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3일 목요일
프라하Praha 시내관광 ; 프라하의 상징 프라하성을 가다
프라하는 블타바강을 따라 동서로 형성된 10개 지구로 나뉘며 1지구가 옛 시청광장에서 시작하는 옛 시가지, 카를교, 프라하성 등 관광 중심이 된다. 시의 면적은 약 500평방킬로미터, 인구 약 120만 명 ,블타바강(독일 명 몰다우강)이 S자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양쪽에 발달된 도시다.
9세기말경 보헤미아왕국의 수도로서 수많은 역사를 간직하였고,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및 바로크양식의 건축물이 모두 남아 있는 고도이며 뾰쪽한 탑 건축물이 많아 100탑의 도시라고도 부른다. 신성로마제국시대의 찰스4세(찰스대제)가 찰스 대학을 세우고(아직도 그때 지은 건물이 대학교 본관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프라하성을 건축했다. 16~ 18세기까지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였다.
교통은 지하철과 트램, 버스가 다닌다. 한 장 티켓으로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으며 1회권 1일권 3일권 등등이 있어 편리하였다. 특히 22번 트램은 프라하의 주요 관광지 거의 모두를 통과한다. 우리는 22번 트램을 타고 블타바강 서쪽 높은 언덕에 자리한 프라하의 상징 프라하성으로 갔다. 트램 차창으로 스치는 성으로 올라가는 길 양옆에 세로로 커다란 직사각형 짙은 남색 천에 흰색 영문으로 쓴 현대 HYUNDAI 플래카드Placard가 성 앞까지 일정한 간격에 줄지어 쭉 펄럭이고 있었다.
너무 익숙한 단어라 가슴이 뭉클했다. 아들에게 반가운 목소리로 “현대다. 현대” 라고 제법 큰소리로 말하니 옆자리 외국인 (여기선 우리가 외국인이지)이 어리둥절하며 쳐다본다. 우리가 무엇이라 말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런데 여기 사람들이 저 플래카드가 아시아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 자동차 기업의 이름인지 알기나 할까? 현대라는 영문 글자만 쓰여 있지 아무런 표지가 없다. 우리가 한국인이고 우리나라 ‘현대’ 라는 기업을 알기에 감격스럽지 체코 사람들과 유럽 관광객들은 그저 남색 깃발이 ‘펄럭이구나’ 알 따름이라 느껴졌다.
기업 마켓팅과 대한민국과는 다른 차원이어야 하는지 나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모국의 이름과 기업 이름이 함께 광고 되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부려 보았다. 이 왕궁에도 역시 한글로 된 안내서도 우리말 가이드 폰은 없었다. 16세기 말까지 보헤미아 왕가의 궁전이며 체코 정치의 중심이었고 현재도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곳이다.
왕궁으로 들어가 맨 처음 만난 성 비타Vita 성당
궁정 내부는 들어가는 길을 찾지 못하여 관람하지 못해 아쉬웠다. 사실은 유럽 궁전 몇 곳을 관람하고 나니 내부 구조가 비슷비슷하게 느껴져 비싼 관람료 들이고 보고 싶은 흥미가 사라진 탓도 있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한 곳이라 궁전도 사원도 빈의 궁전과 풍기는 맛이 비슷하였다, 여러 궁전 건물 가운데 이름도 똑같은 벨베드르 궁전도 있었다.

성 비타(Vita) 성당
성 비타 성당은 프라하 최대의 고딕건축이다. 빈의 슈테판 성당과 지붕양식이 꼭 같게 보였다. 10세기부터 조금씩 짓다가 1929년 완성 되었다 유럽의 거대한 성당 건축은 대부분 몇 세기에 걸쳐 지어졌다. 종교 건축물이라 건축비를 손에 쥐고 짓는 게 아니라 신도들의 헌금으로 짓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성당 왼쪽 앞 스테인드 글라스는 20세기 초에 활략한 체코의 아르누보 예술가 알폰스 무하(Alfons Mucha)작품으로 9세기에 슬라브 민족에게 가톨릭을 전파한 비잔틴 선교사의 활동을 새겼다. 동유럽의 거대한 영토를 지배한 바츨라 2세의 묘와 예배당 그리고 이교회를 거쳐간 주교들의 묘가 안치되었다.
은 300톤을 녹여 만든 14세기 사제 성 네포묵Nepomuckeho묘와 예배당이 있다. 보헤미아 국왕 벤체슬라오가 왕비의 고해신부인 네포묵에게 왕비의 고해 비밀을 틀어놓으라는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 이유로 미움을 받아 갖은 고문을 당하다 결국 블타바강에 던져 참살 당하였다. 그때 강물이 빛을 발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 뒤 고백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되어 1729년 네포묵은 성인으로 추대 되었고 카를교에 조각 동상이 있다.
성 비타 성당을 나와 이리저리 다니다 중세시대 연금술사들이 거주하던 좁은 골목, 동화책에 나올 법한 색색의 집, 카프카의 파란색 작업실을 지났다. 지금은 선물가계로 자리한 황금소로를 지나 왕궁을 나왔다.
국립박물관 관람

