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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 – 끝이 보이지 않는 갈등의 질곡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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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십자군 원정 (1096∼1099년)
동로마제국의 알레시오 황제가 파견한 자들로부터 동로마제국의 위급한 상황을 전해 들은 교황 우르바노 2세((Urbain II)는 1095년 11월 27일 클레르몽(Clermont) 공의회 회의석상에서 그리스도의 무덤을 되찾고 동방의 그리스도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원정군을 보내자고 호소하여 제1차 십자군 원정(1096∼1099년)이 시작되었다. 그는 성지 해방전쟁을 성전(聖戰)이라고 명명하고 종군하는 군사들에게 신의 구원을 약속하였다.
우르반(Urbain II) 교황이 클레르몽(Clermont)에서
십자군원정을 시작할 날짜를 1096년 8월 15일로 정했다.
그 후 교황의 호소를 전하기 위하여 각지에 사람들이 파견되었다. 교황이 계획한 십자군은 주로 기사(騎士)들로 편성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각 지방에 파견된 사람들과는 무관하게 개인적인 신념으로 십자군에 참가할 것을 호소하고 다니는 별도의 사람들도 있었다.
“이곳 유럽에서는 좁은 땅에서 기독교 신자들끼리 서로 싸우고 죽이고 있다. 그러나 원정에 참가하면 적들의 재산을 획들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승리를 거두고 영광스럽게 개선할 수 있다. 또한 이를 시도하다가 혹시 죽는다 할지라도 천국의 상급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연설을 듣고 열광한 군중들은 '하나님의 뜻'을 외치면서 다투어 십자군 원정에 출전하기를 맹세했다.
그 중에서도 ‘은자(隱者) 피터’(Peter the Hermit)는 십자군 사상의 창시자로 불릴 만큼 전설적인 인물이다. ‘은자(隱者) 피터’는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모아 ‘민중십자군’을 만들었다. 이들 외에도 다섯 개 정도의 ‘민중십자군’이 지방에서 결성되었다.
은자(隱者) 피터(Peter the Hermit)가 원정대 십자군을 향해 설교하는 모습.
교황 우르반은 십자군 원정을 1096년 8월 15일에 시작하기로 정했으나 이들 민중십자군은 마음이 급한 나머지 치밀한 준비와 계획도 수립하지 않은 채 교황이 나누어 준 십자가가 그려진 하얀 가운을 걸치고 ‘민중십자군(People’s Crusade)’의 자격으로 선발대가 되어 먼저 출발하였다.
십자군 선발대 – ‘민중의 십자군'
이들 십자군 원정대에는 많은 농민들과 일반 신도들이 가담했으며 기사들과 같이 그리스도와 함께 가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신앙을 가진 자들로 구성되었는데 지휘체계나 훈련도 받지않고 참가한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계몽되지 않은 농부들도 많이 참가한 비조직적이고 준비되지 않은 ‘민중의 십자군’은 교회역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게 된다.
십자군 전사들이 동유럽으로 이동함에 따라, 지역 주민들과의 마찰도 심화되었다. 당시 유럽은 흉작으로 거의 기근 상태였다. 거의 아무 것도 없이 동쪽으로 이동하는 수 천명의 굶주린 십자군 원정대를 환영할 곳은 많지 않았다.
십자군 선발대 '민중의 십자군'
이들 십자군은 헝가리, 불가리아를 통과할 때 이미 그곳에서 식량이 떨어져 약탈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럴수록 주민들과의 불화는 심화되었다. 그러고 이밖에도 3개의 민중십자군 부대가 이어졌는데, 그들에 의해서 유대인 박해가 개시된 것이다.
‘민중의 십자군’이 자행한 유대인 학살.
Massacre of the Jews by the People's Crusade.
특히 라인강 유역을 지나면서 저지른 라이닝겐의 백작인 에미코의 박해는 처참하였다. 십자군에 대한 지나친 열성이 일찍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어단 유대인에게로 쏠렸는데, 거기에는 부유한 유대인에 대한 경제적 증오심도 깃들어 있었다. 이들 중에는 유대인들에게 빚진 자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빚을 갚지 않으려는 의도에서였다. 이것은 반 셈족운동의 시원(始原)이 되었다. 이 3개 부대는 헝가리인의 공격에 의해 괴멸되었다.
