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희망의 계절이고 가을은 추억의 계절이다. 진달래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고 아카 시아 꽃 오동나무꽃 향기가 온 마을을 뒤덮는 봄은 가을의 수확에 대한 희망에 부풀고, 노 랗고 붉은 단풍이 황금의 들을 거두어드리는 가을은 삶의 뒤안길에 얽힌 여울들의 추억에 젖게 된다. 그것은 부모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일 수도 있고 헤어진 연인에 대한 그리움일 수도 있다. 하기야 봄은 신생의 젊음이요 가을은 성숙의 장년이라고 말하듯이 봄은 가을을 향한 출발이요 가을은 봄의 도착지가 된다. 이런 봄에 아버지에 대한 옛을 생각하고 그리움 에 잠겨 보는 것은 화사한 꽃 속에서 그 방향(芳香)을 맡으면서 한 다발의 장미를 바치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세조때부터 성종 때까지 대제학 대사헌으로 시흥에 안장사(安長祀)에 모시고 있 는 평해 구씨 종직 안장공 선조의 16대 후손으로 할아버지의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나서 흙 속에서 연꽃을 피우신 어른이시다. 정구품의 벼슬을 하신 증조 할아버지가 그 위풍으로 사 시던 집을 할아버지 때 일었다가 다시 찾으시고 5남2녀의 7남매를 어머니와 같이 제각기 사 회에 기여하고 자기의 뜻을 펼치게 기르시고 기울어진 집안을 다시 일으키신 분이다. 해방 전에는 회사원으로 해방 후에는 농민으로 고을의 유지로 살아오시면서 남들이 말하는 대로 인심을 얻고 있던 후덕한 분이다. 월남전에 참전하여 전투 근무를 다 마치고 떠나기 전날 베트공에게 당해 돌아오지 못한 넷째 아들에 대한 상심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71세로 먼 나라에 가셨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작은 토막의 장면을 떠올려 본다. 나는 아버지가 계셔야 할텐데 하고 마음을 조리며 신작로를 걸어갔다. 장항초등학교 4한 년 때였다. 그림 시간인데 물감을 가져오지 않은 것이다. 봉근리의 집에도 사실은 거의 써서 바닥이 났으니 아버지 사무실에 찾아가 돈을 얻어 사야 할 판이다. 그대로 다른 애들 앞에 어정거리다가 넘어가려고 했는데 각자 다 그려내야 한다고 해서 선생님의 승낙을 받고 아버 지를 찾아가기로 한 것이다. 가을인 듯 싶다. 길가 논에는 벼가 누렇게 익어 황금의 물결이 파도 치고 신작로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한들거리고 있었다. 큰 도로에서 마을로 가는 작은 도로에도 양쪽에 코스모스가 바람에 나풀거리며 누런 볏 모개와 출렁거리고 있었다. 자동차가 먼지를 일으키면서 신작로길을 달려 왔다. 자갈을 깔아 놓은 신작로가 하얀 먼 지로 뒤덮여 안개에 쌓인 것 같았다. 길옆으로 피해 섰으나 먼지로 하얗게 뒤집었다. 목구멍 도 칼칼했다. 하지만 그런 것이 문제가 아녔다. 어서 가서 물감을 사서 교실로 되돌아가야 한다. 담임선생이 기다릴 것이 두려웠다. 발을 먼지로 뒤덮인 신작로를 뛰다시피 달려 걸어 갔다. 아버지 회사는 가장 중심가인 창선동의 12미터 도로의 길가에 있었다. 조선물산주식회사 장항지소의 사무실이 보이지 안도의 마음이 노였다. 가마니 새끼줄 등 농산품을 생산하는 회사이다. 공장장인 아버지는 사무실에 없었다. 단숨에 멀지 않은 공장으로 달려갔다. "아버지!" "네가 웬 일이냐?" 공장 안에 있는 아버지가 놀라는 표정으로 맞이했다. "아버지! 급해요. 물감을 사가지고 가야 돼요." 땀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아버지 앞으로 다가섰다. "아침에 말하지, 여기까지 오느냐." 