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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경북 지방 스크랩 문경 봉암사(1) - 석탄일에만 만날 수 있는 절
普願 추천 0 조회 42 16.06.23 18:0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일년에 한번 산문을 개방하는 문경 봉암사(1)

 

 

 

1년에 딱 한 번 석가탄신일에만 산문을 연다는 꿈속의 절집, 비밀의 사찰로서 조계종 산하 2,800개의 절 중에서 유일하게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는 청정도량이다.

몇 번을 벼루다가 드디어 올해, 가까운 지인들과 함께 새벽 3시에 경주를 출발, 빗길을 헤치며 3시간 반을 달려서 봉암사를 다녀왔다.

 

 희양산

 

 

 

봉암용곡

울창한 숲과 맑은 계곡이 한데 어우러져 잠시 속세의 고뇌도 잊게한다

 

 

문경 가은에서 서북쪽으로 길을 잡아 가다보면 멀리 흰 봉우리가 불쑥 솟아 한눈에 들어오는데. 바로 희양산이다. 이 산자락은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에 걸쳐있는 속리산국립공원에 잇대어 있다.

 

백두대간의 단전에 해당하는 높이 998m의 거대한 바위산으로 서쪽에서 시작되어 동쪽으로 흐르는 30리 계곡을 끼고 있어 천하 길지로 이름나 있다. 멀리서 보아도 우뚝한 모습이 한눈에 영봉임을 알 수 있는데 봉황과 같은 바위산에 용과 같은 계곡이 흐르고 있다하여 예로부터 봉암용곡이라 불렀다.

이 희양산 중턱에 봉암사가 자리하고 있다

 

봉암사는 지금부터 약 1,100여 년 전, 신라 헌강왕 5년( 879년) 지증국사(智證國師824∼882)께서 창건한 고찰로서 선종산문인 구산선문의 일맥인 희양산문(曦陽山門)으로 그 사격이 매우 당당하다

당시 심층거사가 대사의 명성을 듣고 희양산 일대를 희사하여 수행도량으로 만들 것을 간청하였다. 대사는 처음에 거절하다가 이곳을 둘러보고 "산이 병풍처럼 사방에 둘러쳐져 있어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흩는 것 같고 강물이 멀리 둘러 쌓였는 즉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과 같다."며 경탄하고 "이땅을 얻게 된 것이 어찌 하늘이 준 것이 아니겠는가.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것이다" 라 하며 대중을 이끌고 절을 지었다.

지증대사가 봉암사를 개산하여 선풍을 크게 떨치니 이것이 신라 후기에 새로운 사상흐름을 창출한 구산선문 가운데 희양산파(曦陽山派)의 주봉을 이루었던 곳이다.

 

 

 

 

그 후 후삼국의 대립 갈등으로 절이 전화를 입어 폐허화되고 극락전만 남았을 때인 고려태조 18년 정진대사가 중창하여 많은 고승을 배출하였고 불교중흥을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던 대선찰이다.

조선조 세종대왕때 험허당 기화 스님이 절을 중수한 뒤 머물면서 원각경소를 저술하였고. 1674년 다시 소실된 절을 신화 스님이 중건하였으며 1703년다시 중건하였으나 이후 크게 쇠퇴하였다.

 

구한말 1907년 의병전쟁 때에 다시 전화를 입어 극락전과 백련암만 남고 전소되었던 것을 1915년 윤세욱스님이 요사와 영각, 창고 3동을 신축하였고, 1927년에는 지증대사의 비각과 익랑을 세웠다.

 

근래에 들어 당시 조실을 지낸 전 조계종 종정서암스님과 주지 동춘스님 후임 원행, 법연스님등의 원력으로 절을 크게 중창하여 수행도량으로 면모를 일신했다. 지증대사 적조탑, 지증대사적조탑비, 정진대사 원오탑,정진대사 원오탑비, 봉암사 삼층석탑등의 성보문화재가 옛 선사의 향기를 은은하게 전하고 있다

 

 

일주문

 

다포계맞배지붕형식의 일주문

 

전면의 편액-"희양산봉암사"

 

후면의 편액-"봉황문"

 

사찰을 찾으면 가장 먼저 마주치는 것이 일주문이다. 기둥이 한 줄로 늘어서 있다고 해서 일주문(一柱門)이다.  한 줄의 기둥은 번뇌로 흐트러진 세속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상징한다고 한다. 일주는 곧 일심(一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문 밖은 속계(俗界), 문 안은 진계(眞界), 곧 정토세계다. 일주문은  사찰의 공간을 상징하는 역할을 이외에도 더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1900년경의 일주문 모습

 


현재의 일주분

기둥 아랫부분의 장식이 예사스럽지 않다

 

 

이 일주문은 2월 6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비교적 잘 보존되었고, 일주문 특유의 건축 특징이 잘 나타나 있으며, 받침 시설이 예스럽고 아담해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다.