지휘자의 통솔을 제대로 받지 않은 이들은 발칸 지역을 지나 콘스탄티노플로 가는 경로를 따라가면서 집과 마을들을 마음대로 약탈하고 도시를 불태우며 주민들을 학살하는 참극을 일으키며 행진했다.
선발대로 출정했던 ‘민중의 십자군(People’s Crusade)’은 전멸당하고
십자군을 이끌었던 ‘은자(隱者, 은둔자) 피터(Peter)’만 간신히 살아서 돌아왔다.
전투경험이 없는 원정군들은 예루살렘에 도달하기도 전에 셀주크족의 공격을 받아 전멸하였다. 소아시아로 이동했던 피터의 추종자들은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해서 니케아를 점령하러 갔다가 1096년 10월 이슬람 군대에게 전멸당하고 ‘은자(隱者) 피터’만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
정규 십자군의 출정이 시작되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하는 십자군 선발대.
1차 원정에는 왕들이 참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를 이끈 것은 로레인 공 볼로냐의 가드프리, 노르만디(Normandie, 북프랑스인을 말함)공 로버트, 툴루즈 백작 레이몬드등 유명한 귀족들이었다. 당시로서는 매우 큰 군세였는데 비전투원을 포함하여 5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 중 주력을 이룬 것은 프랑스인과 노르만(Normandie)인 이었다.
노르만 기마병( Norman cavalry).
노르만은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Normandie) 출신이다.
십자군 전사들이 공격하고자 했던 다음 도시는 안티오크였고 여정은 참혹했다. 땅은 투르크의 침략으로 황폐해져 있었고, 식량과 물은 거의 없었다. 여름의 절정이여서 사람과 동물이 많이 죽었다.
기사들은 말 등위에서 싸우도록 훈련받았고, 짐을 진 말들은 무기와 갑옷, 투구를 옮기기 위해 필요했다. 1097년 10월 안티오크에 도착했을 때는 5,000명의 기사들과 1,000마리에 훨씬 못 미치는 말들이 있었다. 여름이 지나감에 따라, 200마리 보다 더 적은 말과 심지어 부일론의 굿프리와 플랑드르의 로버트처럼 말을 달라고 빌어야 하는 처지에 있는 지도자들도 있었다.
이슬람 군대들은 십자군이 포위 공격하는 것에 대항해서 7달이 넘는 동안 안티오크에 갇혀 있었다. 그 당시 십자군은 끊임없는 공격 아래 아사 직전이었다. 방어자들 중 한 명이 반역자가 되어 십자군들이 돌파하는 것을 도와준 후에서야 도시는 함락되었다.
1097년 10월, ‘안티오크(Antioch)’에 도착한 십자군.
그러나 성은 견고했다.
그러나 그 직후 안티오크에서 십자군이 이슬람 군대의 포위 공격을 받았다. 탈출을 막기 위해 문은 굳게 닫혀 있어 군대의 사기도 아주 낮았다. 마침내 나가서 싸우는 것 이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결정했다.
그런데 마침 이 성안에서 그리스도를 찔렀던 창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다시 반격을 가해서 승리를 했다. 결과는 승리였고 너무 놀라서 십자군 전사들은, 천사들과 성인들과 죽은 십자군 전사들의 하늘 군대가 함께 했었다고 믿었다.
그리스도를 찔렀던 창 ‘Holy Lance’를 찾았다.
예수와 관련된 성스러운 유물로 알려진 것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사용되었던 ‘십자가’와 가시로 만든 ‘면류관’, 그리고 그의 몸을 십자가에 고정시켰던 ‘못’과 그의 죽음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 옆구리를 찌르는데 사용되었던 ‘성스러운 창(Holy Lance)’ 등이 있다. 성스러운 창은 ‘롱기누스의 창’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당시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다는 로마의 병사 이름이 ‘롱기누스’라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이후 ‘롱기누스의 창’은 신비한 힘을 가진 것으로 생각되어 이 창을 손에 넣은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믿음이 팽배했다. 이 때문에 히틀러를 비롯해 나폴레옹까지도 ‘롱기누스의 창’을 손에 넣기 위해 온갖 방법과 수단을 다 동원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성스런 힘을 가졌다는 여러 개의 창들이 생겨났다. 현재 ‘롱기누스의 창’으로 알려진 유물 4점이 있다고 한다.
