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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항의 역사 개관(釜山港)의 역사(歷史)
삼한시대에는 대한해협을 건너 대마도에 이르고 다시 일지도(壹支島)를 건너 바로 구주에 이르는 해상교통로로 우리의 선진문화를 전파하는 통로였다. 삼국 및 고려시대에는 전혀 항만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고 더구나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왜구의 피해가 극심하여 농어촌은 황폐화와 민심의 동요로 인하여 일본과의 교역은 기대 할 수 없었다. 부산항이 본격적으로 우리 역사무대에 등장하게 된 것은 1407년(태종7) 최초로 부산포가 개항되면서 본격적인 교류가 시작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왜군이 가장 먼저 상륙하였던 곳이며, 또한 일본과의 문화외교 교류사절인 통신사가 출발하였던 곳도 부산항이었다.
1876년 불평등조약인『병자수호조규』의 체결로 제국주의에 의해 개항된 부산항은 과거의 왜관처럼, 우리가 우위에 섰던 선린외교에서 무력에 의한 개항의 불평등한 위치로 탈바꿈 한 날이기도 하다. 제국주의 일본은 1898년에 부산매축주식회사를 세워 1902년부터 부산 앞바다를 메우기 시작했다. 이는 부산항 개발과 건설의 출발이라 할 수 있지만 그 개발의 내용과 목적 및 용도가 일본의 식민지 착취, 경제침략, 나아가서는 대륙진출 발판의 목적으로 병참기지화 되었다.
부산항의 본격적인 개발은 군수물자 수송의 교통기지로 이용하기 위해 1912년부터 에 시작되어 제1,2,3,4부두 및 중앙부두 그리고 제1물양장에서 제8물양장까지의 건설이 1943년에 이르러 이루어지게 되었다. 광복이전까지 부산항의 항만건설 현황은 1912년에 제1부두 신축이래, 1943년 제4부두 완공에 이르기까지 안벽 5,033m, 물양장 6,320m, 방파제 2,437m, 호안 9,757m 등이 축조되었다
부산항의 제1단계 개발사업은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 정책에 따라 부산항은 수출입 전진기지로서 발전하였다. 현재는 컨테이너 및 양곡 전용부두로 축조된 제5부두는 1974년 11월 8일에 착공하여 1979년 3월 13일에 준공되었고, 석탄과 고철 및 광석 전용부두인 제7부두는 1974년 11월 8일 착공되고, 1978년 8월 29일에 준공되었다. 또한 제8부두는 1975년 3월 8일 착공되어 1980년 12월 30일 준공으로 1,000톤급 2선석, 5,000톤급 1선석, 1만톤급 1선석 및 1만 5,000톤급 3선석 등 총 7척의 선박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게 되었고, 이로서 기존 각 부 두에 산재해 있던 특수화물 전용부두로 축조되었다.
이 밖에도 국제여객부두는 1975년 12월 1일 착공 1978년 5월 30일 준공으로 3,000톤급 및 1만톤급 각 1선석씩 2척의 선박이 동시 접안할 수 있는 시설이 완공되었다. 연안여객부두가 1976년 9월 21일에 착공 1978년 2월 24일에 준공되어 쾌속선 2척과 300톤급 미만의 일반 여객선을 비롯하여 3,800톤급 카페리에 이르기까지 11척의 여객선이 동시에 접안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제1부두는 1975년 12월 1일에 착공하여 1977년3월 20일에 준공되었고, 제2부두는 1977년 4월 28일 착공 1979년 8월 3일에 개축준공으로 일반부두로 전용화 할수 있게 되었다. 제2단계 개발사업은 1979년에서 1983년까지 5년동안 1979년 7월 23일 6부두를 착공하여 1981년 12월 31일에 완공되었고, 제3부두 및 중앙부두개축은 1981년 8월 13일 착공되어 1983년 3월 31일에 완공되었다. 또한 제4부두 및 제5물양장 개축은 1979년 12월 24일 착공되어 1981년 6월 30일에 완공으로 잡화부두로서 그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다.