일주문은 1900년경에 찍은 사진에도 나타나고 있어, 적어도 18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봉암사의 목조건물 중 극락전과 일주문이 가장 오래되었다.

 

 

 일주문을 지나면 오른쪽 거대한 바위에 '남무아미타불'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안에서 바라본 일주문

 

 봉암사 사찰 입구의 해탈교

 

왼쪽엔 용추동천(龍湫洞天), 오른쪽엔 침류교(枕流橋)이라고 적혀 있다

  

 

 

침류교를 지나면 바로 보이는 남훈루

 

남훈루는 봉암사의 선원으로 사용되는 건물로서 정면의 3칸은 2층 누각으로 되어 있고 양쪽으로 4칸씩 여덟칸은 단층으로 된 특이한 건물 형태를 지니고 있다.

'남훈루'라는 말은 부처님의 향기를 내어뿜는 남쪽의 문이라는 뜻일게다

 

 

▶봉암사 극락전(보물 제1574호)

 

 목탑형식의 극락전

 

대웅보전 동쪽에 자리한 극락전은 앞면과 옆면 모두 한 칸인 데다가 지붕이 두 겹이며 정사각형의 사모지붕을 하고 있어 전각의 모습이 매우 독특하다.

 

사모지붕이 모이는 중심에는 탑의 상륜부처럼 보이는 것을 얹고 있는데 `절병`이라고 한다.

평면이 정방형인 이런 전각은 대개 본래 목탑이 세워졌던 자리에 다시 지은 것들이다.

극락전(極樂殿)은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신다. 아미타불은 원래 임금이었으나 출가한 후 온갖 공덕을 쌓아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을 세운 끝에 마침내 부처가 되었다. 그러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이들이 의지하는 대표적인 부처다.
아미타불의 광명이 백천억 불국토를 비추고 수명도 한량없다 해서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도 하고, 주불의 이름을 따서 미타전이라고도 한다.

 

극락전의 석조기단은 9~10세기경의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그때에는 이곳에 목탑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17세기에 불타서 다시 지었는데 옛 모습대로는 하지 못하고 1층만을 지어 법당으로 쓰고 있다

 

봉암사 극락전은 법주사팔상전, 썽봉사삼층복탑(불에 타기전)과 더불어 목탑양식의 건물로 대단히 소중한 건물이다.

신라 경순왕이 피난시 원당으로 사용한 유서 깊은 건물로 전해지고 있으며, 현재 극락전 내부에는 어필각(御筆閣)이란 편액(扁額)이 걸려 있다,

봉암사는  935년(태조18) 정진대사가 중창하였으나 임란을 거치면서 극락전과 일주문만 남기고 그 많던 건물들이 모두 소실되었으며 이 극락전은 일제강점기 때 옥개보수가 있은 듯 망와에 소화16년(1941년)이란 기록이 남아 있다.

봉암사에서 극락전은 가장 오래되고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전각이다.

 높은 단층 몸체에 차양칸을 둘러 마치 중층건물 같은 외관을 구성했고, 몸체와 채양칸의 기둥열을 다르게 한 독특한 수법을 보이고 있다.

 

 

극락전의 가구식기단

 

기단과 초석은 고려때의 것으로 보이는데

기단은 탑과 동일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상ㆍ하갑석은 면석으로 처리하였고 기단바닥은 장방형 판석을 깔았다. 그 위에 외진주(바깥기둥) 12개과 내진주(안기둥) 4개로 중층목탑을 만들었다.

바깥기둥을 기단 상대갑석 위에 3칸형식을 세워 일층지붕을 받치게하고 안기둥(사천주四天柱) 4개를 세워 정사각형모양의 불전을 만들었다.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고 뒷면벽에 기대어 작은 불단을 만들었다.

 

앞문은 주칸사이에 문설주를 세우고 3짝문을 내었다. 중앙의 문은 궁널을 끼운 쌍여닫이 세살문을 달고 좌우는 세살창을 다달았다. 따라서 정면에서 볼 때 4분합문으로 보이며 좌우측에는 폭이 넓은 세살문을 중앙에 넣고 졸대를 세운 판벽으로 처리하였다. 비록 단칸의 불전이지만 일반 불전과 마찬가지로 정면과 양측면 출입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2층은 다포작으로 주칸포는 2구씩 사면에 넣고 주심포는 모두 귀공포이다.

