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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야기 |
<조선시대>-제6대 단종, 정순왕후 송씨, |
정업원 비각 이곳을 찾으려면 서울지하철 6호선 타고 창신역 3번출구로 나가면 낙산으로 오르는 길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똑바로난 큰길을 돌아 5분 오르면 청룡사가 나온다. 길따라 난 청룡사 안쪽으로 정업원 구기라는 비각이 있고 그 앞쪽으로 동망봉이 보인다. 한 마리 원통한 새 궁중을 나와 외로운 몸 외짝 그림자 푸른 산중을 헤맨다 밤마다 잠을 청하나 잠은 이룰 수 없고 해마다 한을 다하고자 하나 한은 끝이 없네. 자규 소리도 끊긴 새벽 묏부리 달빛만 희고 피 뿌린 듯 봄 골짜기 떨어진 꽃만 붉구나. 하늘은 귀머거리라 슬픈 하소연 듣지 못하는데 어찌해서 수심 많은 내 귀만 홀로 듣는가.
단종이 청령포에서 지었다고 전해지는 '자규루 시' 다
비운의 정순왕후 송씨 단종과 정순왕후 사이에는 자식이 없다. 살벌한 분위기에서 가례를 올리고 동거한 기간이 1년도 안된다. 정순왕후는 18세에 단종과 헤어져 홀로 되어 소생 없이 82세 까지 살았다.
해마다 3월이면 전주이씨 문중, 친정인 여산송씨 문중, 시누이 경혜공주(단종 누이) 시가 해주 정씨 세 문중이 모여 사릉에서 매년 정순왕후 넋을 위로하는 제사를 올린다.
정순왕후의 사릉 6대 단종비 경기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리 산65-1(사적제209호)에 있다. 작년 이날도 제를 마치자 3월 날씨 답지 않게 천둥 번개가 치고 소나기가 쏟아 지더니 이내 우박으로 바뀌어 제관들이 모두 한 마디씩 한다.
-왕후님의 원한이 아직도 풀리지 않는 모양 이군-. 80평생의 모진 목숨에 그 원한은 오죽했으랴, 여인의 恨은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하잖는가
비참한 정업원(淨業院)의 생활
정순왕후는 1440년 (세종22년) 판돈녕부사 송현수의 딸로 태어나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해 가히 종묘를 보존할 인물이라 하여 1453년(단종 1년)에 간택되어, 이듬해 15세로 왕비로 책봉 된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고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자 의덕 왕대비에 봉해 진다. 단종이 사사된 후 세조 3년(1457년) 노산부인으로 강봉 되고 송씨의 운명은 예견된 길로 가고 있다.
청계천 영도교永渡橋에서 18세 소녀 왕비 송씨는 영월로 떠나는 17세 소년왕 단종을 눈물로 영원히 이별한다. 영영 이별한 다리, 영도교는 영원히 건너간 다리라고 후세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다. 지아비를 잃어 버리고 그 후 궁궐에서 쫓겨난 송씨는 지금의 동대문 밖 연미정(숭인동) 동망봉 기슭에 초가삼간을 짓고 한 많은 여생를 이어 간다. 정업원淨業院이라 이름 붙여진 그곳에서 함께 쫓겨난 세명의 시녀와 살았다. 시녀들이 해온 동냥으로 끼니를 잇는 비참한 생활이었다.
근처 동망봉에 올라 영월을 향해 조석으로 단종이 무사하기를 빌었지만 비원과 통곡은 허사였다. 왕비의 오열과 궁핍을 인지한 마을 여인네들이 줄을 서서 쌀과 나물을 사립문 위로 던져 놓고 갔다. 서슬이 녹지 않은 세조는 이 보고를 받고 부녀자들이 정업원 근처에 얼씬거리는 것을 금지했다. 민초들은 다시 지혜를 짜냈다. 정업원 인근에 금남禁男시장인 채소전을 열었다. 禁男이니 감시하는 관리가 접근을 할 수 없다. 이를 틈타 여인네들은 곡식과 채소를 정업원 담 너머로 던졌다. 후 송씨는 자줏물 들이는 염색업으로 생계를 이었다. 그 골짜기를 지금도 자줏골이라 부른다. 세월이 흘러 세조는 자신과 가족에게 액운이 겹치자 퍼런 서슬이 녹아 참회한다. 송씨의 비참한 생활을 전해 들은 세조는 정업원 근처에 영빈전이란 아담한 집을 짓고 궁핍을 면할 넉넉한 식량을 내렸으나 그것을 넙죽 받을 송씨가 아니다. 오로지 정신력으로 이가 바스러지도록 원한을 짓 씹으며 80 평생을 보냈다. 무서운 에너지다. 차라리 요절이라도 했으면 한의 깊이가 덜했으련만, 공식 통계는 없지만 우리나라 무속인이 모시는 신이 송씨 부인이 가장 많다고 한다. 송씨 부인이 바로 정순왕후일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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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쏠쏠한 재미 좋은글 사랑합시다.
전주향교/鶴田/옮김/한문희총대장 감사합니다.
본래의 마음,자유인 한문희총대장, 백두대간의 전설 자유인 백두대간종주대한문희총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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