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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유배당한 사람처럼
내가 이렇게 외국을 포함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도 스스로 강조하는 게, '나는 관광객이 아니다'라는 말이다. 그 건, '비록 나는 이렇게 돌아다니고는 있지만, 일을 하면서 다닌다'는 뜻이 감춰져 있기도 한 말인데, 그 건 명확한 사실이다.
그런데 쿠바에 와서 최근 이런저런 이유로 일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나에겐 그에 따른 불안감과 불만이 쌓여가고도 있었는데......
*
5월도 말로 점점 여름과 가까워져서 그런가?
여기도 더워지고 습해지는 느낌이면서 바람까지도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
더구나 날은 길어지면서 더디게만 가니 한꺼번에 2중고에 시달리는 기분이다.
게다가 모기가 나타나는 저녁 5시 경부터 사라지는 아침 7시 부근까지(8.9시에도 모기는 간간이 있다.) 모기를 피하느라 안간힘을 쓰다 보니, 밤까지 엄청 길게 느껴져, 하루 보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어젯밤에도 너덧 차례 잠에서 깨어 일어났는데,
첫 번째 깨어난 시각이 8시 14분이었다.
그렇다면 잠자리에 들고 40분이나 지났을까 말까한 상태에서 모기 때문에 깨어났던 것으로, 한 시간여를 흔들의자와(의자에 앉아 있을 수만 있어도 행복하겠는데, 모기가 나를 가만 놔두지 않아) 복도를 서성이는 걸로 시간을 때우다 다시 누웠다.
그러다 일어나 보니 10시 반 경, 자는 시간보다 깨어 도망다니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로 나는 모기에 시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밤인데도 왜 바람 한 점 없는지......
오늘, 다 저녁 때(6시 반 넘어) 저녁을 먹을까 하는데, 조금 전 여기 숙소 방들을 점검하던 야근 종업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오더니, ‘R’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좋은 사람이고 나를 많이 도와주고 있다고 맞장구도 쳐주었는데,
가만히 듣고 보니, 그는 날더러, 자기에게 적선을 하라는 것이었다.
하다 못해 담배라도 사서 피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는 건지!
나는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내가 돈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 설사 돈이 있다고 해도 그런 사람에게 또 그렇게 돈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무슨 명목으로?
더구나 이 숙소 야간 경비원이, 어떻게 투숙객에게 손을 벌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할 수도 있지만, 결코 하지 않겠다!" 고 딱 잘라 말했다.
그러자 겸연쩍어하면서 돌아갔는데,
엊그저께는 청소하는 여자가(둘인데 그 중 하나가) 마치 나를 도와줄 것처럼 너스레를 떨기에, 고맙다고까지 했는데, 그 다음 날부터 찾아와 뭔가를 빌려 달라거나 자신에게 줄 수 없냐고 요구하기에,
처음엔 친절하게 대응해주다가 그녀의 본심을 알고는,
"너는 왜 이 숙소의 손님인 나한테 자꾸만 뭔가를 요구하냐? 이건, 손님을 대하는 공정한 자세가 아니라는 걸 모르느냐?"고 하면서 냉정하게 대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고 보면, 이들은 내가 돈이 많은 사람으로 안다.
글쎄, 근데 그건 어쩌면 사실일 수도 있다. 적어도 여기 쿠바에서는......
내가 돈이 없다면, 이렇게 여기에 머물 수 없을 테니까. 더구나 지금도 상당히 깔끔하고 좋은 건물에서 초라하지 않게 숙박하고 있으니까.(물론 숙박료는 싸다.)
그런 걸로만 봐도, 나는 쿠바 안에서만큼은 돈이 없는 가난뱅이로는 보여지지 않을 것이기에,
그들의 시각이 틀리다고 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예를 들어 미국에만 있다고 해도, 나는 진짜 가난뱅이에 어디 오갈 데 없는 '떠돌이' 신세로 전락할 수도 있는 경제력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여기 쿠바에서는, 물가가 싼 덕에, 없는 돈에도 ‘부자’ 행세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아무래도 여기 쿠바의 보통 사람들보다는 (돈의 힘으로)잘 지내고 있는 모습이니까.
그렇지만 나는 점점 더, 여기 쿠바에 있는 게 불편하게 느껴진다.
여기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안타까워서인데,
내 본심은 이들에게 뭔가 도움이 되고도 싶은데,
내가 여기 쿠바에 무슨 '자선단체' 회원으로 온 것도 아니고, '평화 봉사단'의 입장도 아닌 다음에야,
내가 무슨 수로 이들을 돕겠다고 나서겠는가 말이다.
나야 큰 목적의식도 없이 지나가다 들르 듯 쿠바에 왔던 사람이라, 이렇게 지내다 떠나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이들의 사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불편하고 슬프기까지 해서,
그런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가급적 밖에 외출하는 것마저도 자제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저녁도 먹고 어쩐지 무료하고도 쓸쓸한 기분에 젖어 있었는데, 8시가 돼 가기에,
'이제 자야 하나?' 하고 있는데, 저 아래에 웬 빨간 옷이 보이면서 손을 흔드는데,
R이었다.
다른 손엔 뭔가를 잔뜩 들고서......
그가 들고 온 것은, 빠빠야 반절(두 쪽으로 나눠)과 수박 4분의 1통이었는데, 엊그제 내가,
"여긴 열대과일이 많다고만 하더니, 여태까지 수박이나 멜론 같은 건, 파는 것조차 구경 못했다."고 했던 말에 대한 반응이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수박이 이상했다. 씨앗이 호박씨 같이 크고 색깔도 붉었다.
그뿐만 아니라 맛도 좀 이상했는데, 수박 맛은 났지만 그렇게 달지도 않았다. 반면 빠빠야는 괜찮았다.
그리고 그는 내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복도 모퉁이 바람 통하는 곳까지 나와 노트북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두 구멍의 콘세트가 달려있는 긴 전선줄을 가져왔는데, 그 형체가 궁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보니 사온 게 아닌 자신이 재료를 구해 만든 게 분명했는데, 여기 쿠바의 ‘물자난’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물론, 그래도 방안 벽의 콘세트에 꼽은 뒤 길게 늘어뜨려 복도 모퉁이까지 연결시켜 노트북을 시험해 보니 작동에는 이상이 없었는데,
그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우면서도, 나는 그 걸 보고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심정이었다.
