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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교사들의 입국과 초기 선교활동
⑴ 초기선교사들의 한국정착
① 북장로회와 감리회
* 1885. 2 언더우드, 스크랜튼, 아펜젤러는 일본에 도착했다. 당시 조선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개화파가 불리한 입장에 처해 있었다. 선교사들은 개화파와 친밀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안전문제가 제기 되었다.
* 1885. 4.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부부는 부산에 도착했고(4.2) 부활절에 제물포에 입항했다(4.5). 포크 공사는 여성의 입국을 만류했기 때문에 아펜젤러 부부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언더우드는 선교사의 신분이 아니라 제중원의 교사 자격으로 활동을 했다.
제물포(인천항)
20대 중반의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
*1885. 5.1 감리교의 스크랜튼 의사가 입국했고, 6월에는 아펜젤러 부부와 장로교 선교사 헤론 의사가 입국했다. 감리교 선교사들은 미공사관 근처 정동에 기지를 마련했다.
감리교 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튼, 그의 어머니 매리 스크랜튼(1832-1909, 이화학당의 설립자)
고종은 1886년 제중원에서 활동하던 헤론 선교사에게 종2품 벼슬을 내리는 교지를 주었다. 그는 1884년 미국장로교선교부가 임명한 공식 한국선교사 1호이다. 헤론은 병원운영, 성경번역, 순회진료, 문서선교에 큰 공헌을 남겼다. 오른쪽 사진은 양화진 헤론 선교사의 묘지이다.
언더우드는 런던에서 출생하였고, 그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을 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화학자와 발명가 였다. 그의 형 존 언더우드는 타자기 회사를 운영하여 거액의 돈을 벌었다. 언더우드는 뉴욕 대학교와 네덜란드 개혁교회 배경을 가진 전통적인 브른스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언더우드의 신앙은 열정적이고 뜨거웠다. 언더우드는 1883년 신학교연맹대회에서 아펜젤러를 만났다.
존 언더우드
아펜젤러는 원래 장로교에서 신앙생활을 했으나 그는 감리교회로 이적하였고 드류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교파주의자가 아니었고 복음선포를 위해서는 교파를 초월할 수 있는 열려있는 복음주의자들이었다. 그래서 초기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는 에큐메니칼 협력관계가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② 영국성공회
*1885년 말 중국 남부 복주에 있는 성공회 선교부는 중국인 두 명을 부산에 파견하여 전도하였다. 1887년 북중국과 일본의 성공회를 관장하던 부주교(Archideacon) 울프(J. H. Wolfe)는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캔터베리 대주교와 호주 성공회를 향해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해야 한다는 요청의 편지를 보냈다.
*1890. 9.29 찰스 코르프(C. J. Corfe, 高요한) 신부가 초대 한국 주교로 임명을 받고 트롤로프 등 7명의 사제와 2명의 의사와 함께 입국하였고, 강화도를 선교 거점으로 사역을 시작하였다.
*1911 트롤로프 신부가 주교로 서품을 받았다. 1914년에 강화도에 성미가엘신학원을 설립하고 한국인 성직자를 양성하였다. 그 결과 1915년 김희준 첫 사제가 안수를 받았다. 1916년 조선 성공회 헌장과 법규가 작성되었다. 1926년 한국 최초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된 서울 대성당이 완공되었다.
고요한 주교(Charles J Corfe) 성공회 강화성당
성공회 대성당
성공회 성누가병원 1890
천도찬가 (1904) 성회송가(1903) 악보없이 번역
③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
*1887년 울프의 요청은 호주 멜번의 매카트니 목사가 발행하는 선교잡지에 게재되었다. 이것을 읽은 헨리 데이비스는 한국선교를 꿈꾸면서 빅토리아 장로교회로 적을 옮겨 신학을 공부하였다. 1889. 10 헨리 데이비스(Henry Davies) 목사와 그의 누이 메리 데이비스가 입국했다. 그러나 1890. 4 헨리 데이비스는 선교여행 중에 사망하였고, 1891. 10 제2의 선교 팀이 부산에 도착하면서 본격적인 한국선교를 시도하게 된다.
울푸가 보낸 편지가 실린 선교지 헨리데이비스 목사와 그의 누이 메리
데이비스 목사의 한국어 공부 그의 일기와 선교여행 답사지도
④ 남장로회
*1891. 10 언더우드와 윤치호는 내슈빌의 미국신학생해외선교연맹(Inter-Seminary Alliance for Foreign Missions)에서 강연을 하였다. 이 강연에 참석하였던 매코믹 신학교의 테이트(L.B. Tate), (버지니아) 유니언 신학교의 존슨(C. Johnson)과 레널즈(W.D. Reynolds)가 한국선교를 결심하였다. 이들은 남장로교 해외선교부에 선교를 자원했다. 이들의 모임에 전킨(W.M. Junkin)도 합류 하였다. 이상의 4명의 신학생은 언더우드와 함께 미국 남부를 순회하면서 한국선교의 시급성을 역설하였다.
*그 후에 언더우드와 친구들은 3000달러는 헌금했고, 언더우드의 형은 2000달러를 헌금했다.남장로교선교부는 이러한 재정적 후원에 힘입어 한국선교를 결정하게 된다. 남장로교의 한국선교를 촉발시킨 인물은 “언더우드”였다.
*1892. 2.7 남장로교회는 7명의 선교사를 임명했고 11.3 “7인의 선발대”가 한국에 도착했다.
*타이트와 메티 테이트(M. Tate)/ 레널즈/ 전킨/ 데이비스(L. Davies)/ 레이번(M. Leyburn)/ 볼링(P. Bolling)
남장로회 7인의 선발대
남장로회 선교기지 확장
⑤ 남감리교회
젊은 윤치호 리드 선교사
⑥ 캐나다장로회
게일(연동교회, 성경번역) 그의 호조
펜윅(침례교단) 하디(1907부흥운동) 에비슨(세브란스병원)
*1893. 12 매켄지(W.J. McKenzie)는 메리 타임즈 장로교학교 선교협회 후원을 받아 한국에 왔다.
매켄지는 다음과 같은 일기를 기록했다.
나를 태우고 갈 배의 갑판에 올랐다. 고국 땅을 떠나는 것이 후회스럽다거나 섭섭한 감정은 들지 않는다. 아!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충만하지 않는가! 내가 고국을 떠나는 것은 결코 희생이 아니다. 오히려 이곳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희생이다. 이제부터 조선은 내가 선택한 나의 육친의 나라다. 하나님, 나로 하여금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오래오래 그 일터에서 일하며 살게 해주소서. “사망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는” 심판의 날 공중에서 큰 나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나의 뼈가 그곳에 묻혀 있게 해주소서! (1893.11)
매켄지 선교사는 황해도 소래지역에서 거주하면서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 지역 사람들과 똑같은 조건에서 살면서 선교하였다. 그의 헌신적인 활동으로 동학교도들은 그 지역의 교회에 피해를 주지 않았고 오히려 도움을 주었다. 매켄지는 열병에 걸려 고통을 겪다가 환각상태에서 권총으로 자신의 머릴 쏘아 사망했다.(1894)
매켄지 선교사가 살았던 집
*1898. 9.7 캐나다장로회 선교사 그리슨, 맥레, 푸트 3인이 정식으로 내한하였다.
1910 간도의 캐나다 선교사 구례선(로버트 그리슨)
⑵ 여러 교파 교회의 정착과 발전
① 구세군
호가드 정령의 선교(1912)
② 성결교회의 시작
김상준 정빈(교회의 제도화를 반대하며 성결교를 떠났다) 이명직 목사(서울신대창립자)
활천 조선동양선교회 성결교회(1930)
③ 예수재림 제7일 안식일 교회
④ 동방교회
아관파천 [俄館播遷]
1895년 8월 20일 일본 세력은 친러세력을 키워 일본을 견제하는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그후 1896년 2월 11일 친러세력과 러시아 공사의 공모하에 고종과 왕세자가 궁궐을 벗어나
지금의 서울특별시 정동(貞洞)에 위치한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간 사건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 공사관
⑤ 침례교
(좌)펜윅은 조선인 전도를 위해 토착화를 시도했다.
(우) 펜윅과 동양선교회 1889 신명균이 길러낸 한국인 교인
펜윅이 엮은 찬송가(1899-1939) 공주동양선교교회 1920년대
펜윅의 달편지, 펜윅과 신명균
펜윅선교사의무덤, 초가집은 그가 살던 집
⑥ 조합교회
조합교회(일제시대)
위에서 1910년 이전에 한국에 진출한 교파들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특징은
⑶ 초기의 선교활동
초기 선교활동은 고종이 일본의 감리교 감독 맥클레이 목사에게 병원과 학교에 대한 사업을 윤허하면서 시작되었다. 고종 황제는 근대문물은 도입하려고 하면서 선교활동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위정척사파들의 공격이 극심했기 때문이었다. 선교사들은 직접선교하기 보다는 병원과 학교를 통해 활동하는 간접선교 방식을 택함으로써 조선정부와의 충돌을 피하고 한국인들로부터 환심을 얻을 수 있었다.