 

 

이 극락전의 건조 수법은 고려말, 조선초의 불교식 진전양식으로 생각되는 원당이다. 원당이란 개인이나 친척이 특정 사원과 창건,중수 보시 등으로 관계를 맺고 거의 독점적으로 발원이나 운영에 참여하여 안년과 명복을 기원하는 사찰, 또는 사찰 내의 특정 건물을 말한다. 특히 불교를 배척했던 조선시대에 왕실의 발원에 의해 설치된 원당이 전국 명산대찰에 많았다.

봉암사는 신라 경순왕때부터 왕실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극락전에 대해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극락전을 불태우기 위해 장작개비에 불을 붙여 지붕에 던졌는데 불이 붙기는커녕 오히려 장작개비만 타고 불니 붙지 않아 포기를 하였다는 이야기이다

 

 

법당 안에는 하품중생의 수인을 하고 있는 아마타여래좌불과 극락회상도를 모셔놓았는데 백여 년 된 이 극락회상도는 극락의 모습을 잔잔하게 표현한 것으로 흔히 보기 어려운 것이다.

 

 

대웅보전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셨다

삼존상 뒤에는 목각으로 만든 탱불이 있다

 

 

대웅전 좌우벽의 화엄경변상도 벽화

화엄경변상도는 대승불교의 2대 경전, 즉 화엄경과 법화경 중에서

화엄경의 경전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대웅전 옆의 아귀밥통

 

발우를 씻은 물을 ‘청정수(淸淨水)' 혹은 절정수(節情水)라고 하는데

이 물을 아귀가 먹을 수 있도록 부어 주는 것을 아귀발우(餓鬼鉢盂)라고 하며 

부어주는 곳이 위의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돌을 동그랗게 놓고 가운데 잔자갈을 깔아놓은 곳이다,

공양을 마친 후 물을 버리는 곳이라해서 퇴수대(退水臺)라고도 하는데

속어로는  ‘아귀가 먹는 물을 담는다’ 하여 아귀밥통이라 부른다

 

<관련자료 : 아귀 밥통을 아십니까? http://blog.daum.net/kinhj4801/15959867>

 

 

 

 

금색전(金色殿)

 

 지증대사가 봉암사의 화롱점정(畵龍點睛)으로 정한 곳이 이 금색전의 자리라고 한다

 

 

 금색전의 뒷면

 

 금색전의 뒷면에는 '대웅전'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금색전(金色殿)' 이란 금색인(金色人)을 모시는 집이란 뜻인데 금색인은 부처님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전각 안의 불상은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어 '비로전'이라는 명칭이 맞지 않을까 ?다

 

도적의 소굴이 될만큼 기가 센 터에  지증대사는 비보책으로 네개의 처마기둥을 세워 지기를 누르고 2기의 철불을 모셨다고 한다.

그 중 한 기는 지금도 지하 어딘가에 묻혀있으며 반조각이 난 다른 한 기의 철불은 스님들이 고철로 팔아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그 근거가 부족하다

 

지금의 금색전은 불에 타 없어진 것을 1955년도 다시 건립한 것이며  전면에 삼층석탑이 있는 것과 금색전 건물의 뒷쪽에 대웅전이라는 편액이 달려있는 것으로 미루어 지금의 대웅보전이 세워지기 전까지 대웅전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금색전(金色殿) 안에는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다.

 

 

▶봉암사 3층석탑(보물 169호)

 

 

금색전 앞에 서 있는 삼층석탑

 

통일 신라시대의 석탑은 이중 기단 위에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탑은 단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와 상부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의 비례와 균형이 조화되어 보기드문 아름다움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상륜부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한국 석탑 중에서 매우 귀중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불국사의 석가탑과 닮은 모습으로 비례도 아름다워 봉암사 창건 당시 즉 9세기 통일신라 헌덕왕(재위 809∼826)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는 가운데, 상륜부 보개의 귀마다에 연꽃이 조각된 귀꽃으로 새긴 점이 고려시대에 유행하는 석조부도의 지붕과 비슷하다고 보아 그보다 늦은 고려 초에 조성되지 않았나 하고 여기지기도 한다.

