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국권 회복과 근대적 시형의 모색
밤을 지키는 희망의 등불
알 수 없어요
한용운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골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슬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적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갓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ㅅ불입니까
출처 《원본 한용운 시집》 (2009) 첫 발표 <님의 침묵>(1926)
한용운 韓龍雲 (1879~1944)
시인이자 승려, 사상가로서 1926년에 89편의 작품을 담은 시집 《님의 침묵》을 출간하였다.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으나 끝내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입적하였다.
답이 없는
질문들
‘알 수 없어요’라는 제목에는 목적어가 없다. 대뜸 알 수 없다니, 무엇을? 일단 독자의 관심을 끄는 데에는 효과적인 전략으로 보인다. 딱히 강박증이 있지 않더라도 무언가 있어야 할 것이 없으면 신경이 쓰이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알 수 없어요’라는 제목은 독자로 하여금 그 이전에 던져졌을, 답하기 어려운 어떤 질문의 존재를 의식하게끔 한다.
마치 이 점을 겨냥하기라도 한 것처럼, <알 수 없어요>는 독자에게 여러 질문을 연이어 던진다. 이 작품은 하나의 시행에 하나의 질문을 담아 총 여섯 행을 구성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여섯 개의 질문은 모두 ‘~은 누구의 입니까?’라는 동일한 문형을 반복함으로써 작품 전체에 통일성과 리듬감을 부여한다. 동일한 문형이 여러 번 반복됨에도 읽는 과정이 그리 지루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주어 앞에 길게 놓인 섬세한 묘사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1행에서 독자가 마주하게 될 ‘오동잎’은 평범한 오동잎이 아니다. 그것은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이다. 일상 언어를 사용하는 자리에서는 좀처럼 만나 보기 어려운 유려한 수식을 통해, ‘오동잎’이라는 시어는 보편적 의미에서 놓여나 고유한 이미지를 획득하게 된다. 의문문의 주어 자리에 놓인 ‘오동잎, 하늘, 향기, 시내, 저녁놀, 나의 가슴’ 등이 모두 이러하다.
그런데 이 시어들을 나란히 늘어놓고 보니, 마지막에 놓인 것은 그 성격이 다소 이질적인 듯하다. 다른 것들은 모두 외적 세계에 속한 것인데, ‘나의 가슴’은 ‘나’, 즉 화자 자신의 내적 세계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6행의 이질성은 형식적인 면에서도 확인된다. 같은 문형의 반복으로 형성된 안정적 리듬은 6행 전반부에 “타고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라는 다른 문형의 진술이 끼어듦으로써 깨어진다. 의문문 하나로 완결되는 다른 행들과 달리, 마지막 행에서는 의문문 앞에 다른 문장을 결합시킴으로써 예외성을 부여한다. 이 이질성과 예외성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 이 작품의 전체적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 당신은 ‘누구’십니까
6행의 이질성과 예외성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다시 처음부터 읽어 보면, 1~5행까지 동일하게 반복되는 문장 구조가 우선 눈길을 끈다. 이재복(2010:217-218)은 문장에서의 기능에 주목하여 그 세부를 ‘수식어절+원관념(주지, tenor)+보조관념(매체, vehicle)+의문문 종결’의 구조로 분석하였다. 쉽게 말해 이는 문장 구조의 핵심을 주지와 매체의 결합 관계인 ‘비유’로 보자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문면상으로는 의문문의 주어 자리에 놓인 ‘오동잎, 하늘, 향기, 시내, 저녁놀’ 등이 원관념이 되고, 서술어 자리에 놓인 ‘발자최, 얼골, 입김, 노래, 시’ 등이 각각의 보조관념이 되는 것으로 읽힌다. 매 행의 질문들이 두 범주의 시어들을 일대일로 대응시켜 비유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인데, 이 분석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비유에 있어 중요한 것은 두 사물의 결합에서 일어나는 의미론적 변용”(김준오, 2005: 178)이다. 독자가 이 의미론적 변용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는 먼저 두 사물의 결합을 가능하게 한 요소가 무엇인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비유는 “양자가 공유하고 있는 의미의 어떤 유사성”(오세영, 2013: 228)에 근거하여 성립된다고 본다. 이에 따르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공유하고 있는 의미의 유사성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그런데 <알 수 없어요>의 경우 이러한 방식의 접근이 어렵다. 이 작품에서 사용된 비유는 결합 관계에 있는 두 시어 중 하나가 의미상 미확정의 상태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발자최’는 그냥 발자최가 아니라 “누구의 발자최”이며, ‘얼골’ 역시 “누구의 얼골”이다. 이어지는 ‘입김’, ‘노래’, ‘시’도 마찬가지로 모두 ‘누구’의 것인데, 이 ‘누구’가 작품의 문면에서 특정되지 않음으로써 두 사물이 공유하고 있는 유사성을 파악하는 것 역시 어려워진다.
