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해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던 성웅 이순신의 명량해전. 7월 31일 밤 방영된 KBS 1TV ‘불멸의 이순신’ (윤선주 극본, 이성주 연출) 명량 대첩편은 수많은 네티즌들에게 큰 감동을 줬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전함으로 300여척의 왜 수군을 격멸하는 명량대첩은 1일 오전에도 각 포털 사이트에 인기 검색어로 올라 오는 등 사이트마다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명량대첩에 관한 글을 없이 올라 오고 있지만 아쉽게도 이와 관련한 이미지 자료는 전무하다 시피 했습니다. 해전 그림은 백과사전에 나오는 간단한 명량해전 상상도 한장이 전부였으며 사진은 거의 명량 즉 울돌목을 가로지르는 진도대교 사진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아주 드물게 진도대교 옆 해남군에 있는 명량대첩 기념공원 사진이 눈에 띄는 정도였습니다. 도깨비 뉴스는 이미 소개했던 명량대첩 관련 이미지 자료를 다시 한번 소개합니다.
위 이미지는 지난 3월 소개했던 것으로 독자 호그니님이 컴퓨터 그래픽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지난 주말 방영된 ‘불멸의 이순신’에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있었습니다. - ‘호그니’님의 ‘명량해전’ 이미지 크게 보기
△독자 ‘호그니’님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참고했던 명량해전 관련 그림
도깨비 뉴스는 호그니님의 그림외에도 3월말 '일본인의 눈에 비친 명량대첩'이라는 제목으로 명량해전 참전 일본 화공의 '조선역해전도'를 소개했었습니다. KBS의 '역사스페셜'에서 소개한 적이 있는 1장의 그림을 디시인사이드의 '헑'님이 20장으로 나눠 해설과 함께 올린 것을 도깨비 뉴스 독자 '뉴스보이'님이 제보했었습니다.
그림은 조선수군과 왜 수군이 백병전을 벌이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31일 실제로 조선 전함 위에서 양측이 백병전을 벌이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이 그림에서 조선 전함에 '李'라는 깃발이 있는 것을 두고 '헑'님은 "설마 대장선 선상에서 백병전이 있었겠느냐"며 의아해 했으나 드라마에서는 실제로 대장선에서 백병전이 벌어졌습니다. 드라마가 고증을 제대로 했다고 인정한다면 이 그림은 상당히 사실적인 것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조선 수군은 활과 창 칼로만 싸우고 있는데 반해 이 그림에서는 조선군이 다양한 무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드라마의 장면과 그림의 장면들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헑'님의 그림과 해설을 다시 한번 소개합니다.
전체 그림이오. 전체적인 구도는 왜군의 세키부네가 조선의 판옥선 한 척을 향해 달라 붙은 모습 되겠소. 대략 명량에선 안위의 판옥선이었소? 대략 이런 꼴 비슷한 꼴이 났었다오.
왜군 전선, 크기로 보아 세키부네 정도로 보이오만 그 뒤에 고바야와 조선군 협선이 사투를 벌이고 그 뒤에 성 같이 큰 것이 판옥전선으로 보이는구랴. 대략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서 분간이 잘 안되더이다.
달라 붙는 왜군 고바야와 세키부네를 막기 위해서 활을 쏘는 습사수들의 모습이 몇몇 보이는구랴. 왠지 필사적인 느낌이 드오.
거대한 판옥선과 그에 달려드는 세키부네의 모습, 이쯤되면 조선군 모습이 우리가 생각하던 것과 다르기 시작함을 느낄 것이오.
판옥선 위에 옹기종기 모인 조선수군의 확대된 모습. 오, 충격! 사극은 물론이요, 심지어 민족기록화라는 곳에서도 웨이터 드레스(-_- 포졸복)를 입고 갑옷 입은 왜군들과 싸우던 그들이 왜군들의 눈에는 두정갑과 간주형 투구등으로 모두가 완전무장한 조선수군으로 그려져지고 있소. 신기전을 쏘기 위해 시위를 당긴 푸른색 두정갑주를 입은 습사수가 인상적이오.
천자총통을 쏠 준비를 하는 조선수군. 우리가 아는 조선수군의 포대와는 꽤나 모습이 다르구랴. 원주형 투구가 눈에 들어오오. 이 그림에서 첨주형투구는 발견되지 않는다오. 이미 이 시기부터 간주형투구가 월등히 많이 쓰였음을 보여주는 듯 하오. 정공청 장군의 유품 투구의 형상이 저기 저 투구들과 매우 흡사하오.