 

 

 

탑의 높이는 6.31m이고 그중 상륜부의 높이는 2.38m이며 지대석의 너비는 3.24m로서. 산사의 탑치고는 규모가 대단한 편이다. 각 층의 비례와 균형이 매우 조화롭고, 지붕돌의 층급받침이 5단이나 되어 규범을 잃지 않았는데 그 지붕면 곡선은 매우 부드럽게 흘러내린다. 보통 탑들의 기단이 대개 2층인데 비해 문경지방의 탑들은 기단이 단층인 점이 좀 톡특하다

 

 

탑은 건물의 댓돌에 해당하는 기단부(基壇部), 탑의 중심이 되는 탑신부(塔身部), 꼭대기의 머리장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적인 통일신라의 석탑은 기단이 2단이나, 현재 땅 위로 드러나 있는 이 탑의 기단은 1단이다. 특이한 것은 지면과 맞닿아 있어야 할 탑의 받침돌 밑면에 또 하나의 받침이 있어 혹시 이것이 아래층 기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넓어 보인다.

 

 

완전하게 남아있는 상륜부의 장식들

 

앙화에 새겨진 연꽃이 앙징스럽게 화사하다

 

또 하나의 특징은 머리장식 모두가 완전히 남아 있어서 한국 석탑의 기준이 되는 귀중한 유례라는 점이다. 탑의 머리장식은 인도의 탑에서 유래했으며 인도탑의 소형화가 우리나라 탑의 머리에 적용되었다.

탑의 가장 윗부분에 놓이며 여러 개의 구성요소가 차례로 올려져 가장 장식적으로 마련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상륜부가 남아있는 탑으로는 실상사, 보림사, 봉암사 그리고 고려초기탑인 제천 신륵사삼층석탑의 상륜부 등 전국에 몇 기 남아있지 ?다

 

 

안상이 새겨져 있는 탑 앞쪽의 배례석

 

탑 앞쪽에 배례석까지 있으니 이 석탑은 갖출 것은 다 갖춘 셈이다. 배례석은 앞면에 둘, 옆면에 하나씩 안상을 새겨 장식하였다.

 

 

▶지증대사 적조탑(보물 제137호)

 

 

 

 

지증대사의 사리를 모신 부도탑으로 대웅보전에서 서북쪽 뒤에 자리잡은 전각 안에는 탑비와 함께 모셔져 있다

 

지증대사(智證大師, 824-883)는, 탑비의 비문에 의하면 “키가 8자 남짓했고 얼굴이 1자쯤이었으며 말소리가 웅장하고 맑았으니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9세에 출가하여 부석사에 입산하였다. 열일곱에 계를 받고 수행하던 중 꿈속에서 보현보살을 친견하기도 했다. 경주의 세속화 되어가는 불교를 멀리했던 듯, 경문왕의 부름에도 나아가지 않고 수행에 힘쓰다가 879년 이곳에 봉암사를 창건하였다. 창건 3년 뒤인 882년 12월(음력)에 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고 전한다.
지증대사가 헌강왕 8년(882)에 입적하자, 왕은 ‘지증’이란 시호를 내리고, 탑 이름은 ‘적조’라 하였다.

 

 

승탑의 상륜부

상륜부에 노반,복발,보주까지 남아 있어 비교적 원형 그대로 간직된 모습이다.

 

옥개석의 처마

 

옥개석의 귀꽃

 

 

탑신석의 보살상, 사천왕상,자물쇠가 달린 문비(門扉)

 

상대갑석 밑면의 연꽃문양

 

 

이 탑은 봉암사를 개창한 지증대사의 부도로 9세기 경에 팔각원 단형을 기본으로 하여 세운 것으로 현재 옥개석 일부가 파손된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지증대사가 입적한 바로 뒤인 883년에 세운 것으로 연대도 분명하고 부도의 주인공도 확실하면서 규모가 크고 조각이 유려하며 아름답다

여러장의 판석으로 짜여진 방형의 지대석 위에 각 부의 장신 조각이 섬세하고 수려하게 제작되어 당시 신라부도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탑의 높이는 3.41m이고 지대석 너비는 2.28m의 당당한 탑이다. 전체적으로 장중하면서 당당한 모습이다

 

 

 

하대석의 사자상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원당형(八角圓堂形) 부도의 하나로 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있는 팔각형의 굄이 기단부를 받치고 있다.

하대석은 1단으로 각 면에는 안상(眼象)을 조각하고 그 안에 사자상을 1구씩 배치했다. 중대석은 일반적인 형식과 달리 구름무늬와 갑석형으로 된 2단 굄이 받치고 있다. 갑석은 각 모서리에 구름 모양의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얼굴은 사람이고 몸은 새형상인 가릉빈가(迦陵頻伽)를 1구씩 조각했다.