부산항은 계속적인 해상화물량이 증가함에 따라 북외항 개발을 주축으로 하는 제3단계 개발사업이 불가피하게 되어 1990년 12월 준공을 목표로 1985년 착공하게 되었다. 이 3단계 사업은 1,704m의 외항방파제 축조와 780m의 신규 컨테이너 부두축조가 중심이 되었다. 이 신규 컨테이너 부두에는 7.7㎞의 진입도로와 철로가 건설되었고, 합계 6기의 컨테이너 크레인이 설치되었으며 부산항내 정은수면적이 743만 ㎢에서 1,703만 ㎢으로 약2.3배 증대되었다. 또한 동시 접안 능력은 신규 컨테이너 부두에 5만톤급 3척의 접안을 포함, 56척에서 68척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현재 부산항은 우리나라 전국컨테이너 물동량의 95%을 처리하는 세계5대항만으로 성장하였다. 감천항은 부산북항의 남서쪽, 부산남항의 서쪽에 위치하며, 부산항의 보조항으로 감천항은 부산항에서 처리되는 화물은 컨테이너를 주축으로 하는 일반잡화 뿐만 아니라 고철, 양희, 원당, 양곡, 설탕 등 다양하다. 감천항의 본격적인 개발은 1986년 7월 9일에 착공되어 1989년 7월 8일에 준공되었고 고철부두 257m, 일반부두 351m 및 행정선부두 312m 등 총 920m의 부두가 건설되었다.
부산남항은 영도의 북서안과 건너편의 충무동 및 남부민동 사이에 있는 제2종 지정항만이다. 이항은 북쪽으로 약 1.7 ㎞ 만입되어 있고 폭은 1.3㎞ 정도이다. 항만 수역은 3.9m~7.8m로서 항의 평균 폭이 600m에 불과하므로 대형선박의 묘박지로서는 적합치 않다. 항의 북안과 서안에 총연장 2,848m의 호안과 물양장 1,790m, 부잔교 2기, 방파제 528m가 축조되어 있으며, 영도쪽의 해안은 주로 조선 및 수리 조선소가 밀집되어 있고, 영도대교 부근의 안벽일부만이 접안 가능하다. 다대포항 부산항의 남서쪽, 낙동강 하구에 위치한 제1종 어항으로 3면이 육지로 둘려싸여 있고 수심은 2m~20m, 저잘이 뻘로서 소형선박들의 좋은 묘지이고 피항지이다. 이 항은 목재 전용부두로 개발되었으며 방파제 650m, 안벽 1,365m 및 단지조성 1석 등으로 2만톤급을 비롯하여 8개의 선석을 확보할 계획이다.
부산신항(釜山新港) 건설은 부산항의 만성적인 화물 체선·체화 현상을 해소할 뿐만 아니라 중국 상해항 등 경쟁항만과의 중심항(Hub-Port) 선점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여 동북아 지역에서 발생하는 환적화물을 능률적인 처리와 컨테이너 중심항으로서의 기능을 강화하여 국제 경쟁력 제고와 고부가가치 화물 창출을 통해 부산지역의 경제발전에 기여할 것이다. 부산신항은 부산을 21세기 환태평양시대의 동북아 경제거점도시로 육성하여 국토의 균형개발 및 수도권의 기능을 분산 수용하기 위한 부산·경남권 광역개발계획이 1994년 12월 23일 건설교통부에서 고시됨에 따라 가시화되었다. 1995년부터 2011년까지 컨테이너부두 24선석과 다목적부두 1선석 등 25선석을 건설하여 연간 컨테이너 460만TEU와 자동차 30만대의 화물처리 능력을 갖추고, 북측 배후지에 93만평의 국제복합물류단지를 조성하고 가덕∼초정간 도로 22.9㎞ 및 가덕∼삼랑진간 철도 38.8㎞를 건설하여 부산신항을 동북아의 중심 항만으로서 고도의 종합물류 및 항만정보의 거점을 구축하기 위해 1996년 12월 부산신항 및 배후도시, 연계수송로 개발기본계획이 각각 수립되어 사업의 청사진을 마련하였다.
