!"
"때리지 말라고! 그리고 내가 뭘 즐겨? 너 아까부터 말 이상하게 한다?"
"응~ 너 그럴 시간에 너네 동혁이 다른 여자애랑 썸 탐."
말하래서 말했더니 본전은 못 찾고 등짝만 얻어터져서 아주 후끈후끈했다. 염장을 지르려고 작정했는지 다시 한번 등을 찰지게 때리면서 운동장을 가리킨다.
아~ 감히 예상하건대, 김여주 후회 공 각이고요. 이 드라마 시청률 37.5 퍼센트 예상해봅니다. 심란해 죽겠는데 혼자 신나서 킥킥거리길래 뭘 보고 쪼개나 해서 운동장을 쳐다봤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살벌하게 하는지 어두워진 얼굴로 팀원들과 뭐라 뭐라 얘기를 나누더니, 한 여자애가 다가와 볼을 쿡 찌르자 뒤를 돌아본다. 얼굴을 확인하고는 환하게 웃어 보인다. 누나 속을 뒤집어 놓고 웃음이 나오니, 너는? 알 수 없는 심술이 돋아 가자미 눈을 하고 째리는데 삑- 하고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경영과랑 컴공과 2인 3각 예선 시작할게요! 출전 선수들 두 줄로 서주세요!
그 소리에 내 짝을 찾아 운동장에 나란히 섰다. 한 번도 안 맞춰봤는데 잘할 수 있으려나. 지금 그게 중요한가. 내 머릿속이 엉망인데 알 게 뭐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아주 느릿하게 움직였다.
하필이면 키만 멀대같이 큰 김상철이랑 걸렸다. 사실 아무도 이 새끼랑 짝을 해주지 않아 존나게 착한 내가 떠맡은 거다.
야, 김여주. 일등해야 된다. 그래야 상금 타. 오케이?
지랄. 예선전에 과몰입 오지게 하네. 생각했지만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몰라 초지일관 눈웃음으로 일관했다.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 퍼지고 육중한 몸의 김상철이 높낮이도 맞지 않아 헐떡이는 나를 이끌고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시발. 이건 뭐 내가 걷는 건지 들려서 가는 건지 모르겠다. 구호도 없고, 배려도 없는 무식한 발걸음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보니 아주 세상이 빙빙 도는 듯했다.
참 신기하게도 그 와중에 일등으로 코너를 돌고 있었다. 빨리 끝내려는 속셈으로 억지로 발을 맞추려 했다. 다른 팀이 어디쯤 왔나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냉한 눈을 한 이동혁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당황한 나는 스텝이 꼬여 우당탕 자빠져버렸다.
결과는 당연한 꼴찌. 아픈 것보다도 이동혁이 보는 앞에서 넘어졌다는 사실이 쪽팔려 고개를 들지 못했다. 김여주! 야! 괜찮아? 친구들이 달려와 내 무릎을 살피는데 꽤 강하게 쓸렸는지 살갗이 까져 붉은 피가 몽글몽글 차올랐다. 피를 보니 괜스레 더 아픈 듯했다.
"야, 거기서 자빠지면 어떡하냐. 너 때문에 예선 탈락했잖아. 존나 짜증 나네 진짜..."
배려 없던 김상철이 큰 소리로 내게 고함쳤다. 넘어진 것도 서러운데 내가 왜 저딴 새끼한테 쓴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일어나고 싶은데 피는 줄줄 흐르고 다리는 욱신거려서 일어나지도 못하겠다. 짜증이 팍 밀려와 뭐라고 얘기라도 하려고 땅을 짚었는데 손바닥도 같이 쓸렸는지 찌릿한 아픔이 느껴졌다.
아주 잡아먹겠다, 잡아먹겠어. 그놈의 상금이 뭐라고 다친 사람 앞에 두고 이렇게 화를 내. 짜증 나기도 하고 쪽팔리기도 해서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차올랐다. 그래도 김상철은 멈추지 않았다.
"네가 자빠져놓고 왜 울려고 하냐? 질질 짜지, "
"뭐 하는 거예요."