붉은색 통을 던질 준비를 하는 붉은 갑주를 입은 조선수병. 대략 저 것의 정체는 곧 밝혀지오. 벙거지모를 쓴 조선군 병사 발견! 그런데 두정갑을 입고 있소. 대략 절대 우리가 상상하던 그런 벙거지모 포졸이 아니오.
조선수군 판옥선의 화력을 실감하게 해주는 무기들 중 하나. 수노사수들이 활쏠 준비를 하고 있소. 수노기 - 수노궁은 위에 보이는 네모난 상자가 바로 탄창이고 계속해서 활을 발사할 수 있는 연사무기라오.
붉은 상자의 정체는 질려포통이었던 듯 하오. 질려포통은 일종의 수류탄과 같은 것이며, 왜군에 비해 우수한 화약무기를 다량 보유했던 조선군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소. 또 놀라운 사실은 왜란 당시에는 그 수가 거의 적었으리라 믿어지던 팽배수들이 이 그림에선 엄청나게 많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오. 원방패는 물론이며, 명나라로부터 당시에 전래된 등패역시 한점 보이오. 환도뿐만 아니라 중국식의 검역시 사용하고 있소.
왜군 진영- 뎃포 아시가루들이 적을 향해 한명은 겨누고 한명은 열심히 화약 쑤셔 놓고 치열한 전투의 현장을 잘 살렸다고 생각하오.
공성 병기? 잘은 모르겠으나 방패를 든 조선수군을 향해서 찌르는 듯한 모습이오. 조선수군 전선을 기어오르고 뒤에서 조선수군들은 방패등을 들고 대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오.
활을 쏘며 지원하는 왜군 궁수들. 불면증 이순신에선 왜군 장거리 무기는 조총병만 나오는데, 실제론 이렇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오.
조선 수군 배를 향해 올라라? 화살이 빗발치는 가운데 두 왜군이 밧줄인지 뭔가를 잡아 당기는 모습
적 배에 오른 도세이 구소쿠를 입은 꽤나 잘 나가는 젊은 사무라이가 조선수군 을 향해 창을 쭉 뻗고 있소. 단병법전(단병접전의 오타인듯)에 약한 조선군인데 걱정이 되는구랴.
배에 오른 아시가루. 대비하고 있는 팽배수들의 표정이 인상 깊소. 젊은 팽배수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구랴.
판옥선 위의 조선수군들. 대부분이 두정갑으로 중무장하고 있소. 장교와 군졸의 식별은 힘들구랴. 사조구나 장병검 같은 창들도 몇점 보이는 듯 하오.
휘날리는 조선군의 깃발. '이?' 전주 이씨 할때 그 이자? 그렇다면 저 함선이 설마 충무공 이순신의 통제상선?;
왜검을 빼들고 갑판위로 올라와 달려드는 왜군과 그에 응전하는 팽배수의 모습에서 강렬한 포쓰가 풍기오.
정신 없이 싸우는 판옥선 위의 조선수군. 올라온 줄사다리를 치우느라 허겁지겁, 갈고리를 치우느라 바쁘고 정말 생동감 있구랴.
맹선? 아니면 협선? 이런 함선에 탑승한 수군들도 모두 완전무장하고 있소. 왜군이 바라본 조선수군은 이런 모습이었던 듯 하오. 왜란 당시의 싸움을 그린 것이 명확하다는 조선역 해전도의 전투모습에서 소햏은 솔직히 의외로 놀랐다오. 조선군 대부분이 갑옷을 입었음을 상상했으나, 저런 식으로 간주형투구가 이미 저 시대에 대량으로 쓰이고, 대부분이 두정갑을 입고 싸울줄은 전혀 몰랐다오. 저것이 명량해전 당시의 모습이라면 조선수군은 극도로 악화된 상태인데도 저 정도 장비를 하고 있다면... 지금의 불멸의 이순신의 수군들은 도대체 뭐지?
12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해군을 크게 물리친 명량 해전(鳴梁海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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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knightblack/123790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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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korea9000.net/ ascone 글
명량 해전(鳴梁海戰) 당시 양군 함대 배치도. 명량 해전은 세계 전쟁사상 4대 해전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는 불가사의한 승첩(勝捷)이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유재란(丁酉再亂)에서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여 조국을 위기에서 구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그는 남해안 곳곳에서 23회의 해상전투를 치르어 한차례도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를 거두어 재해권을 장악, 7년 전쟁을 조선의 승리로 이끈 주역이었다. 그가 이룩한 23회의 승전(勝戰)가운데 가장 역사에 길이 빛날 전투는 1597년 9월에 있었던 명량 해전(鳴梁海戰)이었다. 영국의 해군사관학교 교재에서는 명량해전을 기원전 408년의 살라미스 해전, 1588년의 칼레 해전, 1805년의 트라팔가 해전과 더불어 세계 해전사에 가장 위대한 승리로 평가하고 있다.
