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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목련이 필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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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한 시간 넘게 엎드려 인민군 동태를 살피고 있다. 무사히 복귀할 수 있나? 발각되면 싸우다 자폭해야 하나 아니면…? 한 달 전 머리카락, 손발톱을 잘라 봉투에 넣고 유서 쓸 때부터 머리속에 여러 그림이 빠르게 지나갔다. 잡혀 고문당하느니 다 죽이고 죽는 게 쉬운데 안타까운 건 가족과 친구들을 영원히 볼 수 없다는 거다. 내 심장이 두 쿵 거리며 막 아우성치고 저만치서 자던 산비둘기도 눈을 떴다. 모기가 아까부터 얼굴과 손등에 달려든다. 자폭용 수류탄을 만져 확인했다. 권총을 꼭 쥔 손은 땀에 미끈거린다. 풀 짓이겨진 냄새가 난다. 목구멍이 메말라 침이 안 삼켜지고 긴장해서 토할 거 같다. 갑자기 하얀 목련이 떠오른다.
내 소원은 군대에서 낙하산 타보는 거였다. 기왕 가는 군대에서 낙하산을 못 타면 평생 한이 될 거 같았다. 베레모 쓴 군인만 보면 낙하산을 탈 수 있는 부대를 물었다. 그러다 겨울방학 때 알아보러 간 병무청 벽에 큰 대자보가 보인다. 붉은 손글씨로 ‘특수부대원 모집’ … 한참을 서서 쳐다보는데 한 아저씨가 다가왔다. 난 낙하산을 탈 수 있냐고 만 물었다.
대한민국 국방부와 계약한 후 과연 잘 한 건가 순식간에 담배 한 갑을 다 태웠다. 누군가가 아까 흔들리는 버스 커튼 사이로 ‘38선 표식’을 봤다고 속삭인다. 칠흑 같은 산속에 반짝이는 불빛들이 보인다. 한동안 맞고 앞뒤로 구르고 뛰다 보니 불빛들은 몽둥이를 든 사내들 눈이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발가벗겨 그냥 짐승 우리 속에 내던져진 거 같다. 누군가 집에 돌려보내 달라고 했다가 다시 춤추는 몽둥이를 보고 혹시나 했던 우리는 포기했다.
꽃피는 4월이라지만 설악산은 아침저녁으로 추웠다. 강원도는 5월 말까지 응달엔 눈과 얼음이 보인다. 나무도 옮겨 심으면 잎이 시들고 새 흙에 적응하려는 시간이 필요하다. 입대 후 일주일이 지났을까 몸살 기운이 든다. 조교에게 말하니 모래 자루 두 개를 양어깨에 메고 연병장을 뛰란다. 조교의 몽둥이에 오전 내내 속옷에 맨발로 뛰었고 몸살은 사라졌다. 처음엔 몇 km로 겨우 뛰었던 내가 이젠 매일 양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30㎏의 모래 배낭을 메고 밤에도 시속 13㎞로 산봉우리까지 뛰었다.
개보다 더 빨리 산을 뛰어올라 건넛산으로 가파른 암벽을 내달렸다. 우리는 무조건 북한 특수부대보다 체력이 앞서야 했다. 하루하루 조금씩 적응이 되는 게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나를 그 틀에 구겨 넣고 맞춰갔다. 기준에 통과 못 하면 몽둥이가 날아오니 목숨을 걸었다. 하루도 이렇게 힘든데 언제 한 달, 일 년이 가고 집에 가는 날이 오나 생각하니 당장 미치는 거 같았다. 한동안은 석양을 보면 내일이 또 오는 게 두려워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인민군복을 입고 북한 군가를 외우고 북한말씨를 배우고 생존훈련, 독도법 등을 교육받았다. 우리 임무는 비정규전 시, 적 후방에 침투해 후방교란, 문서탈취, 요인납치, 암살, 기습파괴, 공작원 접선, 기간시설 폭파, 첩보수집 및 응징보복을 하는 거다. 철조망과 철책, 부비트랩, 함정, 사막, 귀신 지대 등 북쪽 6중 철책선을 뚫고 침투해 혼자 산속에 무덤 근처에 땅굴을 파고 몸을 숨기는 은신술과 살아있는 뱀, 들쥐, 짐승, 벌레 등을 잡아먹는 생존훈련도 받았다. 적성 무기와 무성 무기훈련을 반복해 표창, 젓가락, 대검의 표적이 달렸던 아름드리나무가 벌집이 됐다. 교살용 철실로 무를 가르고 닭, 토끼의 멱을 땄다. 철성판에 개나 살아있는 동물을 매달고 표창 연습하고 잡아먹었다.