아버지 말에 무어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자 가자. 여기 타라. 내 대려다 주마." 아버지는 나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신부락으로 달려 가 물감을 샀다. "자 아버지의 허리를 꼭 잡아라. 네 학교에 데려다 주마." 나는 아버지의 허리를 꼭 껴안고 달리는 대로 몸을 막기었다. 따뜻한 체온이 손을 타고 번져 왔다. 지금도 그 따뜻한 온기를 느끼는 것 같다. 또하나 해방후 일인(日人)이 하던 그 회사는 없어지고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면서 기술자 곽씨 아저씨의 주선으로 방앗간을 했다. 발동기 하나를 놓고 벼를 정미하여 온동네가 방앗 간으로 모여들었다, 낮에부터 밤늦게까지 발동기 방아를 쪘다. 그날은 중학교에서 늦게 돌아 왔다. 이원우 선생이 무슨 일을 시키어 늦은 것이다. 제련소를 뒤로 하고 궁기농장(宮崎農 場)의 들길을 걸어오는데 황혼의 붉은 하늘의 석양을 돌아보며 집으로 돌아 왔다. 봉근리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방앗간의 발동기의 힘찬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하루 종일 농사일을 하고 저녁때부터 방아를 찧기 시작하여 늦게까지 발동기를 돌리고 있었다. "너희들은 공부만 하면 된다. 여기 일은 내가 할 테니 걱정 말고 공부나 해라" 내가 일을 도우려고 하면 아버지는 될 수 있는 대로 안으로 들여보내고 혼자 일하는 사람 과 일을 했다. "너희들은 증조 할아버지의 영광을 되찾아야 한다. 알겠니. 집 앞을 말에서 내려서 허리를 굽으리고 지나가야 하는 옛 영광을 다시 찾아야 한다고 할머니는 손자들을 모아 놓고 강조 했다. 할아버지의 독립자금 운반을 가장하기 위해 방랑하게 보내어 집안이 기운 것을 다시 되찾기 위하여 할머니가 보침 장사를 하여 솔리 만석군 추부자에게서 아흡 마지기 소작을 얻어 농사를 짖고 아버지의 출근과 농사짓는 것에 방아를 찌어 다시 땅을 짚고 일어서기 시 작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집에 와 옷을 갈아입고 방앗간으로 가서 도우려 하자 아버지는 기겁을 하면서 안으로 내 몰았다. "채용과 내가 할 터이니 넌 가서 숙제나 해라." 채용은 집에 일하는 젊은이다. 소여물을 쑤고 들일을 하기 위해 사람의 젊은이의 손이 필 요한 것이다. 공부를 못해 한이 되어 자식을 공부시키겠다는 심기가 분명했던 것이다. 그 때 의 아버지의 의욕에 넘치는 얼굴은 이 가파른 세상을 살아가는 데 지표로 삶의 행로를 비쳐 주고 있다. 장편 <일어서는 산>에서 할머니는 용담할마니 아버지는 기병 어머니는 옵박굴 댁으로 등장하여 봉근리를 주로한 삶을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는 저 먼 나라로 가셨지만 아버지는 우리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삶을 인도하고 삶의 지표로 우리를 살 수 있게 마음의 행로가 되었다. 시골 장항 옥산리 본근리에 있는 부 모님의 산소에 자주 못가 뵈어서 죄송하다. 멀리 제련소가 보이는 그 묘역을 찾아 오늘을 살아가는 세상길의 등불을 찾아 그리운 아버지의 품안에 안기고 싶다.
첫댓글 아버지는 대부와 같이 우리의 기둥이요, 어머니는 샘물과 같은 사랑의 원천이라는데......
참으로 인자하신 어버님이셨습니다. 아마도 교수님 성품은 아버님을 많이 닮은 듯합니다.
잔잔한 감동이 스며 오네요. '일어서는 산'이 교수님 집안 내력이군요. 감명이 깊었습니다.
요즘 아버지들의 뒷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아버지는 늘 살아가는 지표이지요. 세상길의 등불이 되어야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