1996년 1월 23일 건설교통부와 부산지방해양수산청·부산시가 협의하여 신항입지를 가덕도 북서안으로 결정하였으며, 동년 3월 29일 건설교통부(정부조직 개편에 따라 1996. 9. 12 해양수산부로 이관)주관으로 가덕도개발지원협의회를 구성하여 추진상 문제점 해결과 중앙부처지원 건의사항의 창구로서 운영하였다. 1996년 7월 20일 부산지방해양수산청에서 부산항기본계획 고시로 항계변경과 신항개발 계획을 제시하였고, 1996년 12월 18일 건설교통부로부터 부산시 도시기본계획변경이 승인됨으로써 개발에 따른 절차를 수행하였으며, 민자유치계획에 의거 1996년 12월 24일 해양수산부에서 민자유치시설사업 신청서를 접수, 삼성물산(주)등 국내 26개 업체가 컨소시엄 구성으로 사업 참여를 신청하였으며, 해양수산부에서는 삼성물산(주) 등 컨소시엄업체를 우선 협상대상자로 지정하여 21회에 걸친 협상 및 심의를 거쳐 1997년 6월 30일 사업자로 지정하였다.
1997년 6월 12일에는 부산지방해양수산청·부산시·경남도와 4개 수협(부산시·의창·진해시·피조개양식)간에 어업피해보상 약정을 체결하여 효율적인 업무추진이 되도록 하였는데, 1997년 7월 13일 개발대상 해역내 어업피해보상을 위해 부산지방해양수산청과 부산시·경남도간에 업무위·수탁 협약으로 신항건설의 걸림돌이 되는 어민들의 손실보상에 착수하여 보상설명회·의견협의·현지지도·관계기관과 협의회 등을 개최하였다. 1997년 7월 29일 어업피해보상 감정평가를 위해 삼창·정일·동국·코리아 등 4개 감정평가법인을 선정하여 동년 8월 22일 평가의뢰를 하였고, 1997년 11월 20일 부경대학교 해양과학공동연구소에 어업피해조사 용역을 승낙하여 조기보상 실시로 공사에 차질 없도록 추진하였다. 1997년 9월 5일 민자사업자인 삼성물산(주)등 27개사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부산신항만(주)를 설립하였고, 1997년 10월에는 환경영향평가 완료와 실시계획(1차) 고시를 거쳐 1997년 11월 4일 방파제, 소형선 부두 등 정부공사에 대한 역사적인 기공식을 가짐으로써 신항건설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아울러 1999년 9월 준설토 투기장 2공구 호안, 2000년 5월 1공구 호안 공사를 착공하였으며, 2000년 12월 14일에는 민자사업실시협약변경체결 및 실시계획 승인을 득하여 2000년 12월 20일 북쪽부두 1단계(10선석) 사업을 착공하게 되었다.
2001년 11월 22일 부산신항 배후지 공사 착공, 2003년 1월 22일 부산신항 임시 홍보관 개관 및 방파제공사 준공(신항만 부쪽)되었고, 1월 26일 부산신항 배후도로 건설착공하였다. 2월 26일 부산신항 배후도로 착공(가락IC~식만교간 6.74㎞), 2003년 10월 24일 부산신항 배후에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이 지정되었고, 2004년 3월 30일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청 개청되었다. 2006년 1월 19일 부산신항 개항(30개 선석중 우선 3개선석 개장)으로 신항시대를 열리면서, 2월 25일 부산신항, 정기선인 스위스 선사 MSC소속, 컨테이너선 리사(RISA, 5천TEU)가 첫 입하였다. 4월 25일에는 부산신항 컨 화물조작창 개장되었다. 2007년 7월 13일 신항배후부지에 첫 물류센터 개장, 2008년 2-1컨테이너부두 개장, 2009년 1월 14일 부산신항 배후도로 (가락I.C~ 김해 초정I.C 14.4㎞)가 개통되었다. 5월 20일 부산신항, 2-2컨테이너부두가 개장되면서 북컨테이너부두가 완전히 개장 되었다. 남컨테이너 8선석은 공사를 추진 중에 있으며, 향후 서컨테이너부두 5선석이 마무리되면 부산 신항은 부산의 새로운 미래 동력의 중추적인 역할의 중심이 될 것이다.
