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자유시의
정착과 1920년대의 한국 시문학사
이념적 분화
2. 1920년대의 문단 상황
1920년대는 한국 문단이 양적·질적인 측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한 시기로 기록될 수 있다. 특히 시문학의 경우, 상대적으로 미성숙했던 소설 문학에 비해 젊은 시인들이 대거 등장하여 동인지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여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여주었다.
한국 시문학사에서 1920년대는 시의 근대적 변용이 이루어진 시기로 평가된다. 그것은 이 시기에 근대 자유시 형식이 정착되고 본격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애국계몽기에서 1910년대에 걸쳐 시문학 분야에는 가사·시조·사설시조·국문풍월·한시 등의 전통적인 시기 형태와 창가·신체시 등의 새로운 형태가 공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재래의 시가 형식들은 새로운 의식과 시대적 요구를 담아내기에는 부적절한 것이었고, . 새로운 시 형식으로 대두된 창가와 신체시 역시 근대 자유시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서양식 악곡의 노래 가사를 가리켰던 창가는 대개 7.5조의 정형적인 리듬의 반복이었고, 최남선에 의해 실험된 신체시도 유사 정형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모두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기 위한 과도기적 혼란과 모색의 과정을 보여주는 불완전한 시 형태들이었다.
한국의 시문학사에서 자유시 형태의 작품들이 최초로 발견되는 것은 1910년대 중반 무렵이다. 동경의 한국 유학생 기관지였던 『학지광』(1914년 창간)에 김억·윤여제·최승구·현상윤 등이 자유시 형태의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애국계몽기 시가나 최남선의 신체시와는 다른 새로운 시 형식을 선보였다. 이어 한국 최초의 문학잡지인 『태서문예신보』 (1918년 창간)에 프랑스 상징주의 시를 위주로 한 서구시가 번역·소개되어 자유시의 형성과 정착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당시 김억·황석우·주요한 등이 서구시의 충격과 자극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근대 자유시 운동을 주도하였다. 1910년대 중·후반은 한국에서 근대 자유시가 처음으로 등장하여 그 가능성을 모색하던 전환기였다.
이러한 흐름을 이어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의 자유시는 정착의 단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시기 동인지를 중심으로 활동한 많은 젊은 시인들이 자유시를 유일한 근대시 양식으로 받아들이며 본격적으로 창작 활동을 벌이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자유시를 제외한 종래의 여러 시가 형태들은 활기를 잃어버리거나 사라지게 되었다.
이것은 문학 인식과 미의식의 차원에서도 커다란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애국계몽기 시가의 관념이나 교술성을 극복한 의의를 지니기 때문이다. 설익은 관념이나 공인된 주장을 버리고, 개인의 내면적 각성에 기초하여 창작 활동이 이루어진 것은 근대적 미의식의 관점에서 큰 발전이라 할 수 있다. 즉, 당대 시인과 독자들이 문학예술을 단순히 계몽주의적 관념이나 애국심 고취를 위한 수단으로 여기던 것에서 벗어나, 예술의 자율성과 심미성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를 통해 자유시는 좀 더 자유롭고 개성적인 방식으로 삶의 체험과 의미를 탐구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3·1운동 이후 문단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의 하나는 수많은 신문·잡지·동인지가 발간되면서 발표 지면이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약간의 문화적 자유를 허용하는 일제의 지배 정책 변화와도 관련이 있는 현상으로서, 당대 문학의 양적인 팽창을 가능하게 했던 요인이다. 『동아』 · 『조선』 등의 일간지와 함께, 수많은 동인지와 잡지가 발간되어 문학 활동의 터전을 제공하였다. 1919년 2월에 발간된 첫 동인지 창조를 비롯하여, 『폐허』(1920) • 『장미촌』(1921) • 『백조』(1922) • 『금성』(1923) • 『영대』(1924) 등이 그 구체적인 사례들이다. 이밖에도 일반 교양지인『개벽』(1920)과 함께 순수문학지인 『조선문단』(1924)과 『문예공론』(1927) 등이 창간되어 1920년대 문학 공간의 확대에 기여하였다.