그렇지만 그로 인해서, 또 ‘블루투스’를 이용한 인터넷에도 접속한 다음,
모기에 뜯기면서도, 오늘도 한국의 P와 Ch, 그리고 멕시코의 K씨와 문자 채팅을 할 수 있었다.
5 . 26
*
오늘은 청소하는 여자가 바뀌어(성실하고 착한),
더구나 이른 아침 내 방 청소까지 해주어, 그녀에게 마스크 하나를 선물했고, 개운하게 하루를 시작했다.
그런데 모기 때문에 밤새 선풍기를 틀어놓고 자서 그런지 몸 컨디션이 좋질 않다.
무슨 일인지 어제 저녁부터 ‘R’이 왔을 때도 그랬지만, 오늘 아침까지도 바람이 없다.
나에게, 여기 쿠바에서의 바람은 매우 중요한데(바닷가뿐만 아니라 여기 산중에서도), 갑자기 바람이 사라진 것 같아 답답하다 못해 불안하기까지 하다.
그러다 겨우 11시가 되면서 바람이 불기 시작했는데, 그래도 오늘은 다른 날에 비해 상당히 더운 날씨다.
후텁지근하고.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었는데,
좌우간 이들은 ‘위생관념’이 없다. 아니, 지저분해서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다 못해 짜증이 난다.
내가 앉은 탁자는 아침에도 식사를 했던 자리였는데, 아침에 내 쥬스 잔에서 흘러내렸던 쥬스 액이 탁자보에 그대로 닦이지 않고 말라 있었다. 그러니까 아침 접시를 수거해간 뒤 닦지도 않고 그대로 점심 식사를 내왔다는 얘기였다. 허긴, 그게 어디 여기 뿐인가. (내가 겪기엔)쿠바에서는 보통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손님이 식사를 하는데, 웬 오가는 사람이 그리 많고 사람마다 고성을 질러대는지......
식당이면, 손님이 식사를 편히 하게끔 종업원이거나 직원들은 조심스럽게 오가거나 얘기도 좀 조용조용 해야 할 텐데, 벽면 몇 군데에 '숙소에서는 낮은 목소리로...' 라는 주의사항이 붙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방문객들은 물론 특히 여기 종업원들마저 마구 떠들어 대니, 더구나 천장이 높은 공간이라 그 소리들이 쩌렁쩌렁 울리기까지 하니, 여간 시끄러운 게 아니다. 그래도 누구라 할 것 없이 조용히 말하는 사람이 없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들은 공중도덕이나 위생관념이 없어서, 나 같은 사람은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그런데도 여기에 머물 수밖에 없는 내 처지가 딱하기도 하다.)
오늘은 R이 오지 않았다.
그 이유로 보면, 밤 9시가 될 무렵까지 정전이어서 그럴 것 같긴 했다.
날이 어두워지는데도 숙소에 불이 들어오지 않아,
'무슨 일이지?' 하면서 보니 정전이었다.
더구나 오늘도 바람마저 없는 밤이라서 벌써부터 숨이 턱턱 막히는데......
5 . 27
#오이 소박이#
여기 ‘꼬브레’에 와서 방에 ‘냉장고’가 없음으로 해서 먹는 문제가 심각해졌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까보 끄루스'에서는 먹고 싶은 걸 냉장고에 보관하면서 먹을 수 있었는데,
여기는 냉장고가 없다 보니, 이 여름철에 먹 거리를 보관할 장소가 없기 때문에,
불편하다 못해 타격이 커가고 있다는 걸 일주일이 지나면서야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살이 빠지는 것도 알게 되었는데,
못 먹어서 살이 빠진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내가 쿠바에 오자마자부터 이들은 쿠바는 열대 과일이 풍성하다는 걸 하도 강조를 해서, 나는 기대감이 컸는데,
막상 지내면서 보니, ‘망고’ 빼고는 뭐 풍성한 게 없다.
‘바나나’ 정도?
근데, 바나나도 맛이 별로 없이 뻑뻑하기만 하고, 여름에 세계 어디라도 흔한 복숭아 자두 류는 없다고 쳐도, 수박 멜론 같은 것조차 구경도 못한 상황이다.
그러고도 이들은 여기가 무슨 과일 천국인 양 말하는데, 여기 꼬브레에 와서는 허다 못해 빠빠야마저도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이해도 안 되고, 먹거리까지도 가난한 나라라는 걸 알아가고 있다.
내가 이렇게 먹을 과일이 빈약하고 초라한 나라는 본 적이 없으니까.
더구나 '까보 끄루스'에 있을 때, 안토니오 영감님도,
"산티아고 쪽에 가면 과일도 훨씬 풍부하고 맛있을 거요." 했었는데, 그래서 산티아고는 대도시라 풍성한 과일과 먹거리를 즐길 줄 알았는데,
웬걸?
오히려 '까보 끄루스'보다 훨씬 못해서,
내 실망이 여간 큰 게 아니다. 먹지 못해 살까지 다 빠질 정도니까.
그런데 과일만 없는 게 아니라, 가만히 보니 여기는 채소 또한 초라하고 빈약하기 짝이 없다.
음식에 토마토와 양파 그리고 상추를 구경하는 것도 쉽지가 않을 정도로.
내가 알기론 서양 음식 중 그 세 가지는 어쩌면 가장 기본적인 채소로, 그것들 없이 어떻게 샐러드를 해 먹는다는 것인지......
물론 간혹 토마토와 상추는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그마저도 참 볼품이 없다.), 양파는 거의 보지를 못했다.
그래서 한 번은 R에게,
"근데, 왜 쿠바는 양파 보기가 힘들어?" 하자,
"농부들이 안 심으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요?" 하기에,
"허긴, 돈 벌기 싫으면, 가난하든 말든 뭔가 하고 싶겠어?" 하고 내가 비꼬듯 시큰둥하게 대답했었는데,
정말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여기 토양에 양파가 안 되는 건지, R의 말대로 심기 싫어서 안 심는 건지......