어떠한 힘든 훈련과 설령 구타가 있더라도 다 국가를 위한 것이고 우리가 임무를 완수하고 적진에서 살아오기 위해서다 에 모든 게 이해됐다. 훈련 강도가 세서 식사도 잘 나왔고 간식으로 빵과 우유도 매일 몇 개씩 먹었다. 한 달에 돼지 몇 마리씩 나왔다. 살아있는 돼지가 오면 어설픈 취사병 대신 훈련 삼아 우리가 잡아 해체까지 했는데 돼지 멱을 딸 때 참혹한 괴성에 처음엔 고개를 돌렸던 나도 어느새 익숙하게 순식간에 멱을 땄다. ‘눈이 마음의 거울이다’란 말이 있다. 우연히 거울을 보니 불과 몇 달 전 장난기 많던 19살 소년은 없고 살의가 가득 찬 눈의 거친 사내만 있다.
40kg 군장을 메고 설악산을 출발해 지리산까지 갔다 오는 게 만리행군이다. 밤에만 급속행군으로 달리는데 발바닥은 물집에 다 헤지고 발이 부어 못 신을까 봐 취침할 때도 군화를 안 벗었다. 부대로 돌아오자 그때야 고통을 느껴 다들 엉거주춤하고 제대로 걷지도 앉지도 못했지만, 목청 높여 ‘김일성 마빡에다 대검을 꽂고, 유유히 돌아오라 켈로의 용사, 적진 속을 마음대로 누비는 우리, 남포동의 밤거리는 모두 나의 것. 장하다 그 이름 켈로의 용사’를 불러댔다. 재래식 화장실 옆 또랑에 찬 인분 속에서 머리 박고 구르며 똥물을 먹고서야 양성훈련도 끝났다. ‘니들이 최고다. 니들이 북한군 1개 사단보다 강하다’란 부대장 말에 다들 사기가 충천했다. 악마 같던 조교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웃을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어떤 환경이든 적응하는 자만 살 수 있다.
각 기성대에 배치받으니 일 년 전쯤 선임 한 명이 군사분계선 북측 지역에서 공작 중 도망가다 지뢰를 밟아 죽었다고 배신하면 죽음으로 죗값을 받는다고 겁박한다. 부대 근처엔 ‘민간인 출입금지. ㅇㅇ 경찰서장’이란 푯말이 서 있다. 밖에선 안보이지만 산허리를 돌아보면 산 중턱에 있는 텃밭이 딸린 깨끗한 양옥집이 부대다. 부대 뒤편 침투 훈련장에서 철책선 통과훈련을 반복했다. 본부와 떨어져 있는 공작대는 훈련 잘 받는 놈 목소리가 크다.
계급은 형식적이고 장기복무자로 공작경험이 있는 선임이 반장으로 훈련을 주도했다. 장교인 팀장은 행정적일 뿐이다. 나는 야외훈련 중에 팀장과 치고받고 싸우기도 했다. 무능한 간부, 총기사고, 인권유린, 인민재판식 처형 등 비문병적인 일들이 종종 일어났다. 다들 강도 높은 훈련에 악에 바쳐 누구든 걸리면 갈기갈기 찢어 씹어먹겠다는 악다구니만 남았다.