이것은 근대적 작품 발표 양식이 정립되는 기초가 되었다. 근대 이전까지 문학 작품의 유통에는 말과 글에 의한 전달 방식이 공존했지만, 주로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구비문학이 대부분이었다. 일부 필사본이나 인쇄본(목판본)으로 유통된 작품의 경우에도 노래하고, 읊고, 읽는 현장에서 전달되는 관습이 이어져 왔으며, 그래야만 수용자를 널리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활판 인쇄술이 보급된 이후에는 인쇄된 작품이라야 공식적으로 발표된 작품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우리의 경우, 이러한 근대 활판 인쇄술을 선보인 것은 애국계몽기부터이지만, 본격적인 신문·잡지·단행본 등의 출간이 잇따르고 이에 따라 문학 작품 발표와 유통의 공간이 비약적으로 팽창된 것은 1920년대부터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자신이 창작한 작품에 이름을 분명히 밝혀 적어, 저작권을 주장하는 제도와 관행의 확립으로 이어졌다. 저작권이 인정된다는 것은 작가가 근대 사회에서 직업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제도화된 것을 의미했다. 물론 당대에는 출판업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아서 작가들이 실질적인 수입을 기대할 수 없었으나, 이러한 관행의 성립은 한국문학이 본격적으로 근대문학의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⁴
그리고 이 시기 문학 생산을 담당하는 시인 작가들의 수가 크게 증가했다는 사실도 주목을 요한다. 이것은 발표 매체의 팽창과도 관련이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새로운 계층의 작가·시인들이 대거 등장하여 문단을 형성했음을 의미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3·1운동 이후에는 애국계몽기에 존재했던 한시·가사·시조·사설시조·국문풍월 등의 전통적인 시가 형태들이 점차 활기를 잃고 사라져 갔다. 이로 인해 그 주된 담당층이었던 전통적인 유학자들과 구지식인들도 역사의 무대 저편으로 물러나게 되었고, 그 대신 근대적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새로운 문학 담당층으로 대거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전대에 근대적 문학을 지향하며 활약한 작가가 최남선과 이광수 정도에 불과했던 사실과 비교할 때 큰 변화라 할 수 있다.
이 새로운 계층의 작가·시인들 대부분은 일본에서 유학하고, 거기서 서양 근대문학과 서구화된 일본문학을 배워온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을 외부에서 찾고, 서구의 문예사조와 서구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모방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미 『태서문예신보』에서 본격화되기 시작하여, 1920년대 초반 젊은 시인들 대부분이 이에 가담하면서 시대적 조류를 형성하였다. 동인지를 중심으로 집단적인 활동을 벌였던 낭만주의 경향의 시인들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짧은 기간 일본 유학을 통해 받아들인 서구 문학에 대한 이해는 피상적이고 부정확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신문화의 물결 속에서 성장한 이들이 전통문화에 대한 정당한 이해나 인식이 부족했던 것도 문제였다. 이로 인해 그들의 신문학 건설을 위한 시적 노력은 적지 않은 문제를 노출하게 된다. 이들의 한계를 넘어서서 보다 세련되고 성숙한 문학의식이 대두된 것은 지식 계층이 대폭적으로 확산되고 보다 전문적인 시인 작가 그룹이 등장하는 1930년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 1920년대 문단 상황과 관련하여 특기할 만한 일은 문단이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으로 양분되어 재편된 일이다. 이것은 사회 전반의 민족해방운동 세력이 양분된 것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서, 문단에서는 초기의 낭만주의적 흐름이 해체되는 20년 중반 무렵부터 가시화되었다.
사회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계급문학을 주장하는 운동은 1920년대 초부터 있었다. 1922년과 1923년에 각각 ‘염군사焰群社’와 ‘파스큘라(PAS-KYULA)'라는 단체가 조직되어 계급문학 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이어 1925년에 결성된 ’카프‘는 1935년 해체되기까지 계급문학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며 우리 문학사에서 중요한 한 흐름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당대의 문학을 모두 지배계급의 문학이라 규정하고, 피지배계급의 해방을 위한 문학을 주장하였다. 이는 문학의 예술성보다는 사회적 이념의 실현을 중시하는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러한 계급문학에 반대하는 문인들은 민족주의적 이념을 내세우며 집단적 움직임을 보였다. 이들은 ’카프‘와 같이 조직체를 결성한 것은 아니었지만, 비슷한 관점을 공유하며 대체로 1920년대 중반 무렵부터 유파적 성격을 띠고 활동하였다. 이들은 실력 양성과 문화적 저항을 강조했던 민족주의 이념에 따라, 전통 문학의 유산에 관심을 기울여 민족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문학의 활로를 열고자 하였다. 시문학 분야에서 그것은 구체적으로 민요시운동과 시조부흥운동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시적 지향은 이전 시기 무분별한 서구지향성에 대한 반성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계급문학 운동에 대하여 민족문학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1920년대 후반은 서로 다른 문학 이념을 추구하는 두 세력이 양립하며 문학사가 전개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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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5, 지식산업사, 1989, 78~79쪽 참조.
(전도현, 고려대 교수)
『한국 현대 시문학사』 이승하 외 지음
2024. 4. 21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