사기가 충만한 십자군은 1099년 6월에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계속 공격을 퍼부은 끝에, 1099년 7월 15일에는 마침내 성을 함락하고 예루살렘을 수복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부녀자와 유아와 노인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참살하는 비 그리스도교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서유럽에서 이곳까지 도달하는 전투에서 이슬람군들의 매복병들의 습격을 받아 매일 매일 수많은 동료들이 전사하는 가운데 겨우 살아 남은 이들의 보복심리와 이슬람 군들의 항전의 악순환이 서로를 살육의 참상으로 몰고 갔던 것이다.
1099년 7월 15일, 1차원정에서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비기독교인들을 학살했다.
첫 번째 십자군 전쟁 후, 장래 예루살렘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헬라 제국에서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던 안디옥(안티옥)과 시리아를 관통하는 여행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이곳에 일종의 정부수립이 필요함을 느꼈다. 정복지에는 예루살렘왕국 ·안티오키아 후령(侯領) ·트리폴리 백령(伯領) ·에데사 백령 등 4개국이 들어섰다. 이 중 가장 큰 것은 예루살렘 왕국이었다.
성직자들은 신정체제를 수립할 것을 제안했다. 많은 논쟁을 거친 후 볼로냐의 고드프리(Godefroi de Bouillon)가 왕의 칭호를 사양하고, 성묘 교회의 수호자이자 영주라는 칭호를 받아들여 이곳 예루살렘 왕국을 통치하게 되었다. 왕국 안에는 요한기사단, 템플기사단, 조금 늦게 독일기사단 등의 종교기사단이 편성되어 성지 방위의 주요 군사력을 담당했다.
독일 기사단(Teutonic knights,1190년 창설).
십자군시대의 3대 종교기사단.
‘튜턴 기사단(Teutonic knights)’이라고도 한다. 1190년 제3회 십자군이 아콘을 포위하였을 때 뤼베크.브레멘 시민들이 부상병 구호를 위해 세운 병원에서 기원하며, 이들은 ‘템플 기사단’, ‘요한 기사단’과 함께 성지 방위를 담당하는 종교 기사단으로 변모하여 98년에 교황의 승인을 얻었다. 흑십자(黑十字) 휘장을 붙인 백색 망토를 입었던 이들은 의료봉사 뿐만 아니라 이교도와 싸우는 임무까지 맡아 독일 황제,제후로부터 광대한 영토를 기증받았고, 검우기사단(劍友騎士團)과 통합됨으로써 기반이 확고해졌다.
영주는 성을 거점으로 지배층을 형성하였고 상인은 도시에서 특권을 얻어 이익을 증대시켰으나 농민은 희망도 없이 예속상태에 놓였다. 교회와 수도원이 건립되고 교회조직도 정비되어 유럽의 제도와 관습이 그대로 옮겨졌다.
고드프리의 사망(1099년).
Death of Godefroi de Bouillon.
볼로냐의 고드프리(Godefroi de Bouillon)가 1100년 죽자 에뎃사(Edessa)의 볼드윈이 예루살렘 라틴제국의 최초의 왕으로 등극하였다.
제2차 십자군 원정 (1147∼1149년)
1171년 후반에 남서부 쿨디스탄(이집트)의 술탄이며 이슬람 명장인 살라딘(Saladin)이 다메섹을 점령하고 1187년 7월에는 ‘하틴(Hattin) 전투’에서 그리스도교 십자군에게 큰 승리를 거두자 그 여세를 몰아 각지의 도시와 요새를 점령하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하틴 전투(The Battle of Hattin, 1187).
88년간 겨우 명맥만 이어오던 이스라엘의 십자군들은 이 재난의 흉보가 전해지자 민심이 크게 흥분되어 제 3회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 장에 계속 이어집니다.
[출처] ‘십자군 전쟁’ – 끝이 보이지 않는 갈등의 질곡 (2부)|작성자 햇무리