어느새 달려온 이동혁이 내 앞을 가로막고 으르렁거렸다. 이게 지금 무슨 일인가 싶어 두뇌회전이 느려졌다.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그리고 지금 내 앞에서 뭐하잔 거야. 상관없다는 듯 행동할 땐 언제고 왜 나를 두고 감싸냐고.
"일부러 넘어진 것도 아닌데 좀 과하시네요. 다친 거 안 보여요? 사람이 먼저지, 왜 상금에 목숨 걸고 소리를 지르세요.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돌진하던 게 누군데."
저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큰 김상철에게 지지 않고 날카로운 눈으로 맞는 말만 골라 해댄다. 작작 하세요. 거지도 아니고. 김상철이 과한 것도 맞지만 이동혁도 비정상적으로 날카롭게 반응했다.
바짝 독이 오른 이동혁 때문에 너무 놀라서 넘어진 것도 잊어버린 나머지, 다친 손바닥으로 땅을 짚자 앓는 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그 소리에 김상철을 노려보던 이동혁이 자세를 낮추고 내 무릎을 살핀다.
피가 흐르는 다리를 보더니 아무 말하지 않고 나를 의무실로 데려갔다. 의무실로 걸어가면서부터 소독을 하고 붕대를 감을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나를 지켜보다가 인사만 하고 나왔다. 다리가 쓰라려 제대로 걷지 못하자 동혁이 제 팔을 내민다. 어이가 없어 이동혁을 쳐다보자 저도 머쓱한지 시선을 피한다.
"잡아요."
"됐어."
"얼른요."
"갑자기 왜 이래? 나 혼자 갈 테니까 신경 꺼."
투명인간 취급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절절한 눈빛으로 왜 나를 걱정하는지. 퍽 웃긴 상황이었다. 이미 빈정이 상한 내가 이동혁을 돌려보내고 혼자 걸었다.
이동혁 도움받을 바엔 다리가 부러지고 말지. 생각할수록 괘씸해 죽겠네. 지가 달려와놓고 왜 머쓱해하고 있어. 도와줄 거면 눈치 보지나 말던가.
혹시나 해서 뒤를 돌아보니 이동혁은 사라지고 썰렁한 복도가 날 반겼다. 가란다고 진짜 가? 존나 어이없다 진짜, 와.
"아주 차였다고 광고를 하지 그러세요. 예?"
"재민아 무슨 소리야. 차이다니. 차이기도 전에 거절당한 거지."
"아, 얘기가 그렇게 되나?"
"동혁아~ 치킨 사 왔어. 으잉, 근데 콜라가 없다?"
동혁은 혈압이 잔뜩 올랐다. 아무렇지 않은 척, 짝사랑 쿨하게 접을 수 있는 서브 남주인 척, 온갖 척이란 척은 다 했지만 짝사랑 후유증을 못 이겨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공부는커녕, 출석도 못 하고 식음을 전폐하는데 웬수들이 제 집을 찾았다.
야! 이동혁! 엉아 왔어, 문 열어! 그래, 짝사랑 실패남 동혁 씨 문 좀 열어줘! 얘들아, 다 좋은데 다른 집에 민폐니까 좀만 작게 말해.
차례대로 나재민, 황인준, 이제노였다. 이불을 덮어쓰고 무시하려 했지만 건물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는 저 미친놈들 때문에 민원신고가 들어올까 할 수 없이 문을 열었다.
동혁은 문을 열자마자 후회했다. 욕을 처먹는 한이 있어도 이 새끼들을 들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주둥이는 세 갠데 한 사람당 열 마디씩 내뱉고 앉았으니. 치킨을 삼키긴커녕, 물도 도로 역류할 만큼 정신이 없었다.
"너네 장단 맞출 기운 없으니까 먹고 꺼져."
"아니 근데 이 자식이...! 기껏 와봤더니 은혜도 모르고. 사랑에 눈이 멀었구만, 아주."