일반화물부두 시설환경, 생산성 대폭 개선
부산항 제4부두 운영회사인 동방과 국제통운이 부산지방해양수산청으로부터 비관리청 항만공사 허가와 실시계획 승인 실시한 부산항 제4부두 리모델링 공사가 완료됐다. 총 100여원의 공사비를 들여 2003년 11월 28일 착공, 8월 26일 완료된 이 공사는 감천항으로 이전 후 방치돼 오던 시멘트 출하시설(싸이로 등)과 일반화물 처리에 주로 사용해오던 노후 창고를 철거해 야적장과 컨테이너크레인(T/C) 주행로를 추가 확보하는 공사이다. 이 공사로 야적장 부족난을 겪고 있는 부산항 일반화물부두에 4천여평의 추가 야적장이 확보되어 연간 10만TEU의 컨테이너화물을 더 보관하게 되었다. 또한 컨테이너크레인 주행로를 추가 확보함으로서 일반화물의 컨테이너화 전환추세에 적극 대처할 수 있게 되어 부두운영 효율성과 생산성 향상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전망된다.
부산항 제 4부두 앞바다
1980년대 우리나라 최초의 컨테이너종합터미날인 자성대컨테이너부두 전경.
정말 희한하게도 싱가포르와 부산항은 일직선으로 이어집니다.
남중국해와 대만과 중국 양안해협을 지나 부산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홍콩은 이 직선에서 약간 떨어져있긴 하지만 그나마 근접합니다.
그렇다면 한때 부산항의 경쟁상대였던 '고베'항과 일본 제1의 항구인
'요코하마'항의 대륙간 간선항로상의 위치는 어떠한지 살펴볼까요?
수혜지
◆더 깊숙이 들어와 더욱 즐거운 원도심 투어-부산 중구의 40계단과 모노레일 탐방.
추억의 40계단~모노레일~복병산~또따또가~부산근대역사관~국제시장 투어.
[부산테마여행] 부산 중구 뒷골목에서 보낸 부산한 하루
거미줄처럼 엮인 골목마다 볼거리 먹거리 가득
◆부산의 역사와 정이 넘치는 중구 골목길여행
남포동으로 대표되는 중구는 지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어 부산에서 가장 부산다운 곳이 아닐까.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촬영지로 유명해진 중앙동 40계단 문화관광테마거리는 한국전 당시의 역사와 삶의 애환이 담긴 곳. 지금은 40계단을 테마로 그 시절의 특색을 살린 문화거리로 조성됐으며 어려웠던 시절 피난민의 향수를 느낄수 가 있다. 아울러 50년 역사를 자랑하는 부산의 명물 보수동 책방골목도 놓칠 수 없는 부산의 명소.이런 부산 원도심이 인기를 끌면서 원도심을 관광코스로 하는 투어 프로그램도 등장했다.
우선 부산시와 부산관광공사는 부산 원도심 역사·문화 콘텐츠를 활용한 '근대역사 골목투어'을 마련했다.
중구와 서구, 그리고 영도구 등에 산재한 근대 문화 자원을 체험할 수 있으며 관광공사는 '부산 할배·할매'를 안내자로 파견하여 이 관강 프로그램에 대비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운영되는 원도심 투어 프로그램은
▲영도다리를 건너다
▲용두산에 올라 부산포를 보다
▲이바구길을 걷다
▲국제시장을 기웃거리다 등 4개.