공짜는 없고 낙하산은 그냥 하루아침에 타는 게 아니었다. 하여튼 난생처음 비행기에서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리는 소원은 결국 이뤘다. 해군 특수부대에서 해상침투훈련 B-6를 받았다. 잠수장비를 착용하고 종일 물속에 있으면 몸이 덜덜 떨리다 감각이 없어진다. 그러면 구타와 얼차려로 온기를 찾는데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다. 물속으로 막 밀어 넣으니 숨막혀 혼절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름이면 동해안 바닷가에서 훈련하며 해산물도 질리도록 먹을 수 있어 좋았다. 산등성이에 보이는 환한 콘도에서 밤 공기를 타는 음악과 남녀의 요란한 웃음소리는 연배의 우리와 극과 극으로 낯설었다. 우리는 훈련만 받았고 취사와 행정, 기타 업무 등은 대부분 우리보다 나이가 많은 기간병들이 했다. 종종 손님들이 찾아온다. 사복 입은 국방장관이나 미군에 인민군복의 부대장이 거수경례하는 어색한 광경도 본다. 우리는 특수살상무술, 동물 생식, 침투훈련 등 시범을 보이고 손님들은 소나 위문품을 주고 간다.
3년 만에 제대하며 군번과 계급을 받고 집에 돌아왔다. 분위기가 낯설어 술만 마시면 익숙한 산으로 뛰어 갔다. 서울은 여러 산으로 둘러 쌓여있다. 산꼭대기에서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면 꼭 설악산에서 새벽 훈련 중에 보이는 속초 먼바다 오징어 배 불빛과 같아 편안했다. 군 담력훈련처럼 한밤중에 아무도 없는 산을 내달리고 이름없는 무연고 무덤가에서 술을 마셨다.
그러다, 지방 한 소도시 무술 도장에 사범으로 잠시 있었다. 껄렁대는 지방 토박이들은 외지인을 잘도 구별해 술집에서 시비가 곧잘 붙었다. 내가 몇 대 때리면 그대로 나동그라졌고 다시는 안 덤볐다. 해가 떨어지고 술만 취하면 공동묘지가 있는 산으로 내달려 무덤을 베고 누워 소주를 마시며 군가를 불렀다. 나한테 맞은 토박이들과 술친구가 됐고 내가 밤마다 공동묘지에서 술 마신다는 소문이 동네에 퍼질 때쯤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얼마 후 나는 외국에 갔다. 한동안은 현지에 적응하고 무술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학에 다니면서 술에 취하면 산을 찾아 혼자 도심공원을 한밤중에 뛰어다녔고 친구들에게는 술 깨려고 란 핑계를 댔다. 분명히 술에 취해 잠이 들었으나 새벽엔 내가 공동묘지에 누워있었다. 사소한 일에도 감정을 조절 못하고 주먹을 휘둘렀다. 군대 기억이 싫은데 술에 취하면 나도 모르게 군가를 뇌까렸다. 술을 마시면 변하는 내가 두려워 사다 놓은 술을 변기에 다 버렸고 한동안 술도 끊었다. 영어 스트레스와 계속 떠오르는 군대 기억 등이 이유 같았다. 신부님은 고해성사 후 내가 트라우마 같다며 치료하라고 기도해 주신다.
자꾸 술만 취하면 산이나 공동묘지로 달려가게 만든 기억이 싫어 한국을 잊고 살았다. 현지적응에만 집중하자 꿈도 영어로 꿨고 나도 모르게 영어가 먼저 튀어나왔다. 가족 이외엔 우리말을 쓸 기회도 없었고 김치 등 한국 음식도 안 먹었다. 강산이 변할 때쯤 한국에 돌아와 내가 뒹굴던 설악산을 찾았다. 이상한 군복 사내들이 민간인 출입금지라며 나가라기에 ‘내가 니들 선배다.’ 했다.
밀봉교육을 받던 안가를 가니 때마침 내 군복에 물들던 똑같은 석양이 진다. 표창 연습용 표적, 철봉, 개집 등이 남아있으나 수년 전부터 폐쇄된 건물은 폐가가 되어 마치 한번 쓰고 버린 공작원 같았다. 10여 년 전 그 자리에 서 있던 내 모습이 지는 해에 그림자로 투영된다. 소주를 마셨다. 갑자기 목이 메고 눈물이 흐른다. 낙하산타는 환상에 입대한 소년의 감정을 황폐하게 만들었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분함에 혼자서 그렇게 목놓고 엉엉 큰소리로 밤새 울었다.