재민이 혀를 쯧쯧 찬다. 첫사랑을 지독하게 앓는 모양이었다. 여지껏 게임밖에 모르던 놈이 사랑에 빠져 지독한 상사병에 걸리고 말았다. 뭐가 좋냐고 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허파에 구멍 난 사람처럼 웃음만 실실 흘리고 아주 온 세상이 핑크빛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네가 이럴 시간에 여주 누난 밥만 잘 먹고 있을 듯. 인정합니다. 받고 후식으로 설빙까지 조지고 있을 듯. 어잇, 동혁이 앞에서 그런 얘기를 하면 어떡해.
번갈아 가면서 갈궈대는 친구들 덕에 정신이 혼미해진 정신줄을 놓고 말았다. 시끌벅적해진 집은 아주 개판이 따로 없었다.
동혁아, 이 연애 고수 나재민 님이 생각하기엔 말이야. 네가 이럴수록 여주 누나는 너한테 질릴 거야. 왜냐고? 안 그래도 좋아한다고 찝쩍거리던 애가 싫다는데도 뒤만 졸~졸 따라다니면. 어떨 것 같냐?
"... 질리겠지."
"그래! 그거야! 우리 동혁이 드디어 생각이란 걸 좀 하는 거야?"
그럼 뭘 어쩌자고.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는데 나한테 뭘 어쩌라고 지금. 짜증에 이골이 난 동혁의 물음에 재민이 명쾌한 해답을 내놓았다.
이럴 때일수록 네가 잘 사고 있는 걸 어필해야지. 난 누나가 없어도 씩씩하게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요. 언제든지 기다릴 테니까 돌아와요, 누나. 하고 딱 멋있게 물러날 줄 알아야지.
그럼 그렇지. 이 또라이 새끼가 무슨 말을 하나 했다. 동혁은 그대로 일어나 제 친구들을 내쫓았다. 꺼져. 안 꺼져? 경찰 부르기 전에 꺼져라. 동혁의 분노에 눈치 보던 인준과 제노가 거들었다.
동혁아. 나는 재민이의 말이 백번 맞다고 생각해. 재민이는 연애고수잖아. 그래 그래. 그리고 동혁이 너 언제까지 이렇게 인생 포기한 사람처럼 살 거야. 엉? 인준과 제노의 부추김에 동혁의 얇은 귀가 팔랑거리기 시작했다.
... 야, 올리긴 올렸는데. 동혁의 멱살을 잡고 사이좋게 셀카를 찍어 기어코 인스타그램에 업로드를 했다. #치킨. #맞팔. #공공즈. 이건 도저히 못하겠다는 동혁 대신 재민이 알차게 스티커까지 넣어 게시물을 올렸다.
음, 좋아. 이제 기다려. 누나가 좋아요 누른다에 내 코딱지를 건다. 그럼 난 나재민 운동화. 엇, 그럼 난 인준이 시계.
또다시 오가는 헛소리에 동혁이 두통을 호소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지루함에 못 이긴 재민이 넷플릭스나 보자며 몸을 일으키는데 동혁의 핸드폰에서 알림음이 울린다. 화들짝 놀라 넷이 모여 머리를 맞대는데 너무 흥분한 나머지 박치기를 하고 말았다.
아씨, 존나 아파. 얼얼한 머리통을 만지던 동혁이 핸드폰을 뺏어 들었다. 그토록 원하던 여주의 하트였다. 동시에 넷이 만세를 불렀다. 야! 내가 뭐랬어! 누나가 좋아요 누른댔지! 야 고맙다 재민아! 너무도 기쁜 나머지 동혁이 독립운동 뺨칠 만큼 두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다가 현실을 깨닫고 물었다. 근데 누나가 좋아요를 누르면 뭐해. 변하는 건 없잖아. 그 말을 내뱉고 몸을 축 늘어뜨린다. 온몸에 힘이 빠져 손에서도 핸드폰이 스르륵 빠져나간다.
그런 동혁을 보던 재민이 급발진 했다. 때려쳐! 포기해! 너는 누나를 좋아할 자격이 없어! 그냥 평생 짝사랑이나 하고 살아!
그와 동시에 바닥에 떨궈진 핸드폰이 웅웅 울리기 시작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던 말이 딱 맞았다. 바닥을 쿵- 구르며 일어나던 재민의 발이 동혁의 핸드폰을 즈려밟았다. 반박도 못하고 고개만 푹 숙인 동혁을 보며 재민이 물었다.
