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겔 1:1-3 “슬픔의 강가에서 바라보는 희망” 2023. 6. 11.
독일의 작가 <안톤 슈나크>의 “우리들을 슬프게 하는 것들”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중학교 시절에 이 글이 국어 책에 실려서 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산문을 배우고 난 뒤에 국어 선생님은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란 제목으로 글을 적어 오라고 숙제를 내셨습니다.
그리고 각자 적은 글을 발표를 했는데,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어떤 친구가 발표한 내용입니다. 그 친구는 “학교를 오기 위해 버스표를 내었는데, 그만 한 장을 낸다는 것이 두 장이 붙어있다는 것을 모르고 두 장을 내었던 것을 뒤늦게 알았다. 이것이 나를 슬프게 한다”글을 적어 배꼽을 잡고 웃은 적도 있습니다.
인터넷에 보니“예쁜 여자인 줄 알고 사귀고 결혼 했는데, 아이를 낳고 나니 아이의 얼굴이 엄마를 전혀 닮지 않았다. 이것이 나를 슬프게 한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엄마는 성형 수술을 해서 예쁜 얼굴로 변모를 했지만 태어나는 아이는 엄마가 가진 유전적 성향을 그대로 가지다 보니 달랐다는 말입니다. 웃고 넘기는 내용이지만 사람마다 겪는 슬픔이 다 다릅니다.
오늘 이 아침에 교회로 와서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요? ‘궁핍한 돈이 나를 슬프게 하고, 잃어버린 건강이 나를 슬프게 하고, 가족간에 화목 되지 못한 모습이 나를 슬프게 하고, 부모와 자식 그리고 부부간에 불화하는 모습이 나를 슬프게 한다’고 말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신앙이 성장하지 않아서 나를 슬프게 한다고 말씀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이분은 영적으로 깨어 있는 분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도 이런 다양한 슬픔 중에 하나의 슬픔이 등장합니다.
본문은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장면으로, 기쁨 중에 기쁨이고 매우 축하해야하는 경사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부름이 에스겔에게는 슬픔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장소가 “노예로 끌려와서 고통 받고 있는 바벨론 땅, 유프라테스 강의 그발 강가”라는 점입니다. 노예생활을 하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며 머물러 생활하던 지역이 바로 그발 강가였습니다.
시편 137:1절 보면 바벨론 포로생활에 모습이 나옵니다. 1절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라고 노래합니다.
나라는 망해 없어져 버렸습니다. 3차례에 걸쳐 수많은 백성들이 노예로 끌려왔습니다. 힘든 노예생활로 인해 슬퍼합니다. 더군다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노예 생활인지라, 고향 이스라엘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조차 가질 수 없는 참담한 상황입니다.
2절 보십시오.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5년 그 달 초닷새라”
남 유다 나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여호야긴 왕이 포로로 사로 잡힌지 5년째라 말합니다.
이 말은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이 포로생활을 시작한지가 5년 되었다는 말입니다. 날마다 고달프고 고된 노예 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이 그발 강가에 나와 고향산천을 그리워하며, 목숨을 잃어 버린 친구와 가족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게다가 진짜로 더 큰 슬픔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자신들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심판으로 말미암아 벌을 받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싫어하시는 우상숭배를 조상들이 해왔고, 그리고 자신들조차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역하면서 우상숭배에 몰입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으로 나라가 망하고 자신들은 이역만리 바벨론에 노예로 끌려와 모진 고생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다 찾아온 슬픔이라면 스쳐 지나가는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내 실수와 내 잘못으로 인해 겪는 어려움이라면, 시간이 지나가고 내가 노력하면 해결될 수 있는 것이라서 다행입니다. 하지만, 지금 자신들이 겪는 이 모진 슬픔은 하나님의 형벌로 주어진 슬픔이기에 더 아프고, 더 깊은 슬픔에 잠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에도 더 이상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슬픔에 잠겨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입니까? 이 좋은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분들이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한때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분들 뉴스가 나왔지만, 이런 뉴스가 사회를 더 암울하게 만든다고 해서 이제는 뉴스에 나오지도 않습니다. 뉴스에 안 나온다고 자살자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더 많아지고 있지만 보도를 안 할 뿐입니다.
슬픔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령무과 고통을 겪지 아니하고, 걱정거리가 없이 사는 사람은 이 땅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크고 작은 슬픔과 아픔을 겪으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삶 자체가 슬픔의 강가라는 말입니다.
이 슬픔의 강가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희망을 주십니다. 내가 슬픔의 강가에서 한없이 눈물을 흘리고 속이 새까많게 타들어 가는 아픔을 겪을 때에, 어떻게 하면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슬픔의 강가에서 슬픔을 벗어 버리고, 희망을 바라보고, 기쁨을 회복하고 되찾을 수 있을까요? 본문에서 해답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의 말씀으로 슬픔이 바뀌어지게 됩니다.