이 중에서 최근 전국최초로 관광용이 아닌 주민을 위한 복지용 모노레일이 설치 되어 운영이 되고 있는 중구 도심투어길을 40계단 역사테마와 엮어 다녀와봤다.
87번 버스를 타고 중앙동까지 가기로 한다.
처음 타 본 87번 시내버스는 서면로타리에서 가야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신암을 거쳐 수정동 골목 골목을 다니며 중앙동까지 갔는데...정말 처음 타보는 아주 특별한 버스 투어였다.
중앙동 40계단 문화체험 테마거리.
뭐...처음 오는 것도 아니고, 사진 담으러 자주 왔던 곳이지만 그래도 새삼스럽다.
코스는 따로 정해진것이 없으나 부산 역사 골목기행 중 6.25와 관련이 있는 동광동 골목을 중점으로 걸어보려 한다.
이곳의 테마는 이별의 부산정거장.
그래서인지 부산역과 기차가 표현되어있다.
아버지들의 휴식이라는 작품.
시대를 살아가는 아버지들의 무겁고 고단한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
이래저래 대한민국에서 남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않음을 다시 한번 더 느낀다.
옛날의 부산역 모습을 담아놓은 벽화작품.
물동이를 지고, 얹은 자매의 모습.
부산중구를 대표하는 인쇄골목에 40계단 테마로 세워놓은 나무전봇대가 묘한 느낌을 준다.
40계단으로 간다.
40계단입구에 만들어진 뻥튀기 장수와 귀를 막고 있는 아이들의 표정이 재밌는 조형물.
40계단 테마로 전차길이 만들어져 있다
전차 모형의 공중전화기 부스와 나무전봇대들이 마치 그 시대를 보여주는 드라마 세트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40계단에 설치가 된 아코디언켜는 남자의 조형물.한 많은 부산 40계단
40계단은 1950년 6·25 피난시절 교통·행정의 중심지였던 부산중구에 위치하여 많은 피난민들이 그 주위에 판잣 집을 짓고 밀집해서 살았었고 바로 앞 부두에서 들어오는 구호물자를 내다 파는 장터로 그리고 피난 중 헤어진 가족들의 상봉 장소로 유명했던 피난살이의 애환을 상징하던 곳.
1951년 박재홍이 부른 “경상도아가씨” 라는 곡의 소재로도 사용되는 등 당시 영주동 뒷산 동광동, 보수동 일대에 흩어져 살았던 10만이 넘는 피난민들에게는 가장 친근한 장소였다고 한다. 40계단 문화관광 테마거리는 국민은행 중앙동지점에서부터 40계단을 거쳐 40계단문화관과 팔성관광까지 약 450m가량에 이르는 거리를 말하는데, 한국 전쟁 시 피난민의 애환과 향수가 담겨있는 유서깊은 40계단 주변을 50~60년대 분위기에 맞도록 재현하여 추억을 회상할 수 있게 함으로써 새로운 관광명소로 육성하고자 조성하고 있다.
더운 날씨라 시원한 아이스커피 한잔을 시켜들고 골목길 투어를 계속 한다.
이곳 40계단 문화관광 테마거리는 2004년 6월 부산시 종합평가 최우수거리로 선정되어 사업비 3억원을 수상하기도 하였으며, 한국전쟁 피난시절의 애환과 향수가 담겨있는 특색있는 테마거리 조성으로, 감천 문화마을과 함께 새로운 부산 체험관광 명소화로의 문화관광중심지의 위상을 향상시킬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으며 실제로도 많은 젊은이들이 카메라를 가지고 골목길을 서성이는 모습들을 자주 볼수가 있다.
깔끔하게 새 단장을 한 메리놀병원.
지대가 높은 탓에 조금만 올라서면 부산항의 모습이 바로 눈에 들어온다.
코모도호텔의 풍경.