"사랑이 밥 먹여주냐? 너 이래 봤자 누나는 모른다니까?"
"누나는 내가 존나 밥 먹을 힘을 주거든?"
기름진 멘트에 재민이 헛구역질을 했다. 이거 단단히 미친놈이야. 상종을 하면 안 되겠다.
망연자실한 동혁을 보던 제노가 위로의 뜻을 담아 닭다리를 권했다. 안 먹을래. 동혁은 고개를 빼며 안 먹겠다고 했다. 동혁이 닭다리를 거절한 것은 정말 심각하다는 뜻이었다. 남은 닭다리 하나를 뜯던 인준이 다 먹지도 않은 걸 집어던지고 동혁을 추궁했다.
"여주 누나가 그렇게 좋아? 어디가 좋은데? 이유는 있을 거 아니야."
"... 야."
"부르지만 말고 이유를 말해 봐!"
"... 그냥 존나 좋아. 얼굴만 봐도 좋아. 나 어떡하냐."
별안간 동혁이 선언했다. 20세 이모군, 김양의 얼굴만 봐도 좋아, 돌아버려...
동혁의 선언에 인준이 측은해진 동혁을 위로했다. 일단 존버 해봐... 누나도 너의 빈자리를 그리워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씨알도 안 먹힐 위로에 동혁은 어쩐지 더욱 암담해졌다.
그때, 핸드폰을 주워 든 제노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이 낯익은 화면은 통화 중일 때나 나오는 화면이고, 액정에 떠있는 이름은 제 눈이 잘못되지 않은 이상 여주 누나임을 확신했다. 게다가 방금까지 동혁과 삼인방은 여주 누나의 어디가 어떻게 좋은지 신나게 떠들어제꼈다. 그렇다면 누나가 이 내용을 다...
"... 얘들아.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닌 것 같아."
연하의 묘미
"..."
"..."
"동혁아."
"누나."
"앗, 너 먼저 말해..."
"아니에요. 누나 먼저 말해요..."
아파트 놀이터에 나란히 동혁와 걸터 앉은 여주가 헛기침을 했다. 이게 무슨 급전개냐면.
동혁은 일방적인 짝사랑인 줄 알았겠지만 여주 또한 뒤늦게 상사병을 앓는 중이었다.
고작 나이 그거 몇 살이나 더 많다고 어린 동생에게 충고하던 김여주는 한참 뒤에야 알아차린 감정으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여자애와 정답게 얘기 나누던 동혁을 볼 땐 질투심에 피가 끓어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연락을 할까, 말까. 수천번도 고민했지만 제 입으로 내뱉은 말이 마음에 걸려서 실행으로 옮기지 못했다. 매몰차게 걷어차고 먼저 연락을 하는 것도 웃겼다. 쓸데없는 연락은 안 하니만 못할 짓이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미련 가득한 구남친처럼 인스타그램 염탐이 다였다. 그날도 1일 n동혁을 실천 중이었다. 달 전에 멈춰있던 동혁의 타임라인이 업데이트됐다. 과하게 들떠 호들갑을 떨다가 실수로 좋아요를 누르고 말았다.
시발, 이거 취소 안 되냐. 망연자실한 여주가 지식을 뒤지다가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 어플을 종료시켰다.
나만 이렇게 힘든 건가.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동혁이 아른거려 정상적인 일상생활이 불가능했다. 이대로 가다간 아마 세계 최초 짝사랑을 앓다 뒤진 사람으로 뉴스 한 면을 장식할 것 같아 동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달칵하는 소리와 전화가 연결됐고 여주가 목을 가다듬었다. 그, 동혁아... 동혁아? 분명 연결은 됐는데 왜 동혁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낯익은 목소리들이 귀에 울리는 건지, 여주가 볼륨을 키웠다.
'... 그냥 존나 좋아. 얼굴만 봐도 좋아. 나 어떡하냐.'
