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팝나무꽃 축제
토요일 아침부터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이 빗길에 포항까지 가서 100km를 뛴다는 것이 아득하게 느껴지지만 중단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찬 비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운동장이 질척거려 어수선하더니 출발순간 다행히 빗줄기는 약해졌다. 시내를 벗어나자 먹구름에 덥힌 하늘은 거짓말같이 개고 비에 씻긴 초승달이 구름 속에서 수줍은 듯 금빛 얼굴을 내 비친다. 조각달은 서래 질한 논을 호수로 아는지 무논에 몸을 풀어 똑같은 달덩이가 찰랑댄다. 개구리 울음소리 요란하다. 가갸갸 거겨겨 고교교---- 사람들에게 말이 하고 싶어 야학당에서 열심히 한글을 깨우치고 있나보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이 간다. 플래시를 비춰보니 일제히 수면위로 퉁방울눈을 쏘옥 내밀고 있는 모양이 앙증스럽다. 아카시아 꽃향기 진동한다. 밤에는 더 짙고 더 멀리 퍼지는 향내로 온 세상이 감미롭다. 골짝마다 들려오는 소쩍새와 때까치소리를 빼 놓을 수 없다. 여기에 질 새라 홀딱벗고새도 간간이 끼어든다. 어! 저 새는 밤에 우는 새가 아닌데. 눈물겹도록 반갑다. 실은 너희들의 환영소리를 듣고 싶어 우중을 마다하고 이 밤에 여길 찾아왔단다. 밤새도록 들어도 지겹지 않을 개구리소리는 진전못을 돌아오고부터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하마나 다시 이어질까 하고 아쉬운 마음을 달래는데 저 앞에 줄지어 선 가로수마다 눈꽃이 만발하다. 눈을 의심했다. 연초록 잎 새에 오월의 신부인 양 살포시 면사포를 쓰고 미소 짓는 꽃술이 달빛을 받아 눈부시다. 청순하고도 요염하다. 상상이 가느냐? 달밤에 하얀 나비 춤추듯 하늘하늘 미풍에 나부끼는 꽃들의 춤사위를. 그림을 그릴 수 있겠느냐? 휑한 길이 비좁을 새라 네 활개 휘저으며 꽃그늘 사이로 달려가는 달그림자를. 우리는 달리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이팝꽃에 정신이 홀려 한 나무 한 나무 빠트리지 않고 다 쳐다보며 환호성을 터트리는 사이에 후발 주자들마저 묵묵히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인적이 끊어진 시골 길은 적막강산이다. 저만치 절룩거리며 걸어가는 사람이 보였다. 여자다. 무릎이 아파 뛸 수 없다고 하기에 아껴 쓰는 소염진통제를 뿌려주었다. 왠지 밤이 주는 분위기를 공감할 것 같아 묻지도 않는데 저 꽃이 이팝나무라고 아는 체 했다.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고민에 빠졌다. 밤이 깊어가는 낯선 시골길에 아프다는 숙녀 혼자 떨쳐두고 가기가 야박하여 다음 휴식 장소까지 같이 걸으며 동행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러나 울트라에 첫 출전한 동료에게 페이스메이커해 주기로 한 처지라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했다.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산모롱이를 돌아가면서부터 이팝나무 꽃길도 그것으로 끝이다. 깜짝 이벤트로 등장하여 감동의 물결을 안겨주던 주인공이 무대에서 사라졌다. 허전하다. 열광하던 관객들은 여운에 푹 빠져 계속 박수를 보내며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모른다. 그 왜 있지 않는가. 음악회에서 유명 가수가 공연을 마치고 무대를 떠나도 청중들이 그대로 앉아 앵콜! 앵콜! 연호하면 다시 나와 몇 곡을 더 열창하듯이. 