1) 의료선교
장로교의 병원
1884년 9월 20일에 입국한 알렌은 그해 12월 갑신정변에서 칼을 맞은 민영익 대감을 치료하여 살린 후 왕실의 호의를 얻었다. 그는 고종황제에게 민중을 위한 국립병원을 세울 것을 요청했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우정국(종로구 견지동)
알렌이 민영익을 치료한 사건을 기록한 일기
알렌이 고종에게 서양병원 건립을 건의한 원문(왼쪽)과 한문번역1885
1885. 4. 14 갑신정변으로 변을 당한 홍영식의 집에 광혜원(제중원 4.16)을 설립하면서 선교 사업의 합법적 전초기지가 열리게 되었다. 제중원은 언더우드, 스크랜튼, 헤론, 엘러즈(J. Ellers: 최초의 여자의사로 주장했으나 그녀는 의사가 아니었다.)가 합법적인 활동을 하는 근거지가 되었다.
홍영식(역적으로 몰려 처형) 제중원 홍영식의 집을 병원으로 개조(현 헌법재판소 구내)
제중원1886년 4월 16일 고종은 백성의 치료에 공이 크다 하여 제중원(濟衆院)이라 이름을 고치도록 하였고 ,
알렌에게 당상관 통정대부(通政大夫)의 벼슬을 주었다. 환자들이 대기, 간호사가 환자를 간호하고 있는 모습
알렌이 고종에게 받은 한복(오색과 용이 그려진 옷은 왕만이 입을 수 있는 옷이었다)
알렌과 조선인 요리가 (고종이 하사한 나귀)
알렌이 약을 조제할 때 사용한 놋 유발과 유봉 엘러즈 (첫 여의사로 자신을 알렸으나 사실이 아님) 빈톤 선교사와 결혼
릴이아스 호튼 (1888 최초의 여성 의사로 입국) 명성황후의 시의가 됨
1889.3 언더우드는 8년 연상의 릴이아스와 결혼을 함
언더우드의 신혼 여행/ 언더우드, 릴리아스-그들의 아들 원한경
1887년 알렌은 정치에 관심이 많아서 주미 한국공사관의 임시공사로 부임을 받아 떠났고, 병원은 남대문 안 구리개로 이전하여 헤론이 담당하게 되었다.
인천에 있는 알렌 공사의 별장 알렌 공사 부부
1894년 에비슨의 제중원 사직 통보(왼쪽),
제중원을 선교부로 넘기는 1894년 9월 조선 정부의 외교 문서(오른쪽)
에비슨은 병원의 정상적인 운영을 위해 조선 정부에 제중원을 선교부로 넘겨줄 것을 요청했다. 6개월 동안의 협상
끝에 고종은 제중원을 에비슨이 대표하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 넘겼다. 설립된 지 9년 만에 제중원의 성격이 민간병원으로 바뀌었다.
1894년 미국인 실업가 세브란스(Severance, L. H.)는 한국에 병원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에비슨의 연설을 듣고 세브란스 병원을 설립할 수 있는 기금을 헌금했다. 1904년에 남대문 밖 복숭아골[도동]로 현대식 병원을 지어 옮기고 세브란스 병원이라고 했다. 세브란스 병원은 1908년에 최초의 한국인 의사 7명을 배출했다.
에비슨 박사 세브란스 1838-1913
완공 직후의 모습
세브란스 병원과 명동성당
세브란스 병원과 수술실 모습
1905년 세브란스병원의 직원 일동
1908년 세브란스 첫 졸업생허스트와 7명의 첫 졸업생.
뒷줄 김필순, 홍석후, 신창희
가운데 줄 주현칙, 허스트, 박서양(드라마 제중원의 주인공)
아랫줄 김희영, 홍종은
감리교의 병원
1885. 9. 10 스크랜튼은 제중원을 떠나 독자적으로 진료소를 시작하였고 1886. 6. 15 정식으로 시병원(施病院)을 설립하였다.
스크랜튼과 시병원
1887. 10 여성의사 하워드(M. Howard)가 입국하여 시병원 안에 최초의 여성전용병원을 시작했다. 1888. 4 하워드는 여성병원을 정동으로 독립시켰고, 이 병원은 보구여관(保救女館)이라고 불리게 된다. 여성들은 남성의사에에 몸을 보일 수 없는 시대였기 때문에 여성병원과 여의사는 절실히 필요했다.
보구여관
1894스크랜튼은 민중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상동으로 병원을 이전했다.
의료사역은 평양, 선천, 재령, 대구 등 각지로 확대되었고, 위생교육과 예방접종도 치중하여 사망률을 급격히 감소시켰다. 병원과 진료소는 거의 돈을 낼 수 없는 민중들이 기독교를 접하게 되는 장소였다. 의료선교는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제거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 한센병자들의 모습
광주나환자요양원(남장로회)- 훗날 여수애양원으로 이사
부산 상애원 나환자 요양소(호주장로회)
광주 제중원 1905 (남장로회)
순천 기독병원 (남장로회)
순천 안력산 병원 (남장로회)
상동시약소(북감리회)
해리스 기념병원(지금의 동대문 이대부속병원)
해리스는 1897년 미감리회 여선교회 의료선교사로 내한, 동대문 시약소에서 살면서 환자들을 치료
사람들은 동대문 부인병원으로 호칭
해리스는 4년간 일한 후 1901년 평양 광혜여원 의사로 파송
1년 후에 전염병 걸린 환자를 치료하다가 발진티푸스에 걸려 평화스럽게 하늘나라로 떠났다.
대구 제중원 (북장로회)
선천 미동병원(북장로회)
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홀 일가의 선교와 사랑이야기1
1890년 뉴욕시 메디슨가 빈민의료선교에서 만난 닥터 홀과 닥터 로제타 셔우드 평양 최초의 감리교 의료 선교사 닥터 윌리엄 제임스 홀, 그의 아내 닥터 로제타 홀 로제타는 뉴욕출생으로 어려서 선교사의 꿈을 키웠다. 1886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889년 감리교 여성 디커니스 홈에서 선교훈련을 받으며 뉴욕시 빈민가에서 봉사를 하였다. 당시 병원의 선교 책임자는 닥터 윌리엄 제임스 홀 이었다. 그는 첫눈에 로제타에 반해 프로포즈했다. 1889년 한국에서 보구여관을 세운 메타 하워드가 질병으로 떠나자 한국의 감리회는 여자의사를 찾고 있었다. 로제타는 1890년 한국으로 떠났고, 닥터 홀은 중국선교사로 내정되어 있었으나 1891년 12월 조선 땅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벙커 선교사의 주례로 1892년 6월 21일 결혼을 하게 되는데, 이 결혼식이 한국 최초의 기독교식(서양식) 결혼식이 되었다. 닥터 홀은 평양선교를 위해 개척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첫 아들 셔우드 홀이 태어나는 그 다음해 메켄지 목사와 함게 평양으로 들어갔다. 그는 광성학당과 병원사역을 하면서 평양에 복음을 전했다. 1894년 7월에 평양은 청일 전쟁의 전쟁터가 되었다. 닥터 홀은 많은 사람을 치료하다 자신이 병에 감염되었다. 서울에 도착한 홀은 , 로제타와 아들 셔우드 홀의 손을 붙잡고 , 마지막 기도와 유언을 하고 끝내 숨을 거두게 된다. 한국에 온지 2년만에 그는 한국땅에 묻히게 되었다. 그는 양화진 존 헤론의 묘 옆에 묻혀있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떠나기 전 가족과 함께 찍은 닥터 윌리엄 제임스 홀 홀(Holl) 선교사가 평양에서 선교를 하던 집 (돌보는 고아들과 함께)
1895년경 한강변 양화진 닥터 홀의 무덤
로제타는 1890년 10월 13일 제물포에 상륙, 이튿날 서울에 도착했다.
이화학당 근처의 한옥에 머물며 보구여관에서 진료활동을 시작,
첫날 4명의 환자를 시작으로 열 달 동안 2천명 이상을 치료했다.
3년간 1만4천여 명의 환자를 치료하게 된다.
로제타는 처음부터 "여성을 위한 여성의 선교"에 충실했다.
그녀는 화상 환자를 치료하면서 자신의 피부를 띠어 이식하기도 하였다.
이 소식을 알려져 많은 조선인들이 감동을 받았다.
닥터 홀이 사망할 당시 로제타는 아들 셔우드가 있었고 딸 에디스는 태 중에 있었다.
