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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창세기 33장 4절, 마태복음 5장 23~24절, 마태복음 18장 35절, 골로새서 3장 23절
그러자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끌어안았다. 에서는 두 팔을 벌려, 야곱의 목을 끌어안고서, 입을 맞추고, 둘은 함께 울었다. <창세기 33장 4절, 새번역>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마태복음 5장 23~24절, 새번역>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자기 형제자매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마태복음 5장 23~24절, 새번역>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하듯이 하지 말고, 주님께 하듯이 진심으로 하십시오. <골로새서 3장 23절>
수많은 신조어 중에서도 소위 대박이 난 신조어가 있습니다. 그 단어 중 하나가 바로 '썸'입니다. 이 단어는 정말 설명할 수 없었던 어떤 상황을 잘 설명해준 단어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단어를 이제 일상 용어처럼 사용하고 있습니다. 남녀의 교제가 시작되기 전에 서로 알아보기 위한 밀당의 시간, 그리고 서로가 한 걸음 더 다가서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 바로 '썸'입니다. 교제로 이어지지 않고 그냥 '썸'에서 끝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요즘은 이 '썸'이라는 단어 대신에 '삼귀다'라는 말이 사용되기도 합니다. '삼귀다'는 '사귀다'의 첫글자를 숫자 4로 보고 아직 사귀기 전 단계, 즉 '썸'의 단계를 숫자 3을 사용하여 '삼귀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창세기 산책을 하고 계시는 여러분들은 이런 신조어를 보면 어떠신지요? 머리가 아프신가요? 아니면 알아두면 유용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왜 이런 신조어 '썸'이라는 단어로 창세기 산책을 시작했는가 하면 바로, '썸'이라는 노래에 나오는 가사 때문입니다. 정기고와 소유라는 가수가 함께 부른 '썸'이라는 곡을 듣다 보면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요즘따라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너 니꺼인 듯 니꺼 아닌 니꺼 같은 나 이게 무슨 사이인 건지
바로 이 가사를 듣고 있는데 이 가사가 오늘 창세기 33장 야곱과 에서의 만남을 표현하기에 딱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오늘 '화해인 듯 화해 아닌 화해 같은' 재회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얍복강에서 자신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주신 하나님을 체험한 후 야곱은 이제 에서를 만날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때마침 고개를 들어 보니 저 앞에 에서가 장정 사백 명을 거느리고 오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자녀들을 두 아내와 두 여종에게 나누어 맡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참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이런 잔머리를 계속해서 쓰는 야곱을 보면서 왜 이런 방법을 내려놓지 못하는지, 왜 늘 최소한의 장치를 해야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보험'에 대한 신뢰가 큰 것 같습니다.
두 여종과 그들에게서 난 아이들은 앞에 세우고, 레아와 그에게서 난 아이들은 그 뒤에 세우고, 라헬과 요셉은 맨 뒤에 세워서 따라오게 하였다. <창세기 33장 2절, 새번역>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자신이 가장 사랑한 라헬과 요셉은 가장 뒤에 세웁니다.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 이제 라헬과 요셉을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는 누구 하나 소홀한 자식이 없어야 할 터인데, 두 여종과 여종에게서 난 아이들을 앞에 세웁니다. 레아와 레아에게서 난 아이들은 그 다음에 세웁니다. 참 옆에서 보고 있는 야곱의 종들이 야곱을 보면서 만정이 떨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빌하와 실바, 레아가 느꼈을 마음, 자녀들이 아버지 야곱의 태도를 보면서 느꼈을 마음이 너무도 짐작이 갑니다. 라헬과 요셉에 대한 미움은 또 얼마나 커졌을까요? 여하튼 야곱은 이런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달라진 행동이 있습니다. 야곱이 맨 앞으로 간 것입니다. 가장 뒤에서 도망칠 궁리를 한 것이 아니라, 이제 가장 앞에 서서 에서를 마주할 용기가 생긴 것입니다. 그래도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형이 나를 보자마자 죽이면 어떻게 하지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도 해 본 적이 없는 태도, 아니 하나님께 진작에 했어야 할 태도를 보입니다. 에서에게로 가까이 가면서, 일곱 번이나 땅에 엎드려 절을 하는 야곱입니다.