아무튼 그래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내가 여기 쿠바에 와서 제대로 된 샐러드를 먹어보거나, 심지어는 구경한 적도 없다.
기껏해 봐야, 음식점이나 가정(숙소 식당도 마찬가지)에서 샐러드라고 내오긴 하는데,
그냥 덜렁 오이를 얇게 썰어서 내오기에,
'이게 샐러드라고? 이걸 먹으라고?'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면 최소한 뭔가 양념이라도 제대로 해와야 할 것 같은데, 소금에 약간 절이는 게 전부인 것 같고,
어떤 데는 간도 없이 그냥 오이만 몇 조각 썰어내와서,
'이것도 요리라고 할 수 있을까? 아이들 소꿉장난에서도 이보단 잘 할 수 있을 거다.' 하고 기막혀 하는데,
'한국에서는 거저 먹으래도 먹지 않을 걸......' 하다가,
나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고 말았다.
갑자기 한국의 '오이 소박이'가 머릿속에 그려졌던 것으로,
'한국은 오이 하나만을 가지고도, 절여서 무쳐서 장아찌로 만드는 등 수많은 요리 방법으로 조리해서 먹는데......' 하면서 그들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그리면서 침만 삼켜대다가,
'아, 흰 쌀밥에(여기는 밥 알이 풀풀 날리는 간이 된 잡곡밥이거나 흰밥이 주를 이룬다.), 잘 익은 오이 소박이를 먹을 수만 있다면......' 하고 침을 흘리면서, '여기 오이 샐러드와 비교한다면, 우리네 '오이 소박이'는 얼마나 맛있고 풍부한, 그리고 시각적으로도 아름다운 음식이던가!' 하고는,
오죽하면, 그런 음식을 개발해서 해 먹을 줄 아는 우리 민족이 자랑스럽기까지 했겠는가. #
'내가 너무나 쿠바 먹거리를 비하하고 우리 음식을 찬양한 건가? 물론 그런 면도 없지는 않은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그렇지만 내 본심을 숨기고 싶지는 않다.' 하고 이 글도 '쿠바 이야기'에 포함시키기로 했다.
*
자다가 몇 번을 깼는지 모른다.
정전이라 선풍기도 못 튼 채 잠을 청하다가, 모기가 더 극성을 부려 결국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게 애타게 전기를 기다리는데, 한 순간에 불이 들어왔다.
그런데 그렇게 갑자기 불이 들어오자, 저 아랫마을에서부터 떠들썩한 함성이 들려왔다.
그것도 좀 웃겼다.
그러니까, 여기는 정전이었다가 불이 들어오면 사람들이 환호성까지 지르곤 하는데, 오늘도 그랬던 것이다.
마치 ‘월드컵’ 때, 우리 나라가 다른 나라에 골을 넣을 때 아파트 전체가 떠들썩한 것과 비슷한 현상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불이 들어오고 나서야 겨우 선풍기를 틀고 잠을 청했다.
그런데 두 시간 간격으로 잠이 깨, 그러면 또 복도에 나갈 수밖에 없었는데,
거기서도 가만히 있으면 모기에 뜯기니 움직여야만 해서 복도를 왔다갔다 걸어다녀야 했고, 그러면서 졸기도 했다.
이 나이에 잠을 자다 일어나 걷다가 조는 현상을 뭐라고 해야 할지......
그리고 아침에 올 줄 알고 기다렸던 R이 오질 않으니, 그냥 그를 마냥 기다리고 있다가는 점심마저 못 먹을 것이라서, 하는 수 없이 10시 반이 되기에 점심을 신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400 뻬소라는 거 아닌가.(평소엔 350 뻬소)
왜 그런가 했더니, 오늘 메뉴엔 돼지고기가 나온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오늘은 몸도 좋지 않은데, 점심 준비를 해두지 않으면 밖에 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어서, 재빠르게 점심을 신청한 꼴인데,
토요일이라 그런지 숙소 앞 성당 주차장엔 많은 차량들과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런데 점심 무렵에 R이 도착했고, 평소처럼 내 숙소 앞에 올라와 얘기를 하고 있는데, 여종원업 하나가 오더니, 방문객인 R은 이제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때와는 달리 단속이 심했던 것인데, 그래서 내가,
"오늘은 내가 몸이 좀 안 좋아서, 누군가 한 사람쯤 옆에서 나를 도와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야 돌아가는 것 같더니,
곧 다시 올라와, 윗사람이 그랬다며,
얘기를 하려면 아래 홀에 내려와서 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일단 홀로 내려가 R이 '블루투스'로 인터넷 접속을 시켜줘,
나는 카톡과 와삽으로 문자를 보내기도 하다가,
그도 ‘산티아고’에 일이 있다기에 거기서 헤어졌다.
그런데 낮 시간에 뜨거운 물이 나오기 때문에, 그제야 나는 샤워를 했고 옷도 갈아입었는데,
어느새 하늘은 구름으로 덮여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많던 오전의 차량들이 거의 다 빠져나가, 주차장이 썰렁하기만 했다.
그래서였을까?
어쩐지 나도 쓸쓸했다.
그런데 내 눈에 띈 게, 주차장 공터에 호루라기를 부는 주차요원 옆에 앉아 있던 한 노인이었다.
손님도 없는데 그렇게 앉아 있으면 뭘 어쩌자는 건지. 살 사람도 없고, 요즘 망고철이라 맨 망고 뿐인 세상에, 몇 푼이나 받으려고 팔리지도 않는 망고를 놓고 그렇게 하염없이 앉아있는지......
나라도 그 노인의 망고를 사주고 싶어도, 어제 다른 곳에서 샀던 것도 남아있는 상황이라 그럴 수도 없는데(더구나 요즘 날이 더워지면서 과일을 사두면 날파리들이 껴서, 오늘 청소하는 여자에게 너덧 개를 주고도 아직도 남아 있는데),
그런 거 보는 것도 슬프고, 여기 쿠바에 있는 것 자체가 슬프고 불편하다.
5 . 28
#유배당한 사람처럼#
나는 낮밤을 가리지 않고 일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일의 능률은 밤이 훨씬 나은 편인데, 무엇보다도 주변에 신경을 쓰지 않아서일 터다.