분단 이후부터 비공개리에 양성된 북파공작원은 약 13,000여 명으로 추산된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실제 공작에 투입됐고, 절반이 넘는 7,726명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10년간의 베트남전 한국군 전사자 5,000여 명보다 많은 숫자다. 중앙일보에 따르면,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며 북파 형식의 대북 특수임무 수행은 공식적으로 종결됐다지만 요원 양성과 비공식 특수공작은 2000년대까지 계속됐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 정부 당시 민주당 김성호 의원의 노력으로 관련 법률을 개정했다. 2003년 국방부는 국회에서 북파공작원 양성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2004년 ‘특수임무수 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이 ‘1948년 8월 15일 이후 2002년 12월 31일까지 군 첩보부대에 소속되어 특수임무를 하였거나 이와 관련한 교육훈련을 받은 자’로 특정해 보상이 추진됐으나 당사자가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사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국전쟁 막바지 많은 북파공작원이 북한지역에 침투해 공작 중이었다. 휴전이 임박해지자 빨리 남쪽으로 귀환시켜달라는 그들의 무전이 남쪽으로 빗발쳤고 본부는 그들의 피맺힌 호소를 무시하고 무전기를 꺼버렸다.
그 후 그들 대다수는 죽거나 실종됐고 일부는 북한에 투항해 남파간첩양성소에서 선생으로 일하며 배신당한 조국을 향한 복수를 대신했다. 2008년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월북을 기도하다 지뢰폭발로 사망했다던 선임이 사실은 ‘북측지역에서 용변을 보기 위해 매복지역을 이탈했다가 인근 지뢰를 밟고 사망하였으므로 전투 또는 이에 준하는 직무수행 중 사망한 자에 해당한다’는 진상규명 결정을 했다. 30여 년 만에 밝혀진 진실이다.
군대의 영향인지 나는 지금도 아침 6시 전에 일어나고 규칙적으로 생활하며 종종 10~20km 정도는 그냥 걷거나 뛰고 오대산 등 험산도 배낭을 지고 맨발로 등산한다. 항상 나는 남에 피해를 안 주고 조용히 살려고 노력하고 그만큼 남에 피해받는 것도 싫다. 그래서, 공공사회의 기본 질서를 망치는 것들은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언젠가부터 더는 술 취해 ‘왕벌과 딱벌이 날아가니 하늘에선 번개가 치고 박쥐는 숨어든다’라고 중얼거리며 밤중에 산을 뛰어다니거나 무덤을 찾아다니지 않는다. 한일월드컵이 한참일 때 한 모임에서 탈북자를 만났다. 술자리 대화에서 그의 고향이 아는 지역이라 내가 몇 마디 보탰다. 조금 후 그가 조용히 다가와 언제 탈북했는데 남한말을 그렇게 잘하냔다.
우리 집 마당에는 큰 하얀 목련 나무가 있어 해마다 봄이 되면 목련향이 집안과 이 층 내방까지 가득 찬다. 목련은 큰 꽃망울이 달려있다가 언제 폈나 싶으면 벌써 꽃잎이 떨어질 정도로 빨리 진다. 하얀 잎은 연약해 떨어지면 곧 진갈색으로 변한다. 어릴 적부터 봄이면 목련 꽃잎이 발코니와 마당 그리고 담장 주위에 하얗게 내려앉았다. 입대하는 날 아침, 집을 나와 좀 걷다가 뒤로 돌아보니 바람을 타고 우리 집 목련 나무에서 하얀 꽃잎이 눈송이처럼 흩날린다. 그래서 난 하얀 목련만 보면 군대기억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아마도 이 잔상은 내가 죽을 때까지 함께 할 것 같다.
*훈련이나 공작 중 생을 마감한 북파공작원들의 명복을 진심으로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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