적어도 오늘 밤에는 두 번 다시 못 볼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산간마을 앞을 지나는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수백 년 묵은 고목에 뭉게구름처럼 뭉실뭉실 흐드러지게 피어나 절정을 이룬 이팝나무 서 너 그루. 실로 장관이다. 동네 개들이 사납게 짖어대거나 말거나 철부지 아이들 같이 플래시를 비춰대며 탄성을 질렀다. 포항울트라에 오기를 너무 잘 했다. 너 하나로 대 만족이다. 뭘 더 바라겠는가. 가녀린 가로수행렬이 시야에서 사라진지 방금인데 어느새 두 아름도 넘는 노거수로 분장하여 다시 무대를 꽉 채우다니. 깜짝 쇼를 방불케 하는 완벽한 연출이다. 목적지는 아직 절반도 못 왔기에 가야 할 길이 창창하지만 허기진 보릿고개시절을 회상하며 고슬고슬 기름진 쌀밥꽃을 눈으로 요기하느라 시간을 엄청나게 지체했다. 까먹은 시간이 하나 아깝지 않았다. 출발한지 41km지점인 양포삼거리까지 내륙산촌의 밤을 이렇듯 몽환에 사로잡혀 멋지게 소풍하였다. 이제는 해안도로로 방향을 틀어 구룡포를 지나고 지도의 맨 끄트머리인 호미곶을 숨 가쁘게 휘감고 돌아 24시간 용광로가 불을 뿜는 영일만으로 달려들게 된다. 한반도의 웅혼한 기상이 서린 동해의 새벽바다는 집채 만 한 파도를 일으키며 사납게 포효하고 있다. 가슴을 뻥 뚫리게 하는 이 장엄한 오케스트라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대서사시다. 오른 쪽에는 검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지고 왼 편 언덕에는 청보리가 또 하나의 푸른 물결로 넘실댄다. 아! 풋보리 익는 냄새. 아버지의 그리운 땀 냄새. 80km지점에서 몰래 계곡으로 스며들어 냉수욕을 하니 새 힘이 솟아 그 길로 쉬지 않고 달린다. 마지막 10km를 남겨두고는 용수철처럼 튀면서 막판에 지친 주자들을 26명이나 추월하였다. 운동장 트랙으로 워낙 장난스럽게 달려 들어오자 사회자가 “아직도 힘이 펄펄 넘칩니다. 노래방에서 놀다 오는 표정 같습니다.” 14시간 30분. 이팝나무 때문에 기록이 부진했지만 후회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울트라를 이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달리기는 처음이다. 남들은 한눈을 팔지 않고 달리는 시간에 이팝꽃을 포식하는 행운을 누렸기에 심신이 이리 가벼웠던 것이다. 영일만 친구야! 고맙다. 이번 포항 울트라는 활활 타오르는 순백의 자태에 빠져 난 정말 환상적인 밤을 지새웠단다. 참! 이팝나무에 얽힌 에피소드를 들려줘야겠다. 마라톤전문잡지에 실린 ‘울트라마라톤 연금술’을 보고 깜짝 놀랐다. 희미한 달밤에 잠시 스쳐봤던 터라 얼굴은 또렷이 기억할 수 없어도 이팝나무 아래서 스프레이 해 줄때 배번에서 슬쩍 훔쳐본 서울의 ‘곽정란’ 그 이름이다. 수소문하여 전화하자 기억을 하면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알고 보니 러닝라이프에 매달 마라톤 에세이를 기고하는 수필가로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와 일본 북 알프스를 등반한 전문 산악인에다 사하라사막 250km를 6박7일간 완주하고 몽골울트라에도 참가한 그야말로 팔방미인이다. 이팝나무 덕분에 이런 화려한 경력을 지닌 문인을 알게 되다니 대단한 수확이다. 곽선수도 그날 같은 길을 달린 마라토너라면 이팝꽃을 어찌 잊겠느냐면서 그 후 자동차로 달리며 그날 밤의 감동을 재현해 봤다고 한다. 6월호에 실린 그녀의 포항울트라기에는 이팝나무가 어김없이 등장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순간을 놓치지 아니하고 똑같은 시각으로 보고 느낀 이 이팝나무 이야기는 아무래도 오래오래 이어질 것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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