2014년 6월 20일에 전국에서 처음으로 관광용이 아닌 주민을 위한 복지용 모노레일이 설치 되었다는 중구의 168계단. 이 모노레일은 부산시 중구 망양로 387번지 부산디지털고등학교 옆 계단에 설치가 되어있는데, 비탈의 경사가 가파르고 우회로가 멀어 노약자 등이 보행에 불편을 겪던 곳을 국비 11억원, 지방비 12억원 등 모두 23억원을 들여 모노레일을 설치했다고 한다. 선로 길이는 80m, 폭은 6∼8m. 6명이 탈수가 있으며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가 있다.
부산 중구의 가파른 계단길 옆에 설치가 된 모노레일.
6인승 모노레일은 전기로 움직이며 운행시간은 매일 오전 6시부터 오후 10시까지라고 한다.
모노레일의 실내. 6인승의 모노레일 실내는 생각보다 좁아 미니 케이블카를 생각하면 될 정도다.
경사진 계단길 바로 옆에 설치가 되어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중구의 모노레일.
여기까지 온김에 나도 한번 모노레일을 타 보았다.
실내는 생각보다 좁았지만 계단길을 편하게 올라가서 좋긴 했는데.....한번 이용시 최대 6명밖에 탈수가 없는 공간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데 소요되는 시간까지 계산을 한다면 언제든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에스컬레이트보다는 효율성이 떨이진다는 느낌. 에스컬레이트 위에 햇볕을 막을 수 있는 지붕을 만들어놓는다면 차라리 지붕있는 에스컬레이트가 더 경제적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런데 이곳 중구를 시작으로 동구 초량동 168계단에도 길이 65m 비탈길을 오르는 또 다른 모노레일(10인승) 설치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정말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는데...)
모노레일을 타고 산복도로쪽으로 올라선 김에 계속 골목길 투어을 한다.
하늘은 더 없이 높고 푸르며 시계는 좋은 편이다,
영도 봉래산 정상부가 해무에 뎦혀 신비로움을 연출한다.
중구 산복도로에서 바라본 부산시 전경.
용두산타워와 남항대교가 선명하게 보인다.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경이 눈부시도록 아름답다.
오래된 벽화를 손질하여 새 벽화로 만들려는 작업이 뙤약볕 아래서도 한창이다.
중구의 복병산 체육공원을 올라서서...
'정오사'라는 골목길의 특이한 사찰도 여전하고....
부산의 역사가 깃든 골목 골목을 다녀봤으니 이제는 문화예술 꽃 피운 부산 원도심 문화창작공간 ‘또따또가(Totatoga)’를 보러 간다.
이곳 또따또가는 피난민들의 아픔이 서려 있는 ‘40계단’ 주변 상가에 음악, 문학, 연극, 미술 등
예술인들이 함께 함께하는 아지트의 이름. 좁고 낡은 골목길 곳곳에 ‘또따또가
(Totatoga)’라는 빨간명패가 붙여져 있다.
원도심’(原都心).
예전에 부흥했던 도심이라는 뜻일게다.
최근 전국 곳곳에서 원도심 부흥을 위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부산에서도 쇠락해가던 원도심이 ‘예술’로 부활한 곳이 바로 원도심 문화창작공간 ‘또따또가’다.
◆숨바꼭질 하듯 숨어있는 또 다른 공간들
곳곳에 꼭꼭 숨어있는 '또따또가' 27개소를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설마 이렇게 어둡고 낡은 곳에 작업공간이 있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생각한 곳에 분명 있다.
세월이 묻어나는 밥집, 술집, 카페, 인쇄소 등 역사를 훑으며 걷다보면 또따또가라고 적혀 있는 빨간색 명패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술창작촌이지만 화려하지 않다.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예술이 숨어 있다.
의외의 장소에서 만나는 예술이기에 재미가 더욱 쏠쏠하며 의외로 시간이 많이 걸릴수도 있다.
오늘은 인쇄골목의 벽화만 보기로 한다.
모처럼 나온김에 백산기념관도 한번 들러보고..
