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좋은 곳 헤어질세라 발걸음을 늦추니, 숲 너머에서 새들이 아는 듯 지저귄다.
겹겹의 봉우리는 허공 밖에 솟았고, 아름다운 나무들은 보기 좋게 자랐다.
기묘한 바위에는 부처가 새겨져 있고, 굽이친 골짜기는 연못이 되었다.
일만이천봉 광경을 보려 한다면, 석양이 깃든 천일대에 서야한다.
-병술년 가을에 운방산방주인 남농외사
이 그림은 외형 허남농 화선이 그린 금강산 내금강 만폭동 상류에 위치한 석벽대불이다.
고려 말 공민왕의 국사인 나옹화상이 하루 밤 나절에 신통하게 새긴 것이다.
허 건 (1907~1987)
근현대기에 활동한 화가이다. 호는 남농(南農) · 남농산인(南農散人) · 남농외사(南農外史),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호남화단의 종조(宗祖)로 불리는 허련(許鍊)의 손자이자, 허형(許瀅)의 넷째 아들이다. 목포에서 작품 활동을 하였고 현대 목포화단의 대부로 일컬어진다.
1908년에 진도에서 태어났다. 허형의 다섯 아들 가운데 허건과 허건의 동생 허림(許林)도 화가가 되어 허련 · 허형 · 허건 · 허림으로 화가 3대가 이어지는 가계를 이루었다. 집안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1921년 14세라는 늦은 나이에 강진 세류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가 4학년 때에 목포 북교 보통학교로 전학,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그림 공부는 목포 북교보통학교 5 · 6학년 때 전국 규모의 미술대회에서 연달아 입상한 이후에야 가능했다.
허건이 이처럼 그림 공부가 늦어진 것은 화가로서의 빈곤한 생활을 이유로 그림 그리는 것을 말린 부친 허형 때문이었다. 허건의 화가로서의 성공을 허련과 허형의 후광으로 돌리는 이들도 있지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허건 작품으로 볼 때 허건은 허련 이래의 남종화풍과는 다른 경향의 작품을 창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결국 허건의 화가로서의 초년기의 성취는 선대로부터의 화재(畵才)에 현실적 시각과 사생 수법을 가미한 창의적 풍경화 제작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극복하려는 허건의 피나는 노력을 간과할 수 없다. 다만 경제적 곤란은 그를 분발케 하는 요인이자 말년의 엇비슷한 작품의 대량제작 또는 자기복제의 반복이라는 비난을 듣게 한 근본적 원인이 되었다는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1927년 18세에 당시 유일하게 취업을 보장했던 목포상업전수학교2)에 입학한 뒤 1930년 23세의 나이로 제9회 조선미전에 첫 입선하여 화단에 그의 이름을 알렸다. 이후 해방이 될 때까지 조선미전에 무려 14회 입상하였고 특히 1944년의 마지막 조선미전에서는 조선총독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하였다. 조선미전 이외에도 일본의 남종원전(南宗院展), 문부성전람회(이하 문전) 등에도 입상하는 등 활발한 그림 제작활동을 벌였다.
조선미전에 몇 차례 입선하여 겨우 화가의 길목에 들어섰을 때인 1938년에 허형이 타계하자 집안 살림은 더욱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38세(1944) 때에는 어려운 형편 탓에 난방을 하지 못해 동상이 걸린 왼쪽 다리를 절단하기까지 하였다. 청년기의 허건에게 가장 큰 예술적 자극을 준 인물은 요절한 그의 동생 허림이었다. 허림의 본격적인 화가로서의 활동기간은 8년에 그쳤지만 문전 연속 입선,
조선미전 5회 입선이라는 강렬한 족적을 남겼으며 특히 허건의 작품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동생의 요절은 허건에게 화업(畵業)의 대를 이을 각오를 더욱 강하게 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1945년의 광복 이후 허건은 일본화 영향의 채색표현과 장식적 화면구성을 탈피하였는데, 일본화풍의 적극적 도입은 "문전에 입선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일본화풍을 본뜬 것" 것이었다고 술회하였다. 한편, 허건은 전통적 화법의 그림 역시 꾸준히 제작하였는데, 허련 이래 전통적 화법의 그림에 대한 수요가 강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작품세계는 3시기 또는 4시기로 구분하여 파악된다. 4시기로 파악하는 경우를 보면, 허련과 허형의 영향을 받던 화가로서의 시작기에서 조선미전 출품기에 해당하는 1930~1944년간의 기간이 초기가 된다. 문전 스타일의 세필산수를 구사하면서 자연주의적 사생화풍을 시도한 1945~1950년간의 기간이 중기가 되고, 현대감각에 맞는 문기 넘치는 화면구성으로 차츰 단순화되고 개성이 강하게 나타난 1951~1987년의 기간이 후기가 된다. 허건이 썼던 관지(款識)의 변화를 근거로 3시기로 나누기도 한다. 관지의 변화에 따라 활동시기는 1930년대의 남농산인(南農散人)시기, 1940~1950년에 이르는 기간의 남농외사(南農外史)시기, 그 이후의 운림산방주인(雲林山房主人)시기로 구분된다.