아들은 닥터 셔우드 홀은 결핵 전문 의사로서 한국에 다시 온다.(1898년 이전 사진)
초기 홀기념병원((평양에 설립되었던 여성병원, 1894)
기휼병원으로 발전
로제타는 남편의 순직을 기념하면서
재산을 털어 1894년 평양에 병원을 세웠다.
그리고 1895년 미국으로 돌아가 에드스 마가레트를 낳았다.
이때 보조로 일하던 에스더와 박유산을 데려 갔다.
그 뒤 폴웰(Follwell,E.D.)이 이 병원의 원장이 되어 1897년 2월에 개원하였다.
광혜여원(廣惠女院)
1897년 봄 한국에 돌아온 로제타는
1898년 평양에 광혜여원(1986.6)을 설립했다.
그해 온가족이 이질에 걸렸고 1898년 5월 23일,
4살난 딸 에디스는 하늘 나라로 갔고 양화진 아버지 옆에 묻혔다.
로제타는 참석하지 못했고 장례는 아펜젤러 목사가 집행했다.
로제타는 그 고통을 신앙으로 극복하면서 1898년 6월 18일 이 병원 문을 열었다.
평양감사 민병식은 아내의 병을 고쳐준 것에 대한 감사로 병원이름을 지어주었다.
민병식은 선교초기에 닥터 홀과 교인들(한석진 , 김창식 등)을 극심하게
매질하며 박해했던 사람이었다.
조선인 최초의 여자의사 김점동(에스더 박)
14세의 점동이는 1890년
감리교선교사 닥터 로제타 셔우드의 보조원이 되었다.
그녀는 이화학당에서 교육을 받았고, 로제타로부터 김 에스더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1892년 로제타와 홀이 결혼하던 해, 로제타의 중매로 16세의 점동이는 닥터 홀의 조수 박유산과 결혼하였다.
한편, 1895년 의사를 꿈꾸던 에스더(점동이)와 박유산은 로제타를 따라 미국에 건너갔다.
에스더는 Liberty 공립학교에 등록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뉴욕시의 "Nursery and Child's Hospital"로 진학했다.
1896년에 Women's Medical College of Baltimore (Johns Hopkins)에 입학하여 서양의학을 공부하는 첫 한국인이 되었다.
(Wow! How bright was she!)
에스더와 박유산 Dr. Rosetta Hall, Sherwood, Edith
1895년 9월 미국에서 찍은 사진
에스더는(1877-1910)
1900년에 의사(M.D.) 학위를 받고 귀국했으나 박유산은 결핵으로 사망했다.
에스더는 로제타와 함께 10년간을 의사로서 교육자로 정열을 다해 일을 하였다.
1910 년 봄, 전성기의 꽃을 피우던 에스더는 폐결핵으로 아깝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로제타 홀의 헌신
로제타는 오봉래라는 학생에게 처음 점자를 가르쳤다.
1894년 5월 조선최초의 시각장애아 학교 평양여맹학교를 설립했다.
학교이름은 딸의 이름을 따라 에디스 마르리트 어린이 병동이라고 했다.
(병원 겸 학교)
일시 미국에 귀국하여 뉴욕점자를 배웠고, 1897년에는 직접 고안한 뉴욕식 한글 점자를 가르쳤다.
1900년 6 평양외국인 학교를 세웠고 1909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농아학교를 세웠다.
오봉래는 후에 유능한 특수교육 교사가 되었다.
로제타는 또한 김성실을 아껴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하게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맹인 영문과 졸업생이 된 그는 통역사로서 늘 홀 여사와 함께 했다.
1993년 문교부에서 발간한 특수교육백서에 따르면, 로제타는 여러 곳의 병원장이면서
1925년까지 무려 26년간이나 맹아학교와 농아학교의 교장직을 수행했다
.
맹아학교졸업식, 1908
맹아학교 1930
맹인학교 학생들과 함께
로제타는 1928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현재 고려대학 의과대학의 전신)과
인천간호전문보건대학등을 설립하였다.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1회 졸업생
로제타의 송별식 1933. 10.
아들 부부를 남기고 43년간 일한 한국을 떠났다.
1951년 남편과 딸이 묻힌 양화진 외인묘지에 묻혔다.
송암 박두성 선생의 훈맹정음 점자 발명
로제타의 공헌은 1926년 기독교인 박두성이 훈맹정음 점자를 발명하는 데 큰 자극제가 되었다.
1941년 신약성서 점자원판의 완성
점자성경을 읽는 시각장애 소녀
셔우드 홀의 한국사랑
로제타의 외아들인 셔우드 홀은 커가면서 사업가의 꿈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10대이던 1907년 8월, 원산에서 열린 한 모임에서
1907년 기독교 대부흥기의 주역이던 하디 선교사의 설교에 감명받아 의료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가 감명 받았던 하디의 설교 내용에는 이런 것들이 있었다.
“아무리 높은 이상과 동기라도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데 필요한 영적 힘이 없다면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기억하라, 그 힘은 항상 기도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 육체의 힘도 날마다 음식에 의해 유지되는 것처럼
우리의 영적인 힘도 오로지 매일 매일의 기도를 통해서만 강해질 수 있다.
…우리의 결심 역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영광이 되기를 바라는 데서부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닥터 셔우드 홀과 닥터 메리안 홀
닥터 셔우드 홀은 조선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인이며,
최초로 결핵 전문병원과 결핵요양소를 세운 인물이다.
셔우드 홀이 세운 해주 구세병원
환자진료 모습
한국 최초로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
닥터 셔우드 홀은 결핵 퇴치 자금 마련을 위해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했다.
발행한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에는 조선의 상징인 남대문이 그려져 있다.
처음에는 일본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을 도안으로 삼으려고 했다.
물론 일제가 허용치 않았다.
그럼에도 굽히지 않고 다시 남대문을 그려 넣는 기개를 보여주었다.
닥터 셔우드와 메리안 홀 부부는 15년간 이 땅의 결핵 퇴치를 위해 헌신했다.
결국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추방당하고 만다.
부산항을 떠나기 직전 셔우드 홀 가족은 눈물 속에 작은 의식을 치렀다.
셔우드는 가족들 앞에 수놓은 아름다운 태극기 한 장을 꺼냈다.
해주를 떠날 때 조선인 친구가 준 것이었다.
일가족 5명은 나뭇가지에 그 태극기를 걸어놓고 “조선의 진정한 국기를 향해 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허킨스의 시 ‘연의 문(年의 門)’을 낭송했다.
“나는 年의 門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말했네
빛을 주시오
그래야 내가 미지의 세계로 안전히 걸어 들어갈 수 있소
그는 대답했네
어둠에 들어가시오. 그리고 하나님 손을 잡으시오
그리 하는 것이 빛보다 나으며 뜻 있을 것이오”
1984년
91세 셔우드, 88세 메리언 부모의 무덤을 방문
정부가 모란장을 수여
서울시 명예시민
1991년
각각 98세와 95세로 세상을 떠난 닥터 셔우드와 닥터 메리암의 유해가
한줌의 재로 돌아와 부모님과 동생이 묻힌 곳에 안장되었다.
양화진에 묻힌 홀 가족
1..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 중 최초로 순직한 닥터 윌리엄 제임스 홀(Dr. Willam James Hall)
2. 그의 아내인 닥터 로제타 셔우드 홀(Dr. Roetta Sherwood Hall)
3. 아들인 닥터 셔우드 홀(Dr. Sher wood Hall)
4. 며느리 닥터 메리안 홀(Dr. Marian Hall)
5. 셔우드 홀의 여동생인 에디스 마거리트 홀(Edith Margaret Hall)
어린 시절 사망한 에디스를 뺀 나머지 4명이 이 땅에서 봉사한 기간을 합치면 무려 73년이 된다.
2) 교육사업
조선시대의 초등교육은 양반의 아들일 경우 사당에서 교육을 받았다. 딸들과 가난한 집의 아이는 교육에서 소외되었다.
한국인 소학당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서구학교는 "육영공원"(1883-1894)이었다. 이 학교는 정부가 귀족 층의 아이들에게 근대교육을 시키기 위해 세웠다. 그러나 학생들의 게으름과 관료들의 부정부패로 인해 학교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학교의 교사들은 헬리팩스, 길모어, 벙커, 헐버트였다. 벙커와 헐버는 선교사로 다시 내한했다.
육영공원
육영공원의 교재
1885. 11 감리교회는 고종황제로부터 학교 설립을 허가 받았다. 그후 1886. 6. 아펜젤러는 2명의 학생을 데리고 배재학당을 시작했다. 배재학당은 5개월 만에 32명의 학생으로 늘어났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영어를 배워 출세 하려는 요구가 강했다. 그 가운데서 박중상과 한용경 등은 기독교인이 되었다.
배재학당 학생들 1889
배재학당 건축 1896
1886. 5.11 언더우드는 최초의 고아원 학교를 세웠고 그 이름을 ‘언더우드학당’이라고 했는데 ‘예수교학당’, ‘민노아 학당’, ‘구세학당’ 등의 명칭으로 칭해졌다. 후에 이 학교는 경신학당(1905)으로 정착되었다.