그러니까 초저녁 잠이 많은 나는 일단 저녁을 먹은 뒤 남들보다 상당히 일찍 잠자리에 들어, 자정 전에도 '첫 잠'에서 깨어나 맑은 정신에 일을 하는 식인데(새벽까지),
여기 '꼬브레(Cobre)'에 와서도 며칠 째 일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거의 온통 밤 시간을 모기를 피해 도망다녀야 하는데, 무슨 일이 될 것인가 말이다.
그래도 나름대로는 일하기 위해 애를 쓰기도 하지만, 일단 전깃불 아래 앉으면 날벌레들이 몰려들고, 그 즉시 모기에 물리게 되어 여기저기 긁느라 정신집중을 할 수 없으니 일이 제대로 될 리가 없는 것이다. 더욱이 이제는 팔뚝이며 발목 등 겉으로 드러난 피부는 거의 공간도 없게끔 모기에게 빽빽하게 물려, 저녁이 되면서는 불안감에 질려가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다고 여기 쿠바는 어딜 가도 창이 목재 차단막(페르시아나)으로 돼 있기 때문에 모기로부터 완벽하게 피할 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기를 피하려면 몸을 바삐 움직여야 하는데, 그저 타월 같은 걸로 허공이거나 상체 주변을 휘저어가며(그래도 모기는 쫓아다니며 문다.) 졸음에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도 숙소의 복도를 서성일 수밖에 없는(그 운동량만도 상당할 듯) 형국이니, 무슨 일을 할 것인가 말이다. 그러니 요즘엔,
'여기에 내가 왜 있다지?' 하는 생각밖에 안 든다.
그러던 와중에,
원래 내가 선풍기 바람을 싫어해 한국에선 거의 사용조차 하지 않는 사람인데, 여기 와서도 웬만해선 그냥 모기에 뜯기면서 지내왔는데,
그저껜가?
그 밤도 초반엔 사바나(홑이불)를 뒤집어쓰고 누워 잠을 청하다 모기 등쌀에 깨어날 수밖에 없었고, 한 시간 여 밖에서 서성이다 다시 침대로 돌아왔는데, 바람도 잔 밤이라 어쩔 수 없이 선풍기를 틀었고, 더구나 옷도 눅눅해져 다 벗은 채(팬티바람) 잠을 청했었는데,
일부 그 선풍기 바람의 덕은 본 듯했다. 아무래도 모기가 덜 달라들었으니까.
그런데 다른 문제가 불거졌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컨디션이 안 좋았던 것이다.
그래서 아침도 식당에 가지 않았고, 망고 하나와 분유 한 잔을 타서 먹는 걸로 때웠는데,
그러다 말겠지 했던 내 몸 상태가, 어제는 감기 기운이 있는가 싶더니, 또 오늘은 그게 편도선으로 번질 기미마저 보여 나를 바짝 긴장하게 하고 있다.
더구나 오후가 되니, 나아지기는커녕 가래가 끓고 가슴이 뜨끔뜨끔하면서 정신도 흐리멍텅해지는 증상에, 마른기침도 하고......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병원을 염두에 두어야 했고,
다행히 이 마을 다른 산 쪽에 제법 커다란 병원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R이 오면 그와 함께 가려고 했는데,
웬걸?
하필이면 저녁무렵이 되자 비가 내리는 거 아닌가.
그것도 상당히 많은 비가 쏟아지다 보니, R도 비때문에 못 올 터라,
병원 가는 걸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서둘러 저녁을 먹어두었다.
그러고 보니 이 커다란 숙소가 텅텅 빈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내가 이 숙소의 유일한 투숙객이라는 말이기도 했는데, 순간,
'아, 어쩌자고 나는 이렇게 혼자 남의 나라 외딴 곳에 낙동강 오리알 같은 외톨이 팔자를 타고 난 걸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건, 결코 아름답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또, 비가 내려 다소 쌀쌀해지는 것 같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모기가 잉잉거리기 시작하니,
'이 긴 밤을 또, 어떻게 보내야 한다지?' 하는 걱정과 함께 노이로제라도 걸린 사람처럼 안절부절 못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먹거리도 싫고(여기는 맛있는 게 망고 빼고는 없는 것 같다.), 공기도 싫고, 그냥 여기를 떠나고 싶은 생각밖에 없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것마저 내 맘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 쿠바에서는 내가 어딘가 가고 싶어도 자유롭게 다닐 수도 없고(내 카드로 결재를 할 수 없어), 또 어딘가 가봤자 미국처럼(미국에서라면 '알라스카' 같이 기후 자체가 다른 곳에라도 가 있을 수 있겠지만) 큰 나라가 아닌 조그만 섬나라이다 보니 가는 곳마다 모기 없는 곳이 없을 터라, 그럴 바엔 아예 일정을 앞당겨 쿠바를 떠나려고 해도,
오면서 값싼 항공권을 샀던 게 족쇄로 작용해, 항공권 일정 변경이 불가하다니, 죽으나 사나 그 정해진 날짜까지 여기에 머물 수밖에 없는 처지라서다.
그러면 그럴수록 시간은 더디기만 한 것 같은데 일마저 못하는 상황이다 보니, 마치 '창살 없는 감옥'에 갖혀 있거나 멀리 귀양이라도 와 있는 기분이다.
그러고 보니 애꿎은 핸드폰의 달력을 꺼내 하루에도 몇 차례씩 날짜 계산만 하고 있는 모습인데,
'내가 지금 뭘하고 있담?' 하면서도, '근데, 내가 군대 있을 때도 이렇게 시간 가기를 기다렸던가?' 할 정도로 하루하루 보내는 게 전쟁 같기만 하다.
오죽하면,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지금의 이 보름 정도의 시간을 어디에 비축해 두었다가 나중에 요긴하게 써 먹으면 좋을 텐데......' 하는 허무맹랑한 생각까지도 드니,
내가 유배당한 사람도 아닌데, 왜 이렇게 꼼짝 못하고 있는지 나 스스로도 한심하기만 하다. #
'며칠 전의 일인데도 이렇게 다시 기록을 대하니, 이 즈음에 내가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일도 못하고 몸도 안 좋아진 상태에서 먹을 것마저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었으니......