1절,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1절에 나타난 에스겔의 상태를 표현하는 두 가지 모습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1)서른째 해 넷째 달 - 이것은 그발 강가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 에스겔의 나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이 30살 4개월이 될 때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됩니다. 30살의 나이가 어떤 나이에요? 이 나이는 미래에 대한 꿈을 가지고 목표를 세워 도전하는 시기입니다.
그 어떤 것이 앞길을 가로막는다고 하여도 두려워하여 뒤로 물러서거나 무서울 것이 없는 시기입니다. 하지만 30살 에스겔에게는 이 젊은 나이가 도리어 슬픔의 나이입니다. 젊은 나이에 노예생활을 하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더 큰 슬픔입니다.
2)사로잡힌 자 중에 -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30살 혈기왕성한 선지자 에스겔이지만, 신분은 노예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신체 건강한 30살이고 희망을 가지는 나이이지만, 사로잡힌 노예라는 신분은 벗어나지 못하는 족쇄와 같은 상태를 말합니다.
30살의 청년의 나이이지만 노예의 신분에 얽매여 있는 희망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에스겔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희망을 줍니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는 슬픔의 장소인 그발강가이지만, 하나님을 만나고 음성을 듣는 축복의 장소가 바뀌어지게 됩니다.
1절 하반절 보십시오.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하늘의 열렸다”고 말합니다. 하늘 문이 열리면서 하나님의 모습이 에스겔에게 보였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위해서 하늘의 문을 열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내가 슬픔의 강가에 앉아서 슬픔으로 깊은 탄식을 내쉬고 있습니다. 내가 가진 슬픔으로 인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때입니다. 이런 암울한 상황이라고 해도, 에스겔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내가 하늘을 쳐다 보면,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슬픔의 강가에서 하늘의 문을 열고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실패한 것만 바라보고, 내 슬픔만 생각하고, 나를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는 것만 생각한다면, 나에게 다가오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2. 하나님의 권능이 슬픔을 물러가게 합니다.
슬픔의 강가에 머물러 슬픔만 생각하면, 나에게 아무런 희망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슬픔의 강가에 머물고 있다고 해도, 눈을 들어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고, 나를 향하여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에 나에 <권능>이 임하게 됩니다.
1:3 “갈대아 땅 그발 강 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저는 이 3절 말씀을 약간 변경하여 읽어 보길 원합니다. 화면에 나가는 글을 참조하여 공란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서 읽어 보길 원합니다.
“슬픔의 강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나 000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특별히 나에게 임한다면 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권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나에게 임할 때 나의 슬픔은 변하여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여호와의 권능’이라고 표현했지만, 어려운 하나님의 권능이라는 말보다는 더 쉬운 말이 있습니다. 바로‘하나님의 손’으로 번역해도 이해가 더 쉽게 다가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NIV성경에도 ‘There the hand of the LORD was upon him.(여호와의 손이 그 위에 있었다)’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슬픔에 빠져 있는 나를 하나님의 손이 위로해 줍니다. 실망에 빠져 축 늘어져 있는 나의 어깨를 하나님의 손이 보듬어 주시면서 힘을 주십니다. 아무도 잡아 주지 아니하고 홀로 방치된 나의 손을 하나님의 손이 붙잡아 주시면서 나를 일으켜 세워 줍니다.
이런 하나님의 손은 권능의 손이고, 은혜의 손이고, 능력을 주시는 손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손은 은혜의 손만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책망하고 매를 드시는 징계의 손이기도 합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젊은이가 강을 건너다가 다리에서 미끌어져 물에 빠집니다. 수영을 하지 못하는 청년은 곧 물에 빠져 죽을 상황에 쳐합니다. 물속에서 허우적 대면서 살려달라고 외치는데,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서 그냥 빠져 죽게 되는 상황입니다.
물속 깊이 서서히 빠져 들어가는 순간, 누군가가 자신을 낚아 채어 끌어 올리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뭍으로 나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나가는 사람이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자신을 보고 뛰어 들어 목숨을 건져준 것이었습니다.