언더우드가 세운 고아원
고아원에 들어온 김규식(언더우드 양아들)
언더우드 학당
경신학교
개신교회가 조선의 교육에 기여한 큰 공로는 여자학교를 세워 여성지도자들을 길러낸 것이다.
1886.5.31 스크랜튼 여사는 감리교의 이화 여학당을 세웠다.
수업모습
1890년대 학생들
교사들1924
초창기 여학교의 학생들은 고아, 과부, 첩 등 조선사회의 소외계층이었다. 이화여학교는 박 에스더, 하란사, 이경숙, 여메례 등 걸출한 여성지도력을 길러내었다.
박에스더, 하란사, 황메례
김활란 1918, 1928
1887.6 엘러즈는 장로교의 정동여학당을 세웠다. 훗날 정신여자고등학교로 발전했다.
정동여학교
숭의여학교(평양)
숭의여학교 첫입학생
평양숭실
숭실학교 학생들
배화학당의 교사와 학생들 1906
기독교학교의 교과목은 한문, 역사, 지리, 수학, 과학, 성경이었다.
민중계층은 병원과 학교를 통한 선교활동을 은혜로 받아들였으나 식자층과 지배계층은 기독교에 대해 배타적이었다. 간접선교방식은 성례집행 일변도로 시작된 로마가톨릭과 차별성을 강조하여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
3) 성경번역 성경번역은 개신교 선교활동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서 복음을 토착화 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자국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도록 하는 것이 직접전도에 나서는 것 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확신이 있었다.
1887년 서울에 모여있던 선교사들은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했다. 그 위원들은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튼이었다. 성경번역은 또한 교파를 초월하는 에큐메니칼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1890년 선교사들은 로스역 성서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로스 성서가 평안도 사투리와 번역 문체가 옛말이어서 새로 번역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1893년 "상임성서실행위원회"는 성경번역자회를 다음과 같이 구성하였다. (언더우드, 게일, 아펜젤러, 스크랜튼, 트롤로프, 레널즈[95]) 성경번역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1895 시험역본은 〈마태복음〉〈마가복음〉〈요한복음〉〈사도행전〉발행 1900 신약 전체가 출발-시험역본과 개인역본을 급하게 묶은 상태 1906 공인역 《신약젼서》출판 1900 신약과 1910년의 구약을 ‘구역(舊譯)성서 1937 ‘개역성서’
신약성서 1900년판 구약성서 1911년판 이 신구약 성서는 당시 인기를 누렸다.
번역자회(1902) 앞줄: 레널즈, 언더우드, 게일, 존스, 뒷줄: 문경호, 김명준, 정동명
이승두, 김정남, 레널즈, 1910 4월 2일 구약번역 완료 신약개역자회 1930년대 중반 신약 “簡易漢文新約 1931 국한문 혼용 초기 번역자들은 민중계층을 염두에 두고 성서를 번역했다. “아주 무식한 사람들까지도 이해할 수 있도록 문제가 간결하면서도 식자층의 마음에도 들도록 깔끔하고 순수한 것을 추구했다.”(언더우드) *신(神)의 이름 번역 논쟁-'하나님'? '하느님'인가? 구약의 하나님 '엘로힘'은 신약에서 '데오스'로 번역되었다. 영어로는 'God'이었고 중국어로는 '天主' 혹은 '上帝', 일본어는 '가미'였다. 한국어 성서 번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신의 이름을 어떻게 번역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대다수의 선교사들은 "하ㄴ.님"을 선호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처음에 '하나님' 이라는 이름이 한국의 샤머니즘의 신(神)의 이름이라고 생각하고 사용하기를 반대했다. 그러나 한국의 종교들을 연구해 본 이후, 하나님은 모든 한국인들의 정신 세계속에 깊이 뿌리 내려 있고 모든 종교를 초월하는 신관인 것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면 무당들도 하나님이 절대적인 신이라는 것을 믿지만, 그들은 하나님은 이 세상에 간섭하지 않는 신이라고 생각했다. 이승의 삶에서 죽은 자의 혼령과 귀신들이 해를 끼친다고 믿고 굿를 하였다. 또 한국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전혀 그리거나 만들지 않으며, 하나님 혹은 하늘에 대한 제사는 오직 국왕과 그의 대리자 만이 강화도 마니산에서 지낼 수 있으며 그때에는 무당들이 범접할 수 없게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는 한국인들이 지닌 하나님 신관은 유대인들이 지닌 유일신 사상과 흡사하다는 것을 알고 번역에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하ㄴ.님" 본래 하늘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래서 "하느님"으로 번역해야 한다. 1900년 게일은 한국인들에게 "하나님", "하느님"이 둘 다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유일신을 나타내는 "하나"를 강조하면서 "하나님"을 택하자고 주장했다. 성경에서 기독교 신의 이름을 "하나님"으로 택한 것은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한국인들에게 이국적이고 익숙하지 않은 신의 이름으로 번역이 되었더라면 기독교 전파는 어려웠을 것이다. 혹자는 "하나님" "하느님"을 가지고 논쟁을 하지만 그것은 우스운 일이다. 문법적으로 하면 "하늘"이라는 존재에 "님"을 붙여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 안에서 오래 사용해서 신앙적으로 익숙해진 표현은 그래도 두는 것이 낳을 것이다.
언더우드는 초기에 "상제"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번역의 원칙에 대한 논쟁-직역번역(형식적 동등성)을 택할 것인가 창조적 번역(내용적 동등성)을 택할 것인가? 중국어 한문성경은 내용적 동등성을 택해서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문자를 직역하기 보다는 중국인들이 이해하기 쉬운 창조적 번역을 하였다. 반면 한국의 선교사들은 주로 "축자적 영감설"을 선호하면서 문자적 번역(literal translation)을 택했다. 이 과정에는 성경을 자유롭게 번역하는 것을 우려한 선교사들의 보수적인 태도가 영향을 끼쳤다. 창셰긔(1921) 게일, 이원모, 이교승, 이창직-조선어풍 독자적 성경번역 문자적 번역에 반대했던 게일과 한국인 이원모, 이교승, 이창직은 성서는 조선어풍에 맞아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고 창조적 번역을 시도했다. 곧 이어 '자유주의 번역 논쟁'에 휘말렸다.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표준성경은 필요하나 성경을 읽는 사람들의 수준에 맞게 다양한 번역이 필요한 것이 좋다. 어린이에게는 어린이 수준에서 청소년에게는 그들에게 편한 성경이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성경 번역에서 언더우드와 베어드는 아주 보수적인 입장을 로스와 게일 이원모는 진보적인 입장을, 레널즈와 피터즈는 중도적인 입장을 취했다.