영국의 해군사관학교 교장 게니얼 빌라드 소장은 "동양에도 넬슨에 견줄만한 해군 지휘관이 있다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순신이 동양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해전 영웅인 것은 부정할수 없는 사실이다."고 말하였다.
전함 12척과 군사 120여명의 병력으로 전함 133척, 군사 3만여명의 적군을 맞아싸운 불가사의한 승리 명량 해전. 적군은 전함 31척이 격침되고 8천여명의 사상자가 생기는 피해를 입었으나 아군은 단 한척의 전함도 격침되지 않았으며 전사자 2명과 부상자 3명으로 경미한 피해만 입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기적의 승리에 대해 그다지 경외심을 느끼지 않고 있다. 과연 충무공은 어떻게 이러한 승산없는 불가능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수 있었을까?
충무공은 그의 저서 '난중일기(亂中日記)'에 그날의 긴박했던 접전의 순간을 이렇게 적고 있다.
'적선에 몇 겹으로 둘러싸여 앞으로 어찌 될지 알수가 없다. 군사들은 모두 사색이 되어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뿐... 나머지 군선들도 겁을 먹고 진격하지 못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후 충무공이 총지휘한 조선 삼도수군 연합선단은 1592년 5월부터 1594년 4월까지 21회의 해상전투를 치르게 되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1592년 5월 7일에 있었던 옥포 해전에서부터 9월 부산진 해전까지 조선 수군의 전함은 한척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1597년 7월 16일 조선수군의 유일한 패전(敗戰)이었던 칠천량 해전을 제외한다면 아군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던 전투가 부산진 해전이었는데 당시 100여명의 사상자가 생겼지만 전함 173척 가운데 한척도 적의 공격에 의해 침몰되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 수군이 처음으로 전함에서 피해를 입었던 전투가 1593년 4월의 웅포 해전이었는데 적의 포격을 받고 침몰한 것이 아니라 격군들의 실수로 인해 방향을 잘못 잡은 전함 두척이 서로 충돌하여 전복된 것으로 이 사실만 보더라도 당시 조선 수군의 전력이 얼마나 막강했었는지 짐작할수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당시 왜국 수군은 조선 수군과의 해전에서 무기력하게 질수밖에 없었는가? 그것은 조선과 왜국의 주력 함선에서 차이가 난다.
일본 큐슈의 북쪽 해안에 있는 나고야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침공의 출병기지를 이곳에다 정하고 쌓았던 성이다. 여기에는 임진왜란 때의 나고야성 모습을 알수있는 병풍이 하나가 있는데 나고야성안의 사람들과 가옥구조 등이 이 병풍에 묘사되어 있다. 여기에는 갑판 위에 가옥이 지어져 있는 안택선이란 배가 그려져있는데 길이가 30여m인 안택선은 당시 왜국 수군의 주력 함선이었다.
이 배는 2층구조로 갑판 위에서 전투를 벌이는 병사는 약 2백여명 정도였으며 갑판 아래에서 노를 젓는 격군은 약 100여명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 맞서는 조선 수군의 주력함선인 판옥선은 약 300명 가까이 승선할수 있었으며 겉으로는 안택선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배를 만드는 방식에서는 굉장한 차이가 난다. 판자를 어떻게 연결하느냐에 따라 배의 견고성은 결정된다. 판옥선의 가장 큰 특징은 나무못으로 연결한다는 것이다. 판자의 아랫부분을 'ㄴ'자로 턱을 깎아내고 그위에 판자를 붙인 다음 참나무못을 위 판자에서 아래 판자로 내려꽂듯이 박는다. 반면 안택선은 쇠못을 박아 판자를 연결시킨다. 판자 2개를 그대로 나란히 붙이고 쇠못으로 똑바로 박아 연결한다. 두꺼운 판자를 이어붙여 바닥을 만들고 이어서 옆면을 세운다. 갑판은 2층구조지만 옆면으로부터의 충격이 약한 구조다.