이러한 난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문면으로 드러나는 대응 관계 이면의 맥락을 살펴 시어의 관계를 재구성해 보아야 한다. 그러면 시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지점을 섬세하게 조명하게 되고, 이것들이 과연 누구의 것인지를 묻는 질문들이 차곡차곡 누적된다. 이러할 때, 독자들은 원관념, 혹은 보조관념 중 어느 하나가 아니라 이 모든 것들이 귀속되어 있는 어떤 존재로서 반복적으로 호명되는 ‘누구’를 강하게 의식하게 된다. 작품 속 질문은 기실 모두 ‘누구’를 향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답 작품의 마지막까지 명확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 결과 ‘누구’는 단 한 번도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조각난 형태로 전체를 암시하는 양상을 보인다.
본문에서 질문이 아닌 것은 6행의 전반부에 놓인 평서문 하나뿐이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라는 이 문장이 불교의 연기설(起說)에 발 딛고 있는 것임은 한용운이 시인이면서 또한 승려였다는 사실을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맥락을 통해 납득 가능해 보인다. 이를 결정적 단서라 가정해 보면 시의 의미는 급격히 불교적 가르침의 영역으로 포섭된다. ‘옛 탑’, ‘연꽃’ 등의 시어는 이러한 가정을 소소하게 뒷받침하는 근거이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6행은 빈자일등(貧者一燈)이라는 불교의 고사를 풀이한 것으로 넉넉히 읽힌다. 옛날, 부처가 방문한 나라에 난타라는 이름의 가난한 여인이 있었다. 가진 것이 없어 공양할 것도 없었던 이 여인은 온종일 구걸하여 얻은 돈 일전으로 기름 약간을 사서 소박한 등불을 밝혔다. 시간이 지나고 밤이 깊어 다른 이들이 공양한 등불들은 하나둘씩 꺼져 가는데, 난타가 밝힌 등불만은 오히려 밝기를 더했다고 한다. 부처의 제자가 손바람을 불고 옷자락을 흔들어 끄려 하였는데도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 이 모습을 본 부처가 “지금 그 등불은 너희 성문들로서 끌 수 없다. 비록 네가 네 바다의 물을 거기에 쏟거나 산바람으로 그것을 끄려 해도 그것은 끌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체 중생을 두루 건지려고 큰마음을 낸 사람이 보시한 물건이기 때문이니라.”라고 말하며, 난타를 비구니로 받아들였다고 한다(몽산관일 편역, 2008: 197-204). <알 수 없어요>는 이 고사에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된다는 식의 순환론적 세계관을 덧씌웠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는 것은 자연의 이치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의 의지가 실현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가장 진한 어둠도
가장 흐린 빛에 사라진다
화자는 반복하여 ‘누구’를 호명하면서도 끝내 ‘누구’의 정체를 밝히지는 않는다. ‘부처’를 말하는 듯하면서도 결국 ‘부처’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만약 ‘부처’를 특정했다면 <알 수 없어요>의 의미는 삼라만상에 모두 부처의 흔적이 담겨 있다는 범신론적 세계관의 종교시로 수렴되었을 것이다. 이 경우, 작품에서 차용한 질문의 형식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한 수사적 전략으로 이해된다. 쉽게 말해 이 질문들은 ‘~한 사람 누굽니까?’를 반복적으로 외쳐대는 선거철 정치인의 경망스러운 화법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이 된다.