1930년대 일제하에서 한국 학자들의 노력으로 한글 맞춤법이 통일되었다. 이들은 성경번역에 '현대적인 구어체'를 사용하기를 희망하고 장로교총회에 그것을 요청했다 1931년 제20차 장로교 총회에서 대다수의 보수적인 교계 인사들은 새로운 현대적인 구어체 사용을 원치 않고 문어체 사용을 고집했다. 이로인해 성경은 새로 자라나는 신세대들에게 접근하기 어려운 책이 되고 말았다. 그 이후 성경에 현대문체가 적용되는 데 30년의 세월이 걸리고 말았다. 권서들과 전도부인들 한국 개신교회는 "성경의 종교"였다. 번역된 성경을 전국 곳곳에 뿌리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설립하는 일을 했던 사람들은 선교사들이 아니라 한국인 권서과 전도부인들이었다. "권서" 혹은 "매서"는 성경과 경건한 문서들을 파는 사람을 말한다. 여성의 경우에는 "여자권서" 혹은 "전도부인"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이들은 성서공회에 직원으로 소속되었고 선교사들의 관리를 받았다. 이들은 전도를 하고 성경과 책을 팔고 신앙인들이 형성이 되면 그곳에 선교사들을 데려가서 세례를 주고 교회가 설립 될 수 있게 했다.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 토마스 목사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권서(colporteur)자격으로 1865년 8월 31일에 한국의 서해안에 도착해서 한문성경을 주고 한국어를 배웠다. 서상륜은 1882년 영국성서공회(BFBS)로부터 최초의 한국인 권서로 임명되었다. 그는 1883~85년 사이 서울에서 성경을 보급했고, 새문안 교회의 설립자 중의 한사람이 되었다. 호주선교사 왕길지는 1908년 영국성서공회 한국지부의 25주년을 기념식의 축사에서 선교사들의 사역에서 권서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명했다. 나는 귀 성서공회가 지원하는 권서들을 나의 사역에 고용하는 편의를 받아왔습니다. 나는 항상 이들을 나의 전위로 척후병으로 간주했습니다. 실재로 내가 일하는 시골에서 교인들이 모이게 되는 시작은 직접적으로―일부는 간접적으로―권서들의 영향력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 권서들의 매우 고귀한 도움이 없었더라면 큰 전진을 이룩할 수 있었을지 과연 의심스럽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진리를 전파하기 위해 바람과 비와 맞서야 했고, 강을 건너고, 높은 산길들을 가로 질러야 했습니다. 시장터에서, 길가의 휴식처에서, 기차역에서, 성경을 판매하고, 옆의 여행자들에게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관심 있는 사람들의 집을 방문함으로써 그들은 그 씨앗을 뿌렸습니다.1 선교사역에서 큰 진전은 주로 한국인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외국 선교사들은 이교도적 환경에서 성인으로 자라나서, 이교적 사상에 깊이 물들어 있는 한국인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비록 선교사가 한국말을 잘한다고 해도, 그는 실재로 그런 한국인과는 다른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교로부터 회심한 한국인은 비그리스도인의 생각과 말을 알고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2 초기 권서들의 전도 권서 김성호은 1908년에 3700km를 여행했으며 복음을 전하면서 947권의 단권성경과 신약성서를 판매했고, 4688명을 만나고 전도했다. 1905년 대영성서 공회 한국지부 총무 밀러의 여행 1905년 권서 소요한 장로 장신대 소기천 교수의 조부 그녀는 성경을 판매하고 그 값을 농산물로 받았다. 당시 성서공회의 원칙은 성경을 무상으로 배포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성경의 귀함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전도부인들의 모습 4) 문서선교 ① 찬송가 기독교신앙에서 찬양은 예배의 핵심에 속하는 부분이다. 따라서 초기 선교사들은 예배에 필요한 찬양가를 필요에 따라 만들었다. 찬송가 편집은 각 교파에 따라 따로 이루어졌으나 1908년 장로교와 감리교회가 연합하여 합동찬송가를 만들어 내면서 예배를 통일하도록 했다. 따라서 성경번역과 찬송가 출판을 중요한 에큐메니칼 활동이 되었다. 감리교의 찬송가는 다음과 같다 《찬미가》(1892) 감리교 선교사 존스(G.H. Jones)와 로드 와일러(L.C. rothweiler)가 편집하고 출판하였다. 《찬미가》(1895중판) 미감리회는 새롭게 편집을 하여 출판하였다. 《찬미가》(1905) 윤치호는 개인적으로 찬미가를 편집했는데 이 찬송가의 10장에는 "애국가"가 삽입되어 있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애국가는 초기에 찬송가로 불렀던 것이다. 이 당시 기독교인들은 나라 사랑을 담은 찬송가를 많이 지었는데 이 애국가의 저자가 윤치호라는 주장이 있다. 감리교 찬미가 1897 윤치호의 찬미가에 실린 애국가(1905) 당시는 찬송가를 구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손으로 필사를 했다. 위의 사진은1905년 찬미가의 필사본의 일부이다. 장로교에서 사용했던 찬송가 《찬양가》(1893) 언더우드는 최초로 4성부의 악보를 포함하는 찬양가를 출판했는데 주로 서울을 중심으로 사용했다. 《찬셩시》(1895) 평안남북도와 황해도(서북)에서는 그라함 리(G. Lee)와 기포드(M.H. Gifford) 부인이 편집한 찬셩시가 사용되었다. 당시 이 찬송가는 장로교회의 대세를 차지하고 있었던 서북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에 1902년에 장로교공의회에서 공인 찬송가로 인정을 하게 된다. 언더우드 찬양가 1894 장로교찬송가 발행 1895 공인 1902 찬송하는 소리있어 사람기뻐하도다(19장) 《찬숑가》(1908) 장ㆍ감연합찬송가: 1903-1907년 대부흥운동은 개신교 안에 에큐메니칼 운동을 활성화 시켰다.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사이에 교파연합운동도 일어났고, 신문도 하나로 통합되었고, 학교도 공동으로 운영하는 변화가 일어났다. 그래서 예배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 1908년 찬송가가 연합되어 출판되었다. 1908 장감연합찬송가 《신정찬송가》(1931)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장감이함께 사용하던 새로운 찬송가를 발행했다. 이 찬송가 발행은 주로 선교사들이 중심이 되었다. 서북이 중심이 되었던 장로교 총회는 이 찬송가를 인정하지 않고 정인과 목사가 중심이 되어 새로운 《신편찬송가》(1935)를 발행하여 사용했다. 이러한 행동은 장로교가 절대 다수였던 상황에서 연합운동을 깨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정찬송가 1931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발행) 신편찬송가(1936)-장로교 정인과 목사가 발행-장감 연합찬송가 정신 훼손 《통일찬송가》(1983) 한국개신교회는 모든교파가 초교파적으로 사용하는 통일 찬송가를 발행하는데 이르렀다. 이것은 예배의 통일을 위해 상당히 중요한 결과였다. 기타 침례교, 성공회, 구세군에서 사용하는 찬송가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복음찬미》(1899)펜윅의 대한기독교회 《셩회숑가》(1903),《천도찬사》(1904) 영국성공회 《굿셰군가》(1908) 구세군 《복음가》(1911)동양선교회 성공회의 성회송가(1903) 성공회 천도찬사 (1904) 펜윅의 찬송가 1899-1939사용 성결교회 부흥성가(1913) ② 신문 초기 한국교회는 신문을 발간하여 신앙 뿐만이 아니라 선진 문물을 소개하였다. 1887년 감리교의 아펜젤러는 〈죠션 그리스도인 회보〉를 출간했고, 장로교의 언더우드는 〈그리스도 신문〉을 출간했다. 특히 그리스도 신문은 기독교 진리 전파와 민중계몽에 초점을 맞추어 선진제도, 문물, 관습과 농사개량법, 공업기술 보급 등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 조선 정부에서도 구독을 하였다. 감리교회와 장로교회가 각각 따로 발행하던 두 신문은 1905년에 통합하여 <그리스도 신문>으로 발간되다가 〈예수신보〉(1907-1910)로 운영되었다. 기독신보는 1915년 12.8 창간된 초교파 기독교 주간신문이다. 장로교의 "예수교회보"와 감리교의 "그리스도회보"를 통합하여 발행한 것이다. 민족주의 기사를 많이 실어 검열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경향신문〉(1906)과 〈구셰신문〉(1909)도 발행되었다. 1897년 4.1 창간, 주간 편집과 발행인은 언더우드이며 미국 북장로회 선교회 발행이다. 8면으로 3단 조판 순한글 내려쓰기이다. 종합적인 신문이다. 감리교 신문 1910-1914 게일이 발행
③ 잡지의 발행 선교사들은 각기 영문잡지를 발간했는데 그것도 초기에는 장로교와 감리교회가 각기 따로 발간하다가 1905년에 연합으로 발간하게 되었다. 〈The Korean Repository〉(1892) ― 감리교 선교사 올링거가 발행하던 잡지였다. 〈The Korean Review〉 (1901) ― 감리교 선교사 헐버트가 발행하던 잡지였다. 〈The Korea Methodist〉 (1904) ― 북감리교회와 남감리교회는 영문잡지를 통합하여 이 잡지를 발간했다. 〈The Korea Field〉 (1901) ― 다른 한편 장로교 선교사 빈튼은 이 잡지를 발간했다. 그러다가 교파들 사이에 에큐메니칼 운동이 발전하면서 장로교회의 〈코리아 필드〉와 감리교회의 〈코리아 메도디스트〉를 통합하여 1905년에 〈The Korea Mission Field〉(1905)를 발간하게 되었다. 한국어로 발간되었던 기독교 잡지는 다음과 같다. 〈신학월보〉1900 감리회 존스 〈은혜와 진리〉1904 플리머드 형제파 노리마츠 〈예수교회서회보〉1904 빈튼 〈엡윗청년회보〉1904 정동감리교회 〈성경강론월보〉1906 정동감리교회 〈가뎡잡지〉1906 상동교회 청년학원(전덕기, 유성준, 주시경, 노병선, 양기탁 등) 구세론 . Discouese on Salvation or the Law and the Gospel. 1908년 간행된 기독교 교리서. 마펫(S.A. Moffett) 저술. 대한예수교장로회 발행. 존 로스 <종고성교회월보〉1908 영국성공회
조만민광, 1894년 간행된 성공회 발췌 성경이다. 트롤로프 편저로 서울 영국 성공회가 발행하였다. 복음서와 사도서신 중 384절을 발췌하여 편집 주일예배용 성서독서집과 전도용 소책자로 사용 되었다
아모권면, 1906년 간행된 기독교 계몽도서. 노블(W.A. Noble) 부인 저술. 대한예수교서회 발행 청주 선교부 소속 밀러 선교사가 특별히 청주 지역 지방 선교를 위해 혼자서 한글을 배우며 기독교 교리를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大道〉1908 양주삼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 기독교인들을 위해 발간했다. 《예수셩교요령》1883년 로스가 발간 《랑자회긔》1885 이수정 번역 《셩교촬요》1889 아펜젤러 《속죄지도》1889 언더우드 《라병론》1890 올링거 《미이미교회강례》1890 아펜젤러 《크리스도쓰 셩교문답》1890 스크랜튼 부인 최초의 출판사: 1889년 감리교 선교사 올링거는 배재학당 안에 삼문출판사 설립하였다. 이 출판사는 1899년 미이미교회 출판소로 이름을 바꾸었고 1906년에 장로교 감리교 합동 연합출판사로 개편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 북장로회가 불참하였다. 1890년 다른 한편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헤론, 그리고 감리교의 올링거 3인의 노력으로 조선성교서회를 설립하게 된다. 이 출판사는 기독교 서적, 전도지, 정기간행물의 보급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서회가 초기에 출판했던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성교촬리》(1890) 《텬로지귀》(1890).《훈진언》(1891),《쟝원량우샹론》(1892),《구셰진젼》(1893), 《덕혜입문》(1893)
《셩교촬리》1890 언더우드
1893년 간행된 전도 문서이다. 밀른이 저술하고 마펫이 번역하였다. 서울 예수성교서회 발행으로 54면 순 한글이다. 본래 중국에서 한문으로 간행된것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내용은 기독교인 장씨와 유교인 원씨의 대화를 나누는것으로 기독교가 유교의 부족한것을 채워 완성한다는 "보유론"이다. 덕혜입문』은 중국에서 그리피스 죤(Griffith John)이 저술한 전도책자이다. 일종의 서양(기독교)철학입문서로서 내용은 공자, 주자, 장자, 자하, 주염계 등 동양성인들의 논설을 긍정하면서 그 한계를 기독교진리로 보훙하는 형태로 저술되었다. 텬로력정, 1894년 간행된 기독교소설로 번연 저 게일 번역본이다. 서울 삼문출판사 발행으로 서구 소설의 최초의 번역본이다. ‘대한성교서회’(1897)는 훗날 ‘조선예수교서회’(1915)라고 명칭을 변경했고, 오늘날 "대한기독교서회"가 되었다.