학창시절 걸핏하면 오곤했던 용두산공원도 오랜만에 올라본다.
물론 이곳에도 또따또가가 숨어있다.
하루종일 있어봐야 몇장이나 찍을까....
손님이 없어 그늘에서 그저 쉬고있는 즉석사진사의 모습에서 짠한 것을 느낀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소리를 따라 와보니 나무 그늘아래 키타를 퉁기며
노래를 하는 아저씨를 보며 나도 그늘에서 한참을 쉰다.
노인들의 쉼터로 이용되고 있는 용두산 공원.
나는 나이가 들어도 이런곳에는 오지 않으리라 다짐을 해 보는데...5분 후의 일을 알수가 없는게 인생이니...
젊은 아가씨들이 지나가니 절로 고개가 따라 움직이는 본능적인 모습이 재미있어 한컷 담아봤다.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로 도심속 수목원 역활을 톡톡히 하고 있는 용두산공원 산책로.
이왕 온김에 부산근대역사의 백화점이라 할만한 부산근대역사관에도 한번 가보자.
지금의 어른들에겐 미문화원으로 잘 알려진 대청동 부산근대역사관.
외세의 상징과 함께 미문화원 방화사건으로 잘 알려진 대청동 옛 미문화원 건물이 근대역사관으로 탈바꿈해 1876년 부산항 개항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부산 역사를 재조명하고 역사 체험을 통해 역사 인식을 넓힐 수 있도록 근・현대사 관련 유물등 260여점을 전시해놓았다.
개관시간은 9~18시이며(17시까지 입장) 관람료는 무료며 월요일은 휴관이다.
부산근대역사관 1층에는 근대자료실 영상실 정보갬색코너 등을 배치하고 2, 3층은 △부산의 근대개항 △일제의 부산 수탈 △근대 도시 부산 △동양척식주식회사 △한미관계 △부산의 비전 등 주제별 상설전시실로 꾸몄으며, 3층에 기획전시실도 마련해 놓았다. 이 건물은 일제 때인 1929년 지어져 식민지 수탈기구인 동양척식주식회사부산지점이 들어 있다가 해방후인 49년부터 미국이 해외홍보처 부산문화원으로 무상사용해오다 부산 시민들의 반환운동으로 1999년에 돌려받았다.
1982년에는 부산 지역 대학생들의 방화사건이 발생해 80년대 반미운동의 상징적사건으로 기록됐으며, 한미관계 전시실에는 이 사건과 미문화원 반환운동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부산시는 2001년 5월 이 건물을 시 문화재로 지정한 뒤 이 건물의 활용 방안을 놓고 시민들의 여론을 모은 결과 부산근대역사관으로 바꿔 보존하기로 결정하고 건물의 개・보수와 전시실 꾸미기 등에 모두 50억원을 들여 2년에 걸쳐 새롭게 문을 열었다.
참으로 아픈 역사가 아닐수가 없다.
전시실 3층에 만들어져 있는 일제 강점기시대의 대청동 거리풍경.
근대역사관에서는 근대사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3층 전시실을 새롭게 개편하여 1930년대 부산근대거리로 재현해 두었다. 일제강점기 대청동은 부산의 중심지였고 일본인들의 거류지로서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과 조선은행 같은 금융기관, 병원, 양조장, 가구점, 일본식과자점, 세탁소, 미곡판매 및 정미소, 출판사 등 많은 회사와 상업시설들이 즐비했는데.....상점들 대부분이 일본인들이 경영하고 각종 근대적 시설들도 일본인들을 위한 시설들이 많았으며 이러한 일제강점기(1930년대) 대청동 거리의 주요 상점건물들을 축소 재현하여 그 당시의 생활상을 살펴보기 위해서 재현되었다고 한다.
부산근대역사관에 걸려있는 '영도다리 마지막 드는 날'이라는 사진이 눈에 들어오길래 한번 찍어봤다.
부산근대역사관을 나와 국제시장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