*
오늘은 청소부가 바뀌는 날이었는데, 농땡이를 부리는 여자는 아침부터 주변에서 맴돌기만 할 뿐 일도 제대로 하지 않던데,(오늘은 아예 청소도 하지 않았다.)
"내 방 침구는 안 갈아주냐?" 하고 물었더니,
"곧 갈아줄 게요." 하더니, 함흥차사다.
아무튼 그런 와중에도 복도 모퉁이에 앉아 노트북을 펴놓고 글 작업은 조금 했는데,
R이 언제 올지가 내 관심의 초점이었다.
어젯밤에는 어쨌거나 비 때문에 못 왔고,
그 사이에 내 몸이 더 안 좋아졌기 때문에, 그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데,
아마 R이 온다면 ‘모기장’도 가져올 거라고는 했는데......
만약 오늘도 그가 안 오면, 숙소 카운터에 내려가서 어떻게 병원에 갈 수 있는지 물어봐야겠다.
그렇지만 오늘은 여기 숙박료를 지불하는 날이라 내려갔더니,
오늘도 점심값이 어제 같이 400 뻬소라고 하니(자기들 맘대로 가격을 바꾸는데, 무슨 권리로 그러는지 모르겠다.),
일단 사흘치 숙박료와 점심값을 지불하고 올라왔다.
11시가 막 넘었는데, 점심 먹으러 안 가느냐고 농땡녀가 묻기에,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 웬 소리?" 하며 짜증을 냈더니,
그제야 침구를 갈아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을 했으면 그냥 나가도 됐을 텐데,
"다 했어요!" 하기에,
그래도 '고맙다'는 말은 해주었다. 그러면서 생각해 보니,
'자기 일을 해놓고, 나에게 칭찬이라도 듣고 싶다는 건가? 아니면, 거기에 따른 수고비라도 달라는 뜻인가?' 하는 생각이 아니 들 수가 없었다.
어쩐지 (이 여자의 투로는)후자일 것 같은데, 나는 더 이상 그여자와 말을 하지 않았다.
5 . 29
#가난한 젊은이#
아침 내내 기다렸지만 R은 나타나지 않았는데,
점심을 먹으러 아래 식당으로 내려가려던 참에, 무심히 내려다 본 나무 잎 사이로 그가 손을 흔들며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일단 나는 점심을 먹으러 내려갔는데,
오늘도 400 뻬소라더니, 접시엔 큼직한 돼지 고기 덩어리가 놓여 있었다.
물론 나에겐 너무 많은 양이라서 가져간 음식통에 잘라 넣은 뒤, 밥과 감자음식까지 덜어놓고는,
서둘러 밥을 먹고 올라왔다. 그러면서,
“R, 이것 먹어!” 하면서, 나는 혹시 여기 종업원들의 눈에 띌까 봐 방 안에 음식통을 넣어두고는 밖으로 나왔다.
약간 놀라기도 하면서 그가 주저주저하기에,
“내가 먹기 전에, 깨끗하게 덜은 음식이고, 아직도 따뜻하니, 어서 먹으라고!” 하자,
“인야... 이게, 당신 저녁이잖아요?” 하기에,
“걱정 마. 난 저녁 때 우유 한 잔 타서 망고와 때우면 되니까. 그러니, 어서 먹으라고!” 해서야, 그가 방 안으로 들어갔고, 먹는 것 같았다.
물론 나의 이런 행동은 그가 측은해서가 아닌, 어차피 그는 점심 시간을 놓쳤기 때문에 어딜 가서든 먹어야 하니까, 내가 저녁으로 덜어온 음식일 망정, 깨끗하게 가져왔기 때문에 그가 먹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도 내 뜻을 이해했음이 분명했다.
그런 뒤, 우리는 바람이 잘 통하는 숙소 복도의 모퉁이에 앉아 인터넷 사용에 들어갔다.
오랜만에 나는 까페에 글을 올렸고(까보 끄루스 떠나는 것, 그리고 여기 온 내용), 그 일을 끝낸 뒤, 카톡과 와삽의 문자도 확인하다, 바르셀로나의 '누리아'와 오랫동안 통화를 하는 등, 정말 인터넷을 맘껏 자유롭게 이용했다.
그러다 내가 슬쩍 R의 전화 상태에 대해 물었는데,
지난 주 내가 여기 ‘산티아고’로 오던 중 '바야모'의 버스 회사 사무실에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잘 지내요?" 하고 그가 전화를 받자마자 뚝 끊겼던 게, 그의 전화에 돈이 떨어졌기 때문이라는 걸 상기하면서,
그 당시만 해도 나는,
'아니, 내 전화가 올 줄 빤히 알면서, 전화기에 돈도 없는 상태로 방치해두었단 말야?' 하고 섭섭함과 함께 화까지 났었는데, 정작 산티아고 역에서 그를 다시 만난 뒤에 보니, 핸드폰 액정이 깨진 상태 그대로여서(한 달 반 전에 처음 그를 만났던 날 나는 그의 핸드폰 액정이 깨져 있는 걸 보았었다.),
'아직도 그대로야?' 하고 그의 게으름을 탓하다가, 바로 그 순간,
'아, 그게 아니고, 이 친구에게 그만큼 돈이 없다는 것이로구나......' 하고 깨달으면서는,
내 젊은 날 돈이 없어 뭘 하고 싶어도 못하던 시절의 모습도 오버랩되면서,(물론, 그렇다고 지금 내가 돈이 풍족한 사람도 결코 아니지만)
'오죽하면 이럴까......' 하는 심정에, 그 뒤론 그의 빈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다.(그러면서 어떻게든 그를 돕고도 싶었다.)