국립박물관
국립 박물관은 1885년부터 1890년 사이에 건축된 프라하 시내의 대표 건물처럼 느껴졌다. 길을 잃을 번할 때마다 여기를 기점으로 방향을 잡아 찾아다니는 중심 역할을 하는 곳이다.
트램에서 내리니 여름비가 주룩주룩 많이도 내렸다. 아들은 관람했던 곳이라 혼자 관람권을 사서 들어갔다. 프라하 시내 관광객에 비교하면 박물관 내부는 조용하였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견학 온 중 고교생 들 뿐이었다. 인문, 역사, 자연 과학 분야 등 최대의 종합 박물관이다.
체코의 역사관, 고고학관, 동식물 표본, 조류 및 화석, 공룡뼈관 등 모든 분야 관들이 있다. 일층 방에는 체코 역대 유명인사의 그림과 청동 흉상이 전시되어 있었다. 자세히 보려면 몇 날을 관람해야 할 곳이다. 특히 광석관에 있는 516.5 캐럿의 다이아몬드가 유명하다니 꼭 찾아볼 생각이었지만 많은 다이아몬드 중 어느 것이 맞는지, 일 케럿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몰라 책자 읽은 것으로는 찾아보기 힘들어 그냥 나왔다.
바츨라프 광장Vaclavske namesti

바츨라프 광장 모습
국립 박물관 앞 바츨라프 광장은 광장이라기보다 프라하의 대표되는 번하가다. 어느 방향이든 걸으면 모든 관광명소와 시내 어디와도 연결되는 중심거리다. 20세기 초까지도 말 시장으로 이용 되었으나 체코 역사 전환기에 반드시 등장하는 장소가 되었다. 체코 민주개혁의 대규모 시위가 열린 근원지이다.
1918년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의 멸망으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이곳에서 선포 되었고 1948년에는 공산당 권력이 장악한 사회주의 공화국이 선언된 장소다. 1968년에는 개혁 공산주의자들이 시도한 ‘프라하의 봄’에 소련군 탱크부대의 침공 탄압으로 많은 생명이 희생된 곳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1989년에 일어난 체코 민주화혁명 일명 벨벳혁명(무혈시민 혁명)이 바로 이곳에서 탄생되었다.
박물관 앞에 세워진 높은 동상은 “성 바츨라프Vaclav” 기마상으로 1912~13년에 건립 되었다. 성 바츨라프는 10세기경 인물로 국난이 닥치면 중부 보헤미아의 블라니크 산에서 깊은 잠에 빠진 기사들을 깨워 이끌고 와서 적군을 물리친다는 전설의 주인공이며 체코 국민의 수호성인이다. 앞뒤에 4명의 호위 성인이 있다. 그리고 동상 앞에는 1968년 ‘프라하의 봄’에 소련군에 저항하다 희생된 사람들과 1989년 혁명 당시를 기념하는 꽃과 촛불, 사진들이 항상 놓여 있다.
비가 그치니 후덥지근한 날씨가 좀 가시고 생기가 약간 돌았다. 광장 길 끝자락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니 블타바강의 동쪽으로 옛 시가지 광장, 시청사, 카를교, 화약탑, 틴 교회 등 프라하의 명소가 이어져 있었다. 프라하의 지도와 가이드 북을 보면서 구경하였다.
여행이란 많이 걷고 많이 보며 느끼고 즐기는 것이다. 북적이는 관광객의 일원이 되어 그들이 하는 대로 따라 구경도 하고 기념품가계에 들러 새로운 물건, 기념될만한 특성 있는 기념품을 사는 것도 재미가 정말 좋다.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카페에 들러 맥주도 한잔 마신다. 새로운 세상을 보며 마음에 또 다른 하나의 세상을 마련해 가는 여유가 여행 아닐까!
만약 내가 이 세상 끝자락 죽음 앞에 선다면 무엇을 기억하고 아름답고 즐거웠던 추억을 떠올릴까...... . 살아왔던 많은 시간들 중에서 여행에서 담아온 새로운 세상의 이야기를 가슴 깊은 곳에 간직해 두었다 풀어 보고 미소지어리라.
아들 왈 5년 전에 왔을 때 보다 물가가 두 배로 뛰었단다. 특히 체코의 특산품 보헤미아 크리스탈 기념품 값이 다른 유럽 국가들과 비슷하여 싸게 사는 매력을 놓쳤다. 양주잔 몇 개 사려했는데...
까를교 Karluv Most