생면부지 사람으로부터 목숨을 건진 청년은 도시로 나가 자신의 꿈을 펼치고자 합니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도시에서 이런 저런 일을 하던 청년은 범죄에 빠져 들게 됩니다. 작은 물건을 훔치는 좀도둑으로 시작해서 대범하게 칼을 들고 물건을 약탈하는 강도의 자리까지 범죄가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강도죄로 잡혀서 재판을 받게 됩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법정에 끌려 나온 청년은 눈을 들어 재판관을 바라보고 깜짝 놀랍니다. 그 재판관은 몇해 전에 자신을 물에서 구해준 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보아도 분명히 자신의 생명을 구한 은인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전에 나를 죽음에서 건져 주셨으니, 이 판결에서도 나를 구해주실 것이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재판관은 예상을 깨고 청년에게 중한 벌을 내립니다. 젊은이는 “판사님, 지난번에는 저를 죽음에서 건져 주셨는데, 어찌 이번에는 저를 구해주지 않습니까?” 물었습니다. 그러자 판사는 “젊은이, 전에는 내가 자네의 구원자였네, 그러나 이번에는 자네의 재판관일세. 은혜의 시간은 다 지나갔고 심판의 시간이 온 것이라네”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나를 구원하셨으니 어떤 죄를 범해도 심판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절대로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에 에스겔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권능이 임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에스겔과 함께 합니다. 현재 에스겔이 처한 상황은 바뀐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전히 에스겔은 노예였으며, 여전히 고향 땅을 그리워하는 사람이고, 노예 생활을 끝내고 하루 빨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에서 제사 드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에스겔입니다. 상황은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여호와의 손이 임하자 에스겔은 바뀌게 됩니다. 이것이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는 바뀔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나와 함께 하면, 나의 슬픔이 사라지고 내 눈물이 변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희망과 기쁨이 충만하게 임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능이 임할 때에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납니다.
3:15절 “이에 내가 델아빕에 이르러 그 사로잡힌 백성 곧 그발 강 가에 거주하는 자들에게 나아가 그 중에서 두려워 떨며 7일을 지내니라”
<델아빕>이란 단어가 등장합니다. 델아빕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았던 장소를 말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백성들이 왜 하필이면 수많은 도시를 놔두고 <델아빕>이란 곳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을까요?
그냥 우연이라 말하기에는 <델아빕>의 지명이 가진 뜻이 범상치 않습니다. 델아빕이 바벨론 사람들에게는 “홍수의 제방”이란 뜻입니다. 그발 강이 홍수로 자주 범람하면서 피해를 주었던 열악한 장소였기에 홍수의 제방이라 말했습니다. 살기 좋지 않은 곳이기에 바벨론 사람들은 살지 않고 노예였던 이스라엘 민족들이 대거 몰려 살게 됩니다.
하지만 델아빕 지명을 히브리어로 발음하면 다른 뜻이 됩니다. <텔아빕>이란 단어는 “이삭의 언덕”으로 해석이 됩니다. 텔아빕이라는 이름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삭을 맺는 언덕으로 들리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내일에 대한 희망이 있다는 말입니다.
1948년 이스라엘 나라가 건국됩니다. 주후 70년 로마에 의해 멸망당한 뒤에 무려 2천년 동안 전세계에 흩어져 방랑하다가 나라를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나라를 세우고 새로운 나라의 수도를 정할 때 붙인 수도 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전이 있었던 예루살렘이 수도가 아닙니다. 그들이 세운 새로운 조국 이스라엘의 수도는 <텔아비브>였습니다.
위키디아 백과사전 “텔아비브는 히브리어로 ‘봄의 언덕’을 뜻하며, 이 명칭은 파괴속에서 재탄생을 갈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에스겔 3:15절의 델아빕에서 유래되었다”
여러분!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이 거주하였던 곳, 바벨론 사람들에게는 홍수가 범람하는 절망의 장소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축복의 언덕이 된 것이,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습니다. 슬픔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면 인생의 역경을 극복하게 됩니다.
얼마 전“저는 39세에 사랑 받지 못하는 주부입니다”라는 가슴 찡한 글을 보았습니다. 하나뿐인 5살 아들이 유괴당하여 시체로 발견됩니다. 천사처럼 자상하던 남편이 변하여 아이 잃어버리게 만든 여자라면서 날마다 술을 먹고 들어와서 아내를 폭행합니다. 심지어 부엌칼로 위협합니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 생활을 합니다. 남편은 충격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았고, 결국 공장은 부도가 나고, 남편은 어느 날부터 집을 나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남편을 닮은 분을 서울역에서 봤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니, 남편은 서울역에서 노숙자가 되어 있습니다. 술에 절어 거리에서 잠을 자고 있는 남편을 보고, 주머니에 있는 돈 5만원 전부를 호주머니에 몰래 찔러 넣어주고 피눈물을 삼키면서 돌아옵니다.
그런데 이런 모진 고초를 겪는 아내가 위암말기 환자가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환자 본인은 자신의 죽음을 당당히 받아들입니다. 죽을병에 걸려야 아이를 잃어버린 죄책감을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 말을 합니다. 결국 아내는 한 많은 세상에서 유명을 달리해 버립니다.(지금은 고인이 된 경기도 안양시 박달동에서 장순례님 사연입니다.)
인생은 항상 슬픔의 강가에 머물고 있습니다. 세상의 방법으로는 참된 희망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받고, 하나님이 주시는 권능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이제 장마도 다가오고 점점 무더위지는 이 6월의 시점에서 하나님의 손을 부여잡고, 소망으로 전진하는 6월을 보내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