그런 그가, 처음 만난 날 나를 '바야모'에 가는 버스에 태워보내기 위해 그 무거운 짐을 들고 뛰는데, 그를 쫓아가던 내가 그 모습에 감동을 받았던 것인데,
(무릇, 사람들은 서로 감동을 해야만 뭔가 깊은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가만히 보니 이 친구 배움은 많지 않지만(건설 기술자라고 했다.), 머리가 있는 친구로, 처음엔 50대일 줄 알았는데, 최근에 듣기론 40대 중반이라고 하던데,
나를 위해 '콘센트' 전선 가져온 것도 그렇고, ‘모기장’을 가져오면서, 설치할 끈을 준비해 온 것도 그렇고,
내가 숙소에서 준 탁자가 낮아, 구부리고 앉아 사용하기가 불편해서 이리저리 궁리하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이용방법을 새로 찾아낼 때마다,
“어? 이건 이러려고 그랬군요!” 하며 알아차리는 것도 그렇지만(확실히 머리가 있었다.), 내 그림에 관심도 상당해서,
‘흠, 신통하군!’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어제는 또 인터넷 접속을 하면서, 뭔가 전원에 연결시키는 다른 도구도 꺼내면서는 자기 스스로,
“저는 발명가에요!” 하고 웃기에, 보니, 그것도 그럴 싸 해서,
그러니까 이 친구가 가만히 보니, 뭔가 머리를 써가며 살아가는 모습이어서,
나도 그를 어느 정도는 인정해주기로 했다.
게다가 어디서거나 아무한테거나 말도 스스럼없이 거는 모습이(붙임성도 있는 듯), 무슨 일을 하거나 장점으로 작용하는 것 같기도 해서,
‘제법 쓸만 한 젊은이군!’ 하고 인정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이상한 게, ‘까보 끄루스’의 ‘윌리암’도 이 ‘R’과 엇비슷한 나이 같던데,
‘윌리암’도 한 오지랖에 상당히 머리를 잘 써서(비근한 예로 내 디카까지 고쳐줄 정도로) 내가 놀라다 못해 감동했었는데, 이 친구 R도 그와 같은 과(科)라는 게 판명되어,
‘그것도 참 희한하네! 나에겐 어디서 그런 사람들만 걸리네! '오지랖'에 '맥가이버' 타입에, 게다가 남들 도와주기를 좋아하고......’ 하는 생각을 아니 할 수가 없다.
"R, 내가 니 전화 사용하는 것에, 다만 얼마라도 보조해주고 싶은데......" 하자,
조금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내가 너무나 니 신세를 많이 지고 있는데, 더구나 인터넷 이용 같은 것도 너 없이는 어려움이 많을 텐데 이렇게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해줘서, 뭔가 고마움의 표시를 하고 싶어서 그러거든......" 하자,
"그럼, 알아서 하세요." 라는 대답에 싫은 기색도 아니기에,
휴대용 가방을 열어 보니 하필이면 천 뻬소 정도가 남아 있었는데, 그렇다면 500뻬소 정도밖에 해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여기선 적은 돈은 아니지만 어찌 보면 겨우 한 끼 식사값으로 생색내는 것 같기도 해서 내가 잠시 망설였는데, 그도 그 상황을 알아채고는, 내일 내 점심값은 남겨둬야 하지 않겠냐고도 했고, 나도 만약을 위해 500뻬소 정도는 남겨놓아야 할 것 같아, 일단 나머지 돈을 그에게 주었고(나 스스로는 다음을 기약하고 있긴 했지만),
기왕에 말이 나온 김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현재 그의 전반적인 상황과, 내가 쿠바를 바라보는 시각 등을 얘기하느라 시간이 상당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 부부의 꿈은, 어떻게든 쿠바를 벗어나(탈출해?) 외국에 나가 살아보는 것이라는데, 어떻게든 도전해보려고 R의 처 M은 공부로 승부를 걸어 다양한 자격증까지 획득했음에도, 그걸 써먹을 기회마저 없는 현실에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현 쿠바의 체제 하에서는 해외에 나갈 여권 발급이 너무 어렵고, 단 한 가지 방법은 외국에서 특별한 초청장 같은 걸 받아야만 출국이 가능하다는데, 그게 쉽지만은 않은 일이라서(불가능에 가까워), ‘희망’도 없이 ‘무력증’에 사로잡혀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노력을 해도 나아질 수 없는 현실에, 자포자기와 절망 상태로 삶을 이어가는 모습이어서, 듣는 내 입장에서도 답답했고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잘은 모르되, 멀리 갈 것도 없이 '북한'과 거의 같은 수준일 터라고 가늠이 될 뿐이다.
물론 내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특히 내가 그들의 도움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는 사람으로서 얼마든지 그들에게 도움이 돼주고도 싶지만,
내가 무슨 수로 그들을 도울 수 있겠는가 말이다.
더구나 나도 예전에, 미국에도 가지 못하던(비자가 없어서) 처지였던지라 그들의 입장을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었음에도, 내가 그들을 외국에 내 보낼 수 있는 능력은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R, 니네 부부는 아직도 젊으니, 그래도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 해 봐. 나도 예전엔 미국이란 나라에 못 들어갔었거든? 그런데 이렇게 살다 보니, 지금은... 아니 여기 쿠바에 오기 전에도 미국을 들렀다 온 거거든? 그러니 희망을 가지고, 그 일에 매진할 필요는 있을 것 같어......' 하는 말은 해주었는데...... #
#모기장#
여기도 부쩍 더워지고 습해지는데, 슬슬 저녁 기운이 돌며 모기들이 귓가에 ‘잉 잉’ 거리면,
‘이제, 죽었구나!’ 하면서 도망칠 데도 없는데 숨을 궁리만 하고, 겁에 질려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게 요즘의 나다.(여기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모기가 나만 물어, 긁느라 난리도 아니다.)
정말 이렇게 모기에 뜯기면서는 못 살 것 같은데, 그렇다고 마땅한 방법도 없어 죽을 맛이다.
이 나이에 그깟 모기 가지고 뭐, 이리 호들갑이냐고 하면, 마땅히 할 말은 없지만,
내가 이번에 여기 쿠바에 와서 이렇게 모기에게 시달리고 고통을 당할 줄은 추호도 상상못한 일이었다.
더구나 한국에선 나도 ‘모기 안타는 사람’으로 큰소리까지 쳤었는데, 여기 온 뒤로는 그 말이 무색하게 정말 속수무책으로 뜯겨 팔뚝이며 발등이 틈새도 없이 물려, 평생 여기서처럼 모기에게 물린 적이 없다고 호언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끈적거리는 ‘열대기후’와는 전혀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과 모기에 그토록 취약한 사람이라는 것도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다.