이를 피하기 위해 화자는 오직 질문할 뿐, 답하지 않는다. 답하는 순간 애초에 전달하고자 했던 의미들이 속된 전략적 화법의 차원으로 낙후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알 수 없어요>는 아예 제목에서부터 그것이 ‘알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해 두었다.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기에, 답을 말할 수 없다. 그래서 화자는 답을 말하는 대신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주어 앞에 놓인 섬세한 수식의 표현들을 읽다 보면 화자는 답을 찾기보다는 질문을 정확히 던지는 일에 더욱 골몰하였던 것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다섯 개의 질문들은 ‘누구’를 매개로 삼아 하나의 맥락 안에 놓인다. 그리고 ‘알 수 없음’을 전제로 질문들을 이어 가는 방식으로 시상이 전개되면서, 작품 이해의 초점이 추적의 대상(‘누구’)이 아닌 추적의 주체(‘나’)에게로 옮겨진다. 이를 통해 이 시는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삶의 태도를 형상화한다.
6행의 질문 역시 ‘누구’를 매개로 하여 다른 다섯 개의 질문과 연결되지만 그 세부는 크게 다르다. 앞선 다섯 행의 질문은 외적 세계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묘사를 통해 그 이면에 자리한 무언가의 존재를 내비치고자 한다. 반면 6행의 질문은 ‘나의 가슴’, 즉 화자 자신의 내면을 화제로 삼아 그 가치가 무엇인지를 말하고자 한다. 1~5행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난 주체의 태도는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이라는 표현에 함축되어 있다. 여기서 ‘나의 가슴’은 다시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ㅅ불”이라는 표현에 빗대어짐으로써 특별한 가치를 부여받기에 이른다. 화자는 이를 ‘약한 등ㅅ불’이라 표현하였으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이 역시 스스로의 의지로서 밝힌 것이기에 난타의 그것처럼 밤이 깊어도 꺼지지 않고 제 나름의 어둠을 밝힐 것이다. 가장 진한 어둠도 가장 흐린 빛에 사라지기 마련이다. 6행에서 느껴지는 이질성과 예외성은 이 역설적 진리를 설득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이다.
이 시의 메시지는 종교, 국가, 민족 등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약하고 보잘것없는 개별적 존재의 내면을 조명하여 현실 극복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편적, 윤리적 가치를 확보한다. 따라서 이 시를 이해하는 데 꼭 특정 시대의 상황을 덧씌울 필요는 없다. 그러나 덧씌웠을 때 더욱 깊어지는 의미를 굳이 외면할 까닭도 없을 것이다. 한용운이 살았던 시기를 겹쳐 보면, 이 시에서 말하는 ‘밤’의 이미지가 더욱더 가혹하고 암담한 것으로 이해된다. 한용운은 그 밤을 온전히 살아 내었으나 1944년에 입적하여 끝내 밤을 넘지 못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용운에게는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도 그 너머에 무언가가 존재할 것이라는 확신과 의지가 있었다. 이 확신과 의지만이 끝없는 절망을 끝없는 희망으로 바꾸어 내는 동력이었을 것이다. | 이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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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고은(2004), 『한용운 평전』, 향연.
김용직 주해(2009), 《원본 한용운 시집》, 깊은샘.
김종훈(2014), 「한용운의 시 <알 수 없어요>에 나타난 긴장의 양상」 『어문논집』 70, 민족어문학회, 69-92.
김준오(2005), 『시론』(제4판), 삼지원,
몽산 관일 편역 (2008), 『현우경 上』, 두배의느낌.
오세영(2013), 『시론』, 서정시학,
이재복(2010), 「한용운 시 <알 수 없어요>에 대한 일고찰」, 『한국언어문화』 41, 한국언어문화학회, 211-229.
사회평론 교육 총서 19 『문학 교육을 위한 현대시작품론』
2024. 4. 28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