야곱의 이런 모습을 본 에서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이미 하나님이 에서의 마음을 돌려 놓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야곱의 이런 행동을 보면서 에서의 마음도 제법 많이 풀렸을 것입니다. 또한 이미 야곱이 보낸 심부름꾼들을 통해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들은 바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야곱과 에서의 화해의 이 장면만큼은 진짜 '눈물의 상봉'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너무 많이 순수함을 잃어버려서 야곱과 에서 모두 앞과 뒤가 자꾸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야곱과 에서의 이 재회는 진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드라마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러자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끌어안았다. 에서는 두 팔을 벌려, 야곱의 목을 끌어안고서, 입을 맞추고, 둘은 함께 울었다. <창세기 33장 4절, 새번역>
아마 한참을 그렇게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진정이 되자 에서는 야곱의 뒤에서 순서대로 서있는 여인들과 아이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에서가 고개를 들어, 여인들과 아이들을 보면서 물었다. "네가 데리고 온 이 사람들은 누구냐?" 야곱이 대답하였다. "이것들은 하나님이 형님의 못난 아우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입니다." <창세기 33장 5절, 새번역>
'이것들'이라고 해석된 야곱의 말은 오타가 아닙니다. 야곱은 자신의 아내들과 아이들을 '이것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표현에는 여전히 야곱의 마음에 남아 있는 두려움이 녹아 있습니다. '이것들'이라고 표현하면서 일부러 하찮게 표현합니다. 그리고 하지 말았어야 했을지도 모를 말, 한 가지 단어를 덧붙여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아마 이 순간 에서의 눈빛이 바뀌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주셨다고?하나님이.....' 그리고 불현듯 잊고 지내고 있었던 아버지 이삭의 축복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왜 오늘 이런 재회가 생기게 되었는지, 자신을 속이고 도망친 야곱에 대한 마음이 다시금 살아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축복대로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4명의 아내를 통하여 열두명의 자녀를 얻게 된 것만 같아 기분이 조금씩 언짢아지는 에서입니다.
먼저 빌하와 실바가 단, 납달리, 갓, 아셀과 함께 앞으로 나와서 엎드려 절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이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소개를 시키려면 사실 라헬이나 레아를 먼저 소개시키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빌하와 실바부터 소개를 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레아가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과 함께 나와 엎으려 절을 하였습니다. 에서가 보니 레아가 야곱의 첫번째 부인이란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색동옷을 입고 있는 어린 아이가 앞으로 나옵니다. 라헬과 요셉이었습니다. 에서는 금방 눈치챘을 것입니다. 라헬과 요셉이 야곱이 가장 아끼는 부인과 자녀라는 것을 말입니다.
또 한가지 살펴보아야 할 점은 이렇게 야곱의 아내와 자녀들이 계속해서 엎드려 절을 하고 있는데, 형 에서는 그 절을 거절하지 않고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 인사치고는 너무 거창합니다. 왕 앞에서나 해야할 만한 행동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건 인사가 아니라 두려운 마음의 표시입니다. 그리고 마치 에서는 자신이 왕이라도 된 듯이 이 절을 마땅하게 생각합니다. 에서의 마음속에 아버지의 축복권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기에 지금 에서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버지, 이 것 보십시오. 제가 야곱을 섬긴다구요? 아니요. 지금 야곱과 야곱의 모든 식솔들이 저에게 절을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틀렸습니다. 야곱이 저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서는 모른척하면서 다시 질문을 던집니다.
에서가 물었다. "내가 오는 길에 만난 가축 떼는 모두 웬 것이냐?" 야곱이 대답하였다. "형님께 은혜를 입고 싶어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에서가 말하였다. "아우야, 나는 넉넉하다. 너의 것은 네가 가져라." 야곱이 말하였다. "아닙니다, 형님, 형님께서 저를 좋게 보시면, 제가 드리는 이 선물을 받아 주십시오. 형님께서 저를 이렇게 너그럽게 맞아 주시니, 형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듯합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은혜를 베푸시므로, 제가 가진 것도 이렇게 넉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형님께 가지고 온 이 선물을 기꺼이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간곡히 권하므로, 에서는 그 선물을 받았다. <창세기 33장 8~11절, 새번역>
받지 않을 것이면 궁금해 하지도 말았어야 했는데, 에서는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은 가축 떼를 보고 욕심이 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심부름꾼에게 들은 것처럼 야곱이 자신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라고 하니 더욱 관심이 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 정도 거절하는 척 하다가 그 선물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야곱은 그 선물을 에서에게 주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듯하다는 '아부'섞인 말도 서슴치 않습니다. 이런 야곱의 모습은 에서를 만나기 전에 가지는 두려움과 또 다른 것입니다. 이제 에서를 만나고 난 이후에는 에서에게 잘 보이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그의 잔머리가 만들어낸 두려움이 또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얼굴을 뵌 것 같다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형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야곱은 형을 만나기 위해 라반의 집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형 에서는 그저 관문일뿐 야곱은 아버지 이삭을 만난 후, 결국 약속의 땅으로 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에서에게 하고 있는 말은 철저히 '생계형 거짓말'일 뿐입니다.