물론 나는 이전에도 땀나고 몸이 끈적거리는 걸 싫어해서 가까운 아시아의 열대국가(태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에 가지 않았지만, 그런데 이제는 모기까지 악재가 추가 되어, 앞으로는 더더욱 열대기후의 나라에는 가지 않을 생각이다.
아무튼 그렇게 내가 모기 때문에 힘들어 하자(살까지 빠졌다.) 그저껜가 R이,
“인야, 그럼, 내가 모기장을 가져와서 설치해 줄까요?” 하고 묻기에,
“모기장이 있어?” 하고 반신반의했더니,
“전에 쓰던 게 어딘가에 있긴 할 텐데, 아무튼 가서 찾아 볼 게요.” 하면서 돌아갔었다.
그리고 이틀 뒤인 오늘, 꿈에서나 볼 법했던 모기장을 가져왔는데,
“어제 모기장을 꺼냈더니 먼지가 쌓여 있어서, 빨아서 말려오느라 늦었거든요.” 하면서 모기장을 설치하기 위한 끈도 꺼냈는데, 차라리 그 궁색함이 가슴이 찡하도록 서글프기만 했다. 그래도 그 성의만은 고마워 잔뜩 호기심을 갖고 그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사실 그저께 그가 모기장을 가져온다고 했을 때만해도, 나는,
‘가져와서 어떻게 설치하려고?’ 하는 시큰둥한 자세로 걱정이 앞섰는데,
실제 가져와서 직접 설치하는 걸 보니, 의외로 단순하고 간단하기까지 해서,
‘거참, 신통하네!’ 하고 감탄하고 있었고,
그렇게 그걸 다 설치하고 나니,
'이제, 내가 모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이 생겼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여태까지는 생각지도 않았던 '안도감'과 '행복함'까지 생기는 것이었다.
정말 의외였다. 큰 기대를 하지 않은, 단 50cm 정도 높이의 침대를 덮을 공간에 불과했지만, 약간 넉넉하게 침대를 덮은 아담한 모습의 모기장을 보니,
갑자기, 그러니까 여태까지는 존재하지 않던 ‘나만의 새로운 안전한 공간’이 생긴 것 같은,
그러니까 이제 이 세상에는 나를 귀찮게 굴 적(?)이 없어진 것 같은 안도감과 뿌듯함이 의외로 크게 작용해왔던 것으로,
‘왜, 이 생각을 못했을까? 진작에 모기장을 하나 샀다면, 그 고생을 하지 않았어도 됐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후회까지도 되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부터의 나는 이전과는 많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뭔가 믿을만 한 든든한 구석이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고, 저녁이 와도 전혀 두렵거나 불안하지 않은 건 고사하고, 차라리,
'어서 밤이 되거라!' 하는 식으로도 변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숙소의 복도 구석 통로만을 왔다갔다 하면서 7시 반까지 버티다,
드디어 첫 ‘모기장’에서의 밤을 맞았다.
아,
모기장 안은 확실히 조용했고 아늑했고, '이 세상에 나를 침해할 것은 이제 아무 것도 없다'는 안도감에 마음의 평화까지 찾을 수 있었는데, 그건 실로 오랜만에 찾은 행복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어제까지의 밤들과 비교를 해보면, 오늘밤은 정말 꿈 같기만 했던 것이다.
비록 여전히 시원한 바람이 없는 밤이었지만(요즘 그렇다.), 이제 모기장이 있어서 창의 차단막과 문까지 다 열어놓을 수 있어서(그만큼 공기 소통이 되기에) 시원해진 것도 사실이고,
당연히 모기에 쫓길 일이 없다 보니 잠시간도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웃기는 건,
모기장 안에 있다 보니, 그 바깥에도 모기의 모습이 잘 안 보이는 것 같아 약간 섭섭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얼마나 모기 때문에 시달렸으면, 모기장에 ‘모기 약 올리는 만화그림’이라도 붙여놓고 싶어지기까지 했을까. (그렇긴 하지만 이 ‘모기장’을 소재로 그림 하나를 생각해 두는 성과는 있었다.)
아무튼 모기장이 생긴 걸로 뭔가 전환점을 맞은 기분인데,
물론 모기장 안에서 글작업을 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냥 모기에 뜯기지 않은 상태로 잠을 잘 수 있는 것만도 감지덕지였고, 어떻게든 빨리 여기 쿠바를 탈출하려던 생각도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
*
정말, 어떻게든 하루는 간다.
그래서 오늘이 31일이다.
이젠 정말 열흘 여만 참으면 내가 떠날 수 있는 것이다.
어젯밤엔 누군가 한 가족이 이 숙소에 묵었는지, 가까이에서 애들 소리를 포함한 몇 명의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그들은 분명 이 건물 안에 다른 사람이(나와 또 다른 한 커플) 숙박하고 있는 걸 알 텐데도, 그리고 이 숙소 복도에도 '낮은 목소리로 말하세요.' 라는 주의 문구가 엄연히 붙어 있는데도, 새벽이든 밤이든 아랑곳하지 않고 어디서든 목소리를 죽이는 법이 없다.
그런데 그들은 적어도 아이들이 이 곳 복도를(특히 내 쪽으로) 뛰어다니는 건 나무랄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침에 청소부가 와서,
"지금 하늘의 뿌연 먼지는 아프리카 ‘사하라’에서 온 거라는 뉴스가 나오드라구요." 하고 알려주었다.
순간,
'그렇다면 ‘모로코’?'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2012년 내가 거기에 있을 때도 ‘열대 폭풍’이 하늘을 시커멓게 덮었던 적이 두세 차례 있어서, 그게 연결되어 든 생각이었다.
그렇게 세상은 상호작용을 하면서 흘러가는 것인가 보다.
내 감기 증상은 조금 회복되는 듯하지만, 기력이 없고 입맛도 다 가셨다.
망고도 맛이 없고, 이들 음식이 이젠 싫기까지 하다.