의도치 않은 동혁의 사랑고백을 엿들어버린 청취자 1은 조용히 통화 종료를 눌렀다. 며칠을 내리 고민하던 제가 한심했다. 뭘 망설이겠는가. 사랑도 타이밍이라고 주워들은 말이 있었다. 여주는 빠꾸 없이 동혁에게 연락했다.
여주의 연락을 얼마나 바랬던지 바로 갈 테니 기다려달라는 카톡이 왔다. 여주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몸을 베베 꼬지 못해 안달이었다. 동혁이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주의 눈에 그토록 기다리던 동혁이 보였다.
한걸음에 달려온 동혁이 숨을 고르며 여주의 앞에 섰다.
여기 앉아. 숨이 차서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일단 옆에 앉았다. 여주는 그런 동혁을 머리부터 찬찬히 훑어보다가 동혁의 발 언저리에서 시선을 멈췄다. 미처 확인을 하지 못 했는지 양말이 짝짝이였다. 동혁의 발목에 시선을 고정한 여주가 깨달았다. 나 얘 좋아하는 것 같아. 맞지.
"동혁아. 어, 내가 생각해봤는데... 나 너를 존나 좋아하는 것 같아. 이제 와서 너한테 이러는 게 웃기다면 슬프지만 할 말은 없어... 근데 난 이미 네가 좋아... 나 좀 쓰레기야...?”
"... 누난 정말..."
제 감정을 인정하기로 한 여주의 우렁찬 고백에 잠자코 듣던 동혁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얼굴을 더듬거리데 도저히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거짓말 아니죠...? 누나 나 좋아한다고 한 거 맞죠."
"응, 맞아. 나 너 좋아해. 이동혁 좋아해."
"나 볼 좀 꼬집어줘요..."
동혁의 부탁에 여주가 친히 손에 힘을 주고 볼을 살짝 꼬집었다. 꿈 아니네, 정말. 동혁이 여주를 와락 껴안았다. 껴안은 손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주도 손을 뻗어 동혁의 등을 감싸 안았다.
괜찮다고 등을 몇 번이고 쓸면서 동혁을 진정시켰다. 한참을 쓰다듬었더니 들썩거리던 어깨가 조금씩 진정을 찾는 것이 보였다. 이제 동혁의 얼굴을 좀 보려고 몸을 떼어내는데 어찌나 힘이 센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동혁아. 일단 힘 좀 풀어봐. 너 얼굴 좀 보자."
"싫어... 안고 있을래요."
"나 너 얼굴 보고 싶어서 부른 건데 안 보여줄 거야?"
얼굴이 보고 싶었단 여주의 말에 가까스로 멀어진 동혁이 다시 안겨올 태세를 취한다. 그런 동혁을 짠하게 보던 여주의 동혁의 볼에 짧게 입을 맞춘다.
적나라한 쪽- 소리에 여주와 동혁 둘 다 놀라서 후다닥 떨어진다.
민망해져 눈을 피하던 동혁과 여주가 시선처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알을 굴리다가 말없이 서로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동혁은 갈증을 느꼈다. 얼마나 안고 있었다고 품이 이렇게 허전한지. 추워서가 아니었다.
눈 앞에 여주가 있는데도 봐도 봐도 부족하고 좋아서 안달이 났다. 여주를 내려다보던 동혁이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지더니 종이 한장 들어갈 틈도 없을 만큼 다가온다.
"뽀뽀 한번 더 해주면 안 돼요?"
"한 번만?"
한 번이면 되겠어? 동혁의 눈을 피하지 않고 되묻자 손가락을 내 입술을 살살 쓸어내린다.
"잘못 생각했다. 뽀뽀로는 안될 것 같아요."
"응?"
입 안으로 뜨거운 혀가 비집고 들어온다.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이 허리로 내려오고 단단히 손으로 감싼다. 이런 뜻이었어? 뽀뽀로 안될 것 같다던 말이? 거침없이 파고드는 동혁의 입술을 받아내다가도 진도가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 가슴팍을 밀쳤다.
이동혁, 너... 너. 너무 빠르다고 생각 안 해?
"나 애새끼 아니라니까요. 이렇게 큰 애새끼 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