 

 

 

중대석의 합장공양상

 

사리합

 

악기연주 공양상

 

 

중대석의 8면에는 안상을 새기고 그 안에 보개(寶蓋)·보주(寶珠)·영락이 장식된 탁자 위의 사리합(舍利盒)을 비롯하여 무릎을 꿇고 공양하는 합장공양상, 악기를 연주하는 공양상 등을 조각했다. 피어나는 연꽃 모양인 8각 상대석 밑에는 앙련(仰蓮)의 연꽃무늬를 돌렸으며 그 위에는 난간형의 받침대를 마련하고 각 모퉁이마다 기둥 모양을 세웠다. 탑신석의 각 면에는 우주(隅柱)를 새기고, 앞·뒷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비(門扉)와 그 좌우에는 각각 사천왕상을 표현하고 나머지 2면에는 보살상을 조각했다.

  

지증대사적조답비의 탑신석 조각상 배치도

 

 

 

범천상                                                         제석천상

 

옥개석은 탑신이나 기단부에 비해 폭이 넓으며 처마는 편평하게 내려오다가 끝부분에서 약간 위로 반전되었고 귀퉁이마다 삼산형(三山形)의 귀꽃을 장식했다. 상륜부에는 8각의 노반(露盤), 원형의 복발(覆鉢), 보주 등이 남아 있다. 이 부도는 탑비에 의해 883년(헌강왕 9)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증대사 적조탑(보물 제137호)의  가릉빈가(迦陵頻伽, Kalavinka)

가릉빈가는 얼굴은 사람이고 몸은 새형상인 상상의 동물이다

호성이라고 번역하는 데 속칭 극락조라고 하며 깃이 아름답고 소리가 곱다고 한다.

두 손을 가슴 앞에서 모으고 몸을 약간 옆으로 튼 자세로 서있는데, 공양상의 일종이다

 

 

허균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의 말이 의하면 

가릉빈가는 악곡,연주, 춤, 노래로서 부처님을 공양하거나 설법 장소를 상서롭고 아름답게 조성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가릉빈가의 출현은 곧 경사스러운 전조(前兆)의 의미로 해석된다고 한다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의 가릉빈가문을 살펴보면, 상단 괴임대 8면에 각각 날개를 펼친 가릉빈가가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다리와 날개의 표현이 섬세하고, 자세는 유연하다

 

 

▶지증대사 적조탑비(국보 제315호)

 

 

 지증대사적조탑비의 앞면

 

지증대사적조탑비의 뒷면

 

이 비는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의 공적을 찬양한 부도탑비로 신라 경애왕 원년(서기 924년)에 세운 것으로 귀부와 이수를 완전히 갖춘 석비이다.

 비문에 따르면 882년(헌강왕 8) 지증이 입적하자 왕이 시호를 내리고 적조라는 탑호와 함께 비명을 최치원에게 짓게 했다. 비문은 893년(진성여왕 7)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며, 탑은 924년(경애왕 1)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비의 높이는 2.73m이고 너비는 1.64m이며  편마암에 새거진 비로서 신라의 학자 최치원의 4산비(四山碑) 중 하나이다.

 최치원의 4산비(四山碑)는 쌍계사의 진감선사비(眞鑑禪師碑), 성주사지(聖住寺址)의 낭혜화상비(朗慧和尙碑), 봉암사의 지증대사비(智證大師碑), 숭복사지의 숭복사비(崇福寺碑)이다

 

 

 

 

 

 

 

거북모양의 비 받침은 머리는  한개의 뿔을 장식한 용머리의 형상이고 몸은 거북 모양이며, 등 위에는 비를 끼워두는 비좌(碑座)를 갖추고 있다. 비 몸 위로 올려진 머릿돌에는 연꽃무늬와 함께 서로 다투듯 얽혀 있는 8마리의 용이 장식되어 생동감이 느껴지며 매우 섬세하고 다양한 이수를 비신 위에 갖추고 있는 통일신라 최전성기의 석비이다.

 

비문에는 지증대사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고자 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데, 통일신라 후기의 문장가인 최치원이 글을 짓고, 당대의 명필인 분황사의 83세 혜강 노스님이 글을 쓰고 새겼다. 글씨는 왕희지체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꾸밈이 없고 우아하다. 

 

탑비 뒷면의 아랫부분이 심하게 파손되어 있다

 

또한 이 비문에는 신라 하대의 인명, 지명, 관명, 사찰명, 제도, 풍속 등의 정보가 담겨 있어 신라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백제의 소도(蘇塗)에 대한 기록도 있는데, 이는 소도에 대한 국내 유일의 기록이다.

 

 

 

 ※ 나머지는 2편에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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