삼문출판사 조선예수교서회 건물(1906-10) 그러나 아쉽게도 초기 한국인들의 신학적 작품은 지극히 저조했다. 그것은 주체적 수용을 뒷받침할만한 신학수립의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었다. 문서사업이 거의 선교사들에 의해 장악되었고 신학사상과 조류가 번역에 의존하면서 한국교회의 서구 의존적 신학풍토가 정립되어 동양문화를 파괴하는 서구지향적 문화로 흐르는 가능성이 컸다. 다음은 한국인들의 신학 작품이었다. 홍정우《七得》(1895), 노병선《파혹진션론(破惑進善論)》(1897), 길선주《해타론(懈惰論)》(1904), 《만사성취》(1916), 최병헌《예수텬쥬량교변론(耶蘇天主兩敎辯論)(1909)》-가톨릭과 개신교 비교 변증,《 성산명경 (1911)》, 《만종일련(1922)》 -비교종교학 파혹진션론, 1897년, 대한성교서회 노병선(1871) 은 협성회와 엡윗청년회의 창립회원이었고 배재학당의 영어교사였고 평신도 설교자였다. 그는 파혹진선론에서 선교사들이 무엇 때문에 이 땅에 와서 자신들의 돈을 쓰며 교회, 학교, 병원, 출판사를 세워 봉사하는지 의혹을 갖는데서 출발한다. 그는 자신도 이러한 의심을 가졌으나 기독교 신앙을 알 때에만 의혹을 피할 수 있고 참된 진리를 알 수 있다고 기독교를 변증하였다. 또한 그는 기독교가 본래 동양의 종교이었고, 사실은 "동양도, 서양도 아닌 하늘의 종교이다" 라고 반대론자들에게 변증하였다. 해타론, 1904년 간행된 기독교 전도문서이다. 길선주 목사 저술로 평양신학교 졸업반 때 쓴 것이다. 해타(게으름)을 피하기 위해 부지런히 신앙생활 할 것을 권고한다.1 그리고 영생에 대해 보다 자세한 설명을 추가하여 1916년에 길선주 목사가 출간하였다. 그리고 이 책에 담겨 있는 10여편의 삽화는 문맹률이 높던 당대 일반인들에게 신앙적인 아이콘 역할을 수행했다. 즉 상징적인 그림을 통해 기독교인의 고생과 순례의 길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길선주 목사의 <만사성취>는 한국초기 개신교 형성기에 <천로역정>이 미친 영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성산명경 1911년 감리교 초대 목사 최병헌이 지은 전도문서이다. 기독교와 유불선 토착종교의 대화를 담고있다. 그림에 학을 타고 내려오는 백운은 (도교), 소나무 아래 도포 차림의 진도는 유고, 선비에게 인사하고 있는 승려 원각은 불교, 성경 짐을 지고있는 매서인 신천옹(최병헌)은 기독교를 상징 2. 선교연합활동과 선교정책 ⑴ 선교부 연합활동 개신교 선교사들은 교파 형 교회들의 파송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조선에 들어와서 서로 협력하고 경쟁을 피하며 협력했다. 1889년 북장로회와 호주빅토리아장로회(데이비스 목사)는 장로교연합선교공의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이듬해 데이비스 목사가 순직하면서 공의회는 무산되었다. 그리고 1893년 1월 북장로회와 남장로회는 장로회연합선교공의회(the United Council of Presbyterian Missions)를 다시 조직했다. 목적은 조선지(朝鮮地)에 갱정교(更正敎) 신경(信經)과 장로회 정치(長老會政治)를 사용(使用) 하는 연합교회(聯合敎會)를 설립(設立)하는 것이었다. 그 이후 호주장로회와 캐나다 장로회가 가입하여 4개의 장로회선교회 공의회가 설립되었다.
1893년 북장로회 선교사들 (왼쪽이 언더우드 가족) 1893년 한국에 들어온 7명의 남장로회 선교사들 장로교공의회는 1901~1907년 사이에 한국장로교회를 치리하는 실질적인 정치기구(한국인들이 참여)였다. 1901년 장로교공의회 네 개의 장로교 선교회와 두 개의 감리교 선교회는 협력하여 "한국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1905. 9.11)를 조직했다. 이것은 한국교회 안에서 최초로 이루어진 초교파적인 연합 기구였다. 이 조직을 만든 목적은 한국에 유일한 복음주의 교회(개신교회)를 조직하려는 것이었다.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비록 교파는 달랐지만 한국에 하나의 개신교회를 만들기로 합의하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교회의 이름은 "대한예수교회"였고 신경도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일부 선교사들은 교파연합에 비협조적이었고, 특히 미국 남장로교회는 감리교와 장로교가 통합하는 것을 교리적으로 반대하였다. 사실 한국의 교인들은 그 당시 장로교가 무엇인지 감리교가 무엇인지 알고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예수교회가 중요했다. 선교회 연합공의회는 단일교회 운동에는 실패했지만 다양한 에큐메니칼 사업을 추진했다. 그 첫 번째가 장감의 정기 간행물, 신문, 찬송가를 통합한 것이다. 두번째는 장로회와 감리회가 개별적으로 운영하던 미션학교를 통합해서 운영한 것이다. 1905 배재와 경신 통합운영 1907 평양의 남녀중학교 통합운영 1906 숭실대학(Union Christian Colledge) 1915 연희전문학교 1913 세브란스병원, 세브란스의학교 1920 평양의 제중원과 기휼병원 통합 평양연합기독병원 설립 세번째는 1905년 장감연합 주일공과를 발행했다. 그러나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와 서울의 감리교협성신학교는 교파 신학교로 정착하였다.
평양 장로회신학교
평양장신 1회 졸업생 서울 감리교 협성신학교 협성신학교 1회 졸업생
(2) 기독청년회(YMCA) 기독청년회는 초교파적인 연합사업이었다. 선교사들은 미국, 캐나다, 호주 등지에서 YMCA활동과 직간접적인 관련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한국에도 YMCA활동이 꼭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1901 질레트(Philip Gillette, 1874-1939 한국명 길예태)는 YMCA 총무로 부임했다. 그는 배재학교 안에서 최초의 학생회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1902년 평양 하령회에서 숭실학교 학생들에게 처음 야구를 가르쳤다고 한다. 이것이 최초의 한국 야구의 기원이라고 하지만 정식 경기로 한다면 1905년 질레트가 야구 장비를 요청하여 들어온 것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첫 시합은 1906년3월15일 황성YMCA와 덕어학교의 경기로 알려져 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야구단을 창립했고 1911년 105인 사건이 일제의 고문과 조작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서방 언론에 폭로하였고 강제 출국 당했다. 그는 상해에 가서 한국의 독립을 후원했다.