까를교 모습 (공사 중이라 사진을 발췌했습니다.)
블타바강의 다리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다리 양옆으로 30개의 카톨릭 성인 조각상이 유명하다. 한창 보수 공사 중이어서 자세히 감상할 수 없었다. 까를교를 건너보는 것만으로 프라하 구경한 셈이다. 할 만큼 알려진 관광 명소다.
구시청사 천문 시계탑

구시청사 천문 시계탑 모습
구 시청사 앞에 발 디딜 틈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교회건물처럼 보이는 고딕 양식의 고풍스런 천문 시계탑을 올려보고 있었다. 시계탑은 상부 천문시계와 하부 원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1410년에 만들어진 이 시계가 완성 되자 더 이상 이보다 아름다운 시계를 만들지 못하도록 시계를 만든 사람의 눈을 멀게 했다는 이야기 때문에 더 유명하다.
매시 정각 천문시계 옆에 있는 해골인형(시간의 유리잔을 들고 있으며 죽음을 상징)이 종을 치면 그 위의 두 개의 창문이 열리고 그리스도의 12제자 인형이 차례로 나타난다. 이때 천문시계 왼쪽에 있는 거울을 보는 인형(허영심을 상징)과 돈지갑을 든 유태인 인형(부富를 상징)이 같이 움직이고 오른쪽에서는 터번을 쓴 터키인이 음악을 연주한다. 천문시계는 매시마다 시간이 다가오면 ‘죽음 앞에 허영과 부는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것을 보려고 모여드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 느낌은 어떠할까...... 일이십 분 기다려 보고나면 깊은 뜻의 새김보다 별것 아닌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이다니......
유럽인들은 조그마한 것에도 큰 감동을 받는가보다. 유럽 여러 곳 시계탑에서 이런 광경은 어디서나 볼 수 있고 역시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청사건물 정문 위 창문에 "Praha.Caput.Regni" 라는 문구는 프라하 왕국의 수도Prague Capital of the Kingdom라는 의미를 뜻한다.
옛 시가지 광장
옛 시가지의 중심 광장에는 간이식당들도 많으며 많은 인파로 붐볐다. 교황의 부패를 비판하다 1415년에 교황 요한 23세에게 파문당하고 콘스타틴 재판에서 화형에 처해진 순교자이며 중세 종교 개혁가 얀 후스Jan Hus 동상이 있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교회 문에 면죄부 판매를 비난하는 조항을 걸은 것이 종교개혁의 시작이었다면 루터보다 100년 앞선 종교개혁가다. ‘진실을 사랑하고 진실을 말하고 진실을 행하라’ 얀후스의 말씀. 그리고 우리나라 TV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에서 소원의 벽으로 등장하는 동상이기도 하다.

얀 후스Jan Hus 동상
1621 ; 1621년 6월 21일 후스파 종교개혁 지도가 27명이 이 광장 단두대에서 오스트리아 황제군에 패한 후 처형당한 장소를 검은 색 바둑판 바닥에 흰 글씨로 1621을 선명하게 새겨 놓았다.
화약탑Prasna Brana
옛 시가지를 돌다보면 여러 번 지나는 곳이다. 카를교에서 나오다 봐도 여러 번 눈에 들어온다. 17세기에 화약 창고로 이용 되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옛 시가지 광장에서 이곳에 이르는 첼레트 거리는 옛날 상인들의 무역이 성행하던 거리답게 레스토랑, 토산품가계들이 많아 관광객이 몰려든다. 대관식 행진을 하던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곳이 기도하다.

화약탑Prasna Brana
프라하는 모두 중세 건물들로 ‘백탑의 도시’ 답게 하나 건너 하나가 성당이며 로마처럼 중세 유적의 도시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여행하면서 만나는 대부분의 건물들이 수많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다. 그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수많은 돈을 조달하여 중세 그대로 재건하여 오늘의 역사도시를 만들고 많은 관광객을 중세시대로 몰아간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중세의 도시가 아닌 복원된 도시에 서 있으면서 거꾸로 가는 시간에 서 있다고 느끼고 감탄한다.
돌 하나, 다리 하나, 조각상, 뾰쪽탑, 모두에 역사가 서려 있음이 놀랍고 존경스럽다. 역사를 중히 여긴 그들의 안목은 역사의 아픔까지도 관광 자원을 만들었다. 부럽기도 하다. 그걸 보려고 수많은 관광객이 모이며 오늘의 유럽을 관광 대국으로 만들었다.
현대화라는 이름아래 또는 역사적 아픔을 지운다는 명목으로 사라져간 우리나라의 유적들을 생각해 보았다. 불길 속에 사라져간 숭례문이 머리를 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