한편에서는 허련과 허형의 영향을 받던 시기를 수련기로 파악하여 전통화 수련기(1930~1939), 문전(文展) 화풍기 또는 일본화 영향기(1940~1944), 모색기(1945~1950), 정립기 또는 정착기(1951~1987)의 4시기로 나누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허련의 작품세계가 광복 전 그림의 경향과 광복 후의 그림 경향이 뚜렷이 구분된다는 점이다. 광복 전에는 조선미전에 출품하기 위해서 일본화풍에 깊이 경도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광복 이후에는 일본화풍의 영향을 배제한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초년기에는 허련과 허형으로부터 직접적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으나 60년대 이후에는 큰 변화 없는 이른바 '다작의 시기'가 되었다.
작품은 산수화와 소나무 그림이 중심을 이루며 속도감 있는 특유의 독필(禿筆) 또는 갈필(渴筆)을 빠르고 자유로이 구사하여 색채의 섬세함과 밝은 효과를 향토적 정취로 살렸다는 평을 듣는다. 실사를 바탕으로 필치를 종횡으로 속도감 넘치고 자신 있게 구사하여 나무와 산 등의 경물(景物)을 묘사하고, 대담한 수묵의 농담과 설채로 개성 있는 화면을 연출하였다. 특유의 거칠고 빠른 자유분방한 필치는 흔히 허백련의 화풍과 비교되곤 한다. 허련의 족손(族孫)인 허백련이 전통적이고 고답적인 남종화의 세계를 지향한 것에 비하여 허건은 개성과 현대적 감각의 작품을 남겼기 때문이다.
허건은 해방 이듬해부터 목포에 남화연구원(南畵硏究院)을 개설하고 문하생을 받아 후진양성에도 전력을 다하였고, 후배이자 제자들의 화단진출을 적극 도왔다. 국전 추천작가 · 초대작가로서 참여하였고, 1960년부터 1970년까지 심사위원으로 추대되는 등 화단의 중진으로서 활동하였다.
화가로서의 활동과 지역 문화계에서의 비중과 위치는 전라남도문화상(1956, 49세), 목포문화상(1960, 53세), 5 · 16민족상(1977, 70세), 대한민국 문화훈장 은관(銀冠) 수훈(1982, 75세), 대한민국 예술원 원로회원(1983, 76세) 선임 등으로도 알 수 있다.
진도의 운림산방 복원 및 기증, 장학금 기탁, 애장품 기증으로 이루어진 목포시 향토문화관 건립 등은 허건을 지역사회의 상징적 존재로 각인시켰다. 이러한 업적은 목포 등 호남지역에서 허건이라는 이름이 아직도 무게감을 갖는 이유가 된다.
작품세계는 가법(家法)에 얽매이기보다는 가법을 바탕으로 시대변화에 부응하면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과 회화관을 추구한 점이 특징이다. 작품세계를 조망하기 위해서는 허련으로부터 내려오는 화맥을 전제하고 호남의 대표적 항구도시 목포에서 신문물이 밀려들어오는 것을 목격하였고 지역 최고의 명문 목포상업전수학교에서 근대적 교육을 받았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일본에 유학한 동생 허림의 성공과 요절은 큰 자극과 분발의 계기가 되었다.
집필자 김상엽 [네이버 지식백과] 허건 [許楗]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2011. 11.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