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14, 행7:1~8:3, 정갑신 목사님) / 나의 사도행전(12)
히틀러는 탁월한 연설자이다. 그러나 그 탁월한 연설은 세상이 참혹한 비극을 맞이하는데 일조하였다. 사람들은 능력 있어서 외적으로 뛰어나면서도 진솔하게 보이는 능력이 있으나 정작 마음의 순전한 동기가 없다면 그 능력들은 오히려 위험하다. 결국 하나님의 진리와 틀어져 있으면 능력이 있을수록 더 위험한 일이 되는 아이러니가 생긴다. 듣는 청중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어떤 편견의 틀(frame)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면 모든 것을 그 틀 안에서 해석하고, 그 틀에 어울리는 논리만을 받아들인다. 이러한 오류들이 수정되기 위해 진정한 예배가 필요하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깨지지 않은 것들을 고칠 수 있다. 예배를 통해 본질적인 자신을 점검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그런 예배를 드리는 교회는? 진정한 교회는 무엇이며, 교회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은 무엇인가? 스데반 집사의 죽음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결론적으로 스데반의 죽음은 그의 평화롭고 빛나는 얼굴로 갈음이 된다. 그 얼굴이 그의 마음을 잘 나타낸다. 내적인 확신과 궁극적 해결함이 없고서는 가질 수 없는 얼굴이다. 그의 설교는 사실 유언에 가깝다. 재판 자체가 공평하지 않았고 그가 유죄임을 억지로라도 짜 맞추고 결국 죽이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재판인들이 스데반에게 경위와 이유들을 묻지 않고 그저, 사실 여부만 대답하게 하는 것으로도 재판의 불손함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스데반은 자기 변론보다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 열중한다. 어찌 보면 장황하다 싶은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역사 이야기는 거기 하나님을 잘 안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너희들도 하나님의 교단이다. 그러나 너희는 구원자를 구별하지 못하고 성전의 본질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 없다. 모세 이야기를 통해 백성을 위해 쫓겨나서 광야를 떠도는 그의 모습에서 구원자 예수를 연상케 한다. 또한 떠도는 광야 그곳이 하나님의 뜻이 임재해 있는 진정한 교회임을 암시한다. 따라서 건물 성전은 교회의 본질이 아니다. 성전의 본질은 ‘하나님의 임재’이다. 하나님은 어떤 공간에 제한되시는 분이 아니시고 사람에게 매이는 존재도 아니므로 성전은 Mobile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교회는 ‘움직인다.’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곳,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이 교회이다. 건물 성전은 그 일을 보좌하는 데 선량하게 사용될 뿐이다. 솔로몬이 건축한 교회가 참으로 축복된 일이었지만 다윗이 처음 그 성전에 대한 언약을 맺을 때도 선지자는 다윗을 향해, ‘내가 너희 집을 지어 주겠다.’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매우 미세하게 하나님의 것이라기보다 다윗을 향한 것을 주의 깊게 보게 된다. 성전 교회이든 또 어떤 것이든 그것을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뜻보다 더 높게 본다면 그것은 우상이 된다. 아마도 성경책 자체, 기도 자체, 또 하나님과 관계된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서 벗어난다면 이러한 규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세속적으로는 스데반의 설교는 하나도 제대로 된 것이 없다. 세상적 성공의 기준에는 모두 빗나간다. 스데반은 한 번의 설교로 죽임을 당할 것이고, 그의 설교는 그곳에서 전혀 환영받지 못한다. 그곳의 대부분의 인원이 거부감을 느낀다. 매우 무능력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으로는 정반대이다. 사람의 시야로 인식하지 못하는 선량하고도 풍성한 열매가 맺히게 된다. 스데반은 죽었지만, 그 사건을 통해 박해가 심해져 믿는자들이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것이 디아스포라가 되어 복음이 확장된다. 그를 탄압했던 사울은 극적으로 변혁되어 ‘바울’이 되고 위대한 복음 사역자가 된다. 복음은 사랑과 미덕이지만 어두운 세상에서는 공격성과 선명성으로 비춰진다. 오늘 스데반의 설교가 그렇다. 사랑과 화평을 담은 메시지가 죄악으로 더럽혀진 청중에게 대비될 때 공격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스데반의 순교의 그 자리는 하늘과 뜻과 땅의 순종이 맞닿은 완벽한 성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