비누도 다 떨어져 가는데, 며칠 전에 R에게 부탁을 했지만, 여기서 맘대로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닌지 쉽게 가져오지 못하고 있어서, 그마저도 떨어질까봐 걱정이다. (화장실 휴지도 모자랄 것 같은데......)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아침에 숙소 카운터로 R의 전화가 왔는데,
내 몸이 어떠냐기에,
좀 나아졌다고 했더니,
점심 무렵에 도착할 거라고 했다.
그런데 점심 때가 돼도 오지를 않다 보니, 내가 밥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오늘은 여기 식당에서 점심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해서 밖에 나가 먹어야 하는데,
12시 반이 되어도 오질 않아, 화가 났던 나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기로 하고 나갔다.
사실 R이 어제, 오늘 산티아고에 나갈 일이 있다기에 시간이 없으면 여기에 들르지 말고 그냥 나가라고 했더니, 굳이 본인이 오겠다기에 기다렸던 건데 오지 않아서,
나도 배도 고픈데다 더 이상 시간을 잃어버리긴 싫어, 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마을로 나가 보니 가게에서 파는 샌드위치도 떨어졌다 하고, 과일 파는 곳도 없어서 나는 마을 아래까지 다 내려온 뒤, 이제는 중심부 쪽으로 가는데,
한 늙은이가 게으르게 나무 그늘에 비스듬히 누워 있기에
"어디서 과일을 살 수 있을까요?" 하고 묻자,
"시간이 늦었는데...... 과일을 사려면 이른 오전 시간이 좋은데......" 하기에,
"그럼, 여기 근처에 어디서 점심을 먹을 수 있나요?" 하고 물었더니,
"좋은 음식을 파는 곳이 있다." 며, "아, 저 사람을 따라 가 봐요." 하며 지나가는 한 사람을 가리키기에 그를 따라갔다.
그렇게 밥집에 도착해 한참만에 음식을 시키고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시간을 너무 잡아먹어 짜증이 났다.
그래도 음식을 내왔는데, 음식은 할 줄 아는 사람 같아(쿠바에 와서 처음으로 샐러드 다운 샐러드였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런데 점심 값이 500뻬소라는 것이었다.
비쌌지만 그래도 음식할 줄을 아는 사람으로, 다른 곳에 비한다면 좀 깔끔해서 돈을 지불했고,
그러고서도 나오면서 저녁 거리로 간단한 샌드위치를 사가지고 왔다.
그런데 거기서 성당과 숙소도 보이기에 그 방향으로 오다 보니, 길이 있었다.
오는 길에 어떤 한 집에서 망고를 팔기에 가격을 물으니, 15뻬소라기에,
그 많은 걸(열 개도 넘는데) 너무 싼 가격이어서 25뻬소를 주었더니, 노파가 놀라기에,
"나는 25뻬소 가치보다 더 맛있게 먹을 것 같아서 그러 거든요?" 했더니,
두어 차례 고맙다고 인사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숙소에 도착을 했는데, 카운터에서 날 찾는 손님이 있었다고 했다.
R일 터였다.
내 방에 올라오니 아무도 없어서,
'그가 돌아갔나?' 했는데, 샤워하고 있는데 밖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R이었다.
샤워를 끝내고 나오자마자 나는 그에게,
"R, 시간을 아껴 써라. '여자와 시간은 너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나 역시도 너를 기다려주지 않는 사람이다!" 고 하면서, "니가 니 꿈대로 외국에 나가 생활을 한다면, 내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될 텐데......" 하고 의미있는 말을 하자,
"인야,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하고 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앞으로 나하고도 늘 그런 식으로 대하는 게 좋을 거야." 하고 한 마디를 더 해주었다.
그가 환전해온 돈을 나에게 건네면서 다시 인터넷 접속을 시도하고 있는데,
나는 슬그머니 다시 500뻬소를 주면서,
"R, 사실은 그저께 너에게 천 뻬소 정도를 주려고 했는데, 너도 알다시피 그날은 돈이 부족해서 그랬던 거라, 지금이라도 좀 더 채워줄 게. 니가 나에게도 전화를 할 수 있게......" 하자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내가 이렇게 돌아다니며 살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나는 부자는 아냐. 부자는 고사하고 가난한 화가일 뿐이야. 그런 걸로 보면, 니가 내가 아닌 좀 더 부자면서 유명한 화가를 만났다면 더 좋았을 걸......" 하고 웃자,
"그게 무슨 소리에요? 그런 말씀 마세요!" 하고 쩔쩔 매는 것이었다.
그런 뒤 R이 인터넷 접속을 해주어, 나는 바삐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맨 나중에는 마드릳에 있는 '산티아고'와 와삽 통화도 한참을 했다.
그러고 전화를 끊자,
"인야, 스페인 사람과도 아주 친한가 봐요?" 하고 묻기에,
"응? 그래. 이 친구와는 한 10년도 전에 '까미노'에서 만났는데, 지금까지 아주 친하게 지내. 특히 그 친구는 한국에까지 나를 찾아왔던 사람이거든?" 하자,
"인야는, 사람들하고 아주 깊은 관계를 유지하나 봐요......" 하기에,
"꼭 그렇지만은 않아, 사람에 따라 다르지, 뭐......" 하면서, "물론, 나와 맞는 사람과는 이렇게 평생을 함께 할 수도 있고......" 하면서, "R, 근데, 너... 5시 반에 약속이 있다면서 이래도 돼?" 하자,
"아, 그러네!" 하기에,
"얼른 서둘러!" 하고 그를 보냈다.
(그런데 저녁을 먹고 설거지하느라 망고 쓰레기 버리러 가는데 보니, 그는 아직도 안 가고 입구에서 경비들과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도, 오지랖이 넓다......)
6시 반이 넘어가자 모기가 난리를 칠 기색이어서, 얼른 샤워를 했고 그래도 시간을 좀 때워야겠기에 복도에 있었더니,
정말 모기들이 떼거리로 달라 붙어,
얼른 도망치듯 모기장 안으로 들어오긴 했는데,
사람의 몸에서 나는 열기도 있는지라,
침대에 누워도 시원하지가 않았다.
요즘, 날이 갈수록 바람도 없고, 비도 안 내리는 등 나에겐 악재만 늘어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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