그렇게 선물을 받고 기분이 좋아진 에서는 서둘러 길을 떠나자고 재촉합니다. 하지만 야곱은 이 재촉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정중하게 거절합니다.
야곱이 그에게 말하였다. "형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아이들이 아직 어립니다. 또 저는 새끼 딸린 양 떼와 소 떼를 돌봐야 합니다. 하루만이라도 지나치게 빨리 몰고 가면 다 죽습니다. 형님께서는 이 아우보다 앞서서 떠나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저는 앞에 가는 이 가축 떼와 아이들을 이끌고, 그들의 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세일로 가서, 형님께 나가겠습니다." <창세기 33장 13~14절, 새번역>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에서는 야곱 일행이 안전하게 도착하게 하기 위하여, 또한 조금 감시해야겠다는 생각도 가지고, 자신의 부하 몇을 같이 가게 하겠다고 이야기했지만 야곱은 그마저도 거절합니다.
에서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나의 부하 몇을 너와 같이 가게 하겠다." 야곱이 말렸다. "그러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형님께서 저를 너그럽게 맞아 주신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창세기 33장 15절, 새번역>
그러자 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야곱이 준 선물을 모두 가지고 자신의 집, 세일로 돌아가게 됩니다. 어떻습니까? 정말 화해인 듯, 화해 아닌, 화해같은 재회로 보이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야곱은 놀라운 결정을 내립니다.
야곱은 숙곳으로 갔다. 거기에서 야곱은 자기들이 살 집과 짐승이 바람을 피할 우리를 지었다. 그래서 그 곳 이름이 숙곳이 되었다. 야곱이 밧단아람을 떠나, 가나안 땅의 세겜 성에 무사히 이르러서, 그 성 앞에다가 장막을 쳤다. <창세기 33장 17~18절, 새번역>
야곱은 형이 있는 세일로 가지 않았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세겜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세겜에서 7년 동안이나 거하게 됩니다. 세겜에 도착한 야곱은 장막을 친 그 밭을, 세겜의 아버지인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은 백 냥을 주고 사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야곱은 거의 처음으로 하나님께 신앙고백이 담긴 제단을 쌓게 됩니다.
야곱은 거기에서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창세기 33장 20절, 새번역>
이제 야곱은 하나님을 두려운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삭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즉 '나의 하나님'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화해인 듯 화해 아닌 화해 같은 에서와의 재회가 마무리 되었습니다. 사실상 에서와의 동행은 거부한 것입니다. 화해는 했지만 같이 살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 사실을 에서도 알았기에 다시 야곱을 찾아오지 않은 것입니다. 어렵고 큰 산을 넘어섰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야곱의 앞길에는 평안만이 남았을까요? 아쉽게도 창세기 34장에는 실로 안타까운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 역시 야곱이 오늘 세겜에 머물게 됨이 올바르지 않은 선택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제입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 창세기 산책에서 계속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동역자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야곱과 에서의 재회를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드셨습니까? 둘도 없는 형제, 그것도 쌍둥이 형제의 만남은 생각보다 큰 감흥을 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숙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받게 된 '축복'의 향방에 대해서 어떠한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제대로 사과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과할 마음은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믿고,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붙들고, 에서와 동행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제대로 사과하고, 제대로 용서하는 재회가 우리의 삶 속에서 있어야 합니다. 속셈을 가지고서는 진심을 전달할 수가 없습니다. 부부 사이에도, 가족 간에도, 친구간에도, 성도들 사이에도, 진짜 회복을 위해서라면 '속셈'을 빼고, 화해인 듯 화해아닌 화해같은 화해가 아닌 진심의 사과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글을 볼 떄마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말씀을 기억해 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마태복음 5장 23~24절, 새번역>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자기 형제자매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마태복음 5장 23~24절, 새번역>
그리고 진심의 용서도 필요한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를 보면서, 우리를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화해를 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용서를 구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용서해 주고 있습니까? 진심의 재회를 통해 그 사람과 다시 동행할 마음이 있습니까? 오늘 창세기 산책 후의 묵상은 바로 이 점입니다. '관계' 그 깊고도 넓은 주제에 대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지혜를 구해 봅시다. 하나님의 방법을 배우고, 그 방법대로 행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하듯이 하지 말고, 주님께 하듯이 진심으로 하십시오. <골로새서 3장 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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