최초의 야구단 1903 황성YMCA가 공식적으로 출발했다. 회장에는 연동교회 담임목사였던 게일, 부회장에는 윤치호가 선출되었다. YMCA는 처음에 사교와 친목, 언어 교육 등으로 상류층에 접근했다. 당시 교회에는 가난한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 입교했기 때문에 상류층 인사들에게 별도의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후에 YMCA는 서서히 가난한 청년들에게 목공, 페인팅, 사진, 금속, 직조 등의 직업훈련을 시도했다. 그 외에도 기술교육, 체육교육, 스포츠의 소개, 국민보건 및 사회계몽운동을 전개 했다. 1904년 독립협회 운동으로 투옥되었던 지식인들 가운데, 감옥에서 선교사들이 넣어준 성경과 책들을 읽고 집단적인 개종을 체험한 사람들, 이승만, 유성준, 이상재, 신흥우, 김정식 등은 YMCA에 가입하였다.
1903년 한성감옥에서 중죄인 복장이 이승만 1910년 이후 학생YMCA는 하령회(여름에 이루어진 수련회)를 통해 전국 조직망을 발전시켰고 그 조직은 1919년 3.1운동에 기여했다. YMCA는 1920년대 중반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했고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과 긴밀한 접촉을 하였다.
황성기독교청년회관 조선기독교대학(연희전문학교) 내의 YMCA모임 (1916.10.30) 농촌사업지도자협의회 대표들(YMCA) 1928 1938년 조선YMCA연합회는 일본 YMCA에 강제로 흡수되었다.
3. 초기 선교과정에서의 갈등과 수난 ⑴ 선교사 사이의 불화 성공적인 선교 활동의 이면에는 선교사들 사이에 내적인 불화도 있었고 외적으로는 박해도 있었다. ① 알렌과 언더우드 사이 알렌은 최초의 선교사로서 왕실의 총애를 받고 있었기 정치적 상황에 민감했고 정부와 충돌을 피하고 의료를 통한 간접선교를 행할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중국선교의 경험도 있었기 때문에 선교사들 사이에서 대부로 군림하였다. 반면 언더우드는 교육선교를 통한 복음전도에 주력했다. 언더우드의 직접적인 선교활동은 알렌과 자주 충돌을 일으켰고 서로 비난하는 관례가 되었다. ② 알렌과 헤론사이 알렌은 전문의가 아니지만 민영익을 치료하여 제중원의 책임자로 군림하였다. 반면 헤론은 본국에서 의과대학의 교수직에 있던 전문의사였다. 그가 볼 때 알렌은 의사로서 부적합한 사람이었다. 둘 사이에도 인신 공격과 비난이 있었다. 갈등의 원인 ⑵ 신구교간의 갈등 1890년대부터 자유로운 선교활동이 보장 되면서 천주교회와 개신교 사이에는 충돌과 반목이 자주 나타났다. 배경: ⑶ 교폐문제 교폐(敎弊)란 종교가 민간인에게 끼친 피해를 의미한다. 배경: 한국정부의 주권을 무시하는 선교사들의 치외법권적인 행동과 한국인들이 서양인에 대해 양대인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데서 발행했다.
삼국교폐사실성책 1901년 제주도 교폐(이재수의 난) 관계 자료 사망자 317명 명단 삼군평민교민물고성책
4. 교회의 형성과 발전 ⑴ 초기신앙공동체 형성 1884~1898 사이의 전도 행위는 사실상 국법에 어긋나는 불법 행동이었다. 이러한 어려움을 뚫고 국내에서 최초로 일어난 세례식은 “노도사”라고 알려진 노춘경의 수세였다.(1886. 7.18) 1885년 어느 날 노춘경은 기독교 배척문서를 읽고 기독교에 의문을 가졌다. 그는 헤론 선교사의 어학 선생이었고 알렌의 통역을 하던 친구를 찾아갔다. 그는 알렌의 집을 방문했으나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그의 집에서 한문으로 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몰래 가져가서 밤을 새워 읽게 되었다. 그는 감동을 받았고 용기를 내어 언더우드를 찾아가서 성경을 공부하고 예배에 참여했다. 그리고 결신을 하기에 이른다. 수세 사실은 밖으로 알려지면 안되었다. 언더우드는 문 밖에 헐버트를 수문장으로 세우고 안에서 비밀리에 노춘경에게 세례를 주었다. 두 사람 다 목숨을 건 신앙적 결단을 한 것이었다.
국내최초의 수세자 노춘경
언더우드(25세 당시)와 헐버트 1886년 말, 소래에서 일했던 서상륜은 서울의 언더우드를 찾아와서 소래에 와서 개종자들에게 세례를 달라고 부탁했다. 이것은 서상륜과 언더우드의 역사적인 만남이었다. 1887. 1.23 서경조, 정공빈, 최명오는 서울에 와서 세례를 받았고 계속해서 소래 출신 교인들이 세례를 받았다. 1887년 9월초 소래출신 세례교인만 11명이었다. 서상륜 1887. 9. 27 정동 언더우드 사택에서 14인의 세례교인으로 최초의 조직교회 ‘정동교회’(후에 새문안교회)가 창립되었다. 이 교회는 토착신앙공동체와 복음을 전래한 선교사들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1887년 말 25명의 세례교인이 생겨났다. 1887년 10월 말 언더우드는 4주간에 걸쳐 지방여행(송도, 소래, 평양, 의주)을 했다. 1888년 4월에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다시 북부여행을 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1888년 말 65명의 장로교 세례교인이 생겨났다.
언더우드의 집(새문안교회의 전신)
릴리아스 호튼, 언더우드 부인, 최초의 여의사
언더우드의 신혼여행 겸 지방순회 순회전도를 하는 무어선교사 새문안 교회 감리교회는 배재학당을 통해 상당수의 초기 개종자를 얻었다. 1887. 7. 24 배제학당의 학생 박중상이 아펜젤러에게 최초의 감리교 세례를 받았다. 10월 2일에는 한용경이 세례를 받았다. 10월 9일 아펜젤러는 정식으로 교회를 시작했다. 교회 이름은 “베델”이었다.(정동감리교회의 전신).
정동감리교회(최초의 감리교회) 1887 1887년 10월 16일 최성균의 아내가 한국 여성 최초로 개신교 세례를 받았다. 최성균은 로스ㆍ매킨타이어와 함께 만주에서 성경번역에 참석했고, 1887년 9월 말 로스가 내한하여 아펜젤러에게 그를 소개했다. 최성균은 아펜젤러의 권서가 되어 평북 의주에 전도하여 의주읍 교동에 교회를 세웠다. 복음의 수용단계와 교회설립단계에서 한국인 구도자들은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⑵ 초기 교회박해 초기 교회는 수구 세력과 갈등을 겪게 되고 그들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① 영아소동(1888) 수구세력들은 기독교의 확대를 두려워하면서 선교사들이 조선 어린이들을 유괴해서 외국에 팔거나, 실험대상으로 사용한다. 또 남색을 즐긴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 결과 군중들은 외국인을 습격하거나 위협을 가했고, 한국인 고용자들에 대한 구타와 살해 위협이 있었다.
영아소동 미국공사 딘스모아가 외아문 독판 조병식에게 보낸 1888년 6월 18일자 공문 "외국인들이 어린아이들을 잡아다 삶아 먹고 쪄먹는 다고 공현한 소문"
릴이아스 호튼(언더우드 부인)의 Fifteen Years among the Top Nots 안에서 영아 소동에 관한 기사 ② 평양기독교인박해(1894.5.10) 평양감사 민병석은 감리교의 조사 김창식과 장로교의 조사 한석진을 비롯한 교인들 체포해서 죽기 직전까지 구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닥터 제임스 홀 아펜젤러와 함께 찍은 노블 가족(1928) 한석진 (훗날 최초의 한국인 7인 목사중 1인) 딸은 태어나기 전 민병석은 치외법권이 있는 서양 사람을 체포할 수 없기 때문에 조선교인들만 체포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장로교 소속 한석진, 최치량, 신상호, 송인서, 우지룡, 감리교 소속 김창식, 오석형, 이항선과 집을 판 홍재응, 김씨 등이 체포되었다. 관아에서는 이들은 심하게 구타한 후 배교하면 석방하겠다고 회유했고 선교사들에게는 돈을 요구했다.