조선의 판옥선은 두껍고 네모난 판자를 이어서 평평한 바닥을 만들고 7개의 판자로 배를 세운다. 배가 찌그러지지 않게 장쇠로 골격을 단단히 한다. 안택선이 1개의 돛대인 반면, 판옥선은 2개의 돛대를 사용하였다.
조선 수군은 왜국 수군과의 전투에서 안택선이 판옥선보다 약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배의 앞머리를 적선의 옆면에 그대로 들이받는 공격을 자주 시도했다. 이것을 당파(撞破) 공격이라 한다. 당파로 적선의 옆부분을 깨뜨려서 갑판아래에 바닷물이 들어오게 만들어 서서히 적선이 가라앉게 하는 공격방법이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에 왜군이 개인화기로 사용하던 무기는 조총이었다. 조총의 위력으로 전쟁 초기에 조선 육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으며 패배를 거듭했다. 그러나 조선 수군은 달랐다. 바로 왜국 수군을 떨게했고 조총을 무색하게 한 막강한 무기가 있었다. 바로 화포(火砲)이다.
조선 수군의 특징은 화포를 배에 장착하면서 사격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해전의 양상이 이미 근대적 단계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조선 수군이 사용한 화포 가운데 가장 위력적인 화포는 천자총통으로 길이가 130cm, 무게가 298kg이며 한번 발사하는데 사용되는 화약은 1.1kg이다. 무게 30kg의 차대전을 400여m가량 날려보낼수 있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왜국 수군의 주력무기는 조총이었다. 그러나 조총은 육지전에서 그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으나 굉장한 화력의 조선 수군 앞에서는 무용지물에 불과했다. 당시 왜국은 화포를 만들 기술이 없었고 서양에서 들여온 포가 있었으나 선체가 튼튼하지 못해 배의 들보에다 포를 매달아놓고 써야만 했다. 그러나 아무리 우수한 전함, 우수한 무기라도 '전함 12척, 군사 120여명 VS 전함 133척, 군사 3만여명'은 감당하기 힘든 전력의 차이이다. 그렇다면 당시 조선 수군에게는 또다른 무기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남해와 진도를 잇는 진도대교 아래가 바로 울돌목이다. 이곳은 조류가 빠르고 물살이 너무세어 웬만한 배는 지나가지 못한다. 과연 일본의 구로시마 수군은 울돌목의 빠른 물살을 모르고 건너려고 했던 것일까. 하지만 일본 시코쿠의 미야고부 지역은 구로시마 수군의 근거지로 울돌목의 형태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고 조류의 속도도 울돌목 못지않게 매우 빠르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런 빠른 물살에 이미 익숙했다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지형지세를 이용할줄 아는 전략가인 충무공은 좁은 급조류의 울돌목을 활용할 비장의 카드를 준비하고 있었다. 명량 해전 당시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한 이억기의 뒤를 이어 전라좌수사에 오른 김억추가 자신의 행적을 직접 기록한 '현무공실기'라는 책을 보면 가장 폭이 좁은 곳에다 철쇄를 설치하여 적선을 걸리게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수중 철쇄는 진도대교가 있던 자리, 폭이 가장 좁은 이곳에 걸었을 것이다. 양쪽에 막게를 박아놓고 쇠줄은 물에 잠기게 숨겨놓고 왜국 수군을 기다리는 것이다.
어란진에서 출발한 133척의 왜군 대선단은 우수영으로 들어서는 빠른 밀물을 타고 빠른 속도로 울돌목으로 들어선다. 거침없이 밀려오던 왜군 전함들은 생각지도 않은 철쇄에 걸려 차곡차곡 쌓이며 서로 부딪혀 여지없이 깨진다. 오후 1시경, 물길이 정지한다. 그러나 왜국 수군은 오도가도 못한채 혼란에 빠져있다. 이때 조선 수군이 전진하며 맹렬한 포격을 가한다. 다시 썰물이 되는 순간, 정지했던 물길이 거꾸로 바뀌어 왜국 수군 쪽으로 빠르게 흐른다. 유리하던 조류마저 불리해지자 왜국 수군은 극도로 사기가 떨어진다. 조선 수군은 떠내려가는 왜국 수군을 추격하며 계속 화포사격을 하여 완전히 섬멸해버린다.
쇠사슬과 울돌목의 물길을 이용한 이 작전으로 왜국 수군은 손도 써보지 못하고 대패하였으며 조선수군은 단 한척의 피해도 없이 통쾌한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세계 해전사상 그 유례가 없는 위대한 승전, 명량 해전은 이렇게 탄생하였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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