김창식(훗날 최초의 안수받은 감리교 설교자) 지방에서 교인박해가 일어나면 선교사들은 공사관에 연락을 했고, 공사관은 조선 정부에 대해 항의했다. 조선 정부는 박해를 중지하라고 명령을 내렸고, 지방 관리는 이에 복종하여 기독교인들을 석방하는 이러한 과정이 한동안 반복되었다. ③ 기독교인 박멸기도(1900) 1899년 서울에서는 전차 공사가 진행되었다. 관리 김영준, 이용익 등은 1900년 12월 1일을 기해 전국의 선교사들과 기독교인들을 박멸하려는 밀서를 보낼 계획을 세웠다. 지방을 순회중이던 언더우드는 이 사실을 알고 급하게 에비슨에게 라틴어로 전보를 보냈다. 에비슨은 알렌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알렌은 고종에게 보고하여 이러한 박해를 사전에 막을 수 있었다. 이 사건은 1900년 중국에서 일어난 “의화단의 난”(the Boxer Rebellion)에 영향을 받은 것이고 전차가 개통되면 조선의 경제가 외국인에게 침탈될까 우려했던 결과로 일어난 것이었다.
최초로 개통된 전차
서소문의 전차(1900) 이상의 기독교 박해가 일어난 사건의 원인은 ① 1866년 제너럴 셔만호 사건 이후, 평양 주민들의 반외세 감정이 심히 좋지 않았다. ② 선교사들의 돈을 갈취하려는 지방부패 관리의 음모가 있었다. ③ 외래종교에 대한 전통종교 및 문화의 배척이었다. 일련의 박해 사건들이 일어난 기간은 기독교가 겪어야 했던 민중 시험기로 볼 수 있다.
⑶ 청일전쟁과 교회의 발전―민중계층의 입교 19세기 말 한반도는 열강들의 각축장이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은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걸었으나 봉건군대와 외세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 결과 한반도는 청일전쟁(1894-5)의 희생지가 되었다. 그후 일본은 한반도의 경제적 이권을 장악했고, 미국와 영국의 지원을 받으면서 러일전쟁(1904-5)에서 승리했다.
체포되어 가는 녹두장군 전봉준
사발통문
청일전쟁을 치르러 들어오는 일본군 1894
일본군에 포로가 된 청군 한국 개신교는 청일전쟁 이후 1000명→4000명으로 교인수가 증가했고 러일전쟁(1904-5)이후 35000명→55000명으로 교인수가 급증했다. 한국교인 수의 급증은 민족의 위기와 관련되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일조약 1905, 대부흥운동 1907) 그 당시 입교한 층은 대다수가 민중 계층으로서 그 입교 동기는 기독교는 힘의 종교라는 인식이 있었다. 교회는 ‘외국인의 소유’이고 치외법권의 영역으로 인식되고 있었기에 교회에 속하면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을 수 있다는 보호심리가 크게 작용했다. 실재로 평양에서 일본군은 선교사들에게 교회 재산은 보호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선교사들은 교인성장을 즐거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모식신자’(rice christian)가 늘어나는 것을 우려했다. 이 무렵에 교회 입구에 십자기 혹은 성조기를 내거는 예가 생겼다. 황해도 소래교회는 성 조지(St George)십자가를 걸었다. 서울의 상동병원 지붕에는 성조기가 게양되었다.
성 조지 십자가 러일전쟁의 루트 러일전쟁을 풍자한 만화 전쟁을 치르러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 1904 ⑷ 독립협회(1896.7-1898,11)―지식인의 입교 19세기말-20세기초 한국을 둘러 싼 국제 정세는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일의정서(1904) 영일동맹(1902, 1905), 일본과 미국 사이의 가츠라-테프트 밀약(1905), 을사늑약 (1905), 정미7조약(1907), 한일병탄(1910)으로 이어지는 비극의 역사였다. 교회는 정치적 보호기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부의 부패 시정하는 적극적 기능도 있었다. 1899년〈대한크리스도인회보〉기사를 보면 관리들이 기독교인이 많은 곳에는 지방 관리로 가기를 꺼려한다는 사실이 적혀있다. 그곳에서는 함부로 착취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이 당시 민족의식을 지닌 유식계층도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입교 동기는 민중들의 동기와는 크게 달랐다. ① 기독교를 통하여 국가의 민족운동을 전개하여 자주독립국을 쟁취하려는 뜻이 있었다. ② 기독교 사상을 통하여 민도를 높이고, 부국강병 모색하여 민주적 입헌국가 수립하려 했다. 이러한 동기를 제공한 것이 독립협회운동이었다.
독립신문 제작 모습 독립관 서울의 독립협회 활동은 서재필, 윤치호 등 기독교 지식인들과 이상재 등 개혁관료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운동이었다. 그들은 〈독립신문〉을 창간했다(1896.4). 젊은 시절의 서재필과 윤치호 18세의 이승만(오른쪽) 1893 도미직전 이승만 29세 (1904)
독립협회는 초기에는 국민교육, 민주창달, 외세배격 자주독립국가 수립, 부패한 정부관리와 정치 혁신이라는 충군애국적 계몽운동을 전개 했다. 그러나 이 운동이 민중화 되면서 후반부에는 만민공동회ㆍ관민공동회의 대중 집회를 통해 민중참정권, ‘입헌군주제’를 요구하는 체제 개혁적인 정치운동으로 발전했다. 독립협회의 전국확대 독립협회가 지방으로 확대 되는데 지방 지회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면 평양지회는 훗날 목사들이 된 한석진, 방기창, 방화중, 김종섭 등이 중심이 되었다. 1898년 가을 평양 만민공동회에서는 기독교인 안창호가 관리들의 부정과 탐학을 비판하여 평안도 관찰사 조민희와 평양군수 이계필이 사직하는 일도 일어났다.
독립협회운동 당시의 안창호 * 정부 수구세력의 개혁파 제거 반격(1899~1904) 독립협회 운동이 입헌주의로 확대되면서 수구파들은 위기를 느끼고 권력과 보부상을 동원하여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기독교를 탄압했다. 예를 들면 보부상들은 배재학교와 이화학당에 협박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승만, 이상재, 이원긍, 유성준, 홍재기, 안국선, 김정식, 이준, 신흥우, 양의종, 박용만, 정순만, 이승인, 유동근, 이동녕, 이종일 등이 체포되었다. 이들 대다수는 고위 정치관료 출신이었다. 그 중에는 이승만과 신흥우 등 몇 사람은 배재 학당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 * 옥중개종 사건 아펜젤러, 벙커, 언더우드, 게일, 헐버트 등 선교사들의 옥중 지식인 석방운동을 벌이는 한편 감옥에 성경, 기독교서적 및 교양 서적을 제공하였다. 이승만, 신흥우, 양의종은 한성 감옥에 도서실을 운영하면서 일반 정치ㆍ역사ㆍ철학서적/ 기독교한문서적/ 기독교 한글서적/ 정기간행물을 비치하고 공부하였다. 그러던 중에 이승만이 기독교로 개종하였다(1902). 이원긍, 이상재, 유성준, 김정식, 홍재기, 안국선, 이승인, 신흥우 등은 1903년 말에 개종하였다. 이들의 개종 동기는 나라의 구원과 개인의 구원이 함께 들어 있었다. 1903년 한성감옥에서 중죄인 복장이 이승만
옥중개종자의 모습 1904년 옥중에서 개종한 자들이 석방되었다. 이들 중에서 유성준, 이원긍은 게일이 시무하던 연동교회에 출석하였고 이상재, 신흥우, 김정식 등은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 가입하였다. 평가 옥중개종은 유식계층의 기독교 이해에 큰 변화를 가져왔고 유식계층의 기독교 입교를 유발시켰다. 이들 옥중개종자들은 개화주의적 민족의식이 강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구현할 수 없는 민족 자주국가 실현을 기독교 교육과 신앙운동을 통해 실현하려고 했다. 이들의 의지는 교육과 계몽을 통해 민중에게 확산되었고 이로써 의식화된 민중의 힘을 바탕으로 기독교 민족운동이 가능하게 되었다.
번역자회(1906) 앞줄: 레널즈, 언더우드, 게일 뒷줄: 김정삼, 김명준, 이창직
권서의 모습
여자 권서의 모습
장감연합신문 구세신문(창간호)
언문초학, Jesus Saves(with alphabet) 1917년 간행된 전도지. 밀러(F.S. Miller) 저술.
<만사성취>는 1901년에 지은 <해타론>에 기초하여 시조와 그림,
이것은 한학과 동양사상 에 능숙한 길선주 목사의 문학적인 관점을 잘 보여준다.
앞줄 왼쪽부터 강원달, 홍재기, 유성준, 이상재, 김정식,
뒷줄 왼쪽 부터 이숭인(이상재의 아들), 유동근, 김린, 안국선,
보령사 황성기독청년회 하령회
황성기독청년회하령회
평양개척의 선구자 마펫과 그래함 리
독립협회 토론회에 모여드는 군중
앞줄 왼쪽부터 강원달, 홍재기, 유성준, 이상재, 김정식,
뒷줄 왼쪽 부터이숭인(이상재의 아들), 유동근, 김린, 안국선
[출처] 제5장 선교의 자유와 초기 선교활동 (1885~1906) (2)|작성자 물길손길
첫댓글 그